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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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성(李甲成, 1889년 10월 23일~1981년 3월 17일)은 대한민국독립운동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9년 10월 23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서내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에서 부친 이기덕(李基德)과 모친 파평 윤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상민 가정이었지만 유복했고, 그는 7세 때부터 13세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13세 때 대구의 보통학교에 입학해 15세에 졸업한 그는 1904년경 한성부로 상경하여 4년간 경신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졸업했다.

이후 세브란스의학교 약학과에 입학해 수년간 공부하여 졸업한 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3년 동안 약학을 배우는 동시에 세브란스 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3학년 때 중퇴한 그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제약주임으로 근무했다. 한편, 그는 14~15세 때부터 장로회에 입교했다. 미션스쿨인 세브란스 의학교, 의학전문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 인사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다. 이것은 후에 3.1 운동에서 개신교 인사 결집에 큰 역할을 수행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1919년 2월, 이갑성은 YMCA 간사 박희도로부터 학생들이 일본 도쿄에서의 2.8 독립선언에 호응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YMCA 청년부 회원들을 규합하기로 뜻을 모았다. 박희도는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생 한위건을 만났고, 이갑성은 경신학교 후배이자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인 김원벽을 만나 포섭한 뒤 각 전문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 가운데 대표자들을 수소문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는 문제를 논의했다.

이갑성은 남대문교회와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을 중심으로 그룹을 형성했다. 2월 12일과 14일에 음악회를 핑계로 모임을 갖고 전문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과 선언서는 주익이 기초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때 이승훈이 그와 만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일을 논의하면서, 천도교 인사들도 함께 할 의사가 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걸 자제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2월 20일, 이갑성을 비롯한 각 전문학교 대표들은 승동교회에서 제1회 학생간부회의를 개최했다. 그들은 종교계 인사들과 공동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이승훈은 천도교 인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평소 아끼던 이갑성과 상의한 후 김병조, 이명룡, 양전백, 유여대, 길선주, 손정도 등과 상의했다.

이후 이승훈은 재차 상경하여 2월 20일에서 22일까지 총 3차례에 걸쳐 천도교와의 제휴 문제를 논의했다. 1차 회의는 2월 20일 협성학교 사무실에서 이승훈, 박희도, 정춘수, 오화영, 신홍식, 오기선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일본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또한 독립청원이냐, 독립선언이냐를 두고 논의한 결과, 오화영 목사의 제안대로 기독교 측에서 연서한 독립청원서를 일본정부에 보내기로 하였다. 동지 규합 문제는 오화영은 개성과 춘천지구에서, 정춘수는 원산 지구에서, 나머지 사람들은 서울에서 동지들을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반면 천도교와의 연대문제를 놓고 박희도와 정춘수가 교리상의 이유 등을 들어 반대 입장을 폈다.

2차 회의는 2월 21일 남대문 밖에 소재한 이갑성의 집에서 열렸다. 이날 처음으로 양 교파가 한 자리에 모였는데 장로교 측에서는 함태영, 이승훈, 안세환, 김세환, 김필수, 오상근 등이, 감리교 측에서는 박희도, 오화영, 신홍식, 오기선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청원서 초안 작성 문제를 비롯해 종파를 초월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천도교와의 제휴 문제가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 이밖에도 국제정세와 강화회의에 대한 정확한 정보 파악을 위해 현순을 상하이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지방의 동지규합을 위해 이갑성, 김세환, 신홍식, 이승훈을 지방순회위원으로 추가로 임명하였다.

3차 회의는 2월 22일에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는 양 교단의 연대문제가 최종 결정되었다. 합의 결과는 2월 24일 손병희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양측은 3.1 운동의 진행절차와 역할을 분장하였다. 선언서 및 청원서 작성과 인쇄는 천도교 측에서 맡고, 미국 대통령 및 강화회의 참전국 대표들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는 일은 기독교 측에서 맡기로 했다. 또 청원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하는 일은 천도교 측에 맡고, 대표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정부와 직접 담판하는 일, 독립선언서 배포와 3월 1일에 학생과 시민을 동원하는 일은 기독교 측에서 맡기로 정하였다.

2월 27일 정동교회 목사 이필주의 집에서 기독교 대표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날 모임의 목적은 함태영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 초안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청원서' 초안을 심의하는 일이었다. 참석자들은 이 초안에 서명한 후 완성본이 나오면 서명하도록 함태영에게 인장을 맡겼다. 이 자리에서 기독교 측 대표는 최종 16인으로 하며, 서명자 가족에게는 부양료를 지불하기로 정하였다.

기독교 측의 일원인 이갑성은 독립선언서 배포에 적극 나섰다. 2월 28일 김창준으로부터 선언서 약 600매를 받아 그날로 5매를 세브란스의전 학생인 이용설에게 교부하였다. 3월 1일에는 400여 매를 자기 사무실에서 세브란스의전 학생인 이용상에게 교부하였으며, 그중 200매는 대구 이만집 목사에게, 나머지 200매는 마산의 임학찬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또 김병수를 통해 군산의 박연세에게 200매를 보내도록 하였으며, 서울에서는 보성전문 학생 강기덕에게 1,500매를 교부하여 배포토록 하였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밤, 가회동의 손병희의 집에서 기독교·천도교·불교 대표자회의 겸 최종 점검회의가 열렸을 때, 이갑성도 참석하여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 회의에서는 거사장소를 당초의 탑동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만에 하나 발생할지도 모를 시위 군중과 일경 간의 충돌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3월 1일 오후 2시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개최한 뒤 독립선언식이 끝난 직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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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이후 이갑성은 수차례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1919년 3월 8일 경무총감부에서 형사가 "피고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독립운동은 그때 봐야 알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후 5월 6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고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된 그는 4월 29일 예심에 출석했다. 검사가 "피고는 어찌하여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본정부가 조선인에 대하여 조선어로 교육을 시키지 아니하고 조선역사를 가르치지 않으며 징병 의무를 부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치에도 관여시키지 않고 열등한 대우를 하므로 독립을 희망한다. 또 이번에 구류되어서 더욱 그런 생각을 강하게 하였다. 그것은 내가 감옥에서 금수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매일 간수들은 이놈아 저놈아 욕설을 하면서 구타할 뿐 아니라 나에게 1일 3회씩 식사를 차입하므로 내 집의 형편을 생각하여 1일 1회씩만 차입하게 해달라고 간수에게 부탁하였으나 간수는 건방진 놈이라고 욕설을 하면서 거절하였다. 감옥은 지옥 이상의 지옥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검사가 "피고는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잘 감당하여 갈 줄로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것은 조선이 독립이 된다면 잘 하여 갈 줄로 안다. 조선이 일본에 반항해서는 국가 유지상 곤란할 것을 알고 있으므로 조선이 독립국이 된다 하더라도 역시 일본의 원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황인종이 단결하여 백인종에게 저항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들과 같이 서양인과 가까이 하고 있다고는 하나 일본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정부가 우리들을 배일당(排日黨)이라고 지목하고 있는 것은 큰 오해다. 나는 일본이 조선독립을 승낙하여 준다면 조선은 일본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더욱 친할 것이며 나의 감정도 해소될 것이므로 황인종 전체가 단결되리라고 생각되어 이번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갑성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81년 3월 2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수감된지 1년 후 가출옥이 결정되었으나 이를 거부했고, 3.1 운동 1주년 때 옥중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1922년 5월 5일 경성형무소에서 오화영과 함께 만기로 출옥했고, 고향으로 내려간 뒤 대구 지역 유력자들이 열어준 환영회에 참석했다.

1922년 12월 23일, 남대문 식도원에서 조선민립대학 기성준비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이갑성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3월 29일부터 3일간 열린 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에서, 이갑성은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되었다. 기성회는 1차로 400만원을 모금하여 법학부, 경제학부, 문학부, 이학부를 설립하고, 2차로 총 1,250만원을 모금하여 공학부, 농학부, 의학부를 추가해 총 7학부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1923년 5월 10일 경성부·지방부 발기를 시작으로 민립대학 지방부가 설치되었는데 이갑성은 황해도 지방 순회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4년에는 평안남북도의 특파위원으로 파견돼 선전 및 강연활동을 하였다. 4월 12일 평양 천도교회당에서 '우리의 요구'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는데 청중이 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강연 도중 영국이 식민지 인도의 물산을 착취한다는 대목을 이야기하던 중 일제 경찰로부터 강연 중지 명령을 받았다. 이후 그는 강연 도중에 2차례 체포되어 며칠간 구류되기도 했다.

1923년 1월 20일, 이갑성은 협성학교에서 열린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총회에서 이사로 선출되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창립 직후 맞이하는 구정 때부터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즉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토산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하여 입고 음식 및 일용품은 가능한 한 토산품을 사용하도록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 사람 조선 것'을 선전문구로 내세우고 강연회와 가두시위를 하며 선전활동을 벌였다.

1924년 세브란스 의약의 지배인이 된 이갑성은 1925년에 결성된 흥업구락부 간사로 활동했으며, 1926년부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를 맡았다. 1927년 1월 초순 천도교 간부 권동진홍명희, 박동완, 백관구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에서 회합하여 신간회 발의에 합의했다. 이들은 조선민흥회 발기인들과 접촉하여 강령을 초안하여 창립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민족적 단결, 비타협주의 등을 표방한 신간회 강령 초안은 총독부의 허가를 받을 수 없어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갑성은 강령 수정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이승훈, 박동완, 이상재 등과 함께 기독교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발기인은 이들을 포함해 신석우·안재홍 등 조선일보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이었다. 7월 10일 경성지회를 설치하였는데 지회장에는 한용운이 임명되었다.

1930년 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신간회는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대회를 개최했다. 일제는 민중대회 중지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병옥, 권동진, 김병로 등 신간회 간부와 근우회 간부 등을 대거 검거했다. 이갑성 역시 이 일로 검거되어 6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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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8월 4일 경기도형사과가 촬영한 사진.

출옥 후 자동차수리업소인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을 맡다가 이듬해인 1931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제중약국을 경영했다. 하지만 1937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근 7년간의 행적이 묘연하기에, 훗날 이를 놓고 변절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갑성의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국내 송환 후 3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7개월간 복역했다고 한다. 이후 이와모토 마사이치(岩本正一)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그가 기술한 이력서에 따르면, 1942년 상하이에 망명했을 당시 관여했던 독립 운동건의 발각으로 대구 경찰국에 체포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6년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력서가 사실인지는 불명확하며, 그가 상하이에서 벌인 독립운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이 시기에 일제의 밀정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총독부에 넘겼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8.15 광복 후, 이갑성은 지난날 이승만이 주도하여 조직한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한 인연으로 이승만 계열에 속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반탁운동을 위해 결성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회장을 맡았으며, 1946년 정당통일기성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7년 10월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위원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한 선거법 제정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국민당 백남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 전원위원장(1951년), 국민회 최고위원(1952), 자유당 정무부장(1953)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권의 핵심 인사로 활동했다. 1951년 5월 국민방위군 사건 이후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한 뒤, 제2대 부통령 선거에 나서 야당측 후보인 김성수와 경합하였으나 78대 75표로 패배했다.

그는 자유당 창당과정에서 한 몫을 톡톡히 했다. 이승만을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머물게 하는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원내 자유당이 1951년 12월 창당되었을 때 김동성과 함께 중앙위원회 부의장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승만이 총재로 있는 원외자유당으로의 합동을 주장하는 합동파를 이끌었고, 결국 자유당 창당을 이끌어냈다. 이승만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1952년 10월 전시내각의 국무총리로 그를 선임했지만, 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우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이기붕 중심의 후계체제가 가동되면서, 그의 자유당에서의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이에 그는 1956년 10월 사상계에 '우리는 사회악에 항쟁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해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

그러나 4.19 혁명 후 자유당에서 이승만의 집권에 공헌한 전력이 문제가 되었고,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 서울시조사위원회'는 그가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자유당 선거대책 최고고문 겸 중앙위원을 지낸 점, 이승만 후보의 찬조연설을 한 점 등을 들어 공민권 제한 심사문제를 거론하였다.[1]

5.16 군사정변 후, 이갑성은 1962년 6월 <최고회의보>에 '3.1운동과 나'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크게 염려하던 군인들에 의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은 크게 다행한 일이라며, 쿠데타를 적극 찬양했다. 이후 헌법 개정 국민투표관리 위원장을 맡았으며,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 등을 맡아 박정희 정권 창출에 기여했다.

1963년 5월 28일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1967년까지 민주공화당 총재 고문을 맡았다. 1963년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 참여했으며, 1965년 광복회 초대 회장을 맡아 1970년까지 초대, 2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진력했고, 1969년부터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를 역임했다. 또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고, 매년 3.1절 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1979년 3.1절 행사를 끝으로 대외 활동을 중단했고, 사망 3개월 전부터는 실어증에 걸려 대화조차 하지 못했다. 1981년 3월 17일 신병치료차 수안보 온천에 갔다가 졸도하여 곧장 집으로 돌아왔으나, 계속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3월 25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94세. 례는 3월 29일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각주

  1. 동아일보 1961년 2월 25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