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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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玘煥(또는 黃杞煥, 黃紀煥).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포상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황기환은 평안도 순천군(현 평안남도 순천시) 출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드망즈주교 일기' 1920년 3월 12일자 기록에 따르면, 그는 1888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가계가 어땠으며,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생애가 어땠는지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어서 알 수 없다. 황기환은 1904년경 미국으로 건너갔고, 1906년 6월까지 공립협회 레드랜드 지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특정 학교에서 정식으로 공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 걸 볼 때 아마도 독학으로 학업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여기에 지원해 유럽전선으로 파견되어 기독교청년회 소속으로 미국 병사들을 구호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그가 미군에 지원한 동기는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미국인으로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가 유럽전선에 있던 1918년 5월 9일 징집법이 공포되면서, 누구든지 전쟁 때 군복무를 하면 미국시민이 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개정된 징집법의 수혜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프랑스 파리에 남아있던 그는 김규식의 제안을 받고 미군 지휘관에게 부탁하여 허락을 받아 파리로 이동했다. 1919년 6월 3일 파리에 도착한 황기환은 김규식에 의해 한국대표부 서기장으로 임명되었다. 황기환의 미군 복무와 파리의 한국대표부 합류 사실은 중국신문 <신민일보> 1919년 8월 14일자 기사에도 보도되었다.

황기환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한국대표부 일원으로서 대유럽 홍보 활동 및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꾀했다. 김규식이 1919년 8월 8일 미국으로 떠나면서 부위원장 이관용에게 위원장 대리 직을 맡겼지만, 이관용은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여하느라 스위스 제노바로 떠났다. 따라서 한국대표부는 사실상 황기환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뤄졌다.

1919년 8월 23일, 황기환은 프랑스 신문 <라 프티 르프브리크(La Petit Republiq)>와 인터뷰했다. 그는 한국인이 요구하는 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자치나 개혁이 아니라, "한국에서 일본 행정의 철수, 일본이 강탈한 권한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한국인들이 피를 흘리는 것은 한국인들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절대적인 독립을 얻기 위해서이고, 한국인들은 일본정부가 한국에 도입하려는 개혁은 무엇이든 수용하지 않을 것이고,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과 일본이 화해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한국이 독립하고 양국 사이에 좋은 이웃 관계가 수립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인터뷰는 미국에서 간행된 한글신문 <신한민보> 1919년 9월 23일자 기사에 소개되었다.

1919년 8월 25일, 김규식은 워싱턴에 도착한 직후 구미위원부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와 동시에,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은 정식 서기장으로 임명되었고, 위원장 유고시 위원장 직무를 대리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황기환은 부위원장 이관용이 파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이관용은 8월 20일경에 도착하겠다, 8월 27일 이후 도착하겠다는 편지를 보낼 뿐이었다. 이관용은 9월이 되어도 파리로 돌아오지 않았고, 황기환은 이관용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을 뿐더러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이관용은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도 할 수 있었던 반면, 황기환은 프랑스어 구사 능력이 없어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논의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한국대표부가 지불해야 할 고지서들이 쌓여갔지만, 이관용이 돌아오지 않아서 돈을 갚을 여력이 되질 못했다.

여기에 이관용의 발언이 문제를 야기했다. 그는 루체른의 <라 파이예예(La Feui)>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동아시아에서는 사회적 문제를 자유롭게 해결할 수 있는 한 일본·중국 혹은 다른 어떤 나라의 지배 아래 있더라도 개의치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조소앙은 파리에서 이관용을 비난했고, 황기환 역시 김규식에게 편지를 보내 이관용의 발언은 잘못 되었으며, 신문기사가 오보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규식도 이관용의 발언이 '절대 국수적 독립정신'에 위배된다는 답신을 보냈다.

결국 이관용은 여러 문제로 인해 파리위원부 내 인사들과 마찰을 빛다가 10월 10일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이유로 부위원장직을 사임했다. 결국 홀로 파리위원부를 이끌게 된 황기환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어떻게든 한국의 독립문제를 상정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919년 대한민국의회 대표 자격으로 파리에 도착한 고창일이 파리위원부에 참여할 뜻을 밝혔지만, 미국에 있는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가 끝났으므로 그들을 한국대표부에 임명할 필요가 없고, 그들에게 급료를 줄 돈도 없다며 거부했다.

황기환은 런던에 고창일을 보내 대유럽홍보를 담당하게 하려 했지만, 김규식은 인력과 자금이 없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고창일은 윤해와 함께 <한국의 독립과 평화>, <자유한국> 등을 프랑스어로 발표한 뒤 1920년 5월 상하이로 돌아갔다.

이처럼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황기환은 1920년 1월 8일 인권옹호회와 오랜 동안 의논 중이던 한국문제대연설회를 중국문제와 함께 파리지리연구회에서 개최하였다.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된 연설회는 프랑스 하원 특파로 한국과 중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파리대학 교수 샬레(Félicien Robert Challaye)의 한국독립운동 목격담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참살당한 인물들을 수록한 슬라이드 상영, 사동발(謝東發) 박사의 한국근세사(韓國近世史) 보고로 이어졌다.

2월 11일, 황기환은 '뉴욕 헤럴드' 파리지부와 인터뷰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한국문제는 한국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고, 한국인은 자유와 자결을 위해 제국주의와 싸우는 중이며, 이천만 한국인의 요구는 절대 독립으로 어떠한 강압도 한국인의 기백을 꺾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한국독립군이 볼셰비키의 원조로 일본군을 격퇴했다는 워싱턴 발 뉴스는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3월 12일, 황기환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드망즈(Florian Deman)[1] 주교와 면담했다. 드망즈 주교는 황기환이 당시 32세이고, 서울에서 가톨릭 신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세례성사를 받았고, 12년 전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으며,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2년간 프랑스에서 전쟁을 하였으며, 동원이 해제된 후에도 계속 남아 있다고 기록하였다. 황기환이 그를 방문한 이유는 드망즈 주교로부터 한국 상황을 정확히 전해듣고, 선교회의 지원을 받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없어서 분명하지 않다.

1920년 5월 10일, 김규식은 파리대표부를 영국 런던으로 이전시켜 구미위원부 런던지부로 삼기로 결정했다. 김규식은 황기환에게 편지를 보내, 이 결정은 프레더릭 매켄지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과 상의한 결과라며, 2달 이내에 런던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황기환은 파리사무소 폐지는 불가하다고 주장했지만, 김규식이 파리사무소도 유지되기를 바라지만, 그럴 돈이 없고, 유지비가 있다고 해도 관리자가 없다며 거부했다. 황기환은 자금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으며, 자신이 책임지고 사람을 구해보겠다고 답신했지만, 김규식은 비현실적이라며 부정적인 답장을 보냈다.

이에 황기환은 재차 편지를 보내 자신이 런던에서 어떤 직위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김규식은 파리에 본부를 둔 ‘유럽주재 한국사절단의 사무총장 겸 대리공사'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황기환이 가지고 있는 파리사무소 서기장이라는 신임장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황기환 입장에서는, 파리사무소의 서기장일 때와 런던으로 사무소를 옮겨 일하는 것이 같지 않는데도 김규식이 애매모호한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김규식은 황기환이 런던에서 한국인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런던사무소를 마련한 후 어떻게 홍보활동을 해야 할지 자신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유럽사업예산 500달러 중 300달러를 런던에서 사용한다면, 그것은 양동이에 물 한 방울을 넣는 것과 같으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비관적으로 설명하였다.

김규식이 이렇듯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로 나오자, 황기환은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재정 문제, 황기환 부재 중 대신 일할 사람 문제, 그리고 황기환의 미국여행을 미주 및 하와이의 한인들이 매우 부정적으로 비판할 것이라며 미국행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의 어느 지역에서 2주 동안 휴식할 것을 제안하였다. 결국 황기환은 미국행을 포기하고 런던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1920년 9월 2일, 황기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런던위원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런던으로 가서 김규식의 의뢰를 받고 런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영국 정치인들에게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W. L. 윌리엄스에게서 런던 업무를 인수했다.

그리고 10월 26일 ‘대영제국 한국친우회' 창립대회에 참여하여 연설했다. 그는 자신이 런던에 온 이유는 영국이 민주주의의 원천이며 세계의 고통 받는 민족들의 등대이기에, 그리고 1883년 한영조약 체결 이후 좋은 친구였으니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런던의 자유교회, 세례교회, 예수교연합회에서도 한국의 참상을 보고했다.

1달 후 파리로 돌아온 황기환은 1920년 11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국제연맹 개회식에 공식대표로는 아닐지라도 개인적으로라도 참석하기를 희망하였다. 국제연맹의 운영에 관해 배울 수 있을 것이고, 한국독립을 위한 홍보활동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규식의 부재 중 구미위원부 위원장 대리 직을 수행하고 있던 현순으로부터 불가 통보를 받았다. 결국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는 신문을 통해 회의 소식을 들었다.

'뉴욕 헤럴드'지가 "일본은 영토에 대한 어떤 야욕도, 타 국가들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일본인의 발언을 게재하자, 그는 그 말의 진정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일본은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탄압하고 있으며, 한국은 한국을 위한 한국정부를 요구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파리와 런던 2곳을 동시에 담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황기환은 현순의 지시에 따라 런던에서 업무를 짐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현순이 워싱턴에 독단적으로 공사관을 설립하고 이승만 등과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현순은 런던사무소를 폐쇄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승만은 황기환에게 런던에서의 임무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겠노라고 하였다.

이렇듯 복잡한 상황에서도, 황기환은 런던과 파리를 오기며 대유럽 홍보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 4월 23일 이탈리아 샹레모에서 열린 평화회의 최고회의에 '한국독립안' 토론 요구를 갱신하는 취지의 전보를 보냈으며, 5월에는 잡지 <자유한국> 제1호를 프랑스어와 영어로 1,000부 발행했다. <자유한국>은 1921년 5월까지 발행되어 유럽의 각 언론기관과 정부 및 저명인사들에게 보내졌다.

1920년 12월에는 <구주의 우리사업>을 간행하여 설립 이후부터 추진한 파리위원부의 대유럽 외교화동을 정리했다. 이 책자의 언어는 국한문 혼용이었는데, 그것은 이 책자가 미주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관심을 두었던 한국인들을 열람 대상으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 책자에서, 영국은 지리와 언어 등에서 유럽 대륙과 특수한 관계에 있으므로 對유럽홍보활동 중심기관을 영국에 둘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영국은 유럽 대륙과 지리적으로 떨어져있고 영어를 사용하므로, 라틴어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대륙에서는 프랑스어로 홍보활동이 가능하기에, 어떤 난관이 있을지라도 파리사무소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미주, 영국, 프랑스 등 3곳에 기관을 鼎立하고 독일에도 기관 설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황기환은 국내 인사와도 연락을 시도하였다. 1921년, 황기환은 그해 2월에 귀국한 ‘길’이라는 청년으로 하여금 경성에 사는 ‘김 베시’를 방문하도록 하였는데, 소식이 없다며 그 청년을 방문하라고 ‘김 베시’에게 영문편지를 보냈다. 일제가 중도에 가로채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전달된 뒤 1921년 8월 12일 외무부에 보고된 편지에 따르면, 그는 영일동맹 갱신을 막고자 노력했고, 영제국대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홍보하기 위해 소책자 <영일동맹과 한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1921년 4월, 그는 런던경찰국에 소환당했다.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가 영국을 방문하려는 동안 암살하려 한다는 혐의였다. 이에 황기환은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한국인은 암살자가 아니다"라는 항의 서한을 보냈고, '더 스타', '데일리 익스프레스' 등 언론사들에도 한국인들은 일본왕자 암살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일본 당국자들이 그러한 소문을 퍼뜨렸음이 분명하다는 항의서를 보냈다.

1921년 6월 12일, 황기환은 영국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식민지수상회의에 참석한 수상들에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사람의 청원'이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배부하는 동시에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에게도 보냈다.

소책자에는, 4200년의 한국역사, 한영조약, 포악한 힘에 의해 맺어진 을사조약한일병합, 일제의 압제, 만주와 한국에서 상업권을 농락하고 한국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 것 등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성과는 없었다. 또한 1921년 6월 23일 프랑스의 한국친우회 결성식에 참석한 그는 매우 서툰 프랑스 어로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짤막한 연설을 하였다.

황기환은 홍보 활동과 더불어 파리에 온 한국인들을 돕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파리위원부는 러시아 무르만스크에 있던 한국인노동자 500여 명을 프랑스로 데려오기 위해 1919년 10월 4일 프랑스 노동부와 교섭을 시작하고 이사실을 무르만스크에 통지하였다. 무르만스크에서 철수하던 영국군의 보호로 500여 명 중 200명이 영국 에든버러(Edinburgh)에 도착 예정이라는 통지를 받은 황기환은 10월 15일 영국 런던을 거쳐 에든버러로 가서 한국인노동자 200명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영국 외무부는 주영 일본대사관으로부터 한국인들을 중국 청도로 데려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프랑스로 이송시킬 수 없다고 대답했다. 게다가 500명 노동자를 고용하겠다고 구두로 승낙한 프랑스 노동부에서도 프랑스인들이 동양노동자를 배척하기에 한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다고 통지하였다.

황기환은 어떻게든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200명 중 대부분은 동양에 보내졌고 홍재하 등 35명 만이 프랑스로 이송되어 11월 11일 파리에 도착하여 공장에 투입되었다. 이들이라도 프랑스로 가서 노동할 수 있었던 것은 황기환이 적극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노동자들은 노동을 시작한 11월 19일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를 조직하였다. 재법한국민회는 적십자회를 위해 850프랑을 모아 본부에 보내도록 황기환에게 위탁하였고,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6개월 동안 모음 60프랑을 파리위원부에 기부했다.

또한 황기환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일자리 알선에 나섰으며, 유럽에 온 한국인 유학생들도 적극 후원했다. <신한민보> 1920년 12월 16일자 '파리통신부 간청' 기사에서, 황기환은 파리에 온 학생 임장춘이 여비 부족으로 미주에는 가지 못하고 한달 동안 노동을 하다가 병을 얻어 8~9개월 동안 입원하였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도 없으니 300달러 여비를 마련할 수 있독록 도와달라고 신한민보 구독자들에게 요청했다.

런던과 파리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황기환은 1921년 8월경 워싱턴 회의를 준비해야 하니 와달라는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를 대신하여 대유럽홍보활동을 전개할 이는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은 유럽홍보 활동을 중단 내지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한민보> 1921년 12월 15일자 기사에 따르면, 워싱턴 회의에 참여한 그는 한 일본 의원이 일본신문과 지식계급에서는 한국 독립을 허가할 뜻이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는 걸 보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대가 일본 의회에 한국독립안을 제출하겠는가?

그러자 그 일본 의원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황기환은 워싱턴 회의 기간 동안 민찬호 목사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협조하는 등 구미위원부의 구성원으로서 적극 활동했다. 그러나 워싱턴회의는 파리강화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문제를 외면했다. 이후 그는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외교선전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23년 4월 18일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35~37세. 그의 유해는 퀸즈 메스패스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 사후[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황기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13년, 국가보훈처는 황기환의 묘를 처음 발견한 뉴욕한인교회의 요청을 받고 뉴욕에 실사단을 파견, 황기환의 유해를 현충원에 안장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황기환은 생전에 제1차세계대전에서 미군 장교로 활약해 무공훈장까지 받았기에,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 위해서는 뉴욕주법원의 승인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2018년 7월 7일~2018년 9월 30일에 방영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대중의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의 인기 캐릭터 유진 초이와 비슷한 삶을 산 황기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해졌고, 국가보훈처는 뉴욕총영사관과 협의를 거친 끝에 2019년 9월 28일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로 결정했다.[2]

그러나 황기환 유해 봉환은 예상과는 달리 차일피일 미뤄졌는데, 그 이유는 국가보훈처가 뉴욕주법원에 승인을 요청하면서 제출한 서류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보훈처는 황기환의 영어 이름이 EARL K. WHANG인데도 'karl k. WHANG'이라고 적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박효성 뉴욕총영사가 이 서류에 서명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정작 박효성은 서류가 도착했을 당시 총영사 직을 이임한 뒤였기 때문에, 서명 위조 의혹이 제기되었다.[3]

3 외부 링크[편집]

  • 윤선자, <1919~1922년 황기환의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 한국근현대사학회, 2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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