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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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유틀란트 해전.jpeg
날짜 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
장소 아프로-유라시아 대륙
이유 사라예보 사건과 서양 열강 간의 오래된 갈등
결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패망, 유럽 식민지 독립
교전국
세르비아 세르비아 왕국
러시아제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 프랑스
영국 영국
벨기에 벨기에
그리스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몬테네그로 왕국
대일본제국 일본 제국
중국 중국
포르투갈 포르투갈 왕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라이베리아 라이베리아
미국 미국
남아프리카 연방‏‎ 남아프리카 연방
이탈리아왕국 이탈리아 왕국
호주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불가리아 왕국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영어: World War I)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개된, 유럽을 중심으로 발발한 범세계적인 전쟁이다.

세계 최초의 세계 대전으로서, 당시에는 '1차'라는 수식 없이 월드 워(World War)나 더 그레이트 워(the Great War)로 통칭했고 후자는 지금도 유효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명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붙은 것이다. 워낙 끔찍하고 충격적이었던 초대 규모 전쟁이어서, 당대 사람들은 이보다 더한 전쟁이 일어날 리 없을 것이라 믿고 대전(Great War)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다. 영국의 SF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20년 후, 이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만다.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세르비아 왕국간의 전쟁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유럽 열강 국가 간의 외교 관계 속에 마침내 전 대륙을 집어삼킨 전쟁. 최초의 총력전(Total War)로 불리기도 하며, 19세기 유럽인들이 빛나게 쌓아올린 화려한 현대 문명이 가장 참혹한 살인과 파괴의 수단으로 변모할 수 있음을 증명한 전쟁이다. 그리고 이를 불과 20년 만에 더 큰 규모로 반복하게 된다.

전장은 벨기에와 프랑스 동북부, 발칸 반도와 동유럽 일대가 중심이었으며, 소 아시아와 중동 일대가 포함되었다. 독일의 식민지가 있던 동 아프리카나 태평양 도서, 중국 산둥 성에서도 교전은 발생했으나 그 규모는 미약했다.

1 배경[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과 그 과정은 개전 1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아무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수많은 사학자들의 연구 과제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의 발호와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광기, 독일 민족주의 등의 결합으로 불완전하게나마 설명되지만 1차 대전은 몇몇 원인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불완전한 요소가 너무 많다.

이를 최대한 간략히 하자면 유럽 열강 간의 갈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직접적 국가간 갈등 외에도 각 국가가 겪고 있는 내재적 문제나 제국주의로 발현된 민족주의 등도 빼놓을 수 없다.

1.1 독일 vs 프랑스 관계와 러시아[편집]

독일 제2제국을 건설한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탁월한 외교술은 오직 철저하게 프랑스의 고립, 그리고 러시아를 우호 국가로 묶어두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과 프랑스는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가 된 상태였고, 양국은 서로를 주적으로 여기며 유럽 최대의 긴장을 낳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3개 제국 간의 결속을 강화하여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고 이는 비스마르크 재임 기간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이후 비스마르크가 사실상 강요된 은퇴를 당하고, 독일의 외교 정책에서 러시아가 배제되기 시작했다. 빌헬름 2세는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익을 중요시하며 세 제국간 동맹에서 러시아를 방치, 사실상 내쫓았고 이로 인해 안보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외교적으로 고립된 프랑스와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프랑스와 러시아는 전격적으로 동맹을 체결한다. 러시아로서는 발칸 반도에서의 팽창 정책이 비스마르크의 외교 전략으로 계속 장애를 겪는 가운데, 그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고 독일의 새 황제가 대놓고 오스트리아 편을 들면서 발칸에서의 남하 팽창책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고, 외교적 고립을 겪고 있던 프랑스로서는 러시아와의 동맹으로 고립을 탈피하고 동시에 독일의 배후에 거대한 동맹국을 두게 되는 이점을 안게 된 것이다.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제1·2차 모로코 사건 등으로 전면전 직전의 위기에까지 내몰렸으나 어찌어찌 무마되었다.

1.2 독일 vs 영국의 세계정책[편집]

비스마르크 시기 독일은 영국의 세계 패권에 도전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본격적으로 세계 정책을 추진, 3B(Berlin-Byzantium-Baghdad) 정책을 내세우며 유럽과 중동에 걸치는 철도망 부설, 그리고 이를 통한 발칸과 소 아시아, 중동에 걸친 독일의 절대적 영향력 확보에 나섰고, 이는 영국의 3C(Cairo-Capetown-Calcutta) 정책을 통한 인도양 패권 정책에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울러, 틸피츠(Tirpitz)가 주도하고 빌헬름 2세가 적극 후원한 대해군 건설 계획은 전통적인 해군국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해상패권에 대한 직접적이며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독일은 단시간 내에 대규모 해군 함대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여, 영국의 전통적 해상 우위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였고, 이는 영국에게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켜 맞대응을 유발함으로서 영국, 독일 두 열강이 중심이 된 대규모 건함 경쟁을 유발했다. 세계 대전이 터지기 직전 양국의 해군은 대규모로 팽창하여 엄청난 규모와 함께 막대한 예산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이처럼 독일이 새로운 최대 위협국으로 급부상하자 영국의 외교 정책도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래 19세기 영국의 외교 정책은 철두철미하게 러시아의 남하 정책 저지에 초점을 두어 양국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 불리는 충돌을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보다 독일의 위협이 더 심각해진 데다가, 그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해상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극동에서의 남하 정책이 실패하자 러시아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영국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1907년)하기에 이른다.

1.3 발칸의 불씨: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편집]

16세기 이래 발칸 반도에서 절대적인 강자였던 오스만 제국이 18세기 후반 이후로 계속 약화되면서 그 빈틈을 채운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였다. 각각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을 대표하는 두 제국은 서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계속 팽창 정책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적극적인 보스니아 정책은 슬라브계 국가인 세르비아 왕국과 그 동맹국 러시아를 격분케 했다. 이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 민족들이 오스트리아에 상당한 증오심을 갖게 만들었다. 훗날 사라예보 사건의 계기가 된다.

뒤이은 제1, 2차 발칸 전쟁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다시 한 번 명백히 보여주었다. 오스만의 공백으로 인한 발칸의 무게추는 점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쏠리게 되었고 지역의 불안정은 점점 심화되어 당대에 이미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지경이었다.

1.4 사라예보 사건[편집]

사라예보 사건.jpg

그리고 이 모든 내재된 충돌 요소들을 폭발시킨 것이 사라예보 사건이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군인 결사 조직 검은손과 연계한 보스니아인 테러 조직 젊은 보스니아에 의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내외가 암살 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황태자 내외 암살이 보도된 시점에 이미 각국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럽 최고의 명가 합스부르크의 황태자 내외가 백주대낮에 암살된 명백한 테러 행위에 오스트리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양국 간의 전쟁에서 그쳐야 할 것이, 위에서 언급된 유럽 국가 간의 갈등 관계에 결합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발칸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세르비아를 지지하기로 전격적으로 결정했고, 독일은 러시아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전면적으로 지지했다. 아울러, 러시아와 전면전을 펼칠 경우 그 동맹국인 프랑스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프랑스에 대한 선제공격과 이를 위한 중립국 벨기에 침공을 준비했고, 이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자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하던 영국까지 말려들게 했다.

2 개략[편집]

2.1 1914년: 슐리펜 계획의 실패와 바다로의 행진[편집]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독일은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치밀하게 준비한 슐리펜 계획을 발동, 6주 안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을 목표로 서부 전선에서의 전면적인 총공세에 돌입했다.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한 독일군은 벨기에 군의 거센 저항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진격, 마른까지 진격하였으나 늘어진 보급선과 측면에서의 위협, 동부 전선의 러시아군 공세에 따른 병력 차출로 인한 가용 병력의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고, 프랑스가 예비 병력을 신속히 긁어모아 반격에 나서며 마른 강에서 공세가 저지되었다. (제1차 마른 전투) 이후 독일군과 프랑스 군은 국경에서 영불 해협의 해안에 이르는 수백 km의 전선을 따라 기나긴 참호를 파 대치하게 되니 악명 높은 참호전의 시작이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가 독일의 예상을 깨고 상당히 빠른 시간에 병력을 동원하여 동 프로이센을 공격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동 프로이센 공격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리히 루덴도르프 콤비에 의해 좌절, 탄넨베르크에서 대패하고 동부 전선의 주도권을 독일군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탄넨베르크 전투)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독일령 식민지들을 빠르게 공격, 접수했다. 인도양에서 독일 해군 경순양함 SMS 엠덴은 약 2달여간 연합국 해운을 마비시키는 통상 파괴전을 단행하였지만 끝내 격침당했다. 오스만 제국은 11월에 정식으로 참전하여 중동의 영국군과 수에즈 운하, 그리고 러시아령 카프카스를 향한 공세에 돌입했다.

2.2 1915년: 장기전[편집]

2.3 1916년: 양 전선의 격동, 베르됭 전투와 브로실로프 공세[편집]

1916년, 독일군 총참모장 팔켄하임은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군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준다는 목표로 2:5의 병력 교환비를 목표로 하는 대규모 공세를 개시했다. 후일 베르됭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베르됭 요새 대부분을 점령하고 프랑스군을 말 그대로 분쇄기 안으로 끌어들여 엄청난 인명피해를 강요했다. 처참하기 그지 없는 피해와 전면적 패배 위기에 직면한 프랑스군은 앙리 필리프 페탱을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반격에 나섰다. 이후 페탱은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독일군에게도 막대한 출혈을 강요하는데 성공, 전투를 원점으로 돌렸다.

한편, 베르됭 전투로 서부 전선이 위기에 처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동부 전선에서의 공세를 요청했다. 그동안의 거듭되는 패전으로 전선을 정비하고 있던 러시아는 서방 연합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브루실로프 공세에 돌입, 오스트리아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실지를 상당 부분 회복했다. 이 공세로 사실상 오스트리아는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에 심각한 부담감을 안겨다 주었지만 동시에 러시아도 공세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어 피폐해져 갔다.

2.4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동부 전선의 종식[편집]

1917년 3월 발생한 러시아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하자 동부 전선의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급격히 제기되었다. 새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서방 연합국에게 전선 이탈이 없을 것임을 보장하고, 이를 인정받기 위해 동부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단행하였으나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 때 너무 많은 여력을 쏟은 데다, 혁명으로 체제조차 어수선한 상황이어서 대실패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이때 서부 전선에서는 새로이 사령관에 부임한 페탱이 무리한 공세를 자제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서방 연합국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다.

결국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볼셰비키에 의해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볼셰비키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즉각적으로 독일에 휴전을 제의함으로서 동부 전선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카포레토 전투의 참패로 이탈리아가 베네치아 코앞까지 밀리며 2년여간 쥐고 있던 전선 주도권을 완전히 내주었다.

2.5 1918년: 루덴도르프 공세의 실패와 전쟁의 종료[편집]

소련-구 러시아와 종전하고 동부 전선을 종식시킨 독일 제2제국은 동부전선에 투입된 병력까지 모두 서부 전선으로 투입하여 마지막 남은 여력을 모두 긁어모아 최후의 대공세를 실시했다. 루덴도르프 공세라 불리는 1918년 춘계 대공세에서 독일군은 승승장구하여 다시 한 번 마른 강까지 나아갔지만 대서양을 건너온 미군의 대대적 증원 속에 끝내 격퇴당했다. (제2차 마른 전투) 이후 연합국은 총반격을 개시, 프랑스 영내 깊숙히 들어온 독일군을 역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였고, 이탈리아 전선, 발칸 전선에서도 일제히 공세를 개시, 오스만,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등이 하나둘 항복했다.

독일 역시 킬 군항의 반란을 계기로 내부에서 혁명이 일어나 빌헬름 2세가 중립국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신정부는 휴전을 제의, 마침내 길고 긴 대전쟁의 막이 내렸다.

3 결과[편집]

3.1 구 체제의 종식[편집]

동맹국으로 참전한 세 제국은 모조리 제국이 해체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독일은 제2제국이 붕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패전의 대가로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고 프랑스에 알자스-로렌 지방을 반환하는 것을 포함해 벨기에와 (중립국이었던) 덴마크, 신생 독립국 폴란드에 상당한 영토를 내어주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동프로이센이 독일 본토와 유리되었고, 단치히는 자유시로 남게 되었는데 이 불씨는 결국 20년 뒤 또 다른 참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나마 독일은 사정이 나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은 아예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제국이 해체되어 공중 분해되었다. 오헝 제국 역시 붕괴하여 신생 공화국 오스트리아로 재탄생했고, 마지막 황제는 연합국에 의해 유배되는 처지에 놓였다. 오스트리아는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내륙국으로 전락하였으며, 그 영토는 세르비아 왕국의 후신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비롯하여 루마니아, 이탈리아와 같은 승전국,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와 같은 신생 독립국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도 붕괴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연합국이 아닌 굴욕적 강화 조약에 분노한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으며 신생 터키 공화국은 시리아와 이라크를 포함한 중동 지방을 포기하고 그리스와의 전쟁 끝에 아나톨리아와 소아시아를 모두 지켜내는 데 성공하여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연합국이었지만 혁명으로 중도 이탈한 러시아 제국의 후신 소비에트 연방은 격렬한 적백 내전을 이겨냈다. 비록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영토 다수를 잃고, 발트 3국과 핀란드의 독립을 허용했지만 연합국의 개입을 막아내며 사회주의 국가를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구 로마노프 왕조는 사라졌고 마지막 황제 일가는 적군에 의해 총살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구체제의 종식 속에 동유럽 질서는 대대적으로 재편되어 신생 독립국가만 7개에 달하였고(핀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기존 국가들의 국경선도 커다란 변화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승전 직후의 혼란 속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은 철저하게 지켜지진 않아서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은 일치하지 않았고(애당초 동유럽 자체가 민족이 혼재되어 있어 강제 이주를 하지 않는 한 일치할 수도 없었다.) 이는 2~30년대 동유럽의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3.2 상처뿐인 승리[편집]

이기긴 했으나 연합국이 입은 피해는 엄청나기 그지 없었다. 뒤늦게 참전한 미국이나, 유럽 전쟁에는 참여조차 안 한 일본을 제외한 연합국들은 모두 막대한 피해에 신음했다. 특히 프랑스는 서부 전선의 지리한 참호전 속에서 성인 남성층 다수가 죽어 인구 구조에 있어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영국도 프랑스보다는 덜했지만 만만찮은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는 아예 국가가 망했다. 이처럼 막대한 인명피해는 프랑스의 미래 안보 전략을 소극적으로 만들게 하는 요인이 되었는데, 30년대 나치 독일의 확장 시기 때 프랑스가 철저히 수동적이며 방어적인 전략을 채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명피해 외에도 재산상의 피해도 극심했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의 경우 국가 재정이 파탄 직전까지 내몰린 상태였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건함을 전면적으로 중단하고 해군 전력 군축에 나서야만 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막대한 피해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기 위해 독일에 천문학적인 배상액을 요구했고, 이의 징수 과정에서 루르 공업 지대를 전격적으로 점령하기도 하여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희생에 비해 거의 얻은 것이 없어(오스트리아로부터 남부 티롤 지방 및 트리에스테 지역을 양도받은 것이 전부) 전후 극심한 사회 혼란에 빠졌고 결국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된다.

예외는 있었다. 뒤늦게 참전한 미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냈고, 다른 연합국을 상대로 막대한 군수 물자를 수출하여 대호황을 누렸으며, 유럽전 참전을 거부한 일본은 독일이 중국에서 갖고 있던 이권을 모두 양도받음은 물론, 독일령 북마리아나 제도와 미크로네시아를 양도받아 국제 연맹으로부터 위임 통치라는 형태로 식민 지배하였다.

4 특징[편집]

4.1 총력전[편집]

4.2 참호전[편집]

4.3 군사 기술의 급격한 발달[편집]

  • 기관총의 전면사용과 전차의 등장: 제1차 세계 대전의 경우 전쟁 직전에 발명된 각종 기술들이 전쟁에 사용된 사례가 많다. 참호전에서는 이전부터 사용되던 기관총이 널리 사용되면서 기존의 전열보병식의 닥돌이 무의미해져 버렸다. 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결국 전차라는 신무기가 등장하면서부터이며, 이는 기존 야전의 양상을 바꿔놓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 항공전의 시작: 제1차 세계 대전은 항공기가 최초로 사용된 전쟁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간단한 정찰만을 위한 수준에다가 아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위에서 수류탄이나 작은 폭탄, 벽돌(...)을 떨구는 정도였고 비행기 파일럿끼리는 서로 손인사를 할 정도였으나 곧이어 공중에서도 총질을 하기 시작하더니 항공기에 무장을 장착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기관총을 후미에 달거나 전방 프로펠러쪽에 캠축을 설치하여 기관총을 앞으로도 쏠 수 있게 하면서 공중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 각종 기술적 발달: 전투 외 기술적 측면에서는 이전에 사용하던 무선전신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으며, 서로의 무선을 감청하는 기술과 전파의 위치추적기술, 암호 기술도 이 시기를 지나면서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해전에서는 사격통제장치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목측 포격의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지뢰를 본격적으로 매설하였던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한다.

5 전투 목록[편집]

5.1 지상전[편집]

5.2 해전[편집]

5.3 상륙전[편집]

6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