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리 강삭선

이 문서는 영동선 통리역에서 심포리역 간에 존재했던 강삭철도 시설물에 대해서 서술한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황지선 개통(대한뉴스 제415호)


통리 강삭선은 영동선 통리~심포리 간에 설치되어 있던 강삭철도 시설물에 대해 이 문서에서 편의상 붙인 통칭으로, 한국 철도 내에 유일한 시설물이었던 관계로 통상 통리 심포리간의 강삭선, 인클라인(잉크라인, 인크라인 등으로도 표기)으로 당시에 불렸었다. 그러나 광산궤도 등지에도 강삭철도가 사용되는 예가 많기에 별도의 통칭을 두어 서술한다.

통리 강삭선은 통리재 구간의 험준한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설치된 흥전역~나한정역스위치백과 함께 설치된 철도 시설물이다. 통리측에서 심포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구조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상부인 통리측의 고도는 약 700m에 위치해 있었고, 시설물의 총 연장은 1,100m, 선로는 전구간 복선에 최대 구배는 282퍼밀에 달하였다.[1]

역사[편집 | 원본 편집]

통리 강삭선의 설치는 삼척철도 주식회사(이하 삼척철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삼척철도는 삼척탄전[2]의 무연탄 개발을 위해서 일본의 전력회사들이 연합하여 설립한 회사로, 묵호 항만의 건설과 함께 묵호항역에서 철암역에 이르는 운탄선로를 1939년에 5월에 사용 개시[3][4]하여 통리 강삭선 역시 사용 개시하게 되었다. 강삭선 사용개시 이전에는 "소리개차"라 불리던 화물용의 삭도가 1년정도 통리에서 나한정간에 사용되었다고 전한다.[5]

삼척철도 노선 자체가 다른 철도와의 접속이 전혀 없던 철도여서 여객 수요는 지역주민 및 업무관계자 정도로 한정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중일전쟁 등으로 인한 전시체제 하였기 때문에 강삭철도는 주로 석탄 등의 수송 목적에 전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여객의 이용은 제한되어서 해당 구간을 이용하는 여객은 전적으로 도보 연락, 즉 걸어서 역간을 이동해야만 했었고, 이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후 영주역~철암역간에 영동선이 개통되면서, 강삭선은 남한지역 유일의 동서 횡단노선 기능을 하게 되었으며, 또한 주력인 무연탄 화물 수송 또한 과거 묵호항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던 것이 양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되면서 용량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1960년대 기준으로도 이 강삭선과 스위치백 시설은 비정상적인 철도시설인데다, 열차 운행면에서도 제약이 심각하였다고 평가되었다.[1] 실제로 당시의 운행계통은 영동선 개통 이후로도 영주~철암간과 심포리~북평(현 동해역묵호항역 간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당시 교통부는 '황지본선'으로 칭하는 우회선로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이를 위해 합계 연장 3.8km에 달하는 11개의 터널을 포함, 총 연장 8.5km의 단선철도를 새로 부설하게 되었다. 이 신규선로 조차 30퍼밀에 달하는 급구배선이었지만 강삭선에 비하면 운전제약은 거의 없는 수준에 가까운 것이었다. 결국 1963년 5월 20일에 황지본선 개통과 함께 강삭선은 사용이 폐지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영동선 솔안터널 개통 이후 스위치백을 비롯한 고저차 극복 구간이 전면 폐지되고 하이원 추추파크를 통해 유원지화 될때 통리 강삭선도 복원되어 "인클라인트레인"이라는 이름으로 여객수송을 개시했다. 60년대 폐지직전의 시설과 달리 단선 구조이며 심포리역 쪽에 교행장이 있다. 그러나 고장난 이후 방치되고 있으며 운송 재개 여부는 불투명하다.

설비 및 운영[편집 | 원본 편집]

강삭선 구간은 전 구간이 복선으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강철제 케이블(강삭)을 설치하고, 이를 통리측에 설치된 권앙기에 의해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운전이 이루어졌다. 두 복선에 걸쳐 케이블이 설치되었으며, 이에 따라서 통리측에서 화차를 내려줌과 동시에 심포리측에서 화차를 끌어올리는 식으로 하중을 맞춰서 운전을 실시하였다.

케이블의 양단에는 강삭차(혹은 권양차)를 연결해 두었고 여기에 화차를 연결해서 해당구간의 운전을 실시했다. 강삭선의 운전속도는 최대 분당 250m, 평균 240m의 속도로 운전이 이루어졌으며, 구간 운전시분은 13분(780초)이 소요되었다. 전동기는 450마력 전동기 2대를 사용하였다가 이후 750마력 전동기를 추가로 적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강삭차에 화차를 매달아 오르내리는 식으로 운전을 실시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강삭차의 자중(11톤)과 화차 자체의 자중(약 12톤), 여기에 케이블 자체의 중량 12톤까지 포함하면, 화물의 중량은 통리방향으로 감아올릴 경우 21톤 정도만, 심포리방향으로 감아내리는 경우 40톤으로 제한을 받았으며, 그나마도 35톤 이상의 중량차가 발생해서는 안 되는 구조였다.[1]

이렇게 시설이 워낙 취약했기 때문에 이 설비를 써서 운행하는 것은 화차에 한정되었으며, 여객열차의 운행을 이루어지지 못해 승객은 모두 해당 구간을 도보로 이동해야만 했었다. 이렇게 운전상의 제약사항이 많고, 고장시에는 그야말로 수리할때까지 완전히 마비가 되기 때문에 트럭 등으로 옮겨실어 대체수송을 실시해야 했던데다[6], 수송용량 역시 하루 745톤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비효율적이었다. 특히나 영동선 개통으로 양방향 수송을 실시하게 되면서 묵호방향으로의 수송물량 불평형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인클라인 구간의 옆으로는 보행로가 설치되어 도보 연락용도로 사용되었다. 각도로는 15도에 달하는 가파른 경사로였기 때문에 도보접속은 그리 쉬운 편이 아니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 구간을 도보로 이동하는데 젊은 사람도 40분이 걸리며, 어린이나 노인은 1시간을 걸어도 갈까말까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차 시간표 상으로 50분 정도의 접속시간만 주어졌고 다음 열차까지 5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매우 서둘러야만 했었다.[7]

더욱이 당시의 열차는 좌석지정제가 없이 전 열차가 자유석이었기 때문에, 앉아서 가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선착순 경주를 하다시피 주파해야 했었다. 그런 이유로 특히 노약자나 짐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해당 구간에서 지게꾼들이 약 100명 정도가 영업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또한, 겨울철에는 새끼줄을 쓰거나 날카로운 쇠판이 달린 '사갈'을 부착하여 다녀야 했었다.[8]

강삭차[편집 | 원본 편집]

강삭차는 11톤 정도의 중량을 가진 일종의 차장차 역할을 수행하는 차량이다. 강삭선의 강삭 양 끝에는 강삭차가 각각 연결되어 총 2대가 사용되었다. 이 차량은 강삭과 화차를 연결하는 매개역할을 했으며, 강삭선 운전시에는 여기에 운전상황을 감시하는 직원이 승무하였다.

차량의 전후에는 승무원의 감시에 사용하는 창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심포리 방향으로는 작업자간 전호 용도의 종이 걸려 있었다. 강삭차에는 지붕 위에 소형의 3상교류용 집전장치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이 집전장치는 상단 또는 하단의 구내부분에서만 가선에 접속되는 구조였다. 이 전류를 사용해 50마력짜리 윈치를 구동, 구내에 위치한 화차를 견인해 연결하는 식으로 동작하였다. 윈치의 케이블 말단에는 'ㄷ'자형의 특수 연결기가 있어 이걸 화차의 연결기에 걸쳐 연결하고, 고정핀을 체결한 다음 윈치를 감아 화차를 이동해 결합시키는 방식을 취하였다.[9]

각주

  1. 1.0 1.1 1.2 철도청(1969). "철도건설사". pp.163.-164.
  2. 현재의 태백시 일대 및 삼척시 내륙부 일대
  3. 단, 전용철도로의 운영을 총독부 철도국이 반대하여 1940년 8월에 여객 및 화물의 일반영업을 개시함.
  4. 林采成(2016).'三陟炭田の開発と石炭輸送 -日本電力による植民地朝鮮の資源開発史-'.立教経済学研究 第69巻 第5号. pp.106-107.
  5. '기차가 산에 오르는 방법'. 레디앙 2017년 6월 6일 보도.
  6. '화물수송에 타격'. 동아일보 1959년 12월 2일 보도
  7. '양회수송에 지장막심 막혀있는 철암선 보수 까마득'. 동아일보 1959년 9월 3일 보도.
  8. '탄광과 철도민속'.강원도민일보 2008년 8월 29일 보도.[1]
  9. 상기 영상에 간략하게 이 작업이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