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으로서 불과 10년 남짓 존재하였지만, 그곳을 졸업한 수천 명(총 배출 인원은 1천500명~3천500명으로 연구가 갈림[1])은 홍범도의 대한의용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의 주축으로서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에 참전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의 일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설립[편집 | 원본 편집]

1910년 일본 제국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였다(경술국치). 이에 국내외 곳곳에서 무장투쟁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고, 결국 무장투쟁 세력들은 국내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이들 상당수는 중국 만주러시아 연해주로 이전하였다.

1910년 신민회의 간부들은 간도 지역에 인재를 양성할 무관학교를 창설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혁신유림 출신의 의병장 이상룡과 이회영·시영 6형제, 이동녕 등은 사전 답사를 거친 후에 1911년 4월 중국 유하현 삼원포 고산자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고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다. 이후 ‘추가가(鄒家街)’에 자리잡았다. 학교 설립지로 추가가를 택한 이유는 추가가의 조선 본토와 오갈 수 있는 교통 환경과 자체 경작이 가능한 평야 때문이었다.[2] 그리고 같은 해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다만 외부의 감시를 피하고자 학교의 이름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로 하였다. '신흥'은 신민회의 '신(新)'과 구국투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을 합쳐서 작명한 것이다.

활동[편집 | 원본 편집]

추가가 시절[편집 | 원본 편집]

비록 초라한 창고에 마련한 교정이었으나 설립한 해(1911년)에 4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무관학교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흥강습소는 도적떼의 습격[3], 중국 정부의 간섭 등을 피하여 1912년 결국 비록 척박하지만 타세력의 간섭을 피할 수 있는 퉁화(通化) ‘합니하(哈泥河)’로 학교를 이전하였다.[4]

합니하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신흥강습소는 합니하 교정에 모두 18개의 교실을 설치하였다. 그밖에도 학년별 강당과 교무실, 사무실과 편집실, 숙직실이 들어선 별도의 내무반 등이을 건설하였다. 합니하 시절 학교에서는 일반 중등교육과정도 가르쳤다. 이에 학교는 기존의 ‘신흥강습소’라는 공식 명칭에서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로 개명하였다.

신흥중학교의 연수 과정은 크게 일반 중등과정과 부설과정인 군사과로 나뉘었다(그러나 중등과정은 얼마후 다른 학교로 이전되었고 결국 군 양성에 그 역량을 입중). 일반 중등과정은 군사교육과 교양교육이 병행되었으며 총 3년 과정이었다. 군사과는 1년 과정으로 군사교육이 중심이었다. 군사교육을 담당했던 이들은 대개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들이었기에 훈련을 담당할 인력에는 큰 차질이 없었다. 다만 학교 측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기에 교구재가 부족했고, 기마훈련을 실시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5]

대두자 시절[편집 | 원본 편집]

1919년 국내에서는 삼일운동이 일어나는 등 민족 감정이 고조되었고, 신흥중학교를 찾는 이들도 늘어난다. 이에 신흥중학교는 1919년 5월 탁 트인 대지가 자리잡고 있는 대두자(大肚子) 로 본교를 옮기고 합니하에는 분교를 설치한다(합니하 외에도 퉁화현 치다오거우(七道溝)에 1개의 분교가 더 존재한다). 이 무렵부터 신흥중학교가 아닌 '신흥무관학교'로 개명하였다. 이때 지청천을 비롯한 일본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상당수 학교로 투신하였다. 지청천은 학교의 교장으로서 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대두자 시절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 다수는 독립혁명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를 결성하였다. 또한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를 치르는 한편, 그해 10월에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북로군정서)와 청산리 전투에 나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폐교[편집 | 원본 편집]

1920년 8월 신흥무관학교는 결국 폐교되었다.[6]학교가 폐교하게 된 이유는 크게 '내분'과 '외압'이 꼽힌다.

내분[편집 | 원본 편집]

1919년 7월 합니하 분교 소속의 한 학생이 본교 학생들을 구타하여 윤치국 학생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폭행의 이유는 용무를 묻는 태도가 불손했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학생들의 단순한 사고였지만, 그 내막엔 당시 본교와 분교의 내분이 있었다고 한다.[7] 이에 중국 당국은 학교에 학무정지 조치를 내렸다.

외압[편집 | 원본 편집]

일제는 종전에도 갖가지 이유를 들어 중국 동북지방의 독립운동세력 조직을 와해시켰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들을 색출하였다. 학교를 이따금씩 습격하는 마적들 역시 일제와 결탁한 상황이었다. 중국 정부 역시 일제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였다. 결국 봉오동 전투 직후 신흥무관학교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일제의 보복을 피하고자 피신하였고, 결국 그 상태에서 학교는 폐교되었다.

재건 및 인수[편집 | 원본 편집]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된 이후, 만주 지역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때 검성중학원(劍成中學院), 신창학교(新昌學校) 등이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신흥무관학교는 끝내 다시 문을 열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 국내로 돌아온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47년 2월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하였다. 신흥전문학원은 1949년 신흥초급대학(新興初級大學)으로 인가를 받아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회와 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신흥대학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51년 5월 18일 조영식에게 인수되었으며, 1960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었다.[8] 이와 관련하여 왜 경희대학교는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자교의 역사에 넣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9]2016년 기준 경희대학교는 공식 연혁에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인용기사에 따르면 신흥무관학교와 경희대학교는 별개라고 언급하고 있다.

관련 인물[편집 | 원본 편집]

실존인물[편집 | 원본 편집]

가공인물[편집 | 원본 편집]

관련 사이트[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310683
  2. http://m.ilyo.co.kr/?ac=article_view&toto_id=&entry_id=122003
  3. 심지어 설립자 중 한사람인 이석영은 신흥강습소 생도 2명과 함께 마적떼에 납치를 당하기도 하였다.
  4. http://m.ilyo.co.kr/?ac=article_view&toto_id=&entry_id=122003
  5. http://m.ilyo.co.kr/?ac=article_view&toto_id=&entry_id=122003
  6. 7월로 보는 글도 있다.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119367&cid=40942&categoryId=40012
  7. http://m.ilyo.co.kr/?ac=article_view&toto_id=&entry_id=123004
  8. 네이버 지식백과 글
  9. 예컨대 고려대학교 및 연세대학교가 전문학교 시절까지 합쳐서 100년이 넘는다고 하거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법관양성소를 포함해서 역사를 기산하는 것, 또는 성균관대학교가 자교의 역사를 600년으로 보는 것과 경희대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제외하는 것을 비교해보자..물론 상술한 학교들은 학술적인 역할을 계속 맡아온 것에 반하여 경희대학교와 신흥무관학교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