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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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熙道.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으나 1934년 이후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9년 8월 11일 황해도 해주군 해주면 동영정에서 박계근(朴桂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3.1 운동 당시 신문조서에 양반 신분으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집은 풍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행주 의창학교(懿唱學校)에 입학하여 보통과, 고등과를 졸업했고, 평양 숭실중학교로 진학하여 학업을 마친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수학하고 중퇴했다. 이후에는 감리교에서 세운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를 다니다 역시 중도에 그만두었다. 1905년, 박희도는 16세의 나이로 기독교에 입문했고 해주군 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16년 6월부터 전개된 YMCA의 회원 확대 운동에 '열심단'으로 참여하여 금패 포상을 받을 정도로 열렬히 활동했으며, 함경남도 함흥 소재 기독교계 보통학교인 영신학교(永信學校)의 교감으로 재직했다.

박희도는 1916년경 중앙예배당에서 '지성의 감동력'이라는 주재로 여러 강연을 했고, 1916년 8월 미국인 목사 A.L 베커의 지도 감독으로서 경성에서 유학하는 해주 출신 학생들을 건립을 추진했다. 당시 서울로 유학온 학생들은 민간인 집에서 기거했는데, 청결문제, 금전갈취 등이 문제가 됐다. 박희도는 안국동에 거주하는 김용달의 집을 빌려 '육영사(育英舍)'라는 간판을 걸고 기숙사로 운영했다. 또한 그해 10월 장낙도, 유양호 등 중앙교회 목사들과 함께 중류 이하 자제들을 대상으로 기독교적 민족교육을 표방한 중앙유치원을 설립했고, 1917년엔 영신학교를 설립했으며, 베커 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협성학교의 부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18년 6월 감리교 창의문 외부 교회 전도사로 부임했으며, 9월엔 조선기독교청년회 회원부 간사로 취임했다.

1919년 1월 20일, 박희도는 경기도 이천읍 교회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에 참석했다가 화와이 교민 출신으로 국내에 들어와 남양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던 동석기(董錫基) 목사를 만나 국제정세에 대해 전해듣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여기에 1월 중순 경 도쿄 항생들이 모종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도쿄 한인기독교 청년회를 다니던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 유학생 송복순(宋福順)을 통해 전해지자, 박희도는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월 23일 서울로 올라와 YMCA에 가입한 학생들을 모아놓고 시국을 의논했다. 그는 학생들이 천도교, 기독교계 인사들과 연계해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교량 역할을 했다.

2월 18일, 평양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가 찾아와 이승훈이 천도교 측과 독립운동 건을 상의하기 위해 상경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그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이에 박희도는 다음날 소격동에 머물고 있던 이승훈을 찾아가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의 연합 문제를 논의했다. 이후 2월 20일 이갑성의 집에서 장로교파 인사들과 만나 그들의 참여 의사를 전달받았고, 이승훈으로부터 천도교 측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희도는 이후 김창준과 최성모를 만나 민족대표로 합류할 것을 권해 승낙을 받아내고 2월 27일 정동교회 내 이필주 목사 집에 모여 선언서 문안을 확정짓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3월 1일 오후 2시, 박희도는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박희도의 아내 김희신(金喜信)이 증언한 내용을 담은 <경향신문> 1966년 2월 28일자 기사에 따르면, 박희도는 3월 1일 아침 식사 후 아내에게 "나는 일본 대학에 유학을 간다. 부디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시오."라는 부탁을 한 후 인력거를 타고 집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게 체포된 박희도는 취조 및 재판에서 자신의 독립에 대한 소신을 밝히고 조선 독립이 왜 필요한 지도 확실하게 진술했으며,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 피고는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達)할 줄로 생각하였는가.

답: 나는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할 뿐 아니라 언제든지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문: 어째서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는가.

답: 그것은 천도교 측에서 정한 것이므로 우리는 별다른 이유는 없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 1919년 3월 9일 경무총감부 신문조서

이후 박희도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최종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마포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는 1921년 11월 4일에 만기출옥한 후 1921년 11월 5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답했다.

무슨 별 감상이 있겠습니까. 감옥에 있으나 집에 나오나 불쌍한 우리 동포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습니다. 칠십 먹은 부모와 철모르는 동생들을 버리고 감옥에 들어올 때 가족 생각을 하면 이 일을 했겠습니까. 나의 가슴에 쌓인 정성은 오직 가련한 우리 동포를 조금이라도 구원하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올시다. 나도 사람이라 칠십 먹은 부모가 나를 옥중에 들여보내신 후에 형편을 생각하는 나의 가슴은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습니다.

출옥 후 고양군 숭인면 용두리 교회 주임으로 근무했고, 1922년 1월 김명식 등이 주도한 신생활사 창립에 참여해 자본금 1만 5천원을 신생활사에 가탁하여 사장으로 취임하고 잡지 <신생활> 발간을 이끌었다. <신생활>은 사회주의 사상을 비롯한 여러 신사상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며 타 사상들과 사회주의를 일일이 비교해 사회주의의 우수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생활>은 창간호부터 발매금지 조치를 당했고, 1922년 11월 14일에 발행된 제11호에서 러시아 혁명 5주년 특집을 실었다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처음부터 과격한 사회주의적 선동기사를 실어왔다."며 발매금지 처분을 당하고 박희도와 김명식 주필, 신일용 기자 등 6명이 구속되고 인쇄기가 압수당하는 수난을 당했다.

박희도는 체포 후 재판에 기소되어 1923년 1월 17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5년 1월 1일에 만기출옥했다. 그는 출옥 후 독립계몽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1925년 3월 도덕적 인격수양과 경제적 실력양성을 표방하며 조직된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여했고, 1927년 1월에는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 창립에도 참여해 1929년 7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내 출판부장을 맡았으며, 신간회 동경지회 대표회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29년 9월엔 신간회 회보 편집위원을 맡았고, 10월에는 중앙상무 집행위원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1928년, 중앙유치원 사범과가 중앙보육학교로서 정식인가를 받자, 박희도는 중앙보육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30년엔 조선고아구제회 이사로 활동했고, 여러 잡지에 계몽적 성격의 논설을 다수 발표했다.

그러나 1926년 일본으로부터 자치권을 허락받자는 '연정회'에 가담하면서부터 자치론에 경도되기 시작한 그는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뒤 자치론자 최린 등과 뜻을 함께하고 조선 총독부에게 자치권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그가 일제에게 빌붙었다며 변절자라고 손가락질했고, 민심 역시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러던 1934년 3월 17일, <조선중앙일보>는 “교육계의 대불상사, 제자들을 유인하야 정조유린을 감행”이라는 제목으로 박희도의 ‘정조유린’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중앙보육학교장 박희도는 제자이자 친구의 부인인 윤신실을 자기 집에 하숙시키던 중 '정조를 유린'했으며,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언론에 폭로했다고 한다. 조선중앙일보는 3월 19일자 기사에 각계인사의 의견을 실었고, 3월 29일에는 전면에 박희도의 성적 문란을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윤신실은 나중에 자신이 정조를 유린당한 적이 없다며 진술을 번복했고, 결국 박희도는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고 신문 지상에서도 해당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하지만 박희도는 이 사건 때문에 중앙보육학교장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박희도는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그는 1934년 11월 5일 조선호텔에서 창립된 시중회(時中會) 발기인으로 참가해 7명의 이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시중회는 최린이 회장을 맡아 '신흥조선의 건설'을 표방하며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고 조선 민중을 개조시키는 걸 사명으로 삼은 친일단체였다. 박희도는 이 단체에 가담한 이후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전개했다. 1936년 11월 징병제 실시 상임준비위원을 맡고 "조선인도 대일본제국의 충성스런 신민이니 마땅히 천황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며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다. 이듬해 7월 중일전쟁이 개전되자, 박희도는 총독부 함무국 주최 시국강연반에 참여해 일제를 찬양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박희도는 1939년 5월 전시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및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를 맡았고, 뒤이어 조선인 전보국단 평원을 역임했다. 또한 1939년 1월 1일 <동양지광(東洋之光)>을 창간해 사장 및 편집 겸 발행인을 맡고 창간사에서 "필경 내선일체의 구현에 대한 일본정신 앙양의 수양도장(修養道場)을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내선일체 구현을 표방했다. 그는 <동양지광>에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은 마땅히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여러 차례 게재했고 친일 문인들이 친일 작품을 게재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후 1942년 5월 징병제가 실시되자, 박희도는 감사장을 일본 내각총리, 육해군 대신, 조선 총독, 조선군사령관에게 보냈다. 또한 그는 1937년 9월부터 지방 순회 좌담회와 강연회 등에 참가하여 황민화, 지원병, 학병, 헌납 권장 등을 역설했으며,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6월에 조선언론보국회에 참여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천황을 위해 목숨바쳐 싸우자"고 부르짖었다.이에 대해 기독교회사 연구가 김승태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박희도의 일생은 그 시대의 가장 주류를 이룬 사조에 쉽게 빠져 들어가 열성을 다해 일하다가, 그 사조가 일단 잦아들면 쉽게 포기하고 또 다른 사조를 찾아 뛰어들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의 최고봉이었던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그 후 사회주의 사조가 일어나자 『신생활』을 창간하여 동조하였으며, 1920년대 말경에는 신간회에 참여하면서도 자치운동에 기울었다가, 마침내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대륙침략과 세력의 확장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자발적으로 관제운동인 황민화운동에 뛰어들어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친일논설을 펴고 내선일체와 전쟁협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1945년 8.15 광복 후, 박희도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도중에 해산되는 바람에 그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그는 육군정훈학교에서 장병들을 상대로 강연한 것 외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52년 9월 25일에 사망했다. 그는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