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한용운 초상

韓龍雲. 속명은 한유천(韓裕天), 자는 정옥(貞玉), 법호는 만해(萬海).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1]에서 한응준(韓應俊)과 온양 방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한응준은 홍주감영의 하급관리 출신으로,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을 때 홍주감영 관군의 중군장을 맡아 농민군 토벌에 앞장섰다. 한용운은 어렸을 때 성곡리 서당골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총명하기 이를 데 없어 주위에서 신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6살 때 자치통감을 터득했고 7살 때 대학(大學)을 독파했다고 한다. 9살 때 문리에 통달하였고, 14살 때인 1892년[2] 전정숙(全貞淑)과 결혼하여 아들 한보국(韓保國)을 두었다. 이후 훈장으로서 학동을 가르치다가 출가를 결심했다.

한용운의 출가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용운 본인은 1930년 자신의 일대기를 기고하면서, "19세 때에 어떤 사정으로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다른 글에서는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 몸으로 27세까지 한문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27세 되던 해에 홍주의 어떤 절에 가서 주역 공부를 하다 우연히 불서를 읽었고, 불법에 귀의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한용운이 19살 때 집을 나서서 여러 곳을 여행하며 불법을 공부하긴 했지만 출가하진 않았고, 27세 때 정식으로 불가에 귀의한 것으로 보인다.

신간회 중앙위원과 정치부 간사를 맡으며 한용운과 가까이 지냈던 이관구(李寬求)는 1976년 3월 1일 경향신문에 '독립운동과 한용운'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한용운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지막한 키에 영채 있는 안광과 강초한 얼굴은 담력과 학덕을 겸비한 지사의 풍모를 강하게 풍기거니와 볼에 파인 총탄의 흔적에서 지나간 거센 풍상을 읽을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이따금 체머리를 흔들게 된 것이 또한 특징이다. 굳은 침묵을 지키다가도 한번 입을 열면 열화 같은 변설(辯舌)에 마디마디 조리에 어긋남이 없다. 지기와 만나 담소할 때는 다사로운 정한이 넘쳐흐르지만 지조 없는 변절자를 대할 때는 매서운 호령에 주먹까지 거침없이 먹인다.

여기서 '볼에 파인 총탄의 흔적'은 한용운이 연해주로 여행갔을 때 생긴 상처라고 한다.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 그를 친일단체 일진회 첩자로 오인하고 총을 쐈고, 총탄 하나가 볼을 스쳐 지나가면서 생겼다는 것이다. 이때 입은 부상으로 고개가 비뚤어지고 체머리, 즉 머리를 흔드는 요두증(搖頭症)을 앓게 되었다. 그후 한양으로 돌아와서 요양생활을 하던 1905년 말, 홍성에서 을사조약에 반발하여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부친 한응준이 의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용운은 그해에 백담사로 가서 김연곡(金連谷) 선사를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하였다. 이후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그는 사찰에서 불교 관련 서적 뿐만 아니라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 신학문을 접하며 근대사상을 수용했다. 1907년 일본으로 유학간 그는 1908년 4월 승려 양성학교인 코마자와(駒澤) 대학에 입학하여 불교학을 공부했다. 이때 메이지 대학에 황실유학생 신분으로 유학하고 있던 최린과 교제하였다. 6개월 후 조선에 돌아온 그는 백담사에서 학문에 정진하였고,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탈고해 1913년 발간했다. 이 책은 한국 불교가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개혁방안을 제시하면서, 불교의 혁신운동 필요성을 설파했다.

1910년 10월 이회광(李晦光) 승려가 한국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합병을 발표하였다. 한용운은 이를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로 단정하면서 이회광 일파를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박한영(朴漢永), 진진응(陳震應), 김종래(金鍾來) 등과 함께 격문을 돌려 1911년 2월 송광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원종에 대응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였다. 임제종 종무원은 범어사에 두면서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경성에 설립했다. 이때 한용운은 관장 직무대리를 맡아 임제종 운동을 진두지휘했다. 1914년 4월에는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간행하고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불교대전>은 일반인들이 불교경전을 알기 쉽게 풀어 쓴 해설서로 불교 대중화를 위해 쓴 것이다.

1915년부터 영남, 호남의 주요 사찰을 돌며 강연회를 열었고, 그해 10월 조선 선종(禪宗)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했으며, 1917년 4월 <채근담 주해(菜根譚 註解)>를 동양서원에서 출간했다. 40세 때인 1918년 경성에 올라와서 불교 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청년계몽을 지원하였으나, 운영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서 3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이후 범어사에서 불법을 닦던 그는 1919년 2월 말 최린과 만나 독립선언서 발표 계획을 전해듣고 즉석에서 찬성했다. 이후 대각사의 백용성을 찾아가 거사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는 독립선언서 작성과 관련하여 이의를 제기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을 거부한 최남선에게 선언서 기초를 맡기는 걸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손병희 등 천도교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최남선이 쓴 선언서를 채택했다. 그런데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의 명칭을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가 나서서 '독립선언서'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관철시켰다.

한용운은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 초고에 몇 자 가필을 한 뒤 '공약 3장'을 추가했다. 최남선이 쓴 선언서는 손병희의 비폭력 의지가 반영돼 문투가 온건한 편이다. 반면 '공약 3장'은 실천적이며 독립 의지가 뚜렷하게 담겨 있다. 특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한 공약 3장 제2항은 나중에 33인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큰 논란이 됐으며 '내란죄' 죄목이 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2월 28일 밤 보성사 사장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 3천여 매를 건네받은 뒤 계동의 자택으로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을 긴급 소집한 후,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면서 각 지역에 배포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참가한 학생들은 백성욱, 김대용, 오택언, 김봉신, 그리고 김법린이었다. 그들은 3월 1일 경성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으며, 이후 지방으로 내려가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퍼지도록 유도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한용운은 사회를 맡아 인사말 및 격려사를 하였고, 민족대표 33인은 독립만세 삼창을 했다. 이때 그는 피체될 경우를 대비해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동료들에게 제시했다고 한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얼마 후 종로경찰서에서 파견된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이후 1년 반에 걸쳐 심문과 재판이 진행되었다. 수감 초기에 일제가 33인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죄를 적용해 중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문을 듣고 33인 가운데 몇몇 사람이 겁을 먹고 통곡하였다. 그러자 그는 "독립운동을 하고도 살 줄 알았더냐, 당장 민족대표를 취소해 버려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는 재판정에서도 당당했다. 다음은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재판소의 심문 기록이다.

문: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목적은.


답: 조선 전반에 독립한다는 것을 알리자는 것이다.

문: 이런 선언서를 배포하면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는가.

답: 조선은 독립이 될 것이고 인민은 장차 독립국 국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1919년 7월 10일에 열린 경성지방법원 공판 도중 일본인 검사가 그에게 "독립을 선언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말로는 다 할 수 없으니 글로 적어 주겠노라"고 밝혔다. 이후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일명 조선 독립의 서)>이라는 논문을 작성헀는데, 그 분량이 8천여 자에 달했다. 이 논문은 1) 개론 2) 조선 독립선언의 동기 3) 조선독립 선언의 이유 4) 조선총독부 정책에 대하여 5) 조선독립의 자신(自信)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대목은 다음과 같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사해(死骸·송장)와 같고 평화가 없는 자는 다시없는 고통이다. 압박을 받는 자의 주위는 무덤과 다름없고 쟁분(爭奮)을 일삼는 자의 환경은 지옥이 되나니 우주의 이상적 가장 행복한 실재(實在)는 자유와 평화다. 그렇기에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여기고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태(甘飴)처럼 맛보나 이는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일지로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독립의 이유와 필요성을 원초적,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폭력과 기만으로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하였다고 규탄하면서 조선이 자주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외세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민족진영 일각의 실력양성론이나 외교론 등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조선민족이 독립정신만 있으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글은 그를 옥바라지하던 상좌 춘성스님을 통해 해외로 유출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자 기사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大要)'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전문은 우리역사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소요 혐의로 한용운에게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영에 산입)을 선고했다.[3]이리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마포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한용운은 옥중에서 종일 면벽관심(面壁觀心)으로 참선에 열중했다. 노역으로는 최남선, 최린 등과 함께 모자를 만들었다. 또한 감옥 창살 밖으로 큰 소리를 내 다른 방에 갇힌 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한번은 한용운이 옆방의 최린과 통방을 하다가 간수에게 들켜 호된 벌을 받았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읊었다고 한다.

하루는 이웃방과 더불어 통화하다가


간수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네

손으로 두들겨 맞으니

잠시 동안 입을 벌릴 수가 없더라.

1921년 12월 22일 경성감옥에서 가출옥한 그는 이틀 뒤 출옥소감을 들으러 찾아온 동아일보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옥중에서 느낀 것은 고통 속에서 쾌락을 얻고 지옥 속에서 천당을 구하라는 말이었다. 경전으로는 여러 번 그런 말을 보았으나 실상 몸으로 당하기는 처음인데, 다른 사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속에서도 쾌락으로 지냈다.

한용운은 출옥 후에도 민족운동을 지속했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후원하였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을 맡아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이끌었다. 1924년 1월 조선불교청년회 총회에서 총재로 선출된 뒤 불교 혁신을 촉구하였고, 총독부에 사찰령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또한 <유심>, <조선일보>, <대중공론> 등의 언론 매체를 통해 학문과 지식을 겸히하고 심리적 수양이 이뤄져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젊은이를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6년 자작시 88편을 묶어 첫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출간했다.

1929년 12월 21일 경성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했다. 1929년 11월에 발발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연루되어 허헌, 김병로 등과 함께 경성형사과에 체포된 뒤 몇달간 취조받다가 1930년 초에 풀려났다. 1930년 5월 김법린, 최범술, 김상호 등 청년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운동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취임하였다. 만당은 경남 사천의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국내 일원과 동경에까지 지부를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만당은 1938년 말 일경에게 조직이 발각돼 서울, 사천, 진주, 해남, 양산 등지에서 6차례의 검거선풍 끝에 와해되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만당과 한용운의 관계를 밝혀내지 못해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한용운은 대중화와 민중계몽을 위하여 신문 발행을 구상했다. 그래서 당시 운영난에 빠진 <시대일보>를 인수하려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잡지 <불교>지를 인수하여 1931년 불교지 발행인으로 취임해 불교 대중화, 식민지불교의 극복, 민족의식 고취 등에 힘썼다. 한편, 그는 승려들의 결혼 자유화를 부르짖었다. 결혼생활이나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수 차례 조선 총독부에 탄원서를 올렸으나 별다른 회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1931년 53세의 나이로 단성사 옆에 위치한 진성당병원의 간호사 출신 유숙원(兪淑元)과 결혼하고 1934년 딸 한영숙(韓英淑)을 낳았다. 이에 불교계에서 거센 비판이 일었지만, 그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 중생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933년 백양사 승려인 벽산(碧山) 스님이 기증한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지인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한용운은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여 동북 방향으로 집을 털어버렸다고 한다. 1937년 3월 3일 마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김동삼이 옥사했는데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으려 하자, 그가 나서서 시신을 인수한 뒤 심우장에 모셔놓고 5일장을 지낸 후, 미아리의 한 조그만 화장터에서 화장한 후 한강에 뿌렸다. 그는 영결식 때 통곡했는데, 그가 남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 건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반면 변절한 옛 동지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3.1 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이 변절 후 심우장을 방문하자, 그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얼마 후 다시 찾아온 최린은 한용운이 부재중읻자 딸 한영숙에게 돈을 쥐어주고 돌아갔다. 한용운은 이 사실을 알자 부인 유숙원과 딸 한영숙에게 호통을 치고, 바로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그 돈을 집어 던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또 한 번은 길에서 최남선을 만나자, 못 본 체 피했다. 최남선이 따라와 길을 막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당신 누구시요?
저 육당입니다.
육당이 누구요?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葬送)했소.

한편, 한용운은 아내 유숙원과 딸 한영숙을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호적을 올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배급도 받지 못했으며 딸은 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었다. 결국 딸은 그가 집에서 직접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말년에 어렵게 살면서 부인의 삯바느질과 그의 원고료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일제가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뒤 전시총동원 체제를 실시하고 민족 말살 정책을 폈을 때, 수많은 민족진영 인사들이 변절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1940년 2월 창씨개명이 실시되자 반대운동을 전개했고, 1943년 조선인 학병 출정 역시 적극 반대했다.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뇌출혈로 입적하였고, 미아리에서 화장된 뒤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한용운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사상[편집 | 원본 편집]

한용운은 일본이 물질문명이 앞섰다하여 조선을 천시하지만 물질문명을 이루는 것은 쉽고 오히려 정신문명의 확대가 더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그는 <조선독립의 서>에서 서구 근대국가의 군국주의를 비판하여 “독일의 군국주의뿐만 아니라 연합국측의 수단과 방법 역시 군국주의의 유물인 군함과 총포 등의 살인도구”였다는 점에서 서로 다를 바 없는 것이라 비판하였다. 그리고 조선독립은 “모든 물질문명이 완전히 구비된 후에라야 꼭 독립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할 만한 자존(自存)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라 하였다.그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폐해를 일찍이 주목했고, 인간을 기계화, 노예화, 맹목화시킨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세속의 번잡으로부터 자기를 성찰하여 본질적인 이상의 실현을 촉구하는 것이 조선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 판단했다.

그는 종교가 국가의 이상을 실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이상을 국가가 실현하는 것으로서 국가는 정신적 도덕문명을 위한 수단이 되고,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종교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서구 근대의 물질문명과 생산성을 높이 사지 않았다. 단지 인권회복의 차원과 경제적 독립으로서 생산활동을 강조했고 인권의 측면에서 승려의 걸식(乞食)을 비판했다. 그는 불교가 깨어나야 조선혼의 정신문명이 발전될 수 있다고 보면서, 이를 이루기 위해 조선불교유신운동을 전개했다.

한용운은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을 통해 서양의 근대사상, 특히 에마누엘 칸트의 자유론을 접했고, 1920년대에는 당시를 풍미하던 사회주의 이론과 접촉했다. . 그는 서구 근대사조를 접하면서 불교전통의 폐해를 성찰하는 동시에 근대 담론을 불교사상으로 재 개념화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불교유신운동의 기본 취지에서도 “신시대, 신사조에 접촉된 불교가 그 구폐를 개혁하여 개성의 존중을 인정한 유아독존의 사상과 대자대비를 주창한 박애관념으로 사회의 확장에 공헌하며 문화의 발전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개성의 존중은 불교의 유아독존의 사상에서 비롯되고, 박애관념은 대자대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한용운은 기미독립선언서에 덧붙인 '공약삼장'에서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가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하는 것에 있고, 조선독립의 원동력 또한 그 힘에 있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자유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진아(眞我)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자유이다. 이도흠 교수는 한용운이 추구한 자유에 대해 "타인의 자유와 평화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이자 무명(無明)을 탈피하여 진정한 자아와 궁극적 진리와 깨달음에 이르는 적극적 자유"라고 평했다.[4]즉 소극적 자유를 달성한 뒤 적극적 자유를 지향할 때 자존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자유를 '개인적 진아(자유)'와 '공유적 진아(자유)'로 분류했다. 그러면서 공유적 진아가 실현되지 못하면 개인의 진아도 실현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가 이렇듯 자유를 분리한 것은 량치차오가 음빙실문집에서 해석한 칸트의 '도덕적 진아'의 한계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람이 모두 시공을 초월하는 자유권에 의거하여 스스로 그 도덕의 성질을 만드는 것인데, 나의 진아(眞我)를 비록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도덕의 이치로 미루어 보면 엄연히 현상을 벗어나는 “활발 자유(活潑自由)한 것”이라 하였다. 량치차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간은 진여와 무명의 두 종자를 지니고 있는데 칸트가 말한 진아란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로서 자유성을 지닌 것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은 칸트가 말한 현상으로서 곧 비자유성’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칸트가 말하는 진아는 진여로서 불교와 가깝다.

량치차오는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는 일체 중생이 공유하는 체(體)이기에 칸트가 사람마다 모두 각기 하나의 진아를 가지고 있다고 한 것과는 다르므로, 칸트의 '진아'는 불교와 가깝지만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봤다. 그러나 한용운은 칸트와 량치차오 모두 타당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칸트는 개인적 진아만을 말하고, 량치차오는 공유적 진아만을 말하여 두 사람 모두 양자를 아우르지 못했다. 또한 진아는 진여뿐만 아니라 무명을, 자유성뿐만 아니라 비자유성도, 청정만이 아니라 망염(妄染)을 모두 포함하는 것30)이기에 양계초가 무명을 진아에서 제외시킨 것이나 칸트가 자유성만을 진아로 말한 것 역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용운은 "붓다가 성불했으면서도 중생 탓으로 성불하지 못한다면 중생 역시 붓다 때문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하여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은 셋이면서 기실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 삼자는 는 상즉상리(相卽相離)의 관계여서 “하나가 곧 만이요 만이 곧 하나(一而萬萬而一者)”인 관계라 할 수 있고, 만약 부처라 하고 중생이라 하여 그 사이에 경계를 긋는다면 이는 무의미한 것"이라 하였다. 자유란 붓다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자각에서 오는 각유적 자유요, 공유적 평등이다. 유아독존[5]이기에 “구애(拘碍)될 것이 없는” 자유요, “존비(尊卑)가 없고, 자타가 없는” 평등인 것이다. 또한 만해의 자유는 평등을 수반하는 평화의 개념이다. “참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동반하고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는 개인의 자유와 공유적 자유를 결합하여 진정한 인간해방과 사회해방을 이뤄내길 희망했다.

한용운은 1920년대 대세로 떠오른 사회주의 역시 참고했다. 그는 천도교와 사회주의 간의 사상논쟁으로 반종교 운동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불교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사회주의를 불교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불교는 계급에 반항하여 평등의 진리를 선양하며, 소유욕을 부인하고 우주적 생명을 취하는 걸 목표로 삼았으니, 사회주의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석가의 이상인 재산 축적의 부인, 경제상의 불균등 배척, 그리고 소유욕 없이 살자는 것이 현대어로 표현하면 불교사회주의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불교사회주의는 민족과 계급, 국경을 넘어 모두가 잘 살고자 하는 우주적 차원으로 보았다. 즉 계급질서가 아닌 평등을, 소유욕이 아닌 우주적 생명을, 무산자 혁명이 아닌 전 우주의 혁명으로서 산천초목, 우주만유를 모두 구제하자는 것이다.

불교사회주의는 불교가 사회와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산간불교로부터 불교의 ‘민중화’를 외치고 사회참여를 강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전근대시기에 불교는 허무적멸교라 불렸지만, 이제 “창생의 구제는 세상을 떠나 세상을 구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들어와서 세상을 구하는 것”이고, 이는 마치 병자를 떠나 병자를 치유할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다. 즉 민중의 삶을 배제하고는 붓다도, 정토도 없기에, 사회구조의 개혁과 사회진보를 위해 각성하자는 것이다. 또, 불교의 민중화는 시대정신에 합류하는 사회의식의 각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봤다. 그는 <불교유신회>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불교는 사찰에 있는 것도, 승려에게 있는 것도, 경전에 있는 것도 아니라 각인의 정신적 생명에 존재하고 그 자각에 존재한다. 민중과 접하고 민중과 더불어 동화해야 한다.

그는 각인의 자각을 통해 불교의 민중화와 참여로서 공익(公益)의 대아(大我)를 지향해야 한다고 봤다. 공익은 인간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국가가 갖추어야 할 공존공영의 상호협조를 지칭한다. 대아적 차원에서 보면 상호협조는 자조(自助)가 되고, 공익은 사익(私益)이 된다. 따라서 자연과 인류, 모든 국민은 같은 배를 탄 일원이니, 함께 힘을 모아 공익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한용운은 근대사상을 참고하여 불교유신운동을 전개했지만, 서양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회진화론을 반대하고, 비판적 성찰을 통해 불교 자체의 사상과 맥락으로 재해석했다. “우수하고 열등하고 강하고 약해지는 것은 세력 여하”에 있지만 그 세력은 곧 해탈의 힘이라는 것이다. 조선 불교가 유린된 원인도 세력의 부진에 있고, 세력의 부진은 가르침이 포교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으며, 가르침이란 궁극적으로 해탈의 힘이다. 또한 승자가 되는 것은 만물을 아끼고 기르는 자이지 약자를 먹는 자가 아니며, 패배한 자가 되는 것은 만물의 영장되는 권리를 포기하고 사회에 대하여 힘을 제공하는 임무를 소실한 자이지, 처음부터 승자와 패자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한용운이 대처승 금지 폐지를 촉구한 건 일본불교를 선진종교의 모델로 인식하여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화하려 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6] 또는 불교를 사회하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승려들의 결혼을 자유화하려 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7] 그러나 한용운이 대처승 금지 폐지를 촉구한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결혼이 불도를 이루는데 장애될 수만은 없는 것이고, 차라리 인간의 성적 욕망을 인정하여 음지로 모는 것보다 나으며, 오히려 성을 터부시하는 것 자체가 속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시 <선사(禪師)의 설법(說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 주는 것입니다.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드렸습니다 .

한용운은 승려가 아내를 두는 건 불도를 이루는 데 장애가 되는 게 아니며,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라고 봤다. 그러면서 사랑의 속박을 금욕으로 회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긍정하여 그 속박의 사랑을 통과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한용운의 주장은 일본 불교의 영향이나 근대화 기획으로 단정할 수 없다.

한용운은 문학을 분류하는 것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는 문학을 문예만으로 국한시키는 풍조에 대해, "시(詩), 부(賦), 삼국지・수호전・서유기・서상기 같은 사대기서(四大奇書)는 당연히 대 문학이라고 하려니와 이것이 어디에 포함될 것이며, 팔만대장경은 문학이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모든 경전과 인문이 당연히 문학에 포함될 것인데 이를 문예로 축소하면 문예외의 것은 어디에 소속을 두어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그는 불교를 철학과 종교에 편입시켜 불교의 성질을 종교적 성질과 철학적 성질로 나누어 보았다. 불교의 종교적 성질이란 기독교처럼 지옥과 천당을 별도로 놓는 것이 아니라 자심의 진여를 깨닫는 것으로서, "지옥과 천당이 다 정토가 되고, 중생의 마음이 곧 정토"라고 주장했다. 즉, 불교는 타종교처럼 영생을 논하지 않고, 불생불멸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자기 마음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불교의 철학적 성질을 일체종지(一切種智)로 규정했다. 일체종지란 자심을 깨달아 “밝게 통하므로 장애가 없고(瑩徹無碍) 모르는 바가 없는 지혜"이다. 그는 불법을 통달하고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이끄는 것이 불교의 지향점이라 하였다. 이러한 불교는 근대 인류의 중추가 되는 이상주의, 인격주의, 평등주의, 사회진화론, 자유주의, 사회주의, 과학주의 등 모든 주의를 표방하고 있기에, 현대사조는 불교의 주석과 같으며, 불교는 도덕 문명의 원료품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인류 전체의 완성을 구가하고자 하는 자는 불교의 의미를 먼저 체득해야만 할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불교가 모든 학문의 통섭으로서 근대 보통학을 겸비하면서도 진리의 핵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문학을 이끌어내는 종교라고 본 것이다.

한용운은 승려 교육의 세 가지 급선무로 보통학, 사범학, 외국 유학을 제시했다. 보통학은 사람의 의복이나 음식처럼 삶에서 필수적인 것이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으로, 과학, 철학, 문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논리학 등 근대의 학문을 지칭한다. 그는 승려가 보통학을 겸비해야 민중의 삶과 사회로부터 유리되지 않으며, 인간과 사회, 그리고 사물에 대한 지식을 진보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사범학은 중생들의 모범이 될 사범을 길러내는 학문이다. 마지막으로 외국 유학을 통해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서 중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한용운은 물을 맑히기 위해서 근원을 다스리고, 나무를 무성케 하기 위해 뿌리를 북돋우는 것처럼 사람의 행사를 정돈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수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수양이란 망념을 물리치려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본체를 그대로 보유하는 것이다. 그는 <조선불교 유신론>에서 기존 불교의 수행은 '참선'[8]과 '염불당'[9]의 폐단이 심하다며, 두 개념을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참선 폐지'는 스스로를 학대하는 참선 대신 공동으로 선학관을 설립하고 중생이 서로를 격려해 깨달음을 얻게 하자는 것이다. 염불당 폐지는 '유신론'의 주장에서도 가장 파격적인데, 중생들이 거짓 염불을 멀리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자는 것이지 염불당을 완전히 무조건적으로 없애자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된다. 이와 함께 불교 의식(儀式)에 대해서도 많은 다라니(陀羅尼)를 중심으로 한 의식보다는 오히려 간략한 법식(法式)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한용운은 산속의 사원은 사상적인 진보와 모험 및 구세, 경쟁을 자극하지 못해 퇴영적이기 쉽고, 사업적으로는 교육, 포교, 교섭, 체신, 단체, 재정 등에 모두 불리하므로, 사원을 도시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원의 흥망성쇠는 주지(住持: 절을 주관하는 승려)에 달려 있는 만큼 능력있고 훌륭한 사람이 주지의 직책을 맡기 위해서는 제도를 개혁하여 선거로 선출하고 월급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승려들은 외형적으로 단결된 것 같으나 정신적인 단결이 없음을 지적했고, 이 중에서 승려들의 방관자적 태도가 가장 문제라고 봤다. 승려들이 단결하여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한다면 부처님의 중생제도 정신을 배반치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지은 죄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렇듯 한용운은 서구 근대사조를 접하면서 불교 전통의 폐해를 성찰하는 동시에 불교사상을 근대적 담론을 재 개념화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만해의 불교유신사상은 한국불교의 전통적 사유를 계승하면서도 서구 근대사조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토착적 근대화를 이끌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서구 근대 사상을 그대로 이행하지 않고, 불교만의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 그가 설파한 불교사회주의 역시 무산자 계급의 혁명을 추구한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전 생명의 우주혁명을 추구하였다. 그는 전통학문분류와 근대학문의 성격을 고려하여 보통학을 겸비한 인문학의 창도로서 불교학을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정신(正信)의 수양을 주장했다. 그는 불교학의 학문적 재정립을 시도하고 보통학의 겸비와 더불어 마음수양을 우선시 하면서 주체적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현재 이곳에 만해한용운생가지(萬海韓龍雲生家址)가 있으며,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2. 18살 때인 1896년이란 설도 있다.
  3.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4. 이도흠, <탈식민주의자로서 만해 한용운의 사상 읽기>, '만해학보' 제13집.
  5. '어느 것 하나 나 아님이 없다'는 측면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독존(獨存).
  6. 김용태, <근대불교학의 수용과 불교 전통의 재인식>, '한국사상과 문화' 제54집
  7. 김광식, <한용운의 불교 근대화 기획과 승려결혼 자유론>, '개각사상' 제11집.
  8.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한 자리에 앉아서 오래도록 금식하는 수행
  9. 사찰에서 정토왕생을 목적으로 염불 위주의 수행을 하기 위해 지은 불교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