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공화국

Skky999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8월 18일 (화) 12:27 판 (→‎전쟁중 정치)

제1공화국1948년 8월 15일에 군정기가 끝나고 1960년 4.19 혁명 전까지 계속된 대한민국 최초의 정권이다. 이 시기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있었다.

개요

미군정 시기 이후 국회가 구성되고 같은해 8월 15일에 세워진 대한민국 최초의 정권. 6.25 전쟁이 열린 시기도 이때이다. 초반에는 성공적이었으나 좌우간 이념 대립이 심해지고 6.25 전쟁이 일어나서 점점 헬게이트에 빠져들더니 결국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 시기가 끝나고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다.

배경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한반도는 8.15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곧 한반도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한반도의 독립 등의 문제가 떠올랐는데 이는 곧 UN에 상정되었고 국제 연합의 결의에 따라 대한민국의 선거로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였다. 북한에서는 당연하게도 UN 결의안을 거부했고 38선 이남에서 이루어진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면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역사

6.25 전쟁 이전

1948년 8월 15일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새로 취임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한 정당을 내각에 기용하지 않는 등의 행동을 보여 초반부터 독재자 평가를 받게 된다.

군정기부터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는 등 나라가 시끌벅적했지만 당시 정권이 이를 차단하지 못하여 제1공화국 시기에도 다수의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다. 공산주의 계열 장교가 일으킨 여순사건도 있었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더 강화되게 된다.

1949년에는 농지개혁법이 크게 개정되었으나 그 때 하필이면 6.25 전쟁이 일어나서 완전 시행은 되지 않았다.

1950년에는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나서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2대 국회가 활동을 시작하자 마자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초반 전투들은 거의 모두 북한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더니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투가 고착되고 휴전이 되었다. 물론 이 전쟁에서 승패는 가를 수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은 물론 한반도 전체가 황폐화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중 정치

전쟁 직전에 열린 1950년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가 대거 당선되서 이승만 정권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1951년 기존의 정당을 기반으로 하여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수도 역할을 하였던 부산에서는 한때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1952년에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불리해진 이승만은 자신이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억지로 간접선거제를 직접선거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을 하였으며(부산정치파동) 이에 호응한 국민들은 1952년에 열린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당선시킨다.

전후

대한민국북한이 휴전한 이후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독재 정치도 강화되어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다. 1954년, 2대 국회 기간이 끝나고 3대 국회가 시작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지만 이승만 후보가 다시 당선되며 대통령 자리를 지켰다.

1960년 3월에는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서도 이승만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끝내 부정 선거로 밝혀져 3.15 마산시위 등 여러 곳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하지만 시위에 경무대는 발포로 대응했고 결국 이는 4.19 혁명을 발생시켰다. 혁명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이승만에게 대통령직 하야를 권유했고 긴 설득 끝에 결국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며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평가

긍정적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방향을 잘 잡아놓았다는 긍정적 평가가 존재한다. 한반도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미국과 손을 잡은 점이 여기에 해당한다.

외교 측면에서도 잘했다고 평가를 받는데 특히 작전권을 확실히 넘겨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발을 빼는 것을 막았다는 것, 미국이 자연스럽게 6.25 전쟁에 참여하게 했다는 점이 특히 칭찬받는다.

제1공화국의 외교가 대한민국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데 한몫 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농지개혁법 개정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가 많은데 농지개혁법을 개정하지 않았으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토지 배분 선전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과가 대한민국을 자본주의 진영에 끼웠다는 것이다. 북한이 지금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자본주의가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

제1공화국 정부가 외교적 면에서 엄청난 성과를 기록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병크를 저질렀다는 의견도 있다.

정부 수립 후 얼마 안되어서 여순사건 등 여러 사건들이 터졌고 6.25 전쟁의 피해가 상당했으며 제1공화국 시절동안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점을 들 때 제1공화국 정권의 위기 대처 능력과 차단 능력이 좋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제1공화국 정권은 6.25 전쟁이라는 매우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엄청난 뻘짓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거기다 이 정권은 여러번 개헌을 하였는데 이 개헌의 목적이 바로 이승만의 독재를 위한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사사오입 개헌같은 한국 법률사에 길이길이 남을 병크도 있다.

어쨌든 부정 측에서 바라보는 제1공화국을 요약하자면 외교적 성과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엄청난 병크들을 생산해 냈으며 이에 화난 국민들이 붕괴시킨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

6.25 전쟁 이전인 1949년에 농지개혁법이 개정되었다. 1953년에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화폐가 원에서 환으로 바꿨는데 이는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정부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되살리기 위해 1952년에서 1953년에 걸쳐서 40000채가 넘는 주택을 건설하기도 했다.

사회

이 시기에 큰 사회적 이슈는 없었지만 1959년에 슈퍼 태풍으로 발전한 태풍 사라가 대한민국을 강타해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외교

제1공화국 시기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끝나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며 냉전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영향을 받았기에 대한민국의 외교도 미국과 유럽, 기타 반공국가 정도로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제1공화국 시기는 외교 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이면서 시련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48년 이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철저한 반공주의 외교를 펼쳤으며 심지어 중립국에 대해서도 냉정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물론 미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가 있었기에 반감이 있었다.

남북 관계

제1공화국은 북한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다. 이승만은 극단적인 반공주의 노선을 가지고 있었으며 6.25 전쟁 당시에도 공산주의 세력을 멸하겠다는 의지로 통일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평화를 추구하는 미국에 의해 좌절되었다.엥? 6.25 전쟁 중 정부는 맥아더 장군과 함께 만주 폭격을 계획했지만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면서 이것 또한 좌절되었다.

한미 관계

제1공화국과 미국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친일 정책을 문제삼기도 하였다. 1949년에 이승만은 미국의 친일 정책을 비판하였으며 1949년에 주한 미군이 대한민국에서 철수한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국 또한 제1공화국 정권이 돌출 행동을 보이지 않을까 대한민국을 계속 예의 주시하였으며 1953년에는 미국의 닉슨 부통령이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의 행동으로 인해 전쟁이 발생하면 우리는 더이상 대한민국을 돕지 않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친밀해졌으며 미국은 전쟁 피해 복구나 경제 활성화 등을 도와주었다.

한일 관계

일본이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였기에 남북 관계보다는 사이가 좋았지만 이승만은 극심한 반일주의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주요 인물이었으며 엄청난 일본의 야욕을 느꼈기에 일본의 이런 욕심이 패전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믿었다.[1]

제1공화국 정부는 6.25 전쟁 중에 일본군의 참전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으며 1954년에는 국내에 팔리고 있는 일본 상품들을 모두 몰수했다.(...) 1955년에는 일본 상품 수입을 금지했으며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를 해임하기도 하였다.

맥아더 장군이 일본의 조업 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무효화되고 영해가 모호해지자 이승만평화선(이승만 라인)을 발표했는데 독도는 물론 무려 대마도까지 대한민국의 땅으로 보고 있다. 당연히 일본에서 반대가 들어왔지만 이승만은 반대를 묵살했고 결국 나빠질 대로 나빠진 한일 관계는 더 안 좋아지게 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