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여대

유여대.PNG

劉如大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장로회 목사.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8년 12월 10일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서호동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유택현(劉澤賢)과 어머니 윤치현(尹致賢)의 외아들로, 어려서부터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의주, 평양 등 서북 일대가 전쟁터로 변모하자, 유여대는 잠시 고향을 떠나 피신했다가 이듬해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자택에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훈장 노릇을 했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서 '유이학(劉理學)'이라고 불렸다.

1898년, 유여대는 친구 안승원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의주 서교회당에 다녔고 미국 북장로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N.C 휘트모어로부터 세례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는 서구 근대 학문에 관심을 갖고 이를 동포들에게 전하고자 근대학교 설립과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그는 1899년 휘트모어, 장유관, 김창건 등과 함께 의주지역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인 일신학교를 설립해 한문교사를 맡았다. 그는 일신학교가 1908년 양실학교로 흡수 통합된 후에도 교편을 놓지 않았다. 또한 그는 기독교 신앙을 전도하는 데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는 개종 후 전도사가 되어 송장면 교회와 수진면 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사업을 했고, 1907년 의주 서교회에서 동교회가 분리되자 동교회의 장로로서 교회를 이끌었다.

1907년 11월 5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유여대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지역 유지들과 함께 5환을 의연금으로 냈다고 한다. 이후 1909년,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5년에 졸업했고,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의주 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야학을 개설, 문맹통치, 민중계몽에 힘썼다. 이후 1917년 조선장로회 총회에 평북노회 총대로 참석했고, 1918년 평북노회에서 분립한 의산노회의 부회계로 선임되었다.

1919년 2월 10일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를 방문한 유여대는 그곳에서 이승훈양전백을 만나 그들로부터 독립선언계획을 전해듣고 참여를 권유받았다. 그는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밝혔지만 경성으로 상경하기는 어려우므로 의주 방면의 만세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2월 13일 김병조와 함께 장로회 대표로서 민족대표에 참여하기로 했으며, 2월 17일에는 정명채, 김두칠을 만나 3.1 운동 동참을 권유해 승낙을 받아냈다.

2월 27일 도형균으로부터 거사 일자를 전달받은 그는 다음날 양실학교에서 신도 등 20여 명을 모아놓고 독립선언서 발표를 논의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정명채, 김두칠에게 독립선언서 등사를 맡겼고, 안석응에게는 도청 등 관공서에 독립선언서 배포를 부탁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인쇄물이 도착하지 않자, 그는 일본으로 유학간 한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를 임시로 등사해 쓰기로 했다.

이윽고 3월 1일 오후 2시, 유여대는 의주 읍내 서교회당 부근 공터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 등 700~800명을 모아놓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김병농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 비는 기도를 드린 뒤, 유여대가 나서서 "이로부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식사(式辭)를 마치고 선언서를 낭독하려 했다. 이떄 서울에서 인쇄한 기미독립선언서가 도착하자, 그는 그것을 낭독했다. 이후 독립선언식에 모인 일행은 <독립창가>를 합창했다.

독립선언을 한 것은 3월 1일 오늘이라.


반도의 강산 너와 내가 함께 독립만세를 환영하자.

충의를 다하여 흘리는 피는 우리 반도의 독립의 준비라.

5,000년 이래 다스려 온 우리 강산을 누가 강탈하고

누가 우리의 정신을 변하게 할 수 있으랴.

만국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는 하나님(天帝)의 명령이요.

자유와 평등은 현시(現時)의 주의(主義)인데

누가 우리의 권리를 방해할 소냐.

그 후 그들은 다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는 가두 시위 행진에 들어갔다. 이때 헌병들이 달려와 해산을 강요했지만, 오히려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대 숫자는 2천여 명에 이르렀다. 행사 직후 일제 관헌 등은 유여대 등 주동자 7명을 헌병대로 연행했다. 이튿날 천도교 측이 가세하면서 시위대는 3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3월 3일에는 의주 일대의 1200여 명이 읍내로 집결해 시위 운동을 벌였다. 이에 헌병대가 출동하여 총검과 쇠갈고리로 진압했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몇 개의 시위 분대를 조직해 헌병대와 관공서로 몰려가 탄압에 항의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3월 4일에도 양실학교 학생 6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읍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3월 6일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잠잠해지는 듯 했던 의주 만세시위는 3월 말에 촉발되어 3월 30일 영산시와 수구진, 평구진에서 각각 200~400명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고, 31일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4000명이 시위를 벌여 헌병주재소를 파괴했다. 이에 일본 경찰 11명이 출동, 발포하여 시위대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4월 2일 옥상면에서는 주민 2000명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우리는 이미 독립선언을 하였으니 면사무소를 마땅히 폐지하고 우리가 새로 조직할 자치민단(民團)에 면사무소 청사와 비품, 재산 일체를 넘기라"고 선언한 후 면사무소를 접수하여 십수일간 자치활동을 했다가 일제 경찰에게 강제 해산되었다.

의주 만세시위 주동자 유여대 등 7명은 의주 헌병분대에서 신문을 받은 뒤 3월 4일 '보안법 제7조' 위반 혐의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 이송했다. 그는 3월 7일 신의주지청 검사의 신문에서 자신이 의주 독립선언식의 지휘자임을 인정하고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피력했다.

문: 이들의 문서나 기 등은 모두 그대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 틀림없는가.


답: 나는 독립선언을 하려면 이러이러한 물건이 필요하다고 신도를 모아 놓고 이야기하였더니 그자들이 협의를 하고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므로 내가 지휘한 것과 같은 셈이다.

문: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번과 같은 소요를 일으켰는가.

답: 양전백의 말에 의하여 조선민족 대표자로부터 파리의 강화회의에 파견하는 사람들에게 조선은 일반적으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통지하면 강화회의에 독립 요구를 제출하여 각국의 동정을 얻고 독립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이다.

문: 가령 조선이 독립이 된다고 할지라도 이전의 조선과 같이 당파의 싸움과 각국의 야심 등으로 도저히 독립을 유지할 수 없고 도리어 국내는 혼란 속으로 빠진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지 않았는가.

답: 국민 전부가 독립정신이 충만해 있으므로 완전히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문: 가령 정신만 있다고 할지라도 실력이 수반하지 않는 이상은 독립을 오래 지탱할 수 없지 않은가.

답: 실력은 이제부터 양성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3월 8일, 유여대 등은 신의주지청에 기소되었다가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손병희 등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는데, 5월 6일엔 민족대표 관련 사건의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해 검사의 신문을 받았다.

문: (일본)정부의 승인을 거친 후 비로소 독립국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전에 피고 등은 어찌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는가.


답: 그것은 자결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한 것이다.

문: 참고인은 어찌하여 일본의 주권을 이탈하고 조선을 독립시키려고 희망하는가.

답: 조선민족이 자유롭게 발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독립을 희망한다.

문: 일본 제국신민이 되어 있는 편이 자유의 발달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답: 나는 독립하지 않으면 발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문: (한일)병합 전은 인민은 자유를 압박받고 있었으나 독립을 하여서 그와 같은 상태로 되는 것을 희망하고 있는가.

답: 독립을 하여 공화정부가 되고 열국의 대열에 서서 가도록 하고자 생각하고 있다.

문: 그대는 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는가.

답: 독립을 희망하는 것은 조선인에 대하여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 데 불평이 있는 까닭이다.

이후 유여대는 9월 20일부터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심을 치른 뒤 10월 30일 최종판결에서 징녁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1월 6일 홍기조와 함께 만기 출소했다. 이튿날 동아일보 기자로부터 출옥 소감을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모든 자유를 빼앗긴 옥중 생활을 하여보니까 더욱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으며 출옥한 후에 대하여는 모든 일이 순서가 있고 세월이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오직 가장 정의 인도라고 생각하는 일을 위하여 힘을 쓸 뿐이다.

옥 후 의주 동교회 담임목사로 복귀했고 1925년 2월 제13회 의산노회에서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강연을 통해 기독교 교리를 전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 고취와 인재 양성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양실학교가 3.1운동의 여파로 폐쇄되자 양실학교 재건을 위해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기부금을 모집했다. 그 결과 1926년 양실학교는 재단법인으로 등록되었고 총 6학급에 남녀 학생 170여명, 교직원은 교장 박종걸 외 6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동락회(同樂會)에서 매년 기부금을 내줘 학교 운영을 지원했다. 양실학교는 1932년 12월 1일부로 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31년, 유여대는 17년간 시무했던 의주 동교회를 떠나 신의주로 이사해 백마교회 담암목사로 부임해 예배당을 새로 짓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러다가 1934년에는 신병으로 목회자 생활을 마감했고 1935년에는 조선중앙일보 신의주지국 고문을 맡았다. 이후 요양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설교를 모은 '강대지남(講臺指南)', 귀감이 될만한 동서고금 위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위인기담(偉人奇談)', 각종 서식 작성법과 상식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 '면무식(免無識)' 등을 신의주 광명사를 통해 출간했다.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은 고아들을 위한 사업에 기부되었다. 그러던 1937년 1월 13일, 유여대는 의주군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의주군 고성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유여대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며, 1971년 1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가묘를 마련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