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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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基兆.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천도교 신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자는 일지(一之), 호는 유암(遊庵)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5년 12월 16일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가양리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홍경래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어렸을 때 한학을 익혔고 인근에서 문필대가로 불리던 노옥림(盧玉琳)으로부터 한문과 필법을 배웠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을 때 21세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했는데 입교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포교에 힘써 종형 홍기억 등을 입교시켰다.

이듬해 봄, 홍기조는 모종의 일로 체포되어 그해 5월 평양 감영에 구속되었다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1896년 봄에도 다시 평양 감영에 체포되어 많은 재산을 잃고 풀려났다. 이 일로 그의 온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신변을 보전하기 위해 용강의 백룡동 등으로 몸을 숨겼다. 이후 그는 종형 홍기억, 임복언과 함께 경북 문경으로 가서 최시형손병희를 만났다. 두 지도자로부터 교리를 배운 그는 1897년 2월 고향으로 돌아와 홍기억 등과 함께 포교 활동을 벌였다.

1896년 무렵 수접주(首接主) 김유영의 관할 하에서 접주로 있었다. 그리고 접주에 임명된 지 4년 만인 1900년 평안도 대접주에 임명되었다. 그는 1901년 태천의 수접주 이정점, 영변 접주 강성택, 박지화, 박천접주 고강봉 등을 휘하에 거느렸다. 그리고 2년 뒤인 1903년 경에는 교호 1만 호를 거느리는 의창대령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손병희는 정부의 탄압을 피할 겸 신문명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경비 문제로 미국행이 좌절되자 중도에 일본에 체류했다.

손병희는 동학교도의 자제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선진문명을 배우게 하기로 했다. 그는 1902년 1차로 전국에서 동학교인의 자제 24명을 선발해 교토의 부립 제1중학교 등에 입학시켰다. 1904년 3월에는 다시 40명을 데려가 수학하게 했다. 이때 홍기조는 홍병기 등과 함께 손병희를 도왔다. 1904년 9월, 손병희는 진보회를 조직하고 단발, 흑의 입기 등 개화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홍기조는 평양에서 나용환, 임예환 등과 함께 적극 동참했다.

1904년 말 이용구의 무리가 송병준일진회와 통합되자, 홍기조는 평안도 지방에서 일진회 지방회장으로 활동했다. 1905년 11월 15일, 홍기조는 손병희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손병희는 이용구가 진보회원들을 데리고 일진회에 가담한 이래 친일 활동을 벌여서 동학이 매국 종교로 몰리게 된 것에 한탄하며 그에게 일진회를 탈퇴할 것을 권고했고, 홍기조는 이를 따랐다. 이후 손병희는 1906년 1월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고 개혁에 착수했다. 1906년 3월, 천도교는 전국에 72개의 대교구를 설치했다. 이때 홍기조는 13대 교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5월, 홍기조는 포교 활동에 기여한 공로로 2등 은장포증(銀章褒證)을 받고 정주순독(定住巡督)에 임명되었다.

1907년 10월, 홍기조는 다시 교수(敎授)에 임명되었다. 1909년 5월에는 예비도훈(道訓)에 임명되었으며, 1910년 1월에는 신도사(信道師)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1910년대 동안 평안도 지역천도교 고위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고향에서 도사로서 포교 활동에 전념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붕어했다. 이에 고종이 일제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한반도 전역에 확산되었고 반일 감정이 증폭되었다. 이무렵 천도교는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연성기도회(煉性祈禱會)를 열고 있었다. 49일 기도회가 끝난 지 이틀 뒤인 2월 24일, 홍기조는 평안도를 출발해 다음날 오후 8시 30분경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그는 손병희에게 기도회 결과를 보고하고 고종의 국장에 참석하려 했다.

그러던 중, 그는 같은 천도교 간부인 권동진오세창을 우연히 만났다. 두 사람은 홍기조에게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을 준비 중에 있으니 그대도 동지로써 가입하라"고 제안했다. 홍기조는 이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고, 2월 27일에 종로 재동 소재 김상규의 집에서 오세창, 최린, 임예환, 권병덕, 나인협, 김완규, 나용환, 홍병기, 박준승, 양한묵 등과 만났다. 그들은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했다. 그리고는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했다.

2월 28일 밤, 그는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사전모임에 참석해 거사계획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들었다. 그 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독립선언식이 끝난 후 일제 경찰이 들이닥쳤고, 홍기조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체포되어 곧바로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 홍기조는 그날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뜻을 당당하게 밝혔다.

문: 피고는 한일합병 이래 지금까지 병합됨을 불평하고 조선의 현상에 대하여 강개(慷慨)하고 있었던가?


답: 물론 나라가 망했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천도교인은 우리들뿐 아니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조선을 독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문: 무엇 때문에 불평인가?

답: (구)한국 정부 당시에 비하면 생명·재산 보호는 완전히 되고 있다고 하겠으나 이런 것이 좋고 나쁜 것은 관계치 않는다. 오직 자연적인 정신작용으로 독립과 자주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점이 불평이냐고 하면 합방(合邦)한 것이 불평이지 다른 것은 없다.

- 1919년 3월 1일 경무총감부 신문조서.

홍기조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면서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문: 어떤 이유로 조선 독립운동을 하였는가?


답: 이유는 듣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문: 그러면 무슨 이유로 참가하였나?

답: 나는 국민의 의무로써 가입하였다.

문: 피고는 현재의 (총독부) 정치에 대해 불복하는가?

답: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문: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의 권유로 가입할 수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그것은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야만 동양이 평화로워 질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참가하였다.

- 1919년 4월 16일 경성지방법원 재판기록.

홍기조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경성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그곳에서 그물을 뜨는 노역을 했다. <매일신보> 1921년 11월 3일자 기사에 따르면, 홍기조는 감옥의 규칙을 잘 지켜 감옥 당국이 특전을 주려고 했다고 한다. 그는 1921년 11월 6일 유여대와 함께 만기 출옥했다.

출옥 후 1922년 1월 17일 천도교 종법원 종법사에 임명되어 강원도 교구 순회 임무를 맡았다. 그는 1925년 10월 경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하양리에 거주하면서 천도교 진남포 종리원 종리사로 활동했다. 1925년 12월 25일, 홍기조는 종리사 총회에서 임예환, 나인협 등과 함께 종법사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병에 걸려 밖으로 나가지 못하다가 1938년 7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하양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74세. 그는 임종하기 직전 문도 정창운(郭昌運)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이제는 세상 떠날 날이 멀지 아니하였으니까 다시 만나볼 것 같지 못하네. 그대는 아무쪼록 천도교를 위하여 일 많이 하게!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홍기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