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철도

삼척철도
Samcheok railway logo.png
법인 정보
종류 주식회사
산업분야 철도사업, 창고업, 해운업 등
창립 1936년 4월
해산 1948년
본사 조선(일본령)→대한민국

삼척철도(三陟鐵道)는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사설철도 회사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삼척철도 주식회사(이하 삼척철도)는 삼척지역의 무연탄전[1]의 석탄을 운송하기 위해 1936년 4월에 설립된 회사이다. 설립 당초부터 탄광 개발을 수행하는 삼척개발주식회사와 병행하여 설립되어, 삼척지역의 탄광을 개발, 일본 지역에 석탄을 반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였던 회사이다. 사업범위에는 석탄 등 여객, 화물의 운송, 여기에 부대한 제반 사업, 해륙연락운송 및 창고업, 급수업 등을 두고 있었다. [2]

자본금은 일본전력연맹[3]에서 전액 출자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삼척 일대의 무연탄을 채굴하여 일본의 화력발전소에 공급하기 위한 운송 사업을 담당하는 사업체로서 설립된 회사이다. 당 회사는 철도로는 1939년 5월에 석탄 운송을 개시, 1940년 8월에 일반 여객 및 화물 영업을 개시하였다. 사업의 내용은 이하에 서술.

해방 이후 삼척철도는 타 사철과 달리 조선철도의 통일 군정령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일단 회사는 적산으로 취급되어 정부의 관할이 되었으며, 상무부(현재의 산업자원부) 소관 하에 사철의 형태로 운영되어왔다. 이후 1948년 8월 10일자 행정명령에 의해 교통부에 편입, 안동지방철도국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4] 이로서 삼척철도는 국철에 자산 일체를 인계하고 소멸하였다. 자본금의 출처가 전부 일본전력연맹이었기 때문에 개인 및 은행 등이 관여된 여타 사철들과 달리 사후적으로 주식 보상의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철도사업[편집 | 원본 편집]

삼척철도는 현재의 영동선 철암~북평간 및 묵호항선에 해당하는 철도를 건설, 운영하였었다. 이후 설립 4개월 후인 1936년 9월에 철도 건설에 착수하였다. 당초 철도 부설 계획은 거리가 짧고 건설비가 절감가능한 정라항(현 삼척항)을 유력하게 검토하였으나, 오십천하구에 위치해 있어 모래의 퇴적이 심하고 항구가 비좁았기 때문에 묵호항을 반출항으로 변경하여 철도건설 계획도 이에 따라 변경되었다.[5] 이에 따라 강원도 강릉군 망상면 묵호항역을 기점으로 하여 북평(현재의 동해역), 도경리, 미로, 상정, 신기, 마차리, 하고사리, 고사리 등의 정거장을 거쳐 삼착턴광전용철도 및 가공삭도에 접속되는 도계역에 이르는 총연장 42km의 표준궤 철도를 건설하였다. [6]

건설공사는 지형적으로 산악지대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난공사가 예상되었으나,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한 전시 물자수급난 하에서도 꽤 사업의 우선권이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건설 중 터널 구간의 낙반사고로 매몰자가 다수 발생한 사건이나[7], 인부부족 및 물가상승으로 인한 공사비 상승 등의 압박을 받았다.[8]

1939년 5월에 시운전을 마치고 석탄 운송을 개시하였으나, 지역 민원 및 총독부의 압박을 받았던데다 당초 사업허가에 일반영업을 할 것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용철도로의 사용은 불허되어 일반영업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40년 8월에 일반 여객 및 화물 영업을 개시하게 되었다. 다만, 삼척철도는 당시로서는 국철은 물론 다른 사철과의 접속을 가지지 않은 고립된 철도에 있었기 때문에 당초엔 철도 간의 연락운수를 실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전쟁중이던 1944년에는 삼척의 오노다시멘트 및 협동유지 공장[9]의 물자운송을 위해서 철도국이 동해선 중 삼척시 구간 12.9km구간을 우선 건설하여 2월 19일에 개통하였는데, 그 경영을 삼척철도에 위탁하였다.[10] 해당 노선은 동사의 삼척선으로 취급되었다.

해방 이후, 철도사업은 적산으로 취급되어 정부관할이 되었으며, 이후 1948년 8월 10일에 상무부(현재의 산업자원부) 관할 하에 있던 시설이 교통부로 모든 차량과 설비가 인수되어 국철선이 되었다.[11]

차량 및 설비[편집 | 원본 편집]

삼척철도는 개통 초기에 미카형 증기기관차 3량, 푸러형 증기기관차 2량을 갖추고, 30톤적 석탄차 30량, 객차 4량, 유개차 6량, 무개차 22량, 차장차 3량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국철선과의 접속이 없기 때문에 차량의 정비를 위해서 북평역에 간이공장을 따로 설치해야 했으며, 따라서 여기에 기관구와 보선구도 병행 설치되었다. [12]

시설면에서 삼척철도는 굉장히 빈약한 수준에 있었는데, 이후 철암선 구간의 통리역~심포리역 간에는 인클라인이라 불리는 강삭철도 구간을 설치하여 급구배를 극복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흥전역~나한정역 간에는 스위치백 구간을 두고 있었다.

항만사업[편집 | 원본 편집]

삼척철도는 또한 묵호항의 축조 및 운영에도 참가하였다. 특히 항만 안벽과 그 내부에 22만여 평방미터의 매립지를 조성하고, 여기에 저탄장, 창고, 도로, 철도 인입선 등 해륙연락운수시설물을 설치하였다. 특히 무연탄의 반출이 주 사업목적이었던 만큼 송탄기, 호퍼 하화용의 교량선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 적산으로 상공부가 관할하였으나, 철도부문 이관시 항만의 하역설비 일체가 교통부로 이관되었다.[13][14] 교통부는 이 하역업무를 관변단체였던 강생회(후일의 홍익회)에 위탁하여 실시하였다.

각주

  1. 현재의 삼척시 도계읍 및 태백시 일대.
  2. 林采成(2016).'三陟炭田の開発と石炭輸送 -日本電力による植民地朝鮮の資源開発史-'.立教経済学研究 第69巻 第5号. pp.106-107.
  3. 1932년 4월 19일에 설립된 카르텔로, 일본 정부가 전력사업 통제를 위해 구성한 단체. 당시 일본의 5대 전력회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4. '삼척철도국영 안동국 관하에 포섭'. 한성일보, 1948년 8월 26일 보도.
  5. '삼척탄전철도의 종단항은 묵호?'. 동아일보 1935년 6월 5일 보도.
  6. 林采成(2016). 상게논문. pp.107
  7. '삼척"턴넬"낙반되어 인부40인생매'. 동아일보 1937년 6월 28일 보도.
  8. '사철의 건설비는 평균이할고'.동아일보 1938년 5월 13일 보도.
  9. 어유 가공 공장으로 경화유, 비누, 지방산 등의 물자를 생산하였다('협동유지공장 본격적 시판'. 동아일보 1939년 2월 4일 보도 참조.) 유지 공장은 각종 윤활유의 제조 외에 다이나마이트코다이트 같은 화약 제조용의 글리세린 등을 생산하기 때문에 전쟁 수행에 필요한 공장이었다.
  10. 센코카이(1986;2012). "조선교통사", 제1권. pp.406.
  11. 철도청(1992). "한국철도사", 제4권. pp.108.
  12. 林采成(2016). 상게논문. pp.108
  13. 미군정청관보 행정명령 제28호 삼척철도의 이관(Executive Order Number 28 : Transfer of Samchuk railroad)
  14. '묵호항도 교통부에 이관'. 경향신문 1948년 8월 25일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