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18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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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1881년).jpg

金奎植. 호는 우사(尤史)·죽적(竹笛)·만호(晩湖)·서호(西湖), 이명은 김성(金成)·김중문(金仲文)·김일민(金一民), 여일민(余一民)·왕개석(王介石)·한재강(韓再剛)·한중서(韓中書) 등이다.[1]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1881년 음력 1월 27일(양력 2월 28일) 경상도 동래부(현재 부산광역시)에서 청풍 김씨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김지성은 강화도 조약 직후 동래부의 외무 관리로 근무했으며, 한국에 자전거를 처음으로 들여오는 등 개화를 추구하는 인사였다. 그는 동래부 관리로 재직중인 1885년경 일본 상인들의 횡포가 늘어나자 불평등조약의 부당성을 비판하며 이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길에 올랐다. 게다가 모친 경주 이씨 마저 급병에 걸려 죽으면서, 김규식은 6살에 고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후 한성부에 살던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지만, 큰아버지 역시 생업이 어려워서 그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중 1886년 5월 조선에 고아학교를 처음으로 세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의 사정을 전해듣고 1887년 김규식을 고아학교에 데려갔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는 김규식이 고아학교에 들어간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기 몸 역시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내어 삼키려고까지 하였다.

김규식은 고아학교에서 점차 건강을 되찾았고,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남달리 총명했기에 언더우드 부부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이에 주변인들은 그가 언더우드 부부의 양자라고 오해했다고 한다. 한편 고아학교 원생 시절 그의 별칭은 '번개비'였는데, 이로 볼 때 체구는 작았지만 매사에 민첩하고 재기가 넘친것으로 추정된다. 영문으로는 '존'(John)이라 불렸다고 한다. 고아학교는 시간이 지나며 원생이 늘어나자 규모를 학당으로 확장시키고 언더우드의 이름을 따 원두우학당이라 불렀다. 이 학당은 1894년 학당 책임을 선교사 밀러가 맡으면서 민노아학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청일전쟁안창호가 밀러 선교사의 초빙을 받아 민노아학당의 학생 겸 접장 노릇을 2년간 했는데, 김규식은 이때 안창호와 처음 대면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규식은 고아학교 및 학당에서 10여년 간 언더우드와 함께 생활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접했고, 영어 공부와 한문 및 서양의 자연과학 등 다양한 근대학문을 익혔다. 하지만 김규식이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세례를 받은 건 미국으로 유학한 후인 1898년이었다. 그가 뒤늦게야 세례를 받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불우한 처지로 인해 불신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김규식이 고아원과 학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언더우드 부부의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고아의 처지가 된 어린 규식이 행복할 리 없었다. 19세기 말엽이라면 아직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한국 사회에서 외국 선교사가 경영하는 고아원에서 산다는 것은 여러가지 심리적 억압과 고통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중략) 그리고 사회신분을 중시한 사회에서 고아원의 신세를 진다는 것은 어린아이들 간에도 많은 경멸과 천대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을 것이다. (중략) 우사는 때때로 고아원을 뛰쳐나와 잃은 부친을 찾는다고 서울 시내를 헤매곤 하였다는데, 이는 물론 부친을 흠모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나 심리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 신구문화사, 1974.

17세 때인 1897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김규식은 가을학기부터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 예과에 입학했다. 그가 누구의 도움과 알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언더우드의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으나, 1890년대 후반 이래 김규식과 언더우드의 사이가 벌어졌다는 증언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갑신정변 이후 미국에 망명했다가 1896년 귀국하여 젊은이들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장했던 서재필의 도움이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로녹대학에 입학한 그는 무척 성실하게 공부했다. 이는 그의 성적표에서 드러난다. 1897년 가을학기 수강한 예과 과목 성적을 보면, 영어 88점, 초급라틴어 94점, 역사 87점, 영독 94점, 수학 88점, 상업수학 80점, 영작 89점으로 기록되었다. 1898년 봄 학기 성적은 더욱 우수하여 영어 92점, 라틴어 91점과 96점, 역사 94점, 수학 97.7점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이같은 우수한 성적으로 더이상 예과 과정이 필요없다고 인정받아 1898년 가을 학기부터 본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김규식은 유학 생활 3년째 되던 해부터 미국인 학생들과 폭넓게 교제했다. 학내 웅변클럽인 데모스테니언 문학회에 가입하여 미국 및 세계정치 문제 토론에 참가하여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그는 써클 회원으로 참가한지 1년도 안된 1898년에 써클의 통신서기가 되었고, 1900년 1월에는 기록서기, 1900년 11월에는 부회장을 맡았고, 1902년 1월에 회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1900년 6월에 개최한 강연대회에서 1등을 수상했고, 1901년 5월에 개최된 전교강연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는 등 연설가, 웅변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기고가, 평론가로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대학에서 출간되는 <로녹 컬리지언>에 '한국어', '동방의 서광'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한국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 한편, 한국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했다. 특히 '동방의 서광'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서양에서는 근대문명이 꽃피고 있는 반면에 동쪽은 암흑의 밤이 깊이 들어 있다. 동양의 거목들은 한때 은빛의 이슬로 빛났으나, 지금은 겨울의 깊은 눈에 싸여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다. 그러나 깊은 밤은 곧 지나갈 것이고, 한국에도 서광이 비칠 것이니, 도둑들은 물러갈 것이고, 나라의 부를 약탈하는 무리들이 없어질 것이며, 필경은 외국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1903년 5월 <로녹 컬리지언>에 기고한 '러시아와 한국문제'에서, 김규식은 머지않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러시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러시아는 1억 2천 9백만의 건장하고, 왕성하고, 거칠고,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야만적이기까지 한 인구로부터 선발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상비군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아주 영민한 정치가들과 예리한 외교관들로 구성되어, 충성하는 신민을 보호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종족들을 통제하며, 국제분쟁에서는 종종 경쟁국가들을 속여넘긴다.

이에 반해 한국의 사정에 대해서는 비관적으로 서술했다.

한국은 3천 6백년 전에 역사가 시작됐음에도 현재까지 비활동적이고 보수적이다. 위대한 이웃인 중국으로부터 문명을 수용한 이래로, 한국은 학문의 전당이었으며, 용맹한 무인의 고향이었다. 공자의 철학과 석가의 가르침으로부터 유래한 조상숭배라는 유력한 종교의 영향으로, 한국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옛 어른들을 능가함은 잘못이라는 생각과 선대에 위대한 인물이 있은 후에는 그를 능가하는 인물은 다시는 출현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한국의 발전이 왜 더딘지를 쉽게 알 수 있다.


3천년 동안, 즉 여러 왕조의 통치기간동안 한국은 독립국이었으나, 15세기 초 남쪽의 이웃나라와 동맹의 필요성을 느꼈고 어린애같이 보호를 청하였다. 그 결과 1866년까지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 이웃나라인 남쪽의 중국과 북쪽의 러시아와 비교할 때, 한국은 지도상의 한 반점에 불과하고, 9만 2천 평방마일 면적의 반도이며, 현재 타락하고, 무분별하며, 불성실한 정부의 절대통치를 받는 비활동적이고 비진취적인 1천 5백만의 주민을 가지고 있다. 지난 3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외국과 교섭을 거부했으므로 '은자의 나라'라고 불렸다.

한편 일본과 중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일본은 최근 적극적이며 대국의 대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단지 48년 전 미국 해군의 페리 제독이 그 자물쇠를 부숨으로써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일본은 강한 해군과 육군을 가진 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읿론은 그 주변 지역에 러시아의 침투를 막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 중국은 동아시아와 그 문명의 모태임을 자랑하지만, 한국처럼 국가 쇠망의 길에 빠져 있고 국토를 외국의 전쟁터로 내어주고 있으며, 자신을 세계인의 탐욕을 위한 고깃덩어리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는 한국의 운명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달렸다고 규정했으며, 한국은 결국 일본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하면서, 그 이유는 "러시아는 한국을 단지 원할 뿐이지만, 일본은 한국을 자신들의 잉여인구와 에너지의 배출구로 삼는 등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러시아보다는 일본에게 넘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람은 일본에 속하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러시아에 속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한국인은 결국에는 둘 중 어느 한 나라에 속할 것이므로 이 불쌍하고 불운한 민족이 소위 독립국이라는 현재의 정부 체제 아래서 신음하며 지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러시아의 손아귀에 있는 한 진보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마지막 날까지 러시아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역을 강요당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비호 아래에서는 한국인들은 비록 소유물과 권리를 빼앗기지만 입고, 먹고, 교육받고, 평온하게 제국의 훌륭한 신민이 될 것이다. 만약불행한 한국이 이제라도 각성한다면, 박두한 압제를 곧 벗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한국을 기꺼이 이웃으로 대할 것이다.

1903년 6월 로녹대학을 우수한 성적[2]으로 졸업한 김규식은 1년 남짓 뉴욕에서 생활하다가 23세 때인 1904년 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한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던 외국 상사(商社), 광산회사, 은행 등에서 많은 급료를 주겠다는 교섭이 쇄도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를 뿌리치고 언더우드의 비서가 되었고, 새문안교회의 집사, 장로로 봉사했다. 그러면서 러일전쟁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1905년 1월 미국이 양국의 강화회담을 포츠머스에서 중재해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에 갔다. 그러나 이미 강화회의가 끝나 뜻을 펴지 못하자 귀국했다. 이후 미국에 다시 유학하려 했지만 비자가 나오지 않아 실패했다.

그후 언더우드를 도와 새문안교회의 신자들에게 설교하는 한편, YMCA의 학생부 간사를 역임했으며, 경신학교 등 몇몇 학교와 교사와 강사를 맡았으며, 계몽 강연활동에 진력했다. 그러던 1906년 5월 21일 새문안교회 교인이며 군수를 지낸 조순환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정신여학교 합창대의 축가 속에 새문안교회에서 거행되었는데, 서양식 결혼식이 아닌 한국의 전통적인 혼례식, 즉 사모관대 차림에 족두리를 쓰고 연지, 곤지 찍은 혼례로 진행되었다. 이후에도 새문안교회 봉사와 교육, 계몽 강연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새문안교회 재직회록과 당회록, 그리고 교우 세례문답록에는 그의 활동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이 기록들은 현재 새문안교회 내 교회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다.

1906년 이후, 김규식은 동서문밖 홍천사 옆에 설립된 홍화학교와 총교사를 시작으로 교육활동에 적극 나섰다. 또한 당시 대표적인 구국단체였던 대한자강회의 교육부위원을 맡았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7일 잡보는 김규식을 "교육계에 새로운 바람과 영향을 미친 양사(良師)의 표준"이라고 찬양했다. 이밖에도 남대문 내 광신사(廣信社)에서 상업전문학교(商業專門學校)에 청빙되었다. 한편 YMCA에서 1907년 2월부터 1908년 3월 사이에 4회에 걸쳐 강연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7월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던 대한매일신보 사장 어니스트 베델양기탁이 '국채보상횡령'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영국인 집사 출신으로 당시 일본 고베에서 활동하던 변호사 C.N. 크로스가 증인으로 출석했는데, 김규식이 통역을 맡았다. 김규식의 통역은 완벽했고, 이를 토대로 두 사람의 혐의가 아무 근거 없다는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밖에도 당시 국내에 설립되었던 한미홍업주식회사에 이범주(李範周), 임병환(林炳桓), 홍성근(洪聖根) 등과 함께 주주로 참여하는 등 기업활동에도 관여했고, '소년회'라는 단체를 발기하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

일제강점기[편집 | 원본 편집]

1910년 한일병합 후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자, 김규식은 교회 봉사에 집중했다. 그 결과 1910년 12월 18일 새문안교회 장로로 정식 선임되었다. 그해 장남 김진필(金鎭弼)이 태어났지만, 6개월만에 요절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교회 봉사로 잊고자 더욱 노력했다. 당회 서기로서 교회 일에 봉사했으며, 1911년 12월 4일 경기충청노회가 새문안교회에서 회집될 때 서기를 맡았다.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예수장로회총회가 조직되었을 때, 경기충청노회의 총대로 참석했다. 그는 총회 창립식에 관하여 <The Korea Mission Field>에 "한국장로회의 총회 창립"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이 기고문에서, 아브라함이 기독교 신앙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가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지식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이 중요하다"고 여겼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1912년 2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고, 그해 9월 장로회 총회 총대 봉사를 맡았다. 그러던 1913년 봄, 조선 총독이 도쿄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여기에 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금을 주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를 뿌리치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가 망명을 택한 건 105인 사건 때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한 일제에 반감을 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할 의지를 품었던 게 컸다. 그는 훗날 '자필 이력서'에서 망명을 택한 이유를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목적에서였다”라고 밝혔다.

1913년 11월 말 상하이에 도착한 김규식은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했다. 하지만 민족계열 내부의 분파성과 파당성에 상당한 충격과 실망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훗날 '자필 이력서'에서 자신의 항일운동 방향은 처음부터 '운동의 통일과 통합'에 있었다고 밝혔다. 한편 신해혁명을 주도한 황싱, 당취오(唐聚五), 고유균(顧維鈞) 등 중국 인사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쑨원의 난징 정부에 호감을 갖고 쑤저우까지 진군하는 국민혁명군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혁명군이 쑤저우에서 군벌 장훈(張勳)에게 패하자, 장훈은 1914년 가을부터 독자적으로 외몽골 지역에 독립군 군사학교를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유동열, 이태준 및 젊은 학생들과 함께 독립군 또는 게릴라 부대의 미래 장교를 양성할 초보적인 군사학교를 운영할 목적으로 외몽골 우르가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오기로 한 지원자금이 도착하지 못해 무산되었다.

이후 1918년까지 몽골 우루가와 중국의 여러 지역을 돌면서 외국회사의 직원 또는 책임자로 근무하는 동시에 폐병을 앓고 있던 부인 조은수를 돌봤다. 그러나 부인은 1917년 사망했고, 1918년 3월 마이어 회사의 몽골 수도 우루가 지점 설치를 위해 몽골에 다시 갔다가 만주 지역에 목장을 설립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1918년 12월 말 난징의 어느 선교사 댁에서 김순애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례를 치른 지 불과 10여 일만에 상하이로 갔다가 이듬해 1월 말 김규식이 파리 강화 회의에 가서 파리 장서를 전달하고자 중국을 떠나면서 헤어졌다.

김규식은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으로부터 파리 강화 회의 조선 대표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할 적임자로 박용만을 선택하고, 저명한 미국 언론인이자 쑨원의 정치 고문이었던 조지 이프라임 소콜스키(George Ephraim Sokolsky)와 함께 파리에 가려 했다. 그는 박용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박용만 귀하

내가 장가구의 앤더슨 마이어社에 있을 때 한 두 차례 편지를 썼지만 보낸 편지에 대한 귀하의 답장을 받는 즐거움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지난 여름 귀하가 호놀룰루에 부재 중이라고 들었지만 그 이후 귀하가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귀하의 정확한 소재를 알지 못하기에 나는 이 편지를 어떻게든 한번 호놀룰루에 보내려고 합니다. 이 편지와 함께 오늘 아침 북경 신문 중 하나를 발췌해 동봉하는데, 그곳 의 귀하께서 관심을 가질만한 일입니다.

지금 나는 다음 달 무렵 이곳을 떠나 유럽으로 가려고 매우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친구 두어 명과 함께 여행을 하려고 하며, 그 가운데는 풍부한 경험과 큰 동정을 가진 미국인 언론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일한 문제는 재정문제입니다. 우리가 [재정확보에] 성공한다면 우리 출발일을 귀하에게 전보로 알리겠습니다. 그동안 귀하의 뉴욕 주소를 내게 알려주기 바라며, 그래야 우리가 유럽에 도착하기 전은 아니라고 해도 도착했을 때 내가 귀하와 통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귀하가 유럽에서 합류하길 바라며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을 위해 공보국(a Press Bureau)을 개설하고 운영하는데 조력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최소한 약 1년간 파리에 체류할 예정입니다. 귀하가 그곳에 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만약 귀하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더라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 역시 일하게 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귀하의 비용을 제공하기 위해 그곳 우리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우리가 이쪽에서 건너가는 일행의 비용에 충분한 금액을 얻을 수 있다면 일을 잘 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필요한 모든 책자, 문헌, 자료 등을 가져오십시오.

우리가 출발하기 전에 귀하의 답장을 받을 시간이 없기 때문에, 내게는 파리로 편지를 쓰는 편이 좋겠습니다. 봉투 안에 내게 보내는 편지를 동봉하고, 겉봉에는 다음 주소를 기입하십시오.

조지 E. 소콜스키씨(Mr. George E. Sokolsky)

프랑스 파리, 미국 대사관 “지시받을 때까지 보류”

내 이름은 안봉투에 쓰고 상기 주소로 사본을 보내십시오.

경구

김규식(J. K. S. Kimm).

그러나 박용만과 소콜스키는 그의 요청에 응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프랑스에 한국인 입국 제한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3일 주 프랑스 일본대사관은 프랑스 외무부에 한국인 입국 제한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일본이 소유한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려고 하는 한국인들이 프랑스에 입국해 평화회의에서 활동을 재개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프랑스 공화국 정부가 관할 당국에 필요한 지시를 하달해서 난파된 선원들을 제외하고 일본 여권이나 일본 외교관원 혹은 영사직원이 발급한 사증을 소지하지 않은 한국인은 평화회의가 폐회될 때까지 프랑스 입국이 허가되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로 인해 박용만 뿐만 아니라 대한인국민회에서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하려 했던 이승만정한경 등도 파리로 가지 못했다. 미국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이들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김규식은 단신으로 가기로 마음 먹고, 1919년 1월 말 베이징 주재 미국공사에게 협조를 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북경공사관 공보위원회(the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의 칼 크로우(Carl Crow)는 김규식을 접견한 뒤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라인쉬(Paul S. Reinsch)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중국과 시베리아의 한국혁명당을 대표하는 한 한국인이 한 주쯤 전에 상해를 출발해 파리로 떠났다는 사실을 보고합니다. 파리에서 그는 한국독립 요청을 제출할 것을 희망합니다. 이 사람은 중국여권을 가지고 청춘웬(Chung Chun Wen: 김규식의 가명)이라는 중국이름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상당한 지원을 향유하며 미국인들과 영국인들로부터 다수의 소개장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프랑스 우편선 포르토스(Porthos) 호를 타고 43일간 항해한 끝에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YMCA가 주관하는 강연 활동을 재개하려던 호머 헐버트와 만났고, 뒤이어 안중근의 종부성사를 집전했던 조제프 빌럼 신부를 만나 '간독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두 사람으로부터 상당한 자금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은 1919년 5월 27일자 신한민보에 다음의 글을 게재했다.

내가 헐버트 박사의 온전한 시간을 허비하여 우리의 일을 보아달라고 간청한즉 그이도 지금 보는 청년회 사무를 내려놓고 우리의 일을 전무하기로 힘써 보았으나, 오는 10월까지 청년회의 일을 보아주기로 계약한고로 그것도 맘대로 되지 못하였다.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당시 파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통신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3.1 운동에 관해 4월 2일까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한 이래 일주일간 호텔에 머물다가 파리 외곽에 위치한 현지 중국인 이유잉(李煜瀛)의 집에 거주했다. 이유잉은 국민당 정부와 밀접한 인사로, 김규식은 쑨원과 만역했던 신규식을 통하거나 국미당 인사들과 친밀한 관계였던 소콜스키를 통해 이유잉을 소개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받자, 4월 14일 샤토덩 38번지로 이주한 뒤 "한국민대표부"와 "한국통신국"을 설치하고 홍보 활동에 들어갔다. 이후 김탕(金湯)이 5월 초순, 이관용(李灌鎔)이 5월 18일, 여운홍(呂運弘)이 6월 3일, 황기환이 6월 3일, 조소앙이 6월 말에 도착하였다. 또한 비서로 마담 마티앙, 그리고 2명의 타이피리스트와 2명의 프랑스 남자 사무원을 고용하여 총 11명으로 한국대표단의 진용을 갖추었다.

김규식은 <통신전(通信箋, Circulaire)>을 발행하여 이를 각지로 송부하는 한편, 언론 기고, 서신 발송, 소책자(브로슈어) 간행, 한국문제 설명회 개최 등 다양한 공보 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 12월에 발간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유럽 각 신문에 한국문제가 게재된 건수가 파리 80종 323건, 프랑스 각 지방 53종 100건, 유럽 전역 48종 94건으로, 총 181종의 신문에 517건의 기사에 달했으며, 프랑스의 경우 133종 신문에 423건의 기사가 게재되었다고 한다. 통신전은 영어 또는 프랑스어로 작성되어 유럽 내 각 언론기관과 강화회의의 각국 대표 및 저명인사들에게 송부되었다. 이것은 한국의 현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 독립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신전은 1919년 4월 10일부터 1920년 12월 15일까지 총 23호가 발행되었는데, 매호 2,000부씩 발행하였다. 1호부터 18호까지는 타자로 일일이 작성되었고 9월 4일자 19호 부터는 인쇄판으로 발행하였다. 다만 황기환이 전쟁박물관도서관의 브들레(Beudeley)에게 보낸 9월 9일자 편지에 따르면, 통신전 제 6호는 미발행되었다고 한다. 통신전 제1호에는 상해에서 현순으로부터 4월 10일자로 수신된 전문(電文)을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대표단의 김규식 대표가 수령한 한국 사건들에 관련한 다음의 전보를 전해드립니다.


발신 : 상해,

수신 : 1919년 4월 10일 파리

3월 1일부터 현재까지 독립을 위한 시위 활동들은 한국 전역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0만 기독교인들, 2백만 명의 천도교인들, 1백만 명의 불교도인들, 모든 학생들과 젊은 문인들이 참가하였습니다. 소극적 혁명을 선호하는 우리의 민족대표들은 선언문을 배포하고, 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만세”를 외치면서 태극기기와 함께 시위를 조직하였습니다. 여성들은 매우 적극적입니다. 시위는 일본인들의 관공서, 상점들, 공장들에서 폭발하였습니다. 우리의 교회, 학교,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손병희, 길선주, 한용운은 우리 민족의 대표들입니다. 3만 2천 명의 남녀가 감옥에 갇히고, 남녀노소 10만 명이 부상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교통과 통신은 중단되었습니다. 일본은 끔찍한 능욕과 진압 행위를 자행하였습니다. 현순은 파리대표단의 수장에게 우리들의 요구들과 이유들을 알려주기 위해 전신을 보내는 것을 대표회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선교사들은 전 세계에 참상을 전파하면서 우리들의 보호를 위해 봉기하였습니다. 완전한 독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서명 : 현순

수신 : 한국통신국.

또한 통신문 제3호에선 “통신국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유럽 언론에 지속적으로 알릴 것입니다. 현재 한국을 지배하는 자들의 진짜 정책을 밝히고, 한국 문제와 관련된 모든 사실을 대중에 알리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입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통신전 제5호엔 전 일본 외상 고토 신페이 남작이 미국 일간신문 유나이티드 프레스와 가진 인터뷰를 반박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이에 앞서 고토 신페인 남작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은 스스로 자치할 능력이 없다. 자유의 시기가 올 때 제일 먼저 그들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질서의 확립을 위하여 우리 정부는 필요한 모든 수단을 잘 취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보고서는 너무도 과장된 것이다. 실제 혁명운동은 일본이 그들의 나라를 통제하기 시작했을 때 국외로 도망간 한국인들에 의해 이끌어진 것이다. 미국이 마찬가지로 멕시코의 일들에 관하여 간섭하기를 허락치 않는 것처럼, 일본은 미국이 한국 문제에 대하여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미국과 일본은 중국에서 강한 정부가 확립되는 데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다른 열강들의 이권은 지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식은 즉각 이에 반박하는 글을 통신전 제5호에 게재하였고, 프랑스 언론 르땅(Le Temps) 지에도 기고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편집장님,


4월 22일자 귀하의 신문에 뉴욕에서의 “고토 남작의 인터뷰”가 게재되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의 실제를 거론하면서 끔찍한 고토 남작은 말하기를: “한국인들은 스스로 자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유의 시기가 올 때에 일본은 첫째로 그들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다. 그때 까지는……”

만약 몇 줄의 글을 허락하신다면, 이 뛰어난 일본인이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귀하의 독자들에게 일러주고 싶습니다. 한국인들은 자치할능력이 있다 혹은 ‘능력이 없다’라는 것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한국민들은 자치할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체제에서 한국민들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왔습니다. 제한된 교육체계, 모든 천연자원과 경제적 이익들과 상업과 공업 그리고 공공지 또는 사유지들의 강제점유, 한국인들의 정신과 사고를 ‘탈 민족화’하려는 철저한 계획, 한국 민족의 근본을 소멸하고 한국어를 말살하기 위한 강경한 정책들, 이 모든 것들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기적적인 탈바꿈을 할 것이라고 과연 고토 남작은 생각하는 것인지요? ‘자유의 시기가 오면…’이라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현재 행정부서의 수장에서 말단까지 모든 직위는 한국인들을 대신한 일본인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360명의 재판관들, 또한 대부분이 한국인들이었던 여타 지방 행정 관료들 역시 강제병합 이후, 현재는 거의 모두 일본인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능력있는(?) 일본이 한국민들에게 돌려주는 ‘인도하고, 보호하고, 통제하는’(일본이 자주 되풀이하는) 수단들인것입니다!

일본은 이미 1905년 강제적 을사조약을 늑결하기 몇 달 전까지 한국의 독립과 보전을 위하여 그들의 확약과 보증을 반복했던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번 더 우리의 ‘독립’을 ‘보장할’ 첫번째 나라가 되고 싶다면, 만약 한국민들이 자치를 할 ‘능력이 있는지’ 혹은 ‘능력이 없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준거로서 재검토할―우리 민족이 독립을 선언했던― 아마도 바로 지금 그 ‘시기’는 왔습니다.

만약 일본이 그 제국주의 정책을 바꿀 수 있다면, 한국의 독립과 자유의사를 주어야 할 것이며 (미국이 쿠바에게 한 것처럼 필리핀 제도에도 시행할것을 바란다) 아마도 중국의 “진정한” 친구로서 일본은 극동의 ‘먼로 독트린 (Monroe Doctrine)’ 내에서 진정한 ‘인도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아!)……!

경구.

한국대표단.

한편 5월 12일 <르 골로아(Le Gaulois)> 지에서 프랑스 칼럼니스트 로베르 브뤼셀(Robert Brussel)이 조선에 대해 평한 글 '조선 철학자'를 읽고, 르 골로아지에 공개서한 형식으로 기고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편집장님,


저는 지금 귀사의 필자 로베르 브뤼셀(Robert Brussel)이 쓴 “조선 철학자”라는 해학적인 기사를 마치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즐거움과 동시에 한국국민으로서 서글프게 읽었습니다. (내가 만약 한국인이 아니라면) 이 기사의 즐거움만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예민한저의 애국심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브뤼셀씨의 눈으로 한국은 “매혹적이고 조금 우스꽝스러운” 나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이라고 하는 게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1871년의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강제 병합했던 독일처럼,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1910년 8월 22일부터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조선)”를 위한 다른 수식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브뤼셀씨는 일본 외무부 장관인 고토(Goto) 남작이 일본 국회 연설 중에 “자치”에 대하여 언급했다고 했습니다만, 우리 한국민들은 한국의 “독립”을 말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고토 남작은 언행 일치를 하여야 할 것이고,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출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소원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또한 ‘한국민회(Association nationale coréenne)’로 부터 부여받은 저의 임무(사명)이며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임무를 신의 가호와 함께 반드시 완수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편집장님께서 이 글을 받아주실 것을 정중히 바라며 …

경구.

김규식(J. Kinsic S. KIMM),

한국 민족과 국민의 대표자.

로베르 브뤼셀은 김규식의 공개서한을 읽고 편지를 보내 자신의 글에 대한 해명을 하였다. 이에 김규식은 5월 19일 답신을 보내 감사와 경의를 표했다.

1919년 5월 19일


로베르 브뤼셀씨께,

보내주신 편지에 선생의 정중함과 진심이 어려 있어 송구스럽고 감사했습니다. 제가 파리에 도착한 이후 제게 보여주신 선생의 호의와 존중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저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정의를 수호하는 세기의 투사이자 약자들의 변호인, 또 억압받는 이들의 보호자였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이 나라 국민들이 고난 가운데 있는 한국의 대표자에게 보여준 호의로 인해 이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해들은 사실로 미루어 저는 프랑스 여론이 우리와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 우리의 독립 회복을 축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여론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지도자들에게도 반향을 울릴 수 있을까요? 우리와 동일한 상황에 처했던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주권을 인정받은 것처럼 우리도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얻어내 이를 행사할 수 있을지요? 이는 한국인들이 제게 맡긴 중대 사명이며, 저는 이 사명을 제가 가진 능력과 용기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다름없는 이 항쟁 속에서 당신이 제게 준 편지 같은 글들이 저에게 소중한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진심을 다해 감사드리며 르 골로아(Le Gaulois)紙에 실렸던 저의 항의문 내용 중 선생에게 특별히 해가 될 것은 전혀 없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단순한 ‘호소의 외침’이었습니다.

(저를 만나게 된다면) 선생이 아마도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한국인 철학자 동료를 보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제게도 프랑스혁명을 이끌었던 13세기 저명한 철학자의 직계 자손 중 한 사람을 보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며칠 안으로 선생을 방문할 기회를 가지고 싶습니다.

큰 존경과 호감을 드리며.

1919년 5월 19일, 김규식.

1920년 9월 5일자로 발간된 통신전 제20호에는 렁떵뜨(L’Entente) 지에 실렸던 파리지역 국회의원 샤를 르부크(Charles Leboucq)의 글 <한국과 윌슨주의자들의 원리(La Corée et les principes Wisoniens)>를 수록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련하고 순박한 한국!”이라는 조르즈 듀크록(Georges Ducrocq, 1874~1927)의 귀여운 책이 바로 내 눈앞에 있다. 여기에는 매혹적인 것들이 가득 담겨 있다. 초가 지붕으로 덮인 큰 도시만이 아닌, 이 차분한 “조용한 아침” 의 나라의 수도에 사는 맛을 느껴보자. “서울의 집들은 비록 부유하진 않으나 행복한 농부들이 그들의 밀집모자 아래에 감춰져 있는… 화덕에 불이 지펴지고, 집안에는 그들의 행복과 장작불이 사그라들지 않도록 살피는 아낙네들이 있다.” 도시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정오 무렵 남산에 올라 그곳에서 나뭇가지사이로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다. 산등성이에 오르면 “악하지 않다; 무악(無惡)”라는 이름을 가진 파수꾼의 딸이 있는 작은 암자가 있다. 듀크록씨가 말하는 이 이름(무악)은 한국 전체를 상징하는 별칭일 수가 있다. “어떤 이들은 행복을 위해, 또 다른 이들은 불행을 위해 태어났다.” 온화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 작은 사람들은 그들을 삶을 관통하는 온갖 부당함과 잔혹함들을 질겁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다.


사실,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서울은 요즘 평온하지 않다. 이 온화한 나라를 일종의 감옥처럼 통제, 보호, 감독하는 조치를 취하는 일본은 끔찍한 잔학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감옥은 돌연사, 고문들을 행한다고 얘기하는데, 하여튼 억지로 한국은 병합되었다. 엊그제, 사람들은 특히 이집트에 대하여 적용되지 않고 있는 너무 관대한 (윌슨의) 원칙들을 위험한 것으로 이야기하였다. 한국의 사례는 이집트의 경우와 명백히 동일하다. 한국 민족과 국가는, 일본에 의해 늑약으로 체결된, 1910년 8월 22일의 ‘한국병합조약’을 무효이며 일어나지 않은 일로 증언한다. 한국민들은 그들의 독립선언을 주장하고 있다. ‘민족자결권’, 이것이 그 제안이다. 일본이 모든 방면으로 아무리 애써도 민족 자결권은 실재하고, 그것은 조약 수준의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만약 한국민들이 그것을 원한다면 윌슨 대통령에게 감히 이의를 제기 할 것인가?

1910년 한국이 일본에게 한 양도는 어떤 효력이 있는가? 한국민들은 그들의 황제가 강요당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한국 전체에 관한 모든 주권을 그의 이웃사촌 황제에게 영구적이고 완전한 방식으로 넘겨줬다. 1,500만 명의 모든 인구를 가축처럼 넘겨버렸다. 그 날부터 일본은 한국인들의 풍요와 교양을 빼앗았다. 일본은 학생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의 유학과 소위 “위험한 사고들”을 금지시켰다. 일본인 감독관들은 한국민들의 수입과 재산을 통제하면서 각 개인들을 일본에 동화시켜 버렸다. 일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다. 자신들이 순교자들이고 민족통일주의자들이다. 일본은 혁명을 유발시켰다. 1919년 3월1일 봉기한 “독립연맹”은 독립을 선언했다.

수주 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임명된 대표단은 파리강화회의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틀림없이 그들의 목소리는 미약할 것이다. 더우기 우리들은 그 소리를 듣지 않는다. 다른 편은 더욱 단단하고 강한 동맹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8일 메세지에서 "모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의의 원칙, 다시 말해 약소국이든 강대국이든 서로 보호해 주며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권리"라고 정의한 제안들을 잊지 않는다. 일본은 1차 대전에 협력한 국가이며 동맹국으로서 14개 조항에 서명하였다. 어떤 술책으로 한국이 정의를 요구하는 권리를 거부하는지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한국은 스스로 자치할 능력이 없는가? 한국이 합병에 순수히 동의하였는가? 한국의 의병들이 비난받을 일을 저질렀는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단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Traité de Brestitovsk) 때까지 삼국협상 주둔지 내의 동부전선에서 5000명의 한인들이 싸운것을 상기한다. 그들은 자유를 중시하는 프랑스가 한국을 위해서는 왜 다른 나라에 견줄만한 권리를 부정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큰 사람이라도 하늘의 별을 딸 수는 없다”라는 훌륭한 한국의 속담 중 하나가 있다. 그들은 하늘에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그들의 초가 아래서 사는 것을… 땅에 평화를 요구할 뿐이다. 그들은 러시아 땅의 부스러기나 독일과 동맹하기 위하여 술책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남만주도 내몽골의 동쪽도 노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에게 숨막히는 “거대 장벽(만리장성)”을, 다시 말해 일본이 한국인들을 천국 같은 체제하에 살게 한다고 믿는 것을, 무너뜨려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진실, 인류애, 정의”와 같은 의미가 있는 좋은 단어를 이야기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라는 한국 속담 중 하나를 천진스럽게 알려주는 가련하고 온순한 한국은 우리(서구 열강들)가 약속했던 것들에 대한 믿음과 헛된 꿈들에 나약하게 버려져 있다.

샤를 르부크(Charles LEBOUCQ) 파리지역 국회의원.

샤를 르부크는 이 글에서 일본의 한국을 부당하고 잔혹하게 대한다고 규탄했다. 이와 더불어 '한일병합'의 무효력성을 주장하고,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14개 조항에 서명한 것을 상기했다. 그러면서 인류애에 기반한 한국의 독립을 간곡하게 호소했다. 샤를 르부크는 한국친우회를 조직했던 루이 마랭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김규식이 떠난 이후에도 한국에 대하여 많은 동정을 가지고 황기환과 한국대표부의 일들을 후원하였다.

한국대표단은 1919년 6월 30일 미 상원에 읿론의 억압하에 있는 한국의 보호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제출하였으며, 1919년 7월 16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일본 관헌에 의해 불법 체포되어 한국을오 추방된 윤원삼(尹愿三)과 신헌민(申獻民)의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 공문을 스테판 피숑 외무부 장관에게 보내어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관에서는 상해 총영사관에 “상해와 천진의 우리 영사들에게 당분간 일본 영사가 한국인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제시할 경우 그 승인을 바로 거절하지는 말되 피의자들의 체포를 지원하지도 말 것”을 지시하는 공문을 보내었다. 그러나 이미 한국으로 추방된 후의 일이라 결과 없이 종료되고 말았다.

한국대표단은 통신전과 더불어 중요한 몇몇 홍보물을 제작했다. 1919년 9월 간행된 <한국의 독립과 평화>는 35쪽 분량으로 6,500부가 제작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최남선의 요청으로 작성된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시 '패자의 노래'


2. 국가와 민족

3. 한국과 일본

4. 일본 지배하의 한국

5. 한국민족의 독립운동

6. 한국에서의 일본의 잔인성

6. 일본제국의 대륙정책

그리고 부록으로는 다음이 게재되었다.

1. 독립선언서


2. 한국민족의 열망과 목표

3. 제 조약문(1876년 조일수호조규, 조선과 서구열강이 맺은 조약들의 발췌문, 1893년 시모노세키 조약, 1905년 을사조약)

또한 통신전을 송부하면서 홍보용으로 <한국의 독립운동(The Korean movement)>과 청년한국(Young Korea)을 첨부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국판 크기보다 더 작은 40여 쪽의 브로슈어로서, 1919년 상하이 대한적십자사에서 출간한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이다. 이 책자에는 영문독립선언서, 자유를 위한 한국의 외침, 일본의 군국주의 등의 글들이 실렸고, 3.1 운동과 그 진압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알려주는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가 촬영한 사진들이 수록되었다.'청년한국'은 1919년 북미와 하와이에 있는 한인 학생들로 조직된 ‘미주한인유학생회'가 발간한 30여 쪽 분량의 잡지로, 안창호, 이승만, 서재필 등의 미주 독립운동의 지도자들과 미국인 스펜서 던쉬 이어빈(Spencer Dunshee Irwin 등이 기고한 총 12종의 칼럼이 게재되었다. 이 잡지는 3·1운동 이후 한국 관련 칼럼으로 채워졌는데 미국 교회들의 서신, 한국과 한국의 압제자, 한국 상황의 요약(동양의 벨기에), 미국에서 일본의 선전, 강화회의와 한국의 운명, 국제적 도덕성, 한국의 독립운동, 미국과 국제연맹 등의 주제로 구성되었고, 영문으로 제작되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조인되기 직전, 김규식은 혼백에게 편지를 보내 윌슨 대통령, 하우스 대령, 랜싱 국무장관 등과 함께 “비공식적인 통로일지라도 한국의 심각한 상황에 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언급할”기회를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혼백은 이 편지를 수신한 뒤 미국평화협상위원회에게 한국대표부의 대표와 인터뷰를 고려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김규식은 6월 30일 미국대표단과 만나 한국문제를 보고하였다. 그후 7월 28일 동양정치연구회에서 한중문제연설회를 개최하였고, 당일 또다시 국민정치연구회에서 한국문제 보고회를 가졌으며, 7월 30일에는 한국문제 제2차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이렇듯 파리에서 여러 활동을 전개했으나, 한국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정식의제로 상정되지 못했다. 이는 파리강화회의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 한계였다. 이 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모여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 재분할 문제를 논의하는 승전국들의 ‘잔치’였기에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 ‘조선’ 문제는 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매우 열악한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역동적인 홍보 및 언론 외교 활동을 펼친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나 힘이 지배하던 당시 국제사회 현실은 너무도 냉엄했다. 결국 김규식은 별다른 성과가 없자 심히 좌절하였고, 1919년 8월 8일 김탕, 여운홍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규식은 미국에서 좀더 효과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고 싶어했다. 1919년 5월, 그는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그동안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사업과 이곳의 우리 대표부와 관련된 여러 문제 및 신임장 문제 등이 적절하게 처리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우리가 일을 좀 더 잘 꾸려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태동으로 일을 더 잘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만약 소문대로 9월에 국제연맹 제1차 회의가 워싱턴에서 개최된다면, 저는 최소한 잠깐이라도 미국에 가서 귀하와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직후, 그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국제연맹이 워싱턴이 아닌 제노바에서 열린 것이다. 하지만 재정 여건이 좋지 않아서 유럽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부위원장 이관용에게 위원장 대리 직을 맡겼다. 그러나 이관용은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여하느라 스위스 제노바로 떠났다. 그래서 한국대표부는 파리에 남아있던 황기환을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황기환이 1923년 11월 13일 요절한 뒤 해체되었다. 한편 김규식은 파리에서 다하지 못한 외교선전활동을 미국에서 하려고 했으나, 그를 맞이한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외교선전활동은 자신이 맡아야 하고, 김규식은 재미동포들을 상대로 '공채표' 발매를 통한 재정후원금을 거두는 선전원을 맡아주길 희망했다. 그는 김규식을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앉혀서, 이승만파와 안창호파를 중재하게 하였다.

김규식은 1919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만 1년간 미국 서부일대를 중심으로 순회강연회를 강행하며 구미위원부 이름으로 발행한 공채표를 판매하여 1만 6천여 달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그러나 공채표 발매문제는 매우 힘들고 피곤한 일이었다. 평소 건강치 못한 몸으로 순회강연을 강행하는 일도 힘든 일이지만 오래 전부터 대한인국민회가 임정 재무총장의 위임을 받아 ‘애국금’ 모금을 진행하면서 여러 문제가 생겨났다. 즉 구미위원부가 새로 결성되고 공채표를 발매하자, 자연히 국민회 중앙위원회와 구미위원부 사이의 갈등이 야기된 것이다. 또한 구미위원부 운영을 하면서 모금액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문제를 놓고 이승만과 심한 갈등을 벌여야 했다.

여기에 국제연맹 결성을 주창하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전국을 순회하던 도중에 쓰러져서 정상적인 활동이 힘들어지게 되면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려던 그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잇달은 좌절로 인해 오랜 지병이던 편두통이 더욱 심해져 뇌종양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는 결국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서재필에게 “그들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들은 그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상해로 가서 그곳 문제를 조정하는 데 일조하겠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논리적 결론인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하와이에서 한달간 요양 생활을 한 뒤 1921년 1월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상하이에서도 독립운동 세력간의 갈등이 심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떻게든 중재에 나서려 했지만 상호간에 불신과 반목의 골이 너무 깊어서 그러지 못했다. 이에 독립운동 일선을 떠나기로 하고, 임시정부 학무총장직 등 일체의 공직을 사임하고 남화학원을 세워 중국에 유학 오는 한국 청년들을 가르치는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다 1921년 11월 여운형 등 56명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가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려 하였다. 대표자 일행은 각자마다 ‘조사표’라는 이름의 12개 항목의 신상명세서를 작성했다. 이때 김규식 자신이 작성한 명세서에 따르면, 생년월일을 1881년 1월 29일로, 직업은 교육가로, 교육정도는 고등(高等)이라 적었으며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로 6개 국어(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를 적었다. 또한 자신을 ‘이르쿠츠크 공산당의 ‘후보당원’이라고 밝혔는데, 아마도 소련의 원조를 받아내려고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극동민족대회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김규식 등은 곧장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한국 참가자 대표 자격으로 행한 개회 연설에서 사회주의에 상당히 경도된 모습을 보였다.

모스크바는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의 중심지로서 극동 피압박민족의 대표자들을 환영하고 있는데. 워싱턴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다. (중략) 우리 조선대표들은 하나의 불씨, 세계제국주의, 자본주의 체제를 재로 만들어 버릴 불씨를 얻기 위해 모스코바에 왔다.

또한 이즈음에 발표한 "아시아 혁명운동과 제국주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종종 극동의 혁명 과업과 연관하여 ‘연합전선’과 ‘협동’의 필요성에 관해 언급해 왔다. 최근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적 힘이 동아시아 전체를 연대 착취하기 위해 어떻게 결합했는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글에서 한국의 독립은 국제적역학관계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했고, 향후 한국의 독립운동 양태는 “혁명적ㆍ급진적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그 이유는 그들이 싸운다고 해서 더 이상 잃을 것도, 싸우지 않는다고 더 나을 것도 없기에 그들은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그는 이 시기에 민족해방운동에 방점을 두고 피압박 약소민족들과의 통일전선운동으로의 연대를 강조했다. 외교 활동에 초점을 뒀던 그가 사회주의적, 무장 투쟁적 노선으로 전환한 것은 그동안 믿고 신뢰했던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열강들이 기대와는 달리 제국주의 힘의 지배논리에서 약소민족의 비애를 경청하려 하지 않는 점에 대한 반작용, 곧 일종의 배신감 같은 분노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선과 위상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개조파와 창조파가 대립하는 국면에서 창조파 입장을 취했다. 그는 1923년 1월부터 3개월에 걸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 국무위원과 외무위원장에 선임된 뒤 임시정부 해체를 촉구했다. 그리고 창조파의 새 정부를 연해주로 옮기고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원을 기대했다. 마침 코민테른과 소련이 이때까지는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해 1923년 9월 김규식 등 국민대표회의 대표들이 다시 소련에 입국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규식 일행은 그해 말까지 연해주에 머물면서 코민테른과 구체적인 접촉을 갖고 ‘민족혁명당’으로서의 한국독립당 조직 문제 등을 논의했다. 김규식은 이 기간동안 군무담당 국뭉위원인 지청천과 공동명의로 코민테른 극동국 꼬르류로 의장에게 비망록을 보냈는데, 이 비망록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현재 실질적인 조선공산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인민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두 요소가 조선 민중의 해방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협력하여 민족통일전선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1924년 1월 서거한 뒤, 소련이 일본과 밀약을 체결하고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강제 추방한 것이다. 김규식은 이로 인해 심한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고, 1924년 5월 상하이로 돌아온 뒤 2년여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27년 2월 유자명, 이광제(李光濟), 안재환(安載煥) 그리고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왕조후(王涤垕), 인도인 간타싱, 비신싱 등과 함께 한국ㆍ중국ㆍ인도 3국 지도자들로 결성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같은 해 4월 한국 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에 집행위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눈에 띄는 민족운동을 벌이지는 않았다.

김규식은 1923년부터 상하이 복단대학(復旦大學)과 동방대학(東方大學)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이를 시작으로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와 학자를 맡았다. 1924년 모교인 로녹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1920년대 말부터 1945년 귀국할 때까지 영문학 교수와 저술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천진 북양대학교(北洋大學校)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36년부터는 성도(成都)의 사천대학(四川大學)에서 영문학 강의를 했고, 남경(南京) 중앙정치학원(中央政治學院)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문 저서 여러 편을 출간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입문(Introduction to Elizabethan Drama)>, <실용영문작법(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 <실용영문(Practical English>, 그리고 1945년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를 기념하여 <양자유경(揚子幽景) : 전승을 기념하여(The Lure of the Yangtze ; In Memoriam Victoriae)> 등이 그의 대표적인 영문 저서이다.

이렇듯 독립운동 일선에서 멀어져 있던 김규식은 1930년대 초반부터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2년 4월 윤봉길홍커우 공원 의거를 성공하자, 이에 고무된 그는 그해 1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운동자동맹 등 5개 혁명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집행부 외교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중한민중대동맹을 결성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통합시키기도 했다. 1933녀 1월 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한민중대동맹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가 여러 후원 단체를 결성하였으며, 수천불의 활동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이때 <원동 정세((Far Eastern Situation)>라는 제목의 등사물(謄寫物)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미일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이 승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국은 조선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획득하고 만주에서 일본이 장악한 이권을 인수할 수 있겠지만,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미일전쟁 발발을 대비하여 중국을 비롯한 동방피압박민족들이 연대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할 것을 강조했다.

1935년 6월 난징에서 기존의 통일동맹 대신 강력한 통일전선 정당을 표방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고, 김원봉, 김두봉, 지청천, 조소앙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민족혁명당은 당강(黨綱)을 통해 ‘봉건 세력과 일체 반혁명 세력의 숙청,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剝削)하는 경제제도의 소멸, 민중무장의 실시, 토지 국유제,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적 기업의 국영화, 국민 일체의 경제적 활동의 국가통제’ 등을 표방했다. 이러한 방침에는 실제로 민족혁명당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의열단의 견해가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김규식의 정치노선과는 불일치했다. 그렇지만 김규식은 '자필 이력서'에서 김원봉과 의열당이 민족혁명당을 좌지우지하는 데 불만을 표하면서도 민족혁명당의 노선 자체에는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는 민족통일전선이라는 대의 아래 자신의 개인적 견해와 입장을 자제하며 의열단 측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이 난징을 위협하자, 그는 일본군을 피해 각지를 떠돌다 1940년 충칭으로 이동했다. 이후 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김규식은 1942년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43년 1월 임시정부 선전부장이 되었고, 1944년 2월에는 임시정부 약헌 개정에 따라 새로 마련된 부주석에 취임했다. 그러다 8.15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 제1진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광복 이후[편집 | 원본 편집]

32년만에 조국에 돌아온 김규식은 신탁통치문제가 1945년말 불거지자 임시정부의 노선에 따라 신탁반대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성회의에서 결의한 문서 원문을 접하고 이를 신중히 검토한 뒤, 입장을 선회했다. 즉, 신탁통치는 반대하되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제1항인 임시정부의 설립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바탕삼아 발언권을 강력히 행사한다면 적절히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한국문제의 해결은 미, 소 양국의 합의가 이뤄질 때 가능한데, 신탁통치 문제에만 집착하여 모스크바 삼성회의 자체를 반대한다면 민족의 대표기관인 임시정부 수립이 뒤로 미뤄질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그는 이 견해를 측근들에게만 개진할 뿐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다. 반탁운동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송진우가 암살되는 등 정치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나서 자기 생각을 개진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6년 2월 14일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이 군정청 제 1회의실에서 개원했을 때, 김규식은 민주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의장은 이승만이었지만, 미군정은 이승만을 배제하고 김규식에게 의장 대리를 맡도록 하였다. 이승만은 극렬한 반소주의자였기에, 미, 소간의 합의를 저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김규식은 중도적 성향이고 합리적이었고, 신탁통치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그리 적극적으로 개진하지 않았기에, 미군정에서는 타협할 만한 인사로 봤다. 1946년 3월 20일, 김규식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지만,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양자간의 입장이 너무 달랐기에 결렬되었다. 이후 미군정의 정치고문을 맡던 버치 중위가 김규식에게 접근하여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해달라고 권유했다. 미군정은 한반도에서 자국의 이익에 큰 손상을 입지 않게 위해, 그리고 소련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중도파 인사를 끌여들어야 했다.

김규식은 처음에는 국내외 정국이 너무 복잡하여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미군정의 권유가 집요한 데다 이승만까지 나서서 종용하자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1946년 10월 7일 우파 대표로서 좌파 대표로 나선 여운형과 함께 합작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두 사람은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완전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수긍하는 입장에서 미소공위 재개 촉구를 통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이뤄내고", "토지개혁,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처리, 입법기구 문제에 대한 기본방침"을 밝혔다. 미군정은 이 7원칙에 대하여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좌파는 입법기구 설치 문제 등을 문제삼았고, 우파는 토지개혁 문제를 문제삼았다. 결국 7원칙은 이념 대립이 극렬하던 정국으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김규식은 1946년 12월 12일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맡았다. 입법의원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의정치 기관이었지만, 군정법령 118호 제5조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직무 및 권한'에서 입법의원에서 제정된 법령은 군정장관이 동의하여 합법적으로 서명날인하고 관보에 공포하는 때에 법률의 효력이 있다고 규정하였기에 큰 힘이 없었다. 정원은 90명이었는데, 그중 관선의원 45명은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추천한 중도적 인사들이어서, 김규식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김규식은 이러한 입법의원을 정력적으로 이끌면 여러 법안을 제정했다. 한민당 계열이나 토착 지주세력, 독립촉성회 계열이 다수를 차지한 민선의원 45명이 토지개혁, 친일파 처벌 등을 강력히 반대하였기에, 입법의원은 파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 미군정의 실정으로 인한 식량난을 해결해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급기야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측대표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여기에 미소공동위원회가 계속 결렬되고 9월 17일 미국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결국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 6일 전체회의에 의해 발전적 해체를 결의하였고, 12월 15일 해체를 선언했다. 이후 14개 정당과 5개 단체의 대표 및 개인으로 이뤄진 종도파의 결집 단체인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었다. 김규식은 이 연맹의 위원장을 맡았으나, 독자적인 대중조직이 없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합리적이고 온건한 노선을 추구해 명망높았던 그였으나, 지지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과 주장의 정당성을 과신한 나머지 대중조직의 필요성을 묵과했던 것으로 보이며, 정당을 조직하여 정쟁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더러운 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한국총선거안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설치안, 정부 수립 후 미소 양군 철군안을 가결하였다. 이후 1948년 1월 23일 소련 측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38선 이북 입국을 거절하자, 2월 26일 유엔 소총회가 유엔 한국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 즉 남한 지역에서 단독 선거를 치르기로 합의하였다. 김규식은 이보다 앞서 유엔 한국위원단과 접견한 뒤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북행이나 남한선거 감시 여부를 불문하고, 소의 주장이 한인문제로 남북한인이 모아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하자 하였으니, 이에 근거하여 남북 요인회담을 알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회담을 남한에서 하는 것이 좋을 줄 안다.

이후 남한에서 단독 선거가 열리게 되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측근에게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자리를 물러나고 모든 정치적 행보를 중지하겠다는 뜻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다 김구의 권유를 받아들여 북한과의 정치협상을 꾀했다. 그는 남북협상도 하지 않고 민족이 분열된다면 민족지도자로서 너무나 무책임한 짓이라 여겼다. 그러나 북행은 쉽게 결정되지 못했다. 그 자신이 북한 관계자들의 의도를 불신했고, 많은 이들이 북행을 만류하기도 했다. 민족자주연맹 내 여러 인사들은 가맹 단체들이 북행을 하는 것에대해서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지만, 김규식이 직접 참가한다면 장차 정계에 미칠 악영향이 크다며 반대했다. 또한 미군정에서도 김규식을 장차 설립될 중앙정부의 중요 인물로 등장시키려 하였기에, 비치 중위 등을 보내 북행을 만류했다. 이에 김규식은 북한 측에 다음의 5원칙을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1) 여하한 형태의 독재정치라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를 건립할 것


2)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3)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여하한 외국에도 군사기지를 제공치 말 것

5) 미소양군 조속철퇴에 관하여서는 先而 양군당국이 철퇴조건 및 기일 등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을 주장할 것.

북한 측은 5원칙을 무조건 접수하겠다는 뜻을 보내왔고, 1948년 4월 18일 문화인 108인 연서 남북협상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김규식은 평양으로 가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1948년 4월 21일 북행길에 오른 김규식은 다음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와 김구 선생은 우리의 손으로써 조국을 통일시켜야 한다는 데서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북조선 동지들은 우리의 제안을 접수하였다. 나는 오직 남북 정치지도자가 한 자리에 앉아서 성의껏 상토하는 것만이 통일단결의 기본공식이라는 신념에서 북행을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김구 등과 함께 38선을 넘은 김규식은 평양에 도착한 뒤 평양의 특별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평양의 특별호텔에 있을 때 김원봉, 허헌, 박헌영 등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환영 피로연에서 "우리는 우리 장단에 맞추어 우리춤을 추자"며 자주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남북연석회의가 북한 정부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일종의 '쇼'라는 걸 깨닫고,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병을 이유로 숙소에 머무르며 한 번도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1948년 4월 23일 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전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결정되었고 4월 25일 평양방송이 결정서와 격문을 방송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북한 정부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었기에, 남한 측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김규식과 김구는 5월 6일 귀환보고서 성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금반 우리 북행은 우리 민족의 단결을 의심하는 세계 인사에게는 물론이오,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는 다수 동포들에게까지 금차 행동으로서 많은 기대를 이루어 준 것이다. 그리고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는 우리 민족도 세계의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행동으로서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5월 14일 북한이 남한으로의 송전을 중단했고 이에 남한도 즉시 북한 송전을 중단했다. 북한에서 남북협상 당시 끊지 않겠다고 약속한 송전을 끊어버림으로서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김규식 등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하지만 그는 통일정권 수립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앗다. 1948년 7월 21일 민족자주연맹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했다. 통일독립촉진회는 "1. 통일독립운동자의 총역량 결집을 기함 2.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꾀함 3. 민족강토의 일체 분열공작을 방지함"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그러나 남북분열은 끝내 실현되었고,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면서 통일독립촉진회의 활동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그후 민족자주연맹 상임위원회를 주기적으로 열고, 국제정세와 남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토의한 뒤 담화문을 발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치활동을 벌이지 않았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초대 국회의원선거에는 불참 입장을 밝혔던 김규식은 이번에는 당선가능성이 높은 민족자주연맹계열 인사들에게 입후보를 권유했다. 그러나 선거가 치러진 지 한달도 못 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김규식은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체류했다. 그러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뒤 서울로 진격하자, 북한군은 1950년 9월 18일 김규식을 납북했다. 당시 천식과 심장병에 시달렸던 그는 북으로의 강행군을 견딜 수 없었고, 결국 1950년 12월 10일 밤 만포진 근처 어느 민가에서 사망했다. 사후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윤경로, <김규식의 신앙과 학문 그리고 항일민족운동>, 한국기독교역사학회, 2011.[1]
  • 황의서, <해방 후 김규식의 정치적 행동 재평가>, 한국윤리학회, 2002.[2]
  • 정병준, <1919년, 파리로 가는 김규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3]
  • 이유나, <1946~1948년간 김규식의 통일민족국가 건설운동>,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1.[4]

각주

  1.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회에 참석했을 때는 박경(Pak Kieng)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2. 6년간 평균 성적이 92.16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