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

박은식.jpg

朴殷植.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역사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주남면의 바닷가 농촌마을에서 아버지 박용호(朴用浩)와 어머니 노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오랫동안 몰락한 상태로 지냈으나 할아버지 박종록(朴宗錄)의 대에 농업으로 재산을 모아 가세를 일으켰고 아버지 박용호는 서당의 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일찍 학문을 배우면 단명하다고 하여, 그는 10세가 되어서야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떄 고향을 떠나 황해도 일대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안태훈(安泰勳)[1]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신동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전국을 답사하다가 1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3년상을 치룬 뒤 연안 이씨가의 딸과 결혼하여 평안도 삼등현으로 이사했다.

22세 때 경기도 광주로 가서 정약용의 제자였던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의 문인이 되었고, 24세 때 한양으로 상경했다가 임오군란을 목도한 뒤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26세 때 다시 낙양하여 평안도 영원군에 머물면서 주자학자인 박문일(朴文一)·박문오(朴文五) 형제를 만나 유학을 1년여 동안 배웠다.

27세 때 모친의 권유에 따라 평양에서 실시된 향시에 응시하여 관찰사 남연철의 인정을 받아 급제했다. 30세 때 평안도 관찰사 민영준(閔泳駿)의 추천으로 평양 소재의 숭인전 참봉(崇仁殿參奉)에 제수되었다. 34세 때 황해도 관찰사 민병석(閔丙奭)에 의해 평남 중화군 소재의 동명왕릉 참봉(東明王陵參奉)으로 전임되어 황해도 중화군으로 이사하여 6년간 참봉으로서 일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다. 이때 그는 이 사건을 '동비'의 선동에 현혹된 농민들의 반란이라고 인식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그는 이를 사설(邪說)이라고 비판하고 강원도 원주군 주천으로 낙향했다.

40세 때 다시 한성으로 상경한 그는 이때부터 개화사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민족문화를 수호하고 근대사회 건설에 대한 방도로 민족사 연구와 민중 계몽을 추구했다. 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문교부 과장을 담당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자, 그는 42세 때인 1900년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經學院)에서 경학을 강의했고, 관립 한성사범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국민교육 담당자 양성에 매진했다. 이때 교육 진흥책을 논하는 <겸곡문고(謙谷文稿)>와 <학규신론(學規新論)>을 저술했다.

1898년 9월 남궁억, 나수연(羅壽淵), 장지연, 유근 등과 함께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했다. 대한황성신문은 독립협회 회원인 윤치호 등이 발간했다가 윤치호가 서재필로부터 <독립신문>을 인수한 뒤 그들에게 넘어갔다. 이후 대한황성신문은 황성신문으로 개명하고 창간호를 발행했다. 황성신문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추구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집필되었는데, 주로 전통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개화를 추구하는 사설을 기고했다.

1904년 7월 양기탁어니스트 베델 등에 의해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양기탁의 추천을 받아들여 이 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서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조약 강제체결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이 일로 황성신문이 정간당하자, 박은식은 대한매일신문에 글을 올려 장지연을 극찬했고 황성신문의 정간과 장지연의 체포를 비판했다. 이 일로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이 경찰서로 찾아가 자신에게 발행의 책임이 있다며 풀어줄 것을 권고한 덕분에 석방되었다.

박은식은 이후에도 헤이그 특사의 친서를 <공개연설>이란 제목으로 대한매일신보에 실었다. 이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자, 그는 "조선의 역사는 일제에 의한 대리 역사다"라고 비평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내각은 신문지법을 제정해 언론을 통제했다. 박은식은 벌금과 집행유예 3주를 선고받고 상하이에서 생활했다.

48세 때인 1906년 신석하(申錫廈),김달하(金達河),김병희(金秉熹)등과 함께 서우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인 <서우>의 주필을 맡아 국민계몽에 앞장섰고, 장지연, 윤효정(尹孝定) 등이 대한자강회를 설립하자 즉각 가입하여 기관지 <대한자강회월보>에 '대한정신' 등의 애국계몽 논설을 발표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49세 때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이동휘, 김구 등에 의해 신민회가 창설되자 이에 가입하여 교육과 출판 부분에서 활동했다. 그는 <구습 개량론>, <사범양성의 급무>, <문약지폐는 필상기국>, <대한정신의 혈서> 등 40여 편의 논설을 발표해 적극적인 계몽운동에 힘썼다. 그리고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서북흥학회가 통합하여 서북학회가 설립되었을 때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서북학회월보>의 주필을 맡아 '인의 사업은 경쟁으로 인하여 발달함', '노동 동포의 야학' 등 30여 편의 논설을 발표했다.

1909년 오성학교와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맡았으며,[2] 서북협성학교의 지교 설립을 추진해 1908년 5월부터 1909년 말까지 63개 지교를 설립했다. 또한 최남선과 함게 광문회를 조직하여 고전의 출간과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시기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조선 사회를 지배했던 주자학으로는 시대사상으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고 인식했고, 유교를 시대에 맞게 변화하기 위해서는 양명학의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저술된 저서가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이다.

한일병합 후, 일제는 모든 언론 활동을 중지시키고 민족계몽 계열의 각종 서적을 압수했다. 그가 저술한 모든 저서 역시 '금서'로 처리되어 발행과 독서가 금지되었다. 이에 망명을 결심한 그는 1911년 4월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탈출하여 만주의 환인현 흥도천에 있는 윤세복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저술에 집중했다. 여기서 윤세복의 포교를 받으며 대종교 신자가 되었다. 그가 이 시기에 저술한 책들은 주로 한족의 기원, 고구려, 발해, 금나라의 창업과 영웅, 영걸에 관한 것들이었다.

54세 때인 1912년 봉천, 천진, 상하이, 난징, 홍콩 등지를 순방하여 망명 지사들과 함께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했다. 그해 7월 상하이에서 신규식, 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여 총재로 추대되었고, 1913년 7월 6일 신규식, 이찬영 등과 함께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한인 교민의 청년 교육을 위한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지도교수로 활동했다.

1914년 홍콩으로 가서 중국인 친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어잡지 <향강(香江)>의 주필을 맡았다. 이 시기 캉유웨이, 량치차오, 탕사오이 등 다수의 중국혁명동지회 계통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다가 폐간당하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1915년 3월 독립전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단체인 신한혁명당을 이상설, 신규식, 유동열 등과 함께 조직하여 취지서와 규칙을 만들고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안중근전>을 저술하고 망명 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해 중국인 출판사에서 간행했다. 이후 캉유웨이의 위탁을 받고 중국 신문인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필을 맡았으나 국시일보가 얼마 뒤 정간되자 사임했다.

1918년 연해주 한인 동포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송왕령(宋王嶺)으로 가서 <한족공보(韓族公報)>의 주간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재정난으로 곧 발행이 중단되었다. 그해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서명하여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에 참가했으며,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61세 때인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을 조직해 취지서를 쓰고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대표 5명을 경성에 파견했다. 이중 강우규는 남대문 앞에서 새로 조선 총독에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했다.

그해 4월 한성 임시정부로부터 평정관에 임명되었고, 민족대표 30인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 축하문을 발표한 뒤 8월에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헀다. 1920년 중국인이 경영하는 <구국일보>와 <국민보>의 주필 활동을 하였으며,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지필을 시작해 1920년 12월에 간행했다. 63세 때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필로 취임하였고, 66세 때는 <독립신문> 사장에 취임했다.

1924년 12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에 추대되었다. 이후 대통령으로서 상하이에 오지 않고 독립운동 전선 분열에 큰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의 대통령직을 면직시키는 데 찬성했고, 뒤이어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꾸고 내각책임제로 개편한 뒤 신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했다.

대통령을 사임한 직후, 그는 인후염과 만성 기관지염에 시달렸다. 결국 1925년 11월 1일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향년 67세. 그는 죽기 전 동포에게 남기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으로 통일이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 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방량이라도 쓸 수 있다는 것이오,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疎)의 별이 없어야 한다.

사후 상하이 정안사로 공동묘지 600번지에 안장되었다. 1993년 노백린, 신규식 등과 함께 국내 운구가 결정되어 중국에서 유해가 이송되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박은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저서[편집 | 원본 편집]

박은식은 초년기 때 주자를 신봉하고 성리학을 탐구했다. 그러나 40세에 접어든 뒤 제자백가의 학설과 불교, 기독교도 탐구했으며, 서양 학문 역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익힐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특히 양명학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1909년 <유교구신론>과 <왕양명실기>를 저술했다.그는 <유교구신론> 서론에서 자신이 입장을 바꾼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금, 공자의 교가 일취 암담하고 일익 늠철한 경황을 대하야 (중략) 기원인을 소고하며 말류를 추측하니 유교계에 삼대문제가 유한지라. (중략) 소위 삼대문제는 하야오, 하나는 유교파의 정신이 전히 제왕칙에 재하고, 인민사회에 진급할 정신이 부족함이오, 하나는 군산환열국하야 은역천하의 주의를 부강하고 비아구동몽이 구아라는 주의를 시수함이오, 하나는 아한유가에서 간역직체한 법문을 부요하고 지리한만한 공부를 전상함이라.

그는 이 서론에서 유교가 시대사상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쇠약해졌다고 진단했다. 유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주자학을 탈피하고 양명학적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학은 쓰기 어렵고 왕학은 쓰기 쉬워서 '왕양명실기'를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일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윤세복의 집에 1년여 동안 기거하면서, 박은식은 고구려사와 발해사의 연원을 밝히기 위해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고전과 역사서를 탐독했다. 그는 민족사를 연구해 서북간도, 남북만주, 요동평야가 모두 한민족의 고대 활동지였음을 규명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민족운동의 기지로 만주가 적합하다는 걸 표명하려 했다. 이 시기에 저숧란 역사서로 <몽배금태조>, <천개소문전>, <대동고대사론>, <명림답부전>, <발해태조건국지>, <동명성왕실기> 등이 있다.

<몽배금태조>는 만주의 도만강변의 작은 부락에서 일어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을 쳐서 중원까지 공략한 금태조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꿈 속에서 무치생이 금태조를 만나 구국의 방법을 문답하는 형식으로 집필된 일종의 반소소설 역사책이다. 박은식은 금태조를 평주 사람 김준(金俊)의 9세손이며, 고려의 영웅으로 봤다. 이는 그가 여진족을 발해인의 변칭자이며 조선족과 같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만주의 지리, 역사, 인종을 설명하면서, 이곳이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옛 당으로 무수한 영웅, 호걸이 출현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한 뒤 천년동안 이곳을 잃고 소중화로 전락하였다고 탄식하고, 한민족의 만주 이민이 급증하는 것을 기뻐하며 만주를 되찾기 위한 후손의 분발을 촉구했다. 그는 이 책을 청소년들이 잃고 영웅으로 자라나 옛날의 영광으로 되찾아주기를 희망했다.

<천개소문전>은 몽매금태조처럼 반소설적, 역사전기 소설이다. 그는 서론에서 조선의 상등사회에서 유림파와 귀족당만을 숭배하고 영웅을 숭배하지 않아 망국에 이르렀다고 보고, 영웅혼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본론에서는 연개소문의 중원에서의 성장과정과 국내 활동, 당군과의 항쟁, 그리고 종교 사상을 9장으로 나누어 적었다.

제 1장에서는 연개소문의 유년시절, 제 2장에서는 연개소문의 활동, 제 3장은 당나라와의 싸움, 제 4장은 안시성주의 대승첩, 제 5장은 당병의 재침과 패배, 제 6장은 각국과의 경쟁, 제 7장은 댕장의 패환, 제 8장은 연개소문의 종교 사상, 제 9장은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구성되었다. 박은식은 연개소문이 명문귀족들의 정치에 항거하는 개혁가였으며, 중원을 도모하는 팽창주의자였다고 주장했다.

결론에서는 김유신과 연개소문을 비교했다. 그는 김유신이 국가주의를 가르쳤으나 사대주의의 모범이 되었으며, 연개소문은 개인과 국가주의적인 면에서 모두 독립자주자의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또한 연개소문의 외세에 대한 투쟁과 당군과의 침략에 대한 격퇴자로서의 모습을 통해, 일제의 저항에 대한 표상을 나타내고자 했다.

<대동고대사론>은 19쪽의 간략한 프린트 물로, 백암 박기정의 서, 단군조선, 기자조선의 3 부분으로 이뤄지며, 말미에 고조선의 강성에 대한 견해와 윤세복의 간단한 발문이 들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대동'이란 백두산을 중심으로 남북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지역을 말한다. 그는 서론에서 독립을 위해 애국애족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적었다. 또한 '대동민족'이란 표현을 썻는데, 이 대동민족은 단군을 시조로 4천년의 역사를 가진 만주족과 한족의 동족으로 구성된 민족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단군의 후예만 우리의 민족이었으나, 후에 중국에서 들어온 기자도 우리 민족이 되어 우리 민족이 이원화되었고, 시간이 흘러 두 민족이 단군민족으로 일원화되었다고 봤다. 또한 민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민족보다 부강한 승리의 세력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민족을 교화, 복종시킬 수 있는 종교와 역사가 있다고 봤다. 하지만 대동민족은 둘다 없어 세계사에서 우리 민족의 명칭이 없어질 것을 우려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 글을 적었다고 기술했다.

<명림답부전>은 44쪽 분량으로 되어 있고, 표지에는 '홍동학교지인(興東學校之印)'이라 찍힌 4각의 도장이 선명하게 찍혔고 끝에 역사가(歷史歌)가 붙어있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는 명림답부고구려의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백성과 나라를 구한 뛰어난 공을 세운 충신이며, 90세가 넘도록 고위직을 맡으면서 인민의 정신단합과 국가의 원기 배양에 기여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명림답부가 폭군 차대왕을 죽이고 왕위를 태조왕의 동생 신대왕에게 전위한 뒤 자신은 16년간 재상으로서 태평성대의 정치를 한 애국 충신이라고 평가했으며, 서양의 올리버 크롬웰에 비교될 만한 인물이라고 기술했다.

본론은 1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장은 명림답부의 출생지와 시대, 제 2장은 명림답부의 초년행동, 제 3장은 조의대선의 지위, 제4장은 차대왕의 역사, 제 5장은 대선사무(大仙師巫)의 선견(先見), 제 6장은 수성의 찬위, 제 7장은 대선사무의 피화(被禍), 제 8장은 명림답부의 활동, 제 9장은 왕군과 민군의 충돌, 제10장은 차대왕의 피시(被弑)와 신대왕의 즉위, 제 11장은 명림답부의 세력과 정치, 제 12장은 명림답부의 무공 등 12개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끝부분에 역사가가 있다.

<발해태조건국지>의 분량은 66쪽으로, 서론, 12장으로 구성된 본론, 역사가(歷史歌)로 나뉜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의 역사가 단군 조선에서 시작하여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신라와 백제의 삼국시대를 거쳐, 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조 시대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발해와 통일신라가 망한 뒤 고려가 건국되었으나, 고려는 신라의 역사만 인식하고 발해의 역사는 인식하지 못하여 고려 4백년간 발해사를 편찬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개탄했다.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와 정약용아방강역고를 저술할 때 발해강역을 기재하였고, 유득공은 발해고를, 홍석주(洪奭周)는 <발해세가>를 찬술했지만 겨우 당나라 역사서 중 발해인과 교통한 문자를 의거할 뿐이니 국가부흥과 민족회생의 정신을 담은 발해의 역사를 내버려 둔 데 통탄했다.

본문은 12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장은 발해 이전의 고구려의 말운(末運), 제 2장은 태조의 가계와 인격,제 3장은 고구려 유민의 생기(生氣), 제 4장은 영웅의 장신(藏身), 제 5장은 활동시기, 제 6장은 천문령(天門嶺)의 대승첩, 제 7장은 태조 건국, 제 8장은 발해강역(渤海疆域), 제 9장은 발해의 종교와 풍속, 제 10장은 발해의 문학, 제 11장은 태조의 외교, 제 12장은 태조의 유후(裕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발해 건국사에 한정되지 않고 발해의 영토와 문물제도, 종교, 풍속, 문학까지 서술했으며, 발해 태조의 건국과 무왕, 문왕, 선왕 시대까지의 발해의 발달상까지 서술했다. 결론에서는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한민족에게 역사의 지도원리로 발해인의 자강심과 진취심과 희망심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은식은 <동명성왕실기> 역시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실전되었다.

1914년 한국 망국의 역사를 집필하기로 결심한 그는 상하이에서 집필에 전념해 1915년 <한국통사>를 간행했다. 그는 <한국통사>에서 망국의 아픔을 광복으로 이끌기 위해 신(神)과 혼(魂)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모든 사물은 형(形)과 신, 혹은 백(魄)과 혼이 있는데, 혼에 속한 것은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 등이고 백에 속한 것은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 등이다. 형이나 백은 쉽게 없어질 수 있으나, 신이나 혼은 백이나 형에 관계 없이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한 것은 형과 백이 망한 것이지 혼과 신이 망한 것이 아니므로, 혼과 신이 살아잇는 한 형백의 부활, 즉 조국의 광복이 가능하다.

그는 혼이 속한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 중에서 국교와 국사를 중히 여겼다. 즉, 그는 나라의 교육과 역사만 존재한다면 언젠가는 독립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통사>는 고종 즉위부터 105인 사건까지의 역사를 다뤘다. 그는 서론에서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민족은 전설상의 나라인 당·요 등의 시대로부터 건국되어 4천 3백년을 유지하였지만 우리를 스승으로 삼던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했다. 우리 민족이 다시 광복을 되찾기 위해서는 유태인들이 2천년 동안 그 나라는 망해도 유태족 호칭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조상의 가르침을 숭배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역사인 신을 보장하면 나라(形)를 되찾을 수 있다.

박은식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10년은 득과 실이 반반이었다고 평가했다. 긍정적으로 평가내린 것은 문벌과 당파의 견제, 군포의 개혁, 서원 철폐, 국방주의, 풍속교정의 개혁정책이고, 부정적으로 평가내린 것은 경복궁 중건, 서교(西敎) 탄압, 쇄국정책 등이었다. 그가 보기에, 대원군은 개혁을 단행할 힘이 충분히 있었고 시기적으로도 적절했으나 전통적인 개혁에만 집착했다. 그 이유는 그가 국내외 정세를 관찰할 학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단행하여 그 개혁을 추진할 시기를 놓쳤고, 국내 개혁도 자신의 좁은 생각으로 단행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비판했다. 그 예로 재정개혁이 있는데, 박은식은 대원군의 재정개혁을 높게 평가했지만 민산(民産)을 장려하여 부의 원천을 개발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또 경복궁 중건은 부유한 시대이면 가능하지만 국력이 피폐하고 민심이 혼란스로운 시기에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국정의 중요성을 따지지 않고 행한 부적절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발행한 당백전은 화폐제도를 혼란시켰고 원납전(願納錢)을 강제로 징수한 것도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박은식은 대원군이 실각한 것은 위의 실정 때문이 아니라 명성황후의 책략이었다고 주장햇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대원군의 장점을 위주로 보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태산같이 의지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난이라고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김옥균 등 정변의 주체세력을 혁명가로 평가했다. 그는 혁명의 주체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신중하게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거사를 행한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정변을 진행하여 군부 관료, 국민 등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또 일본에 의지하여 정변을 단행하려 했기 때문에 너무 외세 의존적인 태도여서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은식은 동학 농민 혁명에 대해서는 내정이 극도로 부패하면서 발생한 대란이라고 봤다. 그는 동학도가 양반토호와 관원을 잔인하게 살인하였음을 지적하면서도, 동학도들이 혁명사상, 정치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로 인해 엄격한 신분계급이 무너졌음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만약 그들이 일본의 개입 전에 경성으로 바로 진격했다면 혁명을 성공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 되면 서구 같은 시민 혁명을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또, 그는 민비 수구파 정부가 동학 농민 혁명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것에 격렬히 비판했다. 그는 이 반란의 최대 원인은 정부의 과오였으며, 정부가 청군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우리나라의 민중은 흉악하고 간사하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는 오히려 관원에게 적용된다고 규탄했다.

반면, 독립협회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다만 실패원인에 대해서는 "지식의 근본적 기초가 미천했고 운동이 너무 조급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으며, 일본의 탄압도 한 몫을 했다."고 봤다. 이중 일본의 탄압에 대해서는, 일본공사가 고종에게 해산을 건의한 것을 들어 "일제가 독립협회가 활동할 시 우리나라 민권이 발달하여 침략하기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친일내각과 연합하여 독립협회를 탄압했다."고 서술했다.

또한 박은식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각지의 의병 활동을 소개하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박승환 참령의 자결을 신호로 일어난 구 한국군의 봉기와 민긍호 의병 부대를 중요하게 다뤘다. 그는 의병에 대해 "전술과 병기의 사용은 서툴고 성패를 생각하지 않고 목표를 순국에 두고 있으며, 동지들을 전쟁에서 잃고 맨손으로 무적의 일본군의 총칼에 10년 동안 항거하였다."고 적었다.

박은식은 대한자강회와 같은 애국계몽운동단체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으며, 일제가 황성신문을 비롯한 14개 신문과 잡지를 폐가시키고 30여 종 수십만 권의 서적을 압수하고 공업전습소 학생을 비롯한 애국 학생들을 구금한 것을 고발, 규탄했다. 또한 일제가 105인 사건을 일으킨 목적에 대해 "신민회원과 평안도 일대의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을 억압할 계획으로 이 사건을 꾸몄다."고 분석했다.

박은식은 한국의 종교에 대해서도 다뤘다. 그는 삼국시대 이전에 성립된 종교로 단군의 신교, 기자의 예교, 소연, 대연[3]의 윤교를 들었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최치원의 통속 오교, 신라 시조와 고구려 시조 때부터 비롯된 신선교를 들었으며, 불교는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수입되어 여러 명승을 배출하였고 일본에까지 전해주었다. 유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진흥되어, 신라에서는 이두 제작과 같은 특출한 업적이 나타났다고 서술했다.

고려시대에는 유, 불 2교가 성행하였으며, 불교는 선종과 교종으로 구별되어 선종이 더욱 흥기하였으나 사부(詞賦)에 치우치는 폐단이 있어 고려 말에 성리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와 불교가 있었는데, 유교는 정몽주의 계통을 이어받고 여론을 통해 정부를 굴복시킬 수 있어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림이 존중되면서 사화와 당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주자학에만 치우치고 다른 학문은 모두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한편 불교는 명승을 많이 배출하고 왜란 때는 의병도 조직했지만 고려 말부터 유가의 배척을 받아 점점 도태되었다고 기술했다. 조선왕조 후기에 들어온 천주교와 개항 이후에 들어온 미국의 개신교의 배일활동이나 병원 자선사업 등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는 100만 신도를 가졌다고 한 데 비해, 시천교는 모두 일진회당이라고 매도했다.

박은식은 3.1 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운동 관계 자료를 수집하였고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상하이에서 간행했다. 이 책은 '한국통사'의 자매편에 해당되며, 일제의 탄압 및 동화정책에 맞서서 투쟁하는 국내외의 민족운동의 실상을 밝히고 일제의 패망과 독립성취의 필연성을 예고했다.

이 책의 구성은 한국독립운동사 서문, 상,하 2편과 결론으로 이뤄졌다. 상편은 종 25장으로, 제 1장 민족의 약력에서 시작하여 제 25장 각 종교를 박멸하는 정책으로 구성되었다. 또, 상편은 3.1 운동의 도입과정을 서술했다. 하편은 3.1 운동으로부터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독립투쟁사를 서술했다.

박은식은 서문에서 "한국이 나라의 망함이 그 통을 알고 '한국통사'를 저술하였으므로 반드시 '독립운동사'가 있을 것이고 이 '독립운동사'가 있으니 반드시 '독립성공사'가 있을 것이다."라며, 한국독립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그는 나라의 국혼만 존재한다면 나라가 망해도 마침내 독립한다고 보면서, "2천만의 국혼만 존재한다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광복의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고"고 적었다. 그는 일제가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일본은 섬 가운데 자리잡고 있어 본래부터 보고들은 것이 없는 고루한 나라이고, 중국과 러시아와 싸우는 무인들의 전제정치에 일반 사람들은 불만을 품고 밖을 향해 내달리는 것이 지나치게 급격하여 백성의 힘은 이미 피폐하였다. 세계 여러 사람의 민의를 무시하고 오직 소수의 간사한 무리를 이용하여 그들의 야욕을 제멋대로 부려 세계 민의의 원수가 되어 일본은 패망할 수밖에 없다. 또한 구미열강의 여러 나라들도 저들의 침략행위에 분노하여 기회만 있으면 제압하려 하니, 국제적인 고립이 생겨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는 이 저서에서 갑신정변을 '한국통사'에서보다 높게 평가했다. 한국통사에서는 주도세력을 갑신혁당이라 불렀으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갑신독립당이라 불렀으며, 한국통사에서는 난으로 다뤘지만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혁명으로 다뤘다. 그는 갑신정변을 과거에 비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실패를 애석해 했다.

동학 농민 혁명에 대해서는 한국통사에서는 갑오동학당의 난이라고 기술했지만, 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갑오동학당의 ‘대풍운(大風雲)’이라고 고쳤다.그는 ‘대풍운’을 동학당의 혁명의 기치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는 동학당이 무식하고 거동이 난폭하여 기강이 서 있지 못하여 개혁 정치를 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즉, “그들이 구습을 파괴할 수는 있었으나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유능한 자가 나와야 가능했었다”는 것이었다.

독립협회 활동은 『한국통사』에서는 주로 독립의 문제를 중심으로 서술하였으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민권의 문제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즉,독립협회의 운동이 대한제국의 독립과 함께 백성들의 민권운동임을 강조하여 독립협회 회원들이 친러 수구파 대신들의 제거와 개혁정부의 수립을 요청한 운동임을 밝혔다.

의병 활동에 대해서는 한국통사보다 독립운동지혈사에서 더욱 자세하게 서술했다. 그는 의병은 민군이며, 국수라고 지적하며 그들의 저항은 일제의 무력 압박을 가중시키고 이로 인해 한국 민족도 반동을 격렬하게 하여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한국통사에서는 의병의 무력이 약해 결코 독립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평가했지만, 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의병의 가치를 높게 봤다.

박은식은 3.1 운동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3.1 운동이 한국인 2천만이 모두 정의, 인도의 가치 아래 오직 맨손으로 궐기하여 독립을 구하고자 함으로서 세계혁명사상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봤다. 3.1 운동 초창기에는 민족자결주의에 호응하여 평화적인 시위로 진행되었으나 후에는 폭력적으로 변모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한국 민족을 야만적으로 학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격렬한 독립운동은 한국 민족의 본의가 아니었으며, 인도주의를 내세우고 있다고 봤다.

또 그는 3·1운동을 전 민족이 일치한 대민족 운동으로 보고,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의 민족으로부터 독립자격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3.1 운동으로 인해 독립쟁취를 위한 민족의 바람이 구체화되고 있다면서, 광복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믿었다.

한편, 박은식은 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한국통사에서처럼 국혼을 강조했지만, 그 외에도 민의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이 민의에 의해 반드시 독립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회주의를 의식하고 그것이 독립운동에 유리한 조건임을 인정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1 운동에서 일본 헌병대에게 피살되거나 부상당한 이들의 수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만주 등지에서 벌어진 독립전쟁 역시 중요하게 다뤘다. 그는 과거에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영웅이 등장해야 한다고 봤지만, 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민중운동을 중시하면서 한민족 전체의 단합된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또한, 그는 한국을 망국에 빠뜨린 무력한 사류들을 비판하면서, 인민에 대해 "자국 정부의 학대를 반항치 못하는 자가 어찌 다른 나라의 학대를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힐책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남긴 유언에서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각주

  1. 독립유공자 안중근, 안정근, 안공근 형제의 부친이다.
  2. 처음에는 이종호를 교장으로 추천했지만, 이종호가 동지들과 함께 국외로 망명해서 그가 대신 교장을 맡았다.
  3. 소연과 대연은 공자와 같은 시대의 동이인(東夷人)으로, 거상(居喪)을 잘해 효자의 모범으로서 공자의 칭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