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주석 항목을 {{각주}}화)
편집 요약 없음
7번째 줄: 7번째 줄:
== 개요 ==
== 개요 ==
[[견훤]]이 892년에 [[신라]]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때부터 후백제가 [[고려]]에 항복하여 후삼국이 통일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엄밀히는 [[발해]] 및 그 후계국가가 평안남도 이북 지역에 잔존하고  있었고, 도중에 신라의 한 왕자가 또다른 나라를 선포한 적도 있으므로 이 시기에 존재한 국가 수가 3개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견훤]]이 892년에 [[신라]]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때부터 후백제가 [[고려]]에 항복하여 후삼국이 통일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엄밀히는 [[발해]] 및 그 후계국가가 평안남도 이북 지역에 잔존하고  있었고, 도중에 신라의 한 왕자가 또다른 나라를 선포한 적도 있으므로 이 시기에 존재한 국가 수가 3개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한 '군웅할거' 시대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방 [[호족]]의 발흥과 [[신라|중앙권력]]의 붕괴, 이로 인한 호족 군벌간의 항쟁과 삼국정립 등 이 시대는 여러모로 [[삼국지|중국의 삼국 시대]]와도 비슷한 면을 많이 띠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문화 컨텐츠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드라마 [[태조 왕건|태조 {{ㅊ|궁예}}왕건]].
== 배경 ==
[[혜공왕]] 이후의 하대신라는 [[진골]] 사이의 왕권다툼이 격화되며 중앙권력이 점차 약해지고, 이에 따라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상실해가고 있었다. 중앙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지방 각지에서는 그 지방의 유력자들이 [[호족]]으로 성장하여 사실상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비록 [[헌강왕]](875-886) 시기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ㅊ|개드립}}기록이 있기는 하나, 이러한 모습은 권력과 돈이 집중된 경주 중심부의 모습이었을 뿐 지방은 이미 따로 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진성여왕]](887-897) 대에 이르면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호족들은 본격적으로 군벌화되었으며(당시의 대표적인 군벌이 [[원주시|북원]] 일대를 장악한 [[양길]]이다) 이들의 군사행동 또한 노략질 수준에서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고, 신라 중앙은 이를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진성여왕 이후 신라의 세력권은 경주와 그 주변 수십 ㎞ 정도로 축소되고 말았다.
신라가 지방의 독립을 막을 수 없었던 데는 통일 이후의 지방정책 또한 한 몫을 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기존 세력은 신라의 [[골품제]]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고, 통일신라 자체가 극단적으로 [[경주]] 중심으로 돌아간 국가였기 때문에 소외된 이들 지역은 신라 중앙에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견훤]]과 [[궁예]]가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던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 전개 ==
=== 태봉(후고구려)과 후백제의 성립 ===
일반적으로 [[견훤]]이 독립한 892년을 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호족 출신으로 신라 중앙의 장군직에 있던 견훤은 서남해안의 [[해적]]과 호족들을 공격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는데, 견훤은 오히려 이들을 비롯한 지방세력을 포섭한 후 무진주(현 [[광주광역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신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했다. 이후 견훤의 세력은 북쪽의 완산주(현 [[전주시]]) ㅣ일대까지 확대되었고, 백제의 주요 지역이었던 완산주를 중심으로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선언하며 정식으로 [[후백제|(후)백제]]의 왕위에 오른다(900년).
승려 출신으로 양길 휘하의 장수였던 [[궁예]]는 894년 [[강릉시|명주]] 일대를 장악한 이후 신라의 동쪽과 북쪽 변경을 차례차례 접수하였고, 896년 [[왕륭]]과 [[왕건]] 부자를 비롯한 서북부의 호족들이 자신에게 투항해 오자 왕륭의 본거지인 [[개성|송악]]을 수도로 삼고 본격적으로 독립하였다. 궁예 또한 고구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으며 이후 {{ㅊ|빡친}} 양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신라 북부의 넓은 영토를 장악,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고려]]로 정했다.
[[추가바람]]


{{각주}}
{{각주}}


[[분류:한국사]]
[[분류:한국사]]

2015년 6월 4일 (목) 20:39 판

한국사의 시대 구분
선사시대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상고시대
고조선(단군 · 위만) ·
원삼국시대
부여 · 옥저 · 동예
마한 · 변한 · 진한
삼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남북국시대
발해 · 신라
후삼국시대
태봉 · 후백제 ·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미소군정기
미군정 · 소련군정
분단시대
대한민국 · 북한

後三國時代

892년 ~ 936년

개요

견훤이 892년에 신라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때부터 후백제가 고려에 항복하여 후삼국이 통일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엄밀히는 발해 및 그 후계국가가 평안남도 이북 지역에 잔존하고 있었고, 도중에 신라의 한 왕자가 또다른 나라를 선포한 적도 있으므로 이 시기에 존재한 국가 수가 3개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한 '군웅할거' 시대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방 호족의 발흥과 중앙권력의 붕괴, 이로 인한 호족 군벌간의 항쟁과 삼국정립 등 이 시대는 여러모로 중국의 삼국 시대와도 비슷한 면을 많이 띠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문화 컨텐츠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드라마 태조 궁예왕건.

배경

혜공왕 이후의 하대신라는 진골 사이의 왕권다툼이 격화되며 중앙권력이 점차 약해지고, 이에 따라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점차 상실해가고 있었다. 중앙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지방 각지에서는 그 지방의 유력자들이 호족으로 성장하여 사실상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비록 헌강왕(875-886) 시기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개드립기록이 있기는 하나, 이러한 모습은 권력과 돈이 집중된 경주 중심부의 모습이었을 뿐 지방은 이미 따로 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진성여왕(887-897) 대에 이르면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호족들은 본격적으로 군벌화되었으며(당시의 대표적인 군벌이 북원 일대를 장악한 양길이다) 이들의 군사행동 또한 노략질 수준에서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고, 신라 중앙은 이를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진성여왕 이후 신라의 세력권은 경주와 그 주변 수십 ㎞ 정도로 축소되고 말았다.

신라가 지방의 독립을 막을 수 없었던 데는 통일 이후의 지방정책 또한 한 몫을 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기존 세력은 신라의 골품제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고, 통일신라 자체가 극단적으로 경주 중심으로 돌아간 국가였기 때문에 소외된 이들 지역은 신라 중앙에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견훤궁예가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던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전개

태봉(후고구려)과 후백제의 성립

일반적으로 견훤이 독립한 892년을 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호족 출신으로 신라 중앙의 장군직에 있던 견훤은 서남해안의 해적과 호족들을 공격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는데, 견훤은 오히려 이들을 비롯한 지방세력을 포섭한 후 무진주(현 광주광역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신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했다. 이후 견훤의 세력은 북쪽의 완산주(현 전주시) ㅣ일대까지 확대되었고, 백제의 주요 지역이었던 완산주를 중심으로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선언하며 정식으로 (후)백제의 왕위에 오른다(900년).

승려 출신으로 양길 휘하의 장수였던 궁예는 894년 명주 일대를 장악한 이후 신라의 동쪽과 북쪽 변경을 차례차례 접수하였고, 896년 왕륭왕건 부자를 비롯한 서북부의 호족들이 자신에게 투항해 오자 왕륭의 본거지인 송악을 수도로 삼고 본격적으로 독립하였다. 궁예 또한 고구려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으며 이후 빡친 양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신라 북부의 넓은 영토를 장악,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정했다.

추가바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