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 전투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는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죽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들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을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 갈리폴리 전투 직전
갈리폴리 반도의 위성사진
갈리폴리 전투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15년 2월~1916년 1월
위치 터키 갈리폴리 반도 및 인근 해역
결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승리
교전단체
영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
병력:
본문 참조
병력:
본문 참조
손실:
본문 참조
손실:
본문 참조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부터 독일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접근하여 왔으며, 오스만 투르크를 경유하여 중동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한다는 3B 정책[1]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경우 오랜 적대국인 러시아영국과 가까워지자 자연스럽게 독일과 가까워지게 되었으며, 투르크군을 훈련시킬 독일군을 초청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의 잔데르 장군이 1913년 12월에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터키의 육군 감찰부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유럽에 전운이 감돌면서 영국은 자국의 조선소에서 건조중인 외국 함정 중 자국 해군에 사용 가능한 모든 함정을 징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중에는 오스만 투르크로 인도하기로 하였던 전함 2척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중 1척은 완성된 상태였다. 이러한 영국의 신조 전함 인계를 거부하겠다는 소식을 접한 오스만 제국 정부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틈을 타고 독일이 끼어들어서 독일은 자신들의 전투순양함 개밴(Gaeben)과 경순양함 브레슬라우(Breslau)를 투르크에 넘기는 것을 제안하였다. 당시 쇼혼 제독이 지휘중이던 이 두 척의 독일 함정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지중해에서 독일 본국으로 돌아갈 방법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이들은 영국프랑스의 감시망을 피하여 이스탄불에 입항하였다. 이들이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 날 오스만 투르크 정부는 두 함정을 구매하였다고 대외적으로 공포하였으나 승조원은 그대로 독일의 해군 장병들이 탑흥하고 지휘관도 쇼혼 제독이 그대로 있는 상태였다. 10월 하순에 쇼혼 제독은 투르크와 독일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흑해에 자리한 러시아의 주요 군항인 오데사, 노보로시스크, 세바스토폴 등지의 외해에 기뢰를 부설하고 러시아의 함선을 격침시키기까지 하였다. 결국 이러한 도발로 인해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도 전선이 형성되면서 1차 세계대전의 전선이 추가되게 되었다.

1914년 말, 유럽의 서부전선의 대치상태가 참호전의 양상을 띠면서 완전한 장기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의 대군에 대처하는 독일의 병력은 전체 전력의 20% 미만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이는 러시아군의 무장상태가 빈약한 정도를 넘어서 소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력이 상당수에 이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을 통하여서 부족한 무기를 공급받으려고 하였는데 문제는 러시아측이 미국과 교역할 수 있는 해상 교통로는 독일이 통제하는 발틱 해쪽 통로와 오스만 투르크가 통제중인 다다넬즈 해협을 통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이 이루어 질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서부전선의 교착상태를 해결보기 위하여 러시아를 제대로 무장시키고 독일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분산시키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또한 러시아의 남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수입하는 것을 함께 계획중이었다. 이를 위해서 영국의 전쟁위원회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공격하여 봉쇄된 흑해의 러시아 항구로 향하는 항로를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동맹국이지만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를 연합국 측으로 가담시킬 수 있으며, 동시에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들이 독립운동을 벌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유럽쪽 세력을 약화시킬 것을 기대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러시아가 영국에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해군측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주장하자 영국 전쟁위원회는 1915년 1월 13일 "이스탄불을 목표로 갈리폴리 반도를 포격하고 탈취하는 해군원정을 2월 말에 실시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다다넬즈 전투[편집 | 원본 편집]

연합국의 작전계획[편집 | 원본 편집]

영국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다다넬즈 봉쇄전대 사령관인 카든 중장에게 작전계획 보고를 지시하였으며, 1915년 1월 11일 보고한 카든의 작계는 다음과 같은 4단계의 공격계획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1. 다다넬즈 해협 입구의 모든 적 방어진지 파괴
2. 네로우스까지의 기뢰원에 대한 소해와 소해를 제원하기 위한 적 방어진지 제압
3. 네로우스의 적 방어진지 제압

4 네로우스에 대한 소해와 해안 요새를 포격하면서 네로우스를통과하여 마르마라 해에 진출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요청된 전력은 구식전함 12첨, 전투순양함 3척, 경순양함 3척, 전단 선도함 1척, 구축함 15척, 잠수함 6척, 수상기 4기, 소해정 12척 및 기타 보조 함선들이었다. 해군성에서는 이 계획을 승인하였으며, 프랑스 역시 구식전함 4척을 침공용으로 제공하는데 동의하면서 작전계획은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었다. 추가 증원 세력이 에게 해로 향하는 동안 이러한 대규모 작전을 지휘해 본 경험이 없었던 카든 제독을 보좌하기 위하여 처칠은 부사령관에 드로벡 소장을, 참모장에 키즈 준장을 임명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방어계획[편집 | 원본 편집]

오스만 투르크는 자신들의 다다넬즈 해협 방어를 에게해에 가까운 해협 입구 12마일 근방에 집중하였다. 다다넬즈 입구측 육지 끝단에 있는 4개의 해안요새에 27문의 해안포가 배치되어있었으며, 네로우스로 향하는 위쪽에는 12마일 거리에 11개의 요새에 88문의 포를 배치하고 있었다. 또한 이 두 지점 사이에는 해안을 따라 소구경의 해안포가 추가로 배치되었다. 이외에 독일의 원조를 받아 내로우스 근해에 기뢰를 잔뜩 부설하였으며, 기뢰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뢰원 부근에 포대를 추가로 설치하였으며, 야간에 몰래 소해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한 탐조등까지 설치하였다. 또한 해협 입구와 중간의 고지대 사이에는 이동식 곡사포를 배치하였다. 다만 투르크측은 요새 해안포의 대규경 포탄이 부족하다는 점이 약점이었다.

작전경과[편집 | 원본 편집]

1915년 2월 19일 아침 다다넬즈 해협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카든의 1단계 작계는 다다넬즈 해협 입구의 모든 방어진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갈리폴리 반도 끝단에 있는 헬레스 곶과 세드 엘 바 마을에 인접한 2개의 요새와 해협 건너편 아시아쪽 해안의 쿤 케일 마을 부근에 있는 2개의 요새가 주요 공격 표적이었다.

총사령관 카든 제독은 전투순양함 인플렉서블에 승함하여 기함으로 삼았다. 5척의 구식전함들은 해안포의 최대사거리 밖 외해에서 요새에 대한 사격을 시작하였다. 요새의 투르크군은 해안포의 사정거리에 전함이 접근하면 바로 발포하여 연합국 함정의 접근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부 함정이 손상을 무릅쓰고 가까이 접근하여 주간 내내 포격을 퍼부어 결국은 요새를 폐허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다음 단계로는 기상상황이 되는대로 함정의 육전대와 해병대가 해안 끝단에 상륙하여 함대가 파괴하지 못한 잔여 포대를 공격하였다. 결국 3월 4일 4개 요새에 대한 파괴작전이 완료되었으며, 카든 제독은 1단계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 소식에 영국의 전쟁위원회는 계획대로 작전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어 투르크와 앙숙이던 그리스 정부에서는 3개 사단을 갈리폴리에 상륙시키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은 이스탄불을 그리스가 점령하는 것을 원하지 않던 러시아가 반대하고 대신 러시아의 육군을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이어서 2단계 작전인 다다넬즈 해협의 소해작전과 해안선 양편에 배치된 포대를 제압하는 작전이 시행되었다.날씨가 좋은 날마다 전함들이 해협에 진입하여 포대에 사격을 가했으나 성과는 미미하였다. 이동용 곡사포가 여기저기 위치를 바꾸거나 은폐를 철저하게 하여서 제대로 된 포격이 불가능하였다. 무전기를 장치한 수상기를 정찰기가 목표를 확인하여 수시로 위치를 알려주기는 하였지만 기상조건이 전체적으로 좋지 않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 날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케페즈 포인트에 부설된 기뢰원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기뢰원은 해협 입구 앤쪽 7마일부터 시작되어 해협 전체를 가로질러서 부설되었다. 반면 영국군의 해상 작전 중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것이 바로 이 기뢰를 소해하는 소해작전이었다. 이 소해작전을 민간 어부들의 비무장 트롤 어선에 임시로 소해구로 수행하였던 것. 해협의 거센 조류 덕분에 어선의 속력 자체가 거의 나지 않았으며, 소해구가 절단되는 일도 수시로 일어났던 것. 결정적으로 심각한 문제는 민간 승조원들은 전투원이 아니었던 관계로 주위에 포탄이 떨어져서 물기둥이 치솟기만 하여도 바로 도망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야음을 틈타서 소해를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는 탐조등까지 동원하여 사격을 가하자 어선들은 또 다시 도망갔던 것. 이에 빡친 카든 제독은 소해정 지휘관을 함대에서 차출한 현역 장교로 재배치하고 승조원들도 부사관들로 교체하여 케페즈 포인트에 있는 기뢰원까지 소해하며 들어갔다. 몇 차례의 포탄을 맞았지만 인명피해는 9명에 그쳤던 것. 한편 투르크측에서는 연합국 전함들이 해협에 들어오거나 나갈 때 아시아쪽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것을 확인하고 3월 8일 밤에 소형 선박을 이용하여 아시아쪽 해안과 평행으로 20발의 기뢰를 몰래 부설하였다. 이 기뢰들은 3발밖에 소해되지 못하였으며, 이후 대형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한편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작전수행에 빡친 영국의 해군성은 카든에게 압력을 가하여 결국 카든이 사임하고 부사령관으로 있던 드 로벡 제독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드 로벡 제독은 예하 모든 전함을 4척씩 전방으로 내보내서 내로우스 요새를 제압하고 동시에 구식전함들은 해안의 소형 곡사포와 교전하면서 동시에 소해도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먼저 들어간 4척의 영국 전함들이 한시간 반 정도 요새에 포격을 실시한 뒤 2열로 들어간 4척의 프랑스 전함들이 전방으로 이동할 때 쯤에는 육상으로부터의 포격은 상당히 감소하였다. 이에 드 로벡 제독은 계획된 대로 프랑스 전함들을 뒤쪽으로 물리고 다시 영국의 전함을 전방으로 진출시켰다. 이에 아시아 방향의 해안을 따라 계획된 철수 침로로 들어가기 위하여 프랑스 함정들이 우현으로 변침항 종열진을 형성하였으며, 그들은 터키가 지난 3월 8일 밤에 투르크가 몰래 부설한 기뢰원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곧이어 프랑스의 전함 보브가 기뢰에 접촉하여 승조원 600명과 함께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이에 1선의 영국 전함들도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철수하던 영국 전함 중 인플렉스블이 보브가 침몰한 위치 바로 인근에서 기뢰에 접촉하여 함수가 침수된 채로 겨우 해협을 빠져나갔고, 얼마 후 구형전함 이레시스터블도 기뢰에 접촉하여 아시아 쪽 방향으로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손상된 이레시스터블을 예인하도록 지시받은 전함 오션도 기뢰에 접촉하여 두 함정 모두 근라 밤에 침몰하였다. 이 덕분에 순식간에 연합국의 전함 3척이 침몰, 1척은 대파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다넬즈 전투의 종결[편집 | 원본 편집]

일단 네로우스를 방어하던 투르크군과 독일군은 연합국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안도하였으나 네로우스 요새를 방어하던 투르크군의 포대는 파괴되거나 고장난데다 포탄도 거의 다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연합군이 재차 시도할 경우 네로우스의 기뢰원을 뚫고 쉽게 돌파를 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편 다다넬즈 해협에서 퇴각하여 전진기지인 에게 해의 렘노스 섬에 도착한 드 로벡 제독은 육군의 지상작전과 연계되지 않고는 다다넬즈에 대한 전투를 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이를 처칠이 수용하면서 연합국 해군의 2단계 작전은 실패로 종료되었다.

갈리폴리 전투[편집 | 원본 편집]

영국 육군상은 해군의 삽질을 보면서 육군을 동원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다다넬즈 전투에서 해군이 삽질을 하는 것을 보고는 육군을 동원해서 지신들이 숟가락을 얹고 손쉽게 이스탄불까지 진격하여 투르크를 공중분해시킨다는 계획이었던 것. 이에 이집트에 주둔중이던 안작군을 다다넬즈 입구에 있는 그리스령 렘노스 섬으로 이동을 지시했다. 또한 영국 본토의 29사단을 파견하였고, 프랑스측에서 아프리카에 주둔중이던 1개 사단을 차출하여 파견하도록 협의했다. 이 결과 3월 말에는 8만명이 넘는 육군 전력이 렘로스 섬에 집결하게 된다.

작전계획 및 참가전력[편집 | 원본 편집]

연합군[편집 | 원본 편집]

연합군이 렘노스 섬에 모이면서 이를 지휘하기 위한 현장의 연합군 사령관으로는 하밀톤 대장이 임명되었다. 그는 지형정찰을 나선 뒤 킬리드 바의 고원지대가 다다넬즈 해협을 통해 네로우스로 접근하는 통로를 관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 목표는 킬리드 바의 고지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해당 지점의 공격을 29사단에 맡기고 이 부대를 갈리폴리 반도의 맨 끝단인 헬레스 곶에 상륙시키기로 결심했는데 이쪽 지점은 전체적으로 평탄한 편이어서 상륙군에 대한 함포지원이 쉬운 편이었다.

이 헬레스 곶을 지나 5마일 정도 북쪽에 아쉬 바바라고 불리는 언덕이 있었는데 여기에 연합군이 포대를 설치할 경우 곧장 킬리드 바로 진격하는 연합군을 지원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하밀튼 장군은 작전이 계획대로 돌아간다면 상륙 후 24시간 이내에 킬리드 바 언덕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어서 그는 헬레스 곶을 방어하는 투르크 부대에 대한 증원과 보급을 차단할 수 있는 곳에 안작군을 상륙시키기로 결심하였다. 해당 지점은 갈리폴리 반도의 허리부분의 좁은 곳인 가바 테페 곶 약간 북쪽 지점의 만입부로 이쪽으로 안작군을 상륙시키면 상륙지원 함포 포격과 함께 갈리폴리 반도를 종단하는 도로를 차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또한 양동작전으로 북쪽의 사로스만 내부에 위치한 불레어와 아시아쪽 육지인 쿰 케일 지역에 각각 해군 육전단과 프랑스군 1개 사단을 상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오스만 투르크군[편집 | 원본 편집]

3월 18일 연합국 해군의 공격인 다다넬즈 전투가 실패한 뒤 투르크 정부는 갈리폴리 지역 방어 사령관에 투르크에 주둔중이던 독일 고문단장 젠드러 장군을 임명하였다. 그는 영국군의 상륙이 한달 정도 늦어지자 이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강한 훈련과 동시에 상륙 예상 지점마다 철조망과 기관총 포대로 방어된 교통호를 구축해 놓은 것이다. 또한 그는 상륙군이 갈리폴리 반도의 교통로를 차단할 것으 예상하여 사로스 만 내부의 불레어 지역에 2개사단 15,000명을 배치하였으며, 아시아쪽 끝단에 있는 쿰 케일 부근에도 2개 사단을, 그리고 하밀톤이 주공지점으로 결정한 갈리폴리 반도에는 1개 사단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얘비대로 6사단 7,500명이 따로 갈리폴리 반도의 중심부에 주둔시켰는데 이 지점이 하필 안작군 3만명이 상륙하기로 결정된 해안에서 불과 4마일 거리였다. 참고로 이 투르크군 6시단의 지휘관은 8년 뒤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여 초대 대통령이 된 무스타파 케말 대령이었다.

작전경과[편집 | 원본 편집]

3월 16일 영국을 출발한 29사단의 전투장비가 수송선에 전투모드로 제대로 적재되어있지 않아서 좁아터진 전방 발진기지인 무드로스 항으로 입항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하밀톤 장군은 29사단을 이집트알렉산드리아로 보내서 이 곳에서 재적재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실제로 29사단의 장비는 대포와 포탄은 엉뚱한 함정에 들어가 있고, 기관총은 맨 밑바닥에 적재되어 있는 등 전투를 즉시 치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이집트에서 한 달 넘게 시간을 허비하였으며, 이 시간 동안 투르크쪽이 방어준비를 철저히 하게 되었다.

모든 상륙은 4월 25일 오전부터 실시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200여척이 넘는 함정들이 상륙 전날인 24일 각각 상륙예정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갈리폴리 상륙작전.png
갈리폴리 전투의 초기 부대 배치 현황

상륙지점으로 향하던 부대는 블레어 지역의 상륙양동을 위한 해군 보병(해병대) 1만명, 쿰 케일 지역에 견제상륙할 프랑스군 1개사단, 가베 테페 곶 부근에 상륙할 안작군 3만명, 그리고 주공인 헬레스 곶에 상륙할 영국 제29사단이 상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작군 사령관 버드우드 장군은 기습에 성공하기 위하여 자신의 부대 선봉대를 동이 트기 전에 상륙시켰다. 날이 어두웠던 관계로 예정 해안보다 1마일 정도 북쪽에 상륙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상륙 자체는 무난한 편이었다. 주공인 헬레스 곶 지역에 상륙한 29사단장 헌터 장군은 세드 엘 바 동쪽의 해안을 V해안으로 명명하고 이 곳에 자신의 주공 병력 3천명을 상륙시키고 나머지 5개 대대병력 5천명을 V해안과 나란히 펼쳐진 S, W, X, Y해안으로 상륙시키려고 계획했다. 그는 상륙 후 첫날 아쉬 바바 언덕 등성이를 점령하고, 2일째는 갈리폴리 반도의 고지인 킬리드 바 고지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다.

29사단의 전체적인 상륙 자체는 순조로운 편이었다. 그런데 정작 주공이 상륙하기로 했던 V해안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상륙 해안을 마치 콜로세움마냥 둘러싸고 있는 언덕에 투르크군의 참호가 설치되어 있었고, 여기서 날아오는 기관총의 총탄에 전진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일부 병사들이 통로를 개척하려고 하였지만 어김없이 기관총에 희생되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낮 동안 꼼짝도 못하고 있다가 해가 지면서 간신히 해안선에 아주 좁은 방어선만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하루가 지난 26일 밤, 영국군 29사단은 X해안에서 S해안으로 연결되는 선만 겨우 확보하였을 뿐이다[2]

웨스톤 장군은 28일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 때는 이미 새로운 투르크군 증원부대 불레어와 쿰 케일 방향에서 달여와서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시켜 버렸다. 이렇게 되어버리자 서부전선에서와 마찬가지의 참호전 양상을 띠면서 교착상태가 형성되어 영국군 29사단은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서 날아오는 투르크군의 포탄도 영국군의 진격을 막는 요소가 되었다. 약간 북쪽에 상륙한 안작군도 상륙하자마자 투르크군 6사단에 가로막혔으며, 29사단과 마찬가지로 내륙 지역에서 날아오는 포탄에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합군의 해군 함정들이 함포사격을 가하기는 했었지만 정작 함장들이 가지고 있던 시계 자체가 개판이라서 포격의 지원을 받으면서 상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포격이 다 멎은 뒤 상륙하는 삽질까지 더해지면서 악순환만 더해져 갔을 뿐이다. 시간만 속절없이 흐르면서 참호망만 점점 더 길어져만 갔으며, 참호망을 정면에서 뚫으려는 무의미한 삽질만 거듭한 끝에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하밀톤 장군은 결국 8월 6일 안작군 지역 좌측(북쪽)의 갈고리형 만입부인 수라 만에 새로운 2개 사단을 상륙시켜 안작군과 협동하여 갈리폴리 반도를 횡단하여 교통로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케말이 이끄는 투르크군 6사단에 의해 곧 가로막혔으며, 험한 지형과 연합군 측의 통솔력 부족으로 오히려 해안 교두보선까지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이 전선에서 효과를 본 것은 잠수함에 의한 것들 뿐이었는데 4월부터 12월까지 몇 척 되지 않는 영국과 프랑스의 잠수함들이 다다넬즈 해협의 내로우스 포인트를 막고 있는 대잠용 철망을 뚫고 이스탄불 남쪽의 마르마라해까지 진입하여 해상 교통로를 괴롭히는 작전을 수행하기는 하였으나 전세를 결정적으로 뒤집을만한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11월이 되자 연합군이 갈리폴리에서 이스탄불로 진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 되었다. 여기에 50만명의 병력을 쏟아부었으며, 그 중 절반 가까운 25만명의 사상자만 발생시켰을 뿐, 4월에 상륙하던 당시 상황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였다. 오스만 투르크고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투입하였고, 사상자 숫자도 비슷하였지만 여전히 킬리드 바 고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영국의 육군상 킷치너는 하는 수 없이 갈리폴리 전역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영국군은 그 해 12월 10일부터 이듬해 1월 9일까지 한 달동안 단계별로 철수하면서 갈리폴리 전역의 전투가 종결되게 된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 이 전투로 오스만 투르크는 1차 대전에서 패전하기는 하였지만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아시아와 이스탄불 일대의 본토까지 점령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영웅으로 부상한 무스타파 케말은 장군으로 진급하였으며, 전투 이후 8년 뒤 다 쓰러져가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뒤집어 엎는 혁명을 일으키고 터키 공화국을 건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 이 작전을 처음 입안했던 윈스턴 처칠은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다다넬즈 전투에서의 참패로 당장 해군장관 자리에서 잘리다시피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가 잘리면서 작전이 끝났어야 하는데 이 삽질을 육군상 키치너가 판을 더 크게 키우면서 이후 피해가 말도 안되도록 더 커져버리게 된 것이 함정.
  • 이 전투의 가장 큰 전훈은 상륙작전 교리가 새롭게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해군과 상륙군 사이의 치밀한 사전계획과 전투탑재의 중요성, 함안이동 수단의 개발, 함포지원절차, 보급문제 해결, 통신문제 해결, 지휘체계 확립 등 상륙작전에 따른 절차상의 문제가 여지없이 드러났으며, 여기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열심히 관찰하여 분석평가한 미국2차 세계대전시 상륙작전 교리를 새로 발달시켜 수많은 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게 된다. 어찌보면 미국은 이 전투에서 싸우지도 않고 상륙교리를 취득한 가장 큰 수혜자일지도 모른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역사에 만일이라는 것은 없지만 만일 영국이 다다넬즈 전투에서 바로 상륙군을 돌입시킬 수 있었다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애초에 해군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했던 것 자체가 만용이었고 결정적 패인이었던 것. 또한 해군의 철수 직후 그리스의 육군을 바로 동원했어도 방어중이던 오스만 투르크 병력은 사실상 와해된 상태인데다 물자까지 바닥났던 상황이었기에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영향력 확대를 거부한 러시아의 반대와 뒤이어 상륙하기로 하였던 영국군 29사단의 장비적재가 전투적재가 아닌 행정적재가 되어있는 바람에 한달이 넘는 시간을 허송세월하고 이 기간 동안 보급과 부대 재편을 마친 오스만 투르크는 기적적으로 재기할 수 있게 되었다.

각주

  1. Berlin-Byzantium-Bagdad
  2. 지도상에 붉은 곡선으로 그어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