쓰시마 해전

쓰시마 해전
군사 충돌 정보
러일전쟁
날짜 1905년 5월 27일
위치 동해 대한해협 동편 수로(쓰시마섬 근해)
결과 일본 해군의 승리
교전단체
러시아 일본
로제스트벤스키
도고 헤이치로
병력:
전투함 53척 (본문 참조)
병력:
전투함 29척 (본문 참조)
손실:
본문 참조
손실:
어뢰정 3척 침몰
사망 116명
부상 570명
  • Battle of Tushima

발틱함대의 원정항해[편집 | 원본 편집]

러일전쟁의 발발 초기 여순항 봉쇄전에 의하여 극동에 배치된 러시아의 여순함대는 발틱함대가 여순항에 먼저 도착하느냐 아니면 여순항이 먼저 일본군에게 함락되느냐의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여순항 봉쇄전이 진행되는 중에 러시아에서는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지휘 아래 1904년 10월 15일발틱 해의 리바우를 출항하여 극동해역을 향해 무려 18,000마일에 이르는 항해를 시작하였다. 출항 당시 발틱함대의 전력은 신형 전함 4척을 포함한 전함 7척, 구형 장갑순양함 4척, 순양함 4척, 구축함 7척, 그리고 보조함 9척으로 구성되었다. 문제는 발틱 해와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는 발틱함대가 이용할 수 있는 수리창이나 석탄 보급기지가 없었기 때문에 함정의 수리와 보급이 이 항해에 있어서의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는 그나마 러시아에 우호적인 중립국, 특히 프랑스의 식민지 항구의 협조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발틱함대는 독일 선박회사와의 석탄 보급 계약을 하여 이것에 의존하여 항해할 수 있었다.

10월 21일, 발틱함대가 북해도거 뱅크 근해를 지날 때 영국의 어선을 일본의 어뢰정으로 오인하고 발포하여 격침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명 도거 뱅크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영국의 국민들이 격분하여 가만히 관망만 하고 있던 영국이 바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기 직전까지 가 버릴 뻔 하였었다. 그만큼 발틱함대는 극도로 긴장을 하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 때문에 열받은 영국은 스페인 근해에서 영국 함대가 발틱 함대에 대하여 시위기동을 펼치는가 하면, 탕헤르에 입항할 때는 봉쇄하겠다고 협박하거나, 발틱함대에 대한 정보를 일본에 전달하는 등의 행동을 벌여 발틱함대의 신경을 박박 긁어놓게 되었다.

11월 4일 탕헤르에 도착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소형함들은 지중해를 지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도록 하였고, 대형함들은 자신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도록 함대를 분리하였다. 이 두 전력은 1905년 1월 9일 마다가스카르의 노시베에서 다시 상봉하게 되었는데 이 때 발틱함대에 여순항의 함락소식이 전해지게 되면서 발틱함대의 항해 목표가 여순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변경되게 되었다.

이듬해 4월 14일에는 베트남의 캄란 만에 도착하였는데 캄란 만에서의 정박이 거부당하자 다시 인근의 반퐁으로 이동한 다음 네보가토프의 전대가 5월 9일 구형 전함 1척, 장갑해방함 3척, 순양함 1척이 합류하게 되면서 총 전력이 53척으로 증강되게 되었다. 다만 합류한 네보가토프의 전대는 모두 낡고 속력이 느린 함선들이었다. 아무튼 전력이 보강된 발틱함대는 마지막 전투준비를 갖춘 뒤 5월 14일 베트남 해역을 출항하였다.

이후 5월 23일 상하이 근해에서 발틱함대의 마지막 석탄 보급이 이루어졌다. 이 때 각 함정은 창고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갑판 위에 석탄을 적재할 정도로 석탄을 만재하였었다. 25일 야간에는 일부 수송선이 함대에서 이탈하여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양측의 목표[편집 | 원본 편집]

러시아의 목표[편집 | 원본 편집]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주어진 제1 목표는 당연히 블라디보스토크로 입항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세 항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첫째 항로는 대한해협이며, 둘째 항로는 쓰가루 해협, 셋째 항로는 소야 해협이었다. 대한해협의 경우는 일본 함대가 대기중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으며, 쓰가루 해협과 소야 해협은 1천 마일 이상 멀리 돌아가는데다 협수로이고, 잦은 안개, 그리고 기뢰부설의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조건들을 검토한 끝에 결국 최단항로인 대한해협의 동편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대한해협을 선택하게 되면서 발틱함대의 숙제는 크게 세 가지가 되었다. 첫째는 당연히 앞을 가로막을 것으로 생각되는 일본함대와의 교전었고, 둘째는 함대의 주요 목표인 블라디보스토크 입항, 셋째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차단과 블라디보스토크의 부실한 시설을 보완하기 위한 보조함선의 동행이었다. 즉 전투와 항해, 그리고 선단의 방호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때문에 로제스트벤스키는 전함의 전대가 전열을 형성하여 교전하고 순양함으로 전함의 전열을 지원하거나 보조함들을 방호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야간에 대한해협을 통과할 경우 일본의 어뢰정들의 기습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주간에 쓰시마 섬 근해를 통과하기 위하여 순항 속력을 8노트로 감속하였다. 그러나 당연히 이 부근 해역을 주간에 통과하겠다는 것은 일본 전투함들의 집중적인 차단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목표[편집 | 원본 편집]

일본 함대의 목표는 다른 것 없이 오직 발틱함대만 궤멸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여순항 봉쇄전 이후 일본의 연합함대는 1904년 12우러부터 이듬해 2월까지 사세보와 구레의 정비창에서 모든 정비를 다 마치고 2월 21일 한국의 진해만에 입항하였다. 이들이 진해만을 선택한 이유는 발틱함대를 포착하기 가장 쉬운 곳이면서도 묘박지로서도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어서 대기하면서 계속 훈련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함포사격, 어뢰발사, 접적기동, 야간 전투 등의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특히 사격훈련과 구축함 및 어뢰정의 야간 공격 훈련을 중요시하였었다.

여기에 일본 함대는 9월 19일부터는 대한해협의 남서쪽 해역에 경비정 70여척을 집중 배치시켜 발틱함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제독은 작전참모인 아끼야마 중령의 구상에 따라 발틱함대를 따라 북상하면서 4회의 주간전투와 3회의 야간 공격을 감행하는 7단 수비전법으로 발틱함대를 격멸하고자 하였다.

쓰시마 해전[편집 | 원본 편집]

양측의 전력[편집 | 원본 편집]

1905년 5월 27일 04:45에 일본의 정찰선 시나노마루가 발틱함대를 발견하고 무전으로 긴급보고를 하였다. 06:30에 진해만을 출항한 일본 연합함대는 발틱함대를 차단하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동쪽을 향해 항진하였다. 일본의 주력 전투함대는 도고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기함 미카사를 비롯한 전함 4척이 1전대를 이루었으며, 카미무라가 승함한 이즈모와 장갑순양함 6척이 2전대를 구성, 이외에 각각 4척으로 구성된 3개의 순양함전대가 뒤따랐으며, 구축함 21척과 어뢰정 44척이 동행하였다.

발틱함대의 주력 전투함대는 총 3개 전대로 편성되어있었다. 1전대는 기함인 소포로프를 선두로 알렉산더 3세, 보로디노, 오렐의 신형 전함 4척으로 구성되었으며, 2전대는 오슬리비야를 포함한 전함 3척과 장갑순양함 1척, 그리고 3전대는 네보가토프가 지휘하는 구형 전함 니콜라이 1세와 장갑해방함 3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순양함 8척과 구축함 9척이 동행하였었다.

함포 무장면에서 발틱함대는 230mm이상의 대구경 함토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세[1]하였으나 중구경포에 있어서는 일본 함대가 우세하였다. 또한 일본 함대의 함포는 발틱함대의 포보다 신형이어서 사정거리가 보다 길었고 포탄의 성능도 일본쪽이 우세하였다.

전투 발발[편집 | 원본 편집]

27일 오전 일본의 순양함전대가 발틱함대를 집요하게 추격하자 발틱함대는 함대의 진형을 여러 차례 변경하였다. 13:30경 종열진을 형성한 일본의 1전대와 2전대가 북서 침로로 발틱함대의 7마일 전방을 횡단하는 시점에서 발틱함대의 진형은 3개의 복종열진 형태[2]로 길게 늘어서서 북북동 방향으로 항진중이었다. 전방에서 일본 전투함대가 출현하자 로제스트벤스키는 자신의 전투함대에게 종열진을 형성하도록 신호를 보냈다.

13:55경 도고가 발틱함대의 좌현 함수 방향에서 발틱함대에 대하여 역방향인 남서방향의 침를 취하면서 "황국의 흥망이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자 최선을 다하라"[3]라는 의미의 Z기류[4]를 게양되었다. 이후 남서로 항진하던 도고는 14:05에 갑자기 좌현으로 회전하여 북동동 방향으로 변침한 다음 후속함대를 뒤따르게 하면서 일본 함대는 발틱함대에 대하여 T자의 윗줄을 씌우면서 발틱함대의 선두를 압박하여 들어갔다. 그러나 종열진의 종전(corpen)은 후속함들이 한쪽 위치에서 회전해야 하고 회전시에는 속력이 상당히 감속되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발틱함대가 포격을 개시하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 기동이었다.

실제로 일본 함대의 기동을 보고 포격을 호기를 잡은 수보로프가 14:08에 7천야드 거리에서 포격을 개시하였는데 문제는 이 시점에서 발틱함대 역시 제대로 된 종열진을 완전히 형성하지 못하고 일부 함정이 감속하거나 정지한 상태가 되면서 절호의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14:10부터 일본 함대가 응사를 시작하였는데 일본 함대의 포격은 발틱함대의 선두함인 수보로프와 오슬리비야에 집중되었다. 결국 교전이 시작된지 30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발틱함대 전열의 여러 함선들이 손상을 입기 시작하였으며, 14:45에는 오슬리비야가 심한 손상을 입고 전열에서 이탈, 30분 후에 침몰하였다. 이후 15:00에는 기함인 수보로프가 전투력을 상실하고 전열에서 이탈하였으며, 중상을 입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나중에 구축함으로 이송되면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1단계 교전이 끝나게 되었다.

2단계 교전[편집 | 원본 편집]

2단계 교전은 수포로프가 전열에서 이탈한 15:00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3세를 선두로 한 발틱함대는 북북동으로 침로를 유지하고 계속 블라디보스토크 방향으로 도주하고자 하였으나 속력이 우세한 일본의 함대에 번번이 차단당하고 그때마다 T자 씌우기를 당하였기 때문에 발틱함대는 두 번이나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게 되었다. 16:35에 도고는 교전 거리를 벌린 다음 예하 구축함들에게 어뢰를 살포하여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구축함의 어뢰 공격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전장의 연기와 안개로 인해 상당 시간동안 일본함대는 발틱함대와의 접촉을 상실하여 일본함대는 다시 남진하게 되었고 곧이어 발틱함대를 포착하게 되었다. 이 때 일본의 1전대는 발틱함대를 따라 거의 평행하게 북북서진하였고, 카미무라의 2전대는 남쪽에서 교전중인 순양함 전대를 지원하게 되었다.

3단계 교전[편집 | 원본 편집]

도고가 직접 지휘하는 1전대가 발틱함대를 좌현 함수 방향에 두고 서로 평행하게 북서진하는 도중 17:55부터 다시 교전이 시작되었다. 일몰이 다가오는 가운데 일본 1전대의 함선 6척과 발틱함대 함선 10척이 교전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때 일본 1전대의 포격은 선두함인 알렉산더 3세에게 집중되었었다. 이후 약 15분 뒤 알렉산더 3세가 전열에서 이탈, 19:00에 침몰하였으며, 새로 선두가 된 보로디노에게 다시 포격이 집중되어 보로디노 역시 19:20에 침몰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발틱함대의 주력이었던 신형 전함 5척 중 4척이 격침되었다.

울릉도 근해 해전[편집 | 원본 편집]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다가오자 네보가토프는 생존자를 구조하고 혼란중이던 나머지 함선들을 수습하여 북상하였다. 이에 도고는 구축함과 어뢰정들에게 야간 공격을 명령하고 전함과 순양함들은 예정 집결장소인 울릉도 인근 해역을 향해 14노트의 속력으로 북상하였다.

20:30경 일본함대는 울릉도 동남방 해역에서 전함 오렐과 니콜라이 1세, 그리고 장갑해방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포착하고 그 후방에 위협사격을 가하였다. 결국 다음날 오전인 10:30에 네보가토프가 백기를 게양하고 일본함대에 항복하였으나 오후 낡고 속력이 느린 장갑해방함 우사코프는 항복을 거부하고 일본 순양함 2척과 교전한 끝에 자침하게 되었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이 전투로 발틱함대의 주력을 형성했던 12척의 함선 가운데 전함 6척을 포함하여 7척의 함선이 격침되었으며, 장갑해방함 1척은 자침하였으며, 전함 2척과 장갑해방함 2척은 항복하였다. 그 외에 순양함 2척이 격침되고 2척은 좌초되었으며, 구축함 4척과 보조함 3척이 격침되었다. 또한 중상을 입어 이송되었던 로제스트벤스키가 숭함한 베도브이를 포함한 구축함 2척과 병원선 2척이 나포되었으며순양함 3척과 보조선 3척, 구축함 1척은 중립항에 입항하여 그 곳에서 일본 함대에 억류당하게 되었다. 대한해협에 들어선 발틱함대의 함선 38척 가운데 목표지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함정은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 보조선 1척에 그쳤으며, 발틱함대의 인원 손실은 전사자 5천명, 부상자 5백명, 포로 6천명이었다.

반면에 일본함대는 기함인 미카사가 가장 큰 손상을 받았으나 침몰당하지는 않았다. 그 외에 순야함 1척이 전투력을 상실했고 구축함 8척이 손상을 입었으나 침몰한 함정은 어뢰정 3척이 전부였다. 또한 일본함대의 인명손실은 전사 116명, 부상자 57명에 그쳤다.

이후의 영향[편집 | 원본 편집]

  • 당장 발틱함대가 사실상 전멸당하게 되면서 러시아는 더 이상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 국내의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러시아는 결국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수하고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였으며, 여순항과 요동반도, 그리고 사할린의 남부를 일본에 양도하게 되면서 극동에서의 러시아의 남진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패전의 후유증은 정치적 불안정을 가속시켜 이후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간접적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 승전국이 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당장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시켰으며, 이후 1910년의 경술국치로까지 이어지면서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 해군의 전술적 측면에서 보면 보다 큰 구경의 함포를 장착한 대형의 전투함만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거함거포주의사상이 이 해전을 통해서 대두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전에는 단일함에 여러 종류의 함포를 다수 장착한 다종다포주의의 함선에서 탈피하여 대구경의 단일 종류의 함포를 다수 탑재한 거포함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출현한 드레드노트급 전함이나 순양전함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또한 마한함대결전사상이 일본 해군의 전략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여기에 너무 취한 나머지 이들은 나중에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상대건드리최악의 실수를 하게 된다.

각주

  1. 43문:17문
  2. 좌측에 2전대와 3전대가 늘어서고 중앙게 1전대가 위치, 우측에 구축함전대 위치, 후미에 순양함전대가 뒤따름
  3. 皇国ノ興廃此ノ一戦ニ在リ、各員一層奮励努力セヨ
  4. 국제 표준 신호와는 전혀 상관없는 당시 일본만의 기류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