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 (1890년)

김창준.PNG

金昌俊. 대한민국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월북자.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창한 인물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애국렬사릉에 세워진 김창준 묘비에 따르면, 김창준은 1890년 5월 3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가풍리[1]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부모와 가족 사항 등 가정 환경 전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으며, 출생 이후 구체적인 유년기에 대해 언급하는 기록도 전무하다. 다만 그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나중에 일상리 교회가 설립한 야소교 고등소학교에 입학해서 1906년 12월에 졸업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야소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08년에는 일상리 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문요한(John Z. Moore)에게 세례를 받고 감리회 신자가 되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개종하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1907년 평양 대부흥에 감화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김창준은 1910년 6월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대학에 입학하여 1914년 5월에 졸업했다. 한편 그는 191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전도 사업을 시작했으며, 1911년 3월 15일부터 서울 종로에 있는 YMCA 회관에서 남북 양 감리회가 주최한 춘계 신학회에 2년 급으로 출석하여 교육받았다.

그는 1912년경에 함경남도 안변에서 전도 사업에 힘썼으며, 1913년부터는 평양에 거주하면서 남산현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또한 사립 광성학교의 부교장직을 3년간 맡았다. 김창준은 평양에서 매우 열정적을오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부터 월요일까지 4, 5십리 밖에 있는 다섯 교회를 항상 왕래했고 노상에서 개인 전도한 인원이 1년간 2천여 명에 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916년부터 1917년 9월까지 일본 도쿄의 청산학원 신학부에서 유학했고, 동경 시내 YMCA 내에 있던 주일학교 교원양성소를 수료했다.

김창준은 1917년 7월 4일에 <유년 쥬일학교의 급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독신문>에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주일학교에 대한 정의와 일본교회 주일학교의 현황을 분석하면서 종선교회 주일학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유년 주일학교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서 유년들과 청년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조선을 근심하는 일반 신자가 유년 주일학교 사업에 전심해야 할 아홉 가지 이유를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세계를 예수 앞으로 불가불 아해로 시작할 수 밖에 없음.


2. 아해는 만왕의 왕 그리스도의 전권대사.

3. 아해는 천국에 들어갈 자의 근본.

4. 아해는 천국에서 크게 될 자의 모형(摸型)

5. 아해의 가치

6. 아동교육을 굥솔이 여긴 죄

7. 어린 아해를 용납하라

8. 아동교육에 관한 그리스도의 명령

9. 모친은 아해를 보호하는 천사라.

김창준은 조선교회의 미래를 주도할 유년 주일학교 교육이 참으로 중요한데 그것에 대한 인식 없이 그저 매일학교에 일임하고, 장년층의 선교에만 집중하고 있는 조선교회를 안타까워하면서, 실제적인 교육사업에 투자하지 않고 민족의 운명을 이끌어갈 전문적인 지도자를 양성하지 못하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비판했다.

김창준은 일본에서 귀국한 뒤 1917년 9월부터 종로교회(현 서울중앙교회)로 파송받아 빌링스 목사와 함께 본격적인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재학하며 목회활동을 전개했고, 1918년 3월 19일에 강시봉, 김상하, 김종우, 김재홍, 김홍식, 이영순, 배형식, 송주익, 손정도, 윤성렬, 정진수와 함께 제 5회로 졸업했다. 이후 그해 7월에 감리교 협성신학교 기관지였던 <신학세계>에 "요한낙스"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으며, 9월에는 <기독신보>에 "음주의 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해 조선 사회에서 금주 운동의 중요성과 그것을 위한 현실적인 실천 방안에 대해 역설했다.

김창준은 본래 한일병합에 대해 딱히 부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별과 불평등이 심해지는 것을 보고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3.1 운동 이후 재판을 받을 때 "원래 한일합병한 이상 다시 분리할 희망은 두지 않지만 병합 이래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결혼문제를 추진하려 하나 그로 인하여 동화하기는 사실상 불능하고 또 병합 이래 수년을 두고 조선인과 일본인과의 권리 관계는 현저하게 차이가 있는 등으로 불만의 생각을 가졌다"고 증언했다. 그는 박희도의 권유를 받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평양 선천지역에 선언문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김창준은 3.1 운동 직전 빌링스 목사에게 자신의 참가 의사를 밀리 알렸다. 그러나 빌링스 목사는 독립 운동 참가를 반대하고 함께 교회를 지키며 기도나 하라고 말했다. 이에 김창준은 선교사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갖게 되었고, 예심에서 "빌링스는 국가의 관념이 없고 조선에 대해서도 동정하지 않으므로 비평이 많았고 우리에게 동정하지 않았다."라고 진술했다.

김창준은 3월 1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뒤 곧바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이 독립을 희망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것은 조선인의 지위 권리가 일본인과 동일하지 않고 학대를 받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일반이 불평을 가지고 있으므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한다.

이에 검사가 물었다.

피고는 조선이 독립되면 영원히 평화가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김창준이 답했다.

그것은 지위나 권력 아래에 있는 자나 깨달을 일이 못되나 항상 불평을 품고 있기 때문에 독립국이 되면은 조선인은 일본인과 동등의 지위가 되는 고로 동등한 자 동지 간에는 아무 불평도 없고 평등함으로써 그 사귀는 것이 영훤이 평화가 될 줄로 생각하고 있다. 한일을 병합한 것도 전 인민의 의사로써 병합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2월 22일 최린, 함태영,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과 함께 가출옥했다. 그는 이날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웃음을 띄면서 소감을 묻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조선 민족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코자 하던 터이니까 밖에 있으나 감옥에 있으나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는 일반이올시다. 옥중에 일천 칠백명의 죄수가 있으니까 기회 있는 대로 전도하였노라.

김창준은 3년간의 수감 생활에 대한 감상을 <기독신문>에 게재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실로 독서하는 것과 전도하는 데 무한한 취미를 보았습니다. 첫째는 구약성경을 다섯 번이나 통독하였으며 신약성경을 13차나 읽어보고 특별히 묵시록을 4백번이나 읽게 되었으며, 기타 서적도 60여 권을 보았으니 이러한 기회는 바깥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일이며, 나올 때에 가장 유감으로 생각되는 바는 복역하는 여가에 성경구절을 해석하여 차입하는 지리가미에다 약 6백 페이지나 기록하여 둔 것을 감옥 규칙 위반으로 간수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둘째는 절도한 사람이 60여 인이며 그중에는 가족에게 편지로 전도하여 믿은 사람도 많습니다. 특별히 같이 복역하는 사람 22인에게는 날마다 성경을 교독하고 밤낮으로 기도하였으므로 나온 후에 신학공부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3명이며, 그 중에서도 항상 기쁨으로 지내었습니다.

출소 후 중앙교회에서 복회 활동을 수행하던 김창준은 1924년 5월 3일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시카고의 게렛 신학교에 입학했고, 시카고 한인감리교회에서 담임 목회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국민단(國民團)을 이끌던 안창호와 동지회(同志會)를 이끌던 이승만과 지속적으로 교류했으며, <기독신보>에 "참 귀엽다 어린 아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해 여섯 살 된 김유진이 굶고 있는 조선의 동포를 위해 1달러 지폐를 모금함에 넣은 장면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이렇듯 어린 아이도 동족을 위해 기부하니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가난과 굶주림으로 어려움에 처한 동포를 구제하자고 요청했다.

김창준은 게렛 신학교에서 신학의 기초 과목과 농촌 지도력, 사회 이론을 공부했고 1926년 6월에 신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와 동시에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도 교육학, 사회학을 공부하여 1926년 8월 문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시카고, 뉴욕, 워싱턴,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버지니아, 캔자스, 덴버,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등 한인 동포가 많은 곳을 방문해 한인들의 생활 상태 및 여러 정황을 살핀 후 1926년 12월 27일 조선으로 돌아왔다.

한편, 김창준은 1922년 10월 1일 제 15회 미 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23년 2월 9~11일에 이화학당에서 부흥회를 인도했고, 2월 9~12일에는 이필주 목사와 함께 모교인 감리교 협성신학교 부흥회를 인도했다. 또한 1923년 1월 30일 '조선 기독교 창문사'의 창설 주주로 참여하여 15인 취체역으로 활동했으며, 192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기독교 창문사'에서 발행하는 <신생명>에 주요 필진으로 글을 기고했다.

유학 생활을 마친 뒤 귀국한 김창준은 중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재개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윤치호는 자신에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김창준 목사가 훌륭한 설교를 했다. 그는 미국에서 3년 동안 신학 등을 공부하고 1~2주일 전쯤에 귀국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신앙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으며, 조선적 기독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창준은 1927년 6월 YMCA의 기관지 <청년>에 "남녀 교제에 대한 필요한 그 방법"이란 글을 기고했고, 그해 7월에 "기독교의 무저항주의"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또한 11월에 주간, 주일학교 초등과 교안인 <하나님의 선물> 출간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1928년 1월 6일 상하이에서 열린 '동아시아 중앙 총의회'에 조선 북 감리연회 대표로 참석했다. 그리고 2월 19일에 "사회운동과 기독의 선언"이란 주제로 중앙교회에서 종교 강연을 했다. 또한 6월 27일부터 8월 1일까지 6주에 걸쳐 <기독신보>에 조선 기독교 각파 소개 면에 "조선 신교파중 제 2위되는 북 감리교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의 내용은 감리교회의 시작과 발달, 감리교회의 신앙 개요, 감리교회의 특색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이 글의 결말에서 자신이 결코 교파주의를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며 조선 그리스도교인 전체가 한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한 사랑스러운 조선적 그리스도교를 만들도록 분투하며 기도하기를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1929년, 김창준은 <농민생활>의 창간 주간을 맞아서 경영 당국자의 꾸준한 노력에 감사하며 주력 사업에 관해 제안하는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신생> 잡지에 "역사적 기독"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글을 통해 그의 기독론을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예수를 종교와 도덕의 대선생인 동시에 대인격자이며 대활동가라고 평했다. 그리고 인격과 교훈, 덕행이 합하여 에수를 구주화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서 예수의 인류애를 강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사람을 사람으로 사랑하였으며 따라서 가장 불쌍한 이를 더욱 사랑하고 동정하였다. 그이야말로 애(愛)의 화신이었다.

1930년, 김창준은 기독교 교육의 토착화를 기하고자 창간된 <종교교육> 잡지에 필진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조선감리회 제1회 창립총회에 총대로 참석했으며, 국내, 국외 선교회 실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31년 6월 10일에 개최된 제1회 합동연회에서는 "절제와 사회사업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특별 강연을 했으며, 그해 9월 18일에 열린 중앙협의회에서 협성신학교 이사, 피어선 성경학원 이사, 조선 주일학교 연합회 대표, 조선 예수교 연합공의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1932년 5월, 김창준은 경성의 기독청년회가 조직한 <기독교 연구회>에서 빌링스 목사와 함께 연구반을 맡아 지도했다. 그리고 7월에는 "맑스주의와 기독교"라는 제목의 논문을 <신학세계>에 등재했으며, 10월 2일에는 "김창준 목사 교역 15주년 기념식"을 중앙교회에서 개최했다. 또한 그는 미성년자의 음주 및 흡연을 금지하는 운동에 적극 참가했으며, 1932년 12월 16일 조선 기독교 절제회가 미성년자 음주끽연금지법 실시 촉성회를 구성했을 때 적극 후원했다.

1933년, 김창준은 감리교 신학교 전임교수에 부임했다. 하지만 3개월 만에 폐결핵에 걸려 교수 직에서 물려나야 했고, 한때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가까스로 완캐했다. 그는 1933년 12월 13일 <기독신보>에 폐결핵에 굴하지 않고 기도에 전념한 결과 예수의 은총으로 회복되었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1934년, 그는 아빙돈 성서 주석 사건의 빌미가 된 <단권 성경주석>의 편찬에 관여해 사사기의 번역 집필자를 맡았다. 또한 미 감리회 한국선교 50주년 기념 강연회에 강사로 참석하여 "평신도의 선교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후 1935년에 만주 선교연회의 신경교회로 특별 파송되기도 했다.

1937년 5월, 김창준은 금강산 온정리에서 열린 제6회 동부연회에서 돈암구역으로 파송되어 교수와 목회를 겸임했다. 그는 청년회를 재건하고 주일학교에 힘을 섰다. 그러나 경찰의 취조가 갈수록 심해졌기에 더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못했다. 급기야 1940년 10월 그가 교수로 봉직하던 감리교 신학교가 삐라 사건으로 인해 무기한 휴교를 당했고 그 역시 교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듬해 정춘수 등 친일파가 장악한 감리교 총회에서 김창준을 평양 남산현교회로 파송했지만, 그는 실제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시기에 사망한 아들의 장례식을 마치고 "아들을 보내면서"라는 제목의 글을 <기독신보>에 기고한 뒤 1942년 돈암교회에서 물러났다.

1942년 딸 마리아를 수원으로 시집을 보낸 김창준은 만주로 이동했다. 그는 만주에서 '동두공사(東豆公社)'를 창설하여 이상촌 건설운동을 전개했고, 만주에서 모범적 국가를 만들고 국민의 정신을 집중시키며 만주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도모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공장을 설립하고 원동기 설비를 갖춰 매일 감자 5만근을 이용해 물품을 산출했다. 이 공장의 목적은 한인이 경제적 토대를 단단하게 해 갈 곳 없는 청년들에게 일터를 마련하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그는 만주의 광야에 나가 토굴에 들어가서 생활했다. 겨울에는 직접 눈 내린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다가 때면서 지냈고, 여름에는 풀을 베고 밭을 갈고 종자를 부리면서 농사에 전념했다. 또 수로를 개척하여 볍씨를 뿌리고 직접 돌피를 뽑았다.

하지만 만주에서의 일련의 활동이 일제 당국의 의심을 샀고, 수차례 취조를 받으며 압박을 받기에 이르자, 김창준은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조용한 농촌에서 생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45년에 입국하여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서 은거했다. 그는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세월을 보내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양주로 이동해 '국제교화협회(國際敎化協會)'를 창립했다. 그는 해방 후의 삶을 자신의 제 2기의 삶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목회 활동 대신 정치 활동에 전념하기로 하고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때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미군정에게 반감을 품고 자신의 정치노선을 좌익으로 결정했다.

그는 1947년 모스크바 3상회의를 전면적으로 지지했고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논하기 위해 모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9개항의 강령을 찬성하고 민족전선에 참가했다. 이에 대해 세간에서는 감리회 목사인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러 지내는 것을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는 1947년 1월 30일 <독립신보>에 자신이 이같이 행동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8.15 이후 국제교화협회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좌우합작에 노력하였으나, 덮어놓고 좌우합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10월 인민항쟁을 보았다. 여기서 경제적 공평이 없는 곳에 정치적 평등과 세계 평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전을 가리켜 조국도 없고 국토도 없고 민족도 없다고 선전하는 것을 완전한 잡음이라고 절실히 알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3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는 것만이 조국독립을 위하여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전의 노선이 가장 옳고 정당한 이상 여기에 뭉치어 공존공영의 제도 확립을 위하여 강하고 대담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창준은 1947년 2월 4일 "민전에 참가하는 나의 이유"라는 성명서를 통해 향후 활동의 노선과 입장을 분명히 언급했다.

1. 근로인민을 기초로 한 민전 나는 본래 기독교 목사로서 예수의 정신을 따라 노동자들에게 더 가까운 친구가 되고자 함은 나의 본래의 정신이었다. 특권계급의 편으로 서는 것보다는 차라리 근로자 속에 들어가서 같이 울고 같이 울고 싶었다. 이 정신이 곧 나를 근로 인민을 기초로 한 민전으로 몰아넣는 첫째 이유였다.

2. 경제적 공평을 주장하는 민전 십자가 사랑을 부르짖는 속에는 경제적 공평의 제도까지 병행되지 않으면 아니 될 줄 깊이 안다. 경제적 공평이 없으면 정치적 평등 세계적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현하세계의 무산대중은 기아선상에 서서 굶어 죽어간다. 인간의 계급차별은 끊임없이 투쟁을 일으키고 있다. 전체적으로 형제애를 달성키 위해서는 경제적 공평을 주장하는 민전노선을 취함이 제 2이유였다.

3. 3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는 민전

나는 조국도 있다. 민족도 있다. 국토의 신성불가침을 확신한다. 조국의 완전 독립과 민족의 완전 자유는 곧 나의 생명이다. 그러나 애국이라는 진의를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이비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특권을 추양 계속하기 위해여 조국애라는 미명을 팔아 국민의 감정을 흥분시켜 공연히 배타주의를 고취함이 애국인가? 참 애국, 참 민족애는 굶어죽어가는 인민에게 밥을 주고 착취당하는 형제에게 해방을 주며 유린당한 인권을 회복하여 주는 것이 참 애국인 것이다. 그럼으로 나로서는 현재의 방편으로서 국제정세에 순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 민족주의적 국가의 실력을 충실히 하여 또한 독립전취에 가장 빠른 길은 막부 3상 결정 지지에 있다는 것을 믿으며,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근본적 해방은 근로대중의 승리로 말미암아 올 것과 또 그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동시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세계 약소 민족 해방은 세계 인민 민주주의의 최후 승리로만 올 것을 확신함은 나의 민전 노선을 취한 제 3의 이유이다.

김창준은 민전 확대중앙위원회에 참가하여 허헌, 박헌영, 여운형, 김원봉, 김기전 등과 함께 의장단 6인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미군정은 민전이 기독교인 김창준과 천도교인 김기전을 의장으로 선출한 것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들만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후 김창준은 '기독교 민주동맹'을 결성해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접목시키고 반그리스도적, 반민주적인 것에 대한 투쟁을 개시할 것을 선언했다.

기독교 본래의 사회정신은 일부 특권 계급의 이익을 두둔하거나 전제와 압박에 추종하는 것이 아니오, 어디까지나 인민적이요, 평화적이요, 정의감이 굿센 곳에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건지러 왔노라" 말씀하셨고, 그가 몸소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 희생정신이 이것을 표증하는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의 기독교는 이조 말기에 있어서 온갖 전제와 압박을 무릅쓰고 대중 계몽과 신 문화 수립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일제의 강점하에 있어서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기독교 본래의 사회정신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이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이스라엘 민족 해방운동의 정신을 우리 기독교인이 몸소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흘린 기독교도의 '피'는 우리 민족해방운동 사상에 영원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 불행하게도 기독교 지도자의 대부분은 기독교 본래의 정신으로부터 속화, 타락하였을 뿐 아니라 특권 계급의 편에 붙어 반인민적 노선을 걷게 되었으며, 특히 중일전쟁으로부터 태평양 전쟁 중에는 신사참배는 물론 내선일체와 황국화 운동에 적극적 정신한 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 사상에는 물론 민족해방 사상에 있어서 영원히 씻지 못할 오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강요에 견디지 못하여 한 것과, 자발적으로 한 것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으나, 그 책임은 일부 지도자층에 있는 것이요, 절대 다수의 신도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성스러운 8.15 해방을 당하여도 그들 일부 지도자층은 과거를 회개, 근신함이 없이 자신이 의연히 반인민적 노선을 거를 뿐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신도를 오도하고 있음은 실로 통한사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은 인구 8할 이상이 경제적 노예, 질곡에서 해매는 참담한 근로대중이요, 우리 기독교도도 그 대부분이 근로인민이 아닌가. 일부 지도자층에 있는 그들은 반 기독정신인 자기 일개인의 영예와 부귀를 위해서 온갖 부정의를 일삼으며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반동 특권 계급의 전위가 되어 근로대중에 분격을 사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조선의 오늘의 현상을 살펴볼 때 우리 기독교 신도는 재삼 반성하여서 건국의 옳은 방향을 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방향이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 본래의 사회정신을 재인식하며 동시에 이를 확대하고 강화 향상함에 있다. 신성하여야 할 건국도상에 친일파, 민족 반역자, 변절자, 탐욕주의자들이 아무런 회개도 근신도 함이 없이 '애국'과 '독립'의 가면을 쓰고 광란하는 것은 필경 반민족적 반동행위가 아닐 수 없나니 백만 기독교도는 물론 삼천만은 거족적으로 이를 배격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 사회정신은 약자와 빈한자를 위할 것이요, 일부 특권 계급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근로인민을 위한 방향이야말로 우리 기독교 본래의 사회정신과 완전히 합치되는 것이다. 인민적인 민주주의는 전후 전 세계 약소민족이 한결같이 걸어나가는 방향인 것이다. 우리 조선 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모든 고난에 찬 문제의 정당한 해결이라든지 앞으로 영원히 자유스럽고 평화스럽게 살 수 있기 위해서라든지 오직 한 길은 이 길 뿐이다. 전 인민을 토대로 하여 국제적으로 고립되지 않은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 없이는 기독교도의 생활 보장과 신앙의 자유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정신에서 살고 또 살려는 모든 신도는 당연히 총궐기하여 옳은 노선을 걸어야겠다. 관념적인 완고한 주관은 결코 설립되지 못하는 것이니 우리는 척외도 아니요 사대주의도 아닌 상호평등적인 민주주의 연합국과 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나라의 완전한 민주독립을 기하기 위하여 국제헌장으로서 보장된 국제평화의 노선인 막부 3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고 민주주의 임시정부 독립에 협력하자. 이에서만이 우리 동포가 미증유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혹정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것도 구해낼 수 있는 것이다.

만인이 다같이 합할 수 있는 인민적 민주주의 국가건설에 참가함으로써 기독교인의 양심적인 사회적 실무를 완수하는 길이다. 우리 기독교 민주동맹은 복음적 신앙에 입각하여 근로인민의 이익을 위함은 물론, 삼천만이 다 잘 살 수 있는 민주 독립국가 쟁취를 위하여 궐기함을 이에 선언한다.

1947년 3월 기독교 민주동맹.

그러나 기독교 민주동맹은 경찰과 서북 청년단등 보수 청년단체들과 기독교 세력의 방해공작, 테러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고, 다만 민전의 가입단체로 만족해야 했다. 김창준은 1947년 6월 25일에 개최된 미소 공동위원회 합동회의에 민전 산하 정당, 사회단체 대표 격인 기독교 민주동맹 대표로 참석했다. 또한 남로당이 7월 27일에 개최한 '미소 공동위원회 경축 임시정부 수립촉진 인민대회'의 준비위원 32인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남로당이 8.15 기념 대회의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로 기획한 군중대회에서 허헌, 박헌영, 김원봉과 함께 명예의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추대의장으로 선출된 김일성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7년 8월 2일 민정장관 안재홍을 통해 관공서 주최 이외의 일반 정당, 사회단체가 주최하는 옥회집회는 일체 허가하지 않는다는 '행정명령 제5호'를 발표하여 8.15 기념대회를 강력히 제한했다. 여기에 8월 11일 밤부터 남한 전 지역에 걸쳐 좌익 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했다. 이로서 남한 내 좌익진영의 정치운동 및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은 비합법화되어 지하 비밀활동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확정되자, 북조선 노동당은 남로당과 합작하여 단독선거 반대운동을 진행했다. 1948년 3월 26일 평양 방송에서, 북조선 노동당은 <남조선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 사회단체에 고함>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발표해 남북 연석회의를 요청했다.

김창준은 김일성, 김두봉 등의 초청을 받고 1948년 4월 19일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참석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미국과 이승만이 주도하는 남한만의 단선, 단정을 반대하기 위해 민족적 양심이 있는 자, 예수의 정신을 가진 자, 애국적 열정이 있는 자들이 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회의가 끝난 후,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우익계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김창준은 허헌을 비롯한 좌익계 지도자들과 함께 북한에 잔류했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선 확실하게 밝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좌익계 인사들이 더이상 남한에 체류할 수 없게 된 상황에 실망하여 북한에서 자신이 꿈꾸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실현시키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참석했으며, 7월 7일 <남조선 선거 추진 지도위원회> 위원 21명 한 사람으로 포함되었다.

그는 1948년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참석하여 주석단 35인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9월 2일 인민 공화국 헌법 채택과 인공 수립을 위한 '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여 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헌법위원회에서 "진정한 종교의 자유는 인민이 주권을 가진 북반부에서만 가능하다"며 남쪽의 종교의 자유는 허망할 뿐이라고 비난했다.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할 때에 하나의 무기로 종교가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다. 따라서 미국 제국주의자들도 조선을 자기의 식민지로 만들 목적으로 자기의 군대와 함께 종교의 정치적 악용을 준비했다. 그것은 미군 전 사령관 하지 중장이 자기 군대를 인솔하여 남조선에 주둔한 이래로, 고문관 격으로 가톨릭의 방 주교와 언더우드 목사를 초빙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이 남조선에 온 이유는 종교를 선전하고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 제국주의의 남조선에 대한 분할 식민지 정책을 기만,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그 실례로서 8.15 해방 직후, 우리 양심적 기독교 신자 150명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주장하고 이른바 '황국 식민화'를 강요하며, 나아가 교회의 종까지 떼어다가 헌납한 친일 악질 목사, 장로를 배척할 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자와 그 충복인 미국인 반동선교사들은 우리 종교인 뿐만 아니라 전체 인민을 미워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인 반동적 악질 목사, 장로들을 적극적으로 옹호, 지지하며 우리 민주주의적이며 양심적인 종교인을 탄압했다.

김창준은 1949년 2월 내각직속 간부학교를 졸업했으며,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해 41명의 주석단 중 1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6월 28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1차 회의에 참석해 초대 서기국장으로 선임되었다.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이른바 <평화적 조국통일방책에 관한 선언서> 1천 통을 남한의 제 정당, 사회단체, 언론, 출판기관, 교육, 문화기관, 산업, 경제기관, 상계, 종교게. 보건, 쳬육계, 그리고 미군 및 유엔 위원단, 국회의원 등에게 발송했다. 그리고 이들 단체들과 연락하며 회견할 목적으로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김창준은 허헌, 리영, 리극로, 정성언, 박윤길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이 보낸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우리 조국 남반부와 남반부 인민들을 미제국주의자들에게 팔아먹은 매국역도들의 민족분열정책과 식민지 예속화 정책의 길을 걷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조국의 남반부와 남반부 인민들을 미국과 이승만 매국역도들로부터 구출하는 국토완정, 조국 통일독립의 길을 걷든지 하는 것이요, 세번째 길은 없다. 인류 역사는 자기 조국과 자기 인민을 반역하는 자들이 승리하여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중략) 인민의 힘은 역도들의 힘보다 거대하며 위대하다. (후략)

6.25 전쟁 발발 후 잠시 서울에 와서 기독교 민주동맹을 재건했으며, 이후로는 파리, 모스크바, 프라하, 비엔나 등지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북한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미군과 유엔군이 전쟁 범죄를 일삼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북한 정권의 '나팔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휴전 후 기독교 민주동맹 중앙위원장을 맡았으며, 납북된 교회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북한의 종교인을 회유해 북한 당국에 충성하게 만들려 노력했다. 1957년 8월 27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9년 9월 29일, 김창준은 평양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향년 69세. 그의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1990년 북한에서 제정된 '조국 통일상' 표창 및 명예 칭호를 추서받았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그가 월북한 뒤 남한을 비난하고 납북 인사들을 귀순시키려 하고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등 일련의 행위를 보인 점을 들어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또한 그가 생전에 꿈꿨던 '기독교 사회주의'는 북한에서도 실현되지 않았으며, 기독교는 북한에서 철저하게 억압당하고 당국의 어용 종교로 전락했다.

각주

  1. 현재 평안남도 증산군 무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