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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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翰景(또는 鄭漢慶). 미국식 이름은 Henry Chung.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0년 2월 28일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아버지 정용복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했다. 그러다가 그의 스승이자 박용만의 숙부인 박장현으로부터 서양 학문을 권유받고 이에 따라 서양의 학문을 수학했다.

1905년 14살 때 남감리교회의 주선에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이후 로스엔젤레스로 이동하여 한인선교회에 소속된 뒤 교회의 소개로 한 가정의 스쿨보이(가정부)를 맡았다. 그러나 가사일에 서툴려서 한 달만에 쫓겨났고, 1906년 박용만의 주선으로 네브라스카주의 커니시에 취직했다.

1908년 1월, 그는 박용만 및 한인유지들과 함께 해외동포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의하고 미주, 하와이, 러시아 한인 사회단체에 소집취지서를 발송했다. 또한 1908년 5월 박처후 등과 함께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작성하여 대표자회의에 상정했다. 1908년 7월 북미대한인애국동지대표자회의에서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이 통과되었다.

1909년 여름부터 첫 훈련이 실시되어 정한경, 조진찬, 임동식, 유일한, 박처후, 김용성, 김일신, 구영숙, 이관수 등 커니와 헤이스팅스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참가했다. 1911년 8월, 정한경은 ‘한인군사학교(한인 소년병학교)’ 제1회 졸업생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커니고등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학생신문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11년 발행된 교지에 그에 관한 인물평이 실렸다.

헨리 정(정한경)에 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나 할까? 그는 어느 연애소설가가 책 한 권에 넣을 수 있는 꿈을 단 한 문장에 집어넣을 수 있는 재능을 가졌으니, 독자 여러분들은 그의 미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함을 알지어다.

1910년 3월 버펄로 군내 웅변대회에서 아이티를 프랑스로부터 해방시킨 흑인장군 오버처에 대한 연설로 1등을 차지했다. 1913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대표로 선출됐고 1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졸업식에서 대표연설을 했다. 이어 1915년 네브라스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에는 네브라스카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8~19년,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의 연구원이자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기금을 받아 첫 저작인 <한국의 조약들(Korean treaties)>을 집필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은 완전히 독립된 국가였으며 1910년 독립을 불법적으로 박탈당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두번째 저서 <미국의 동양정책>에서는 아시아의 미국 정책, 특히 미국이 일본의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걸 비판했다.

한편, 그는 대한인국민회에서도 활동했다.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는 정한경에게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하나는 하나는 독립 국가를 주장하는 국가와 단체를 대표하기 위해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등장한 소약국동맹회의에 대표로 참석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들의 출국 허가를 거부했고, 정한경 등은 파리로 가지 못했다.

1919년 2월 2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 대표 명의로 이승만과 함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강화회의 각국 대표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열강은 한국을 일본의 학정으로부터 구출하라.


둘째, 열강은 장래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

셋째, 한국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 아래 두자.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한 그는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그해 4월 필라델피아에서 '한국 의회(Korea First Congress)'를 조직했다. 일본외무성 정보기록은 한국 의회에 참석한 조선인은 약 40여 명이고, 세브란스병원에 관련 있는 쿡의 아내 등도 출석하여 독립운동을 고양하고 일본관헌의 불법을 공격하는 성원을 하였다고 기술했다.

1919년 3월 20일, E.D. 소퍼 목사가 <뉴욕 타임스> 기자와 인터뷰한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소퍼 목사는 일본의 한국 통치에 부당한 권력 남용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명의 측면에서 아직 아이(children)에 불과한 한국이 그에 비해 청소년(adolescents) 쯤에 해당되는 일본에 통치를 받는 것이 효율적이며, 당장3.1운동 같은 소요사태가 한국인이 아직 독립할 준비가 안되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소퍼 목사는 3.1 운동의 발발 원인은 일제의 여러 실책도 있지만 소수 선동가들에 의해 확산된 민족자결주의가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정한경은 <뉴욕타임스> 지에 반론을 게재했다. “자치 정부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달라”는 소제목 아래,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은 기회의 평등에 있으며, 일본의 억압적 통치 아래 자신의 가능성을 발전시킬 원초적인 권리조차 유린당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실상을 고발했다. 국가첩보망을 동원한 일상적 감시, 언론 출판의 탄압, 고등교육의 차단 및 국외 유학 금지, 한국어 말살, 경제침탈에 이르기까지, ‘문명화’를 가장한 일본 통치의 민낯을 조목조목 드러냈다.

또한 한국인들은 파리 평화회담과 서양의 여론에 호소해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를 호소한다고 썼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한국을 자유경제지역화하고 동양의 완충지역으로 만들어, 단일 독점 세력에 의한 아시아 장악을 저지함으로써 이 지역의 평화를 견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19년 9월 이승만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정한경은 1920년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을 수행하도록 조직된 기구 '구미위원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재미교포의 애국성금 30만 달러를 모아 상하이로 전달했다.

1921년 4월 구미위원회 임시위원장 현순이승만, 서재필간에 분란이 벌어지자, 그는 이승만을 지지했다. 그해 9월 워싱턴군비축소회의에 파견되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지만 끝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1년 9월 워싱턴 D.C의 아메리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학위논문 제목은 <한국의 사정(The Case for Korea)>이었다. 이 논문은 책으로 출간되어 시중에 배포되었다.

<한국의 사정>은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개요, 한일외교관계사, 1910년 병탄 후 정치적 사법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전근대적 태형의 실상, 감옥 상황과 고문, 언론탄압과 민족성말살, 마약・매춘・도박 등 사회적 악의 의도적 유포, 기독교에 대한 박해, 독립운동 상황, 관제언론의 허위, 일본식 개혁의 허상 등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러나 이무렵 정한경, 이승만 등이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위임통치 청원 사건), 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현순 등이 강력히 비난했다. 특히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던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비난했다. 이에 정한경은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현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그때에 미주나 유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인들이 일인의 관할을 만족하게 여기는 줄로 생각하여 독립이라는 말은 입에도 올리지 못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때) 모든 권고를 받는 가운데 중국 정부의 정치고문으로 있는 젠크 씨는 우리가 먼저 미국통령에게 한국이 현금 일인의 관할에서 벗어나서 불원간 완전독립을 확실히 담보함으로 국제연맹회 위임 하에 두기를 청원하라고 권고했다.


이는 그때에 미국통령이 국제연맹회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권고를 미국의 유명한 이들과 중국과 한국의 여러 친우들에게 받았고, 또 나는 그때에 국민회 회장 안창호 씨에게 편지를 하였소이다.

각하와 내가 일체로 국민회 표원이 된 고로 하와이지회까지 포함된 바 우리가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두령 되는 주임자와 의론하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내가 어떻게 할 것과 미국 친우들의 의향이 포함된 회답을 받은 중 안창호 씨가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사건을 결정 처리 한지라.

국민회 임원회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을 작정하으니 곧 한국 이 일본의 관할에서 벗어나서 불원간 완전독립을 확실히 담보함으로 국제연맹회 위임통치 하에 두기를 청원하라는 공함이 온지라.

한 장은 1918년 11월 25일에 윌슨통령에게 보냈고, 한 장은 동년 12월 10일에 합중국 상원의원에게 보낼 때에, 나는 한국과 중국에있는 유력한 친우들과 여러 萬國公法(만국공법) 율사들의 의향을 참작하여 가장 편리한 것을 따라 윌슨 대통령께 보낸 것이라. 각하(현순)가 기억하는 바와 같이 이는 독립운동이 발생하기 이전의 일이라.

그러나 논란은 좀처럼 끊이지 않았고,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면직 처분 당한 뒤 하와이로 들어갔다. 이후 정한경은 정치 활동을 접고 La Choy Food Products의 영업 사원으로 근무했고, 1933년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이사갔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정한경은 각 신문과 <아시아> 등의 학술지에 소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1944년 10월 20일 임시정부로부터 주미외무위원회 위원 겸 비서주임으로 임명되면서 정치인으로 돌아왔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한국 대표단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남한에 미군이 진주하고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했다. 이에 그는 <한국에 온 러시아인>을 저술해 소련이 한국을 분단시키려 한다고 경고했다. 1948년 2월 미군정의 민간인 고문으로 고용되어 한국으로 귀환했고, 그해 5월 10일에 열린 제헌 국회의원 선거의 총감독을 맡았으며, 이승만을 대통으로 하는 초대 내각이 출범한 뒤 제헌 헌법 1차 초안 작성에도 참여했다.

1948년 12월 이승만으로부터 도쿄의 더글라스 맥아더를 예방하는 외교사절로 임명된 뒤 1949년 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주일 대표부 공사로 재직했으나 2달만에 사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6년 재차 한국을 방문하여 카이로 선언 이후 미국의 정책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이 연구에서 미국이 이승만을 지지한 것은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그는 박정희를 독재자로 지탄했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Korea and the United States through war and peace>는 금서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야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이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말년을 보내던 그는 1985년 6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정한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