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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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龍城. 속명은 백상규(白相奎), 법명은 법명은 진종(震鍾).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승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4년 5월 8일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현재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수원 백씨 백남현(白南賢)과 밀양 손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자비로운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하며, 14세 때인 1877년 꿈속에서 부처님을 만난 뒤 남원군 문룡산 덕밀암에서 행자 생활을 하면서 주지 혜월 스님에게 출가 허락을 받았지만, 부모님이 출가를 결사 반대해서 결국 승려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2년 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를 결심하여, 해인사 극락전을 찾아가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삼고, 상허혜조율사(相虛慧造律師)를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사실 그가 출가하기로 마음 먹은 건 특별히 불도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가정의 불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년에 자신이 출가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냉정히 말하면 ‘手植靑松今十圍(손수 심은 푸른솔 열아름일세)’의 신념을 굳게 먹고 불도의 길로 나섰다기보다도 솔직한 고백으로 말한다면 어린 시절의 내 가정에 대해서 나는 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이어린 나에게 닥쳐오는 계모의 지나친 학대였다. 계모의 학대는 20전후의 철없는 나로 하여금 포근한 가정을 뛰쳐나가게 하고야 말았었다. 이것이 불도로 들어서게 되는 첫째의 커다란 이유가 되었다. 아직도 20전후 하던 약관의 몸으로 가정에 애착을 두지 못하게 되었었으니 세상이 곳 없이 적막한 감이 들었다. 신적으로 퍽도 고적(孤寂)과 비애 속에서 헤매던 나에게 ‘此僧年紀那得知(이 스님 나이를 어떻게 알까?)/ 手植靑松今十圍(손수 심은 푸른솔 열아름일세)’ 이러한 불교의 인생관은 나에게 커다란 희망을 가져다주는 듯싶었다. 그래서 출가하여 산 속에 들어가 불경을 읽고 ‘석가(釋迦)’를 따랐다.

- <삼천리> 제12호 1936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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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에서 기본 교육을 받은 뒤, 고운사, 보광사, 송광사, 표훈사 등 전국의 절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4차례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30대 때 7년간 산중에서 토굴생활을 하며 구도의 길에 정진하였고, 37세 때인 1900년 8월 토굴에서 나와 40세 남짓까지 선지식들과 법거량(法擧量·스승에게 깨침을 점검받는 것)을 하였다. 44세 때인 1907년 9월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약 2년 동안 중국의 5대 명산(태산, 화산, 숭산, 형산, 항산)과 북경 관음사, 통주 화엄사, 숭산 소림사, 조계산 남하사 등의 성지를 순례했다. 1910년 귀국하여 지리산 칠불선원의 종주로 있으면서 <귀원정종>을 저술하엿고, 1911년 경성으로 올라와 강씨 신도 집에 거주하였다.

백용성은 상경 직후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에는 조선이 500년 내내 승유억불 정책을 추진한 여파로 불교의 위세가 매우 열악했다. 경성 안의 사찰이라고는 각황사(覺皇寺)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저서 <조선글 화엄경>의 '저술과 번역에 대한 연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해년(1911년) 2월 그믐에 경성에 들어와서 시대사조를 관찰해보니, 다른종교에서는 곳곳마다 교당을 설립하고 종소리가 쟁쟁하며 교중(敎衆)이 교당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각황사 하나만이 있을 뿐이고, 더욱이 우리 선종에서는 한 명도 선전하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이 한탄스러워 즉시 임제선사가 삼구로 교화한 것을 본받아서 종지를 거량하였을 따름이었다.

백용성은 강씨 집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선회를 개설하였는데, 3개월만에 수백 명의 신도를 모았다. 이를 발판삼아 가희동 211번지의 신도 강영균(康永均) 집에 도회지 참선 포교당을 개원했다. 이후 조선 이희광의 매종 행위를 비판한 박한영(朴漢永), 진진응(陳震應), 김종래(金鍾來), 한용운 등이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표방한 임제종 설립운동을 전개하자, 그는 이에 가담하여 1912년 5월 17일 포교당을 조선임제종중앙포교원으로 개칭하고 개교사장(開敎師長)으로 활동했다.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은 1912년 5월 26일 개교식을 시작으로 임제종의 진리도덕을 세상에 전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가 사찰령을 공포하여 조선불교를 ‘조선불교 선교양종’으로 정리하고 30본사체제를 확립하는 등 압력을 가했다. 1912년 6월, 조선 총독부는 한용운을 불러 임제종 간판을 내리라고 요구했으며, 한용운이 듣지 않자 포교당 건립 자금을 허락없이 모금했다며 재판에 회부했다. 그와 한용운은 이에 대항하였으나 계속되는 압력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1915년 포교원을 떠났다. 이후 조선임제종중앙포교원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후 백용성은 경성 장사동에 선종임제파강구소(禪宗臨濟派講究所)를 열고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문도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백용성은 1911년 우면산 대성초당에 거주하면서 봉익동 1번지에 대각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반면 일제측의 기록인 <조선의 유사종교>에서는 1914년을 대각사 창건 시기로 기술했다. 하지만 한보광은 <백용성 스님의 중반기의 생애>에서 1916년이 대각사 창건 시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1919년 7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백용성이 직접 구술한 취조서를 제시했다.

문: 성명은?

답: 백상규이다.

문: 피고는 어떤 절에 소속되고 있는가?

답: 경상남도 협천 해인사의 승려로 있었고, 그후 범어사에서 경영하던 경성 포교소에 있다가 53세(1916년) 때부터 봉익동 1번지에서 단독으로 있었다.

백용성은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1916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금광사업을 시작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18년 중단했다. 금광사업 실패 후 경성으로 귀환한 백용성은 한용운이 발행하는 불교잡지 <유심(惟心)>에 논설을 수 차례 게재하면서 한용운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1919년 2월 25일, 기미독립선언서 작성에 처음부터 깊이 관여하고 있던 한용운이 그를 찾아와서 "지금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이를 이용하여 각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니 참여해달라"라고 권유했다. 평소 민족 독립을 중생구제의 일환으로 여겼던 그는 흔쾌히 승낙한 후 독립선언서에 날인할 인장을 한용운에게 건넸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열린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 중 불교계 인사는 그와 한용운 둘뿐이었다.

독립선언식 거행 직후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체포된 그는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이후 1년 6개월간 심문과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은 독립선언서에 관해 잘 몰랐으나, 서명하면 체포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며 당당하게 행동했다. 다음은 고등법원에서의 심문기록이다.

문: 독립운동의 방법은 무엇인가.


답: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 자연 일본에서도 조선이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독립을 승인해 주리라는 것을 한용운에게서 들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하고 운동에 참가할 것을 승낙하고 나도 선언서에 이름을 내기로 했었다. 그 밖에 청원서를 만들어 일본정부나 총독부, 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자 등에 보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었다.

문: 선언서를 배포하면 그것으로 곧 독립이 얻어진다고 믿었는가.

답: 그렇다.

문: 선언서에는 어떤 것을 쓸 생각이었는가.

답: 나는 선언서를 본 일도 없으나 한용운의 말로는 무기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난폭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온건한 태도로 서면으로써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했으므로 그런 취지로 선언서는 씌어질 것으로 생각했었다.

문: 선언서는 독립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인가, 독립을 희망한다는 것을 선언한다는 것인가, 어느 것인가.

답: 지금부터 독립하려고 한다는 의미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문: 그러한 선언서를 발표하면 보안법에 저촉된다는 것은 그대도 알고 있었는가.

답: 그런 것은 나는 모른다. 다만 이번의 일에 대하여 이름을 내라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독립하는 것이라면 이름쯤 내어도 좋다고 생각하여 이름을 낸 것에 불과하다.

문: 명월관 지점에서 회합했을 때에는 그 선언서를 발표하면 곧 체포된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답: 그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문: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답: 그것은 그런 것을 발표하면 어쨌든 그대로 무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독립선언을 하면 일본정부가 쉽사리 승인해 줄 것이라면 죄도 아무것도 아닌 것에 체포된다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답: 마침내 독립되고 나면 체포되는 일도 없겠지만 독립이 되기까지의 동안은 그런 일을 하면 무슨 죄에 저촉되는지는 모르나 하여튼 체포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문: 피고 등은 조선의 독립을 강화회의의 문제로 삼고 일본으로 하여금 독립을 어쩔 수 없이 승인하도록 하게 할 생각이 아니었는가.

답: 나는 그런 것은 모른다. 나는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은 필요하다, 일본에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또 불교 상으로 보더라도 조선의 독립은 마땅한 것이므로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하여튼 조선의 독립은 용이하게 될 것으로 믿고 있는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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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백용성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출판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에 산입) 판결을 받고 마포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5월 5일 정춘수 등과 함께 만기 출옥한 그는 상좌들로부터 몇몇 상좌에 의해 대각사가 몰래 매각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개신교 목사들이 한글 성경을 읽으며 암송하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불교 역시 한글로 번역된 경전을 사용해야 대중화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1921년 역경 사업 조직체인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출범시켜 순한문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1922년, 백용성은 '대각교'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봉익동 2번지에 대각교당을 설립하였고, 삼장역회도 가희동 211번지에서 봉익동 2번지로 옮겼다. 이후 대각사는 백용성의 번역사업과 저술활동, 불교개혁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당시 불교가 복을 빌고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 미신을 믿는 비합리적인 종교라는 기독교 인사들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귀원정종>, <수심정로>, <대각교의식>, <각해일륜>, <오도는 각> 등의 많은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 책들을 통해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이며 자각과 타각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주장했다. 또한 경전을 번역함에 있어 문어체 경전을 대화체로 전환하고, 불교용어들도 새로운 단어로 바꾸어 기존의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도 바꾸려고 노력했다.

백용성은 경제적 자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는 시주에만 의존하는 사원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오늘날 불교를 흡혈적·사기적 종교이며 기생적 종교라 아편독과 다름없다고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승려가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선 수행을 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창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중국 지린성 연길현 명월촌, 영본촌 일대의 2만 8천여 평의 토지를 매입하였고, 1927년 9월 대각사 선농당을 이곳에 세운 후 승려들에게 반농반선(半農半禪)을 하면서 인근의 조선동포들과 함께 노농(勞農)공동체를 꾸리도록 하였다. 뒤이어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에 30여 정보의 땅을 매입하여 화과원(華果院)이라는 농장을 세웠다. 그는 농장을 운영하여 사원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는 한편, 독립자금을 송금하기도 했다.

한편, 백용성은 일제의 사찰 장악을 막기 위해 선학원(禪學院)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 활동을 통해 승려의 결혼과 육식 금지 등을 강조했다. 그리고 1926년 5월 비구승려 127명의 연서로 대처식육을 반대하는 내용의 건백서를 조선 총독부와 내무성에 제출했다. 총독부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9월에 2차로 건백서를 재차 제출했다. 그는 여기서 총독부가 대처식육을 금지할 수 없다면, '대처승의 비구계를 취소하고 환속시켜 재가이중의 지위에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이것마저 불가능하다면 청정비구와 그 사찰만은 보존, 수호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유처승려와 무처승려의 구별을 조선 대중이 알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불교를 완전히 개혁하기 위해 기존의 불교라는 명칭까지 바꾸고 1927년 대각사에서 대각교(大覺敎)를 선포한 뒤, '대각교중앙본부'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는 대각교 의식집을 한글로 만들고, 신도들에게 한글로 번역된 경전을 읽고 기도하고 공부할 수 있게 하였다.

백용성은 1928년에 대각교당에서 대각 일요학교를 시작하여 어린이 법회를 열었다. 1920년생 성옥념 씨는 <법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열살 전후되던 시기부터 백용성의 대각사에 다니며 침봉 나인으로 일했다고 증언했다. 이당시 많은 아기나인들이 학교가 쉬는 일요일이면 상궁들을 따라 대각사에 다녔다고 한다. 이는 대각사에는 일반 신도들뿐만 아니라 궁궐의 상궁들과 나인들도 왕래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는 스스로 풍금을 치고 불교합창반을 조직해 찬불가를 보급하였으며, 한 달에 한 번씩 방생을 실시해 방생법회를 개척하였다. 또한 박한영과 함께 불교종합지 <불일(佛日)>을 창간하여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고, '백고약(白膏藥)'을 제조하여 신자들을 상대로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각교를 유사종교로 간주한 일제의 압력이 거세지자, 그는 압박감을 느꼈다. 1936년 12월 잡지 <삼천리>에 이에 관한 글을 게재했다.

오늘날까지 내게는 조고만치 한 재산도 없고 처자와 가정도 못 가젓섰다. 70년동안 거러온 길이 오로지 眞悟와 大覺만 차저거러 왔섰다. 그런데 합병이후 정부에서는 불교도들에게 남녀간 혼인을 許하여 주었다. 이것은 부처의 참뜻에 어그러지는 바이다. 그 뒤 나는 분연히 불교에서 물너나 大覺敎란 일파를 따로히 형성식혔다. ‘佛則大覺’이요, ‘大覺則敎’인즉 부처님의 말슴을 따름에는 불교와 아무런 차이가 없을지나 다만 결혼만을 엄금하여 오는 것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그러다가 그만 요사히에 와서 유사종교니 뭐니 해서 大覺敎를 해산식혀야 한다는 당국의 처사에 어찌할 수 없이 또다시 불교로 넘어가 버리고 말었다. 모든 것이 苦哀와 悲哀 뿐이다. 나의 거러온 과거 70년 간을 회고하면 어든 바 소득이 무엇인가? 내 空碧一如한 흉중에는 또다시 六塵緣影이 어즈럽게 떠오른다. 나는 두 눈을 내려감고 정좌한 뒤 參憚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어느때나 ‘大覺’이 되려노 아무래도 내육신이 죽어가기 전에는 이 뜻을 이루지 못할까부다.

- 백용성, '나의 참회록', <삼천리> 12호 1936년 12월.

김광식의 <대각교의 조선불교 선종 총림으로의 전환 과정 고찰>의 따르면, 대각사 재단이 합법적으로 구성되지 않아서 1934년 9월에 은행에 신탁 등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용성은 1936년 전반기 동안 대각교의 노선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였고, 대각교의 재산 문제를 정리하는 일에 시간을 쏟았다. 1936년 7월, 대각교 동산과 부동산 전체를 해인사 경성포교소로 변경하고 대각교당을 해인사 경성포교당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1936년 11월 대각교당의 소유권이 해인사에서 다시 범어사로 인계되었다. 해인사와의 교섭 및 계약이 무효화되먼서 범어사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대각교당은 범어사에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그 대가로 범어사로부터 매월 초하루에 100원을 제공받았다. 백용성은 범어사 선원의 종주가 되었고, 대각사는 범어사 포교당으로 전환되었다.

대각교는 1937년 후반부터 '조선불교 선종 총림'으로 전환되었고, 1939년 11월 2일부터 선리참구원으로 편입되었다. 백용성은 대각교 재산을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에 기부하겠다는 계약을 체결했으나 등기 등록은 하지 않았다. 이후 대각사에서 역경 편찬에 힘을 기울이며 여생을 보내던 그는 1940년 음력 2월 24일 열반에 들었다. 향년 77세. 그는 임종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백용성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