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망문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앙망문(仰望文)은 고(故) 김대중대통령이 썼다는 일종의 반성문으로 김대중 까는 쪽에서 즐겨쓰는 고인드립이다.

왜 썼나?[편집 | 원본 편집]

80년대 초 공안정국은 살얼음판을 걷는 시대였다. 이 당시 광주계엄군의 군화에 짓밟히고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남산대공분실로 끌려가 코로 설렁탕 시식회를 벌이며 운 좋으면 평생 가져갈 후유 장애를 가지고 나오거나 아주 운이 나쁘면 말 그대로 시체가 되어 실려나오는 매우매우 살벌한 시대였다. 그만큼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난이도는 오늘날 우리가 시민운동 하는 것 따위와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즉 목숨을 걸어야 했고 이 나라의 민주화는 민주화 운동가들의 시체로 구덩이를 매우고 피로 강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 쟁취한 것이다.

하여간 1980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에게 민주화 운동가인 김대중은 눈의 가시였다. 신군부는 민주화 인사이자 야당 총재인 김영삼을 가택 연금시키는 한편 김대중은 내란 음모죄를 날조하여 감옥에 넣어버리고선 후다닥 사형 판결을 내려버렸다. 이 무슨 아프리카남미 어디 제 3세계 막장나라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사실 당시 우리나라 수준이나 외국에 보이는 모습이나 제 3세계 막장 독재국가와 다를 바 없었다.(따지고 보면 1세계 국가들 입장에선 3세계 독재국가 1 정도였다.) 다만 타임지에서 물가안정+경제성장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나라라고 주목하는등 경제발전은 인정받았다.

한편 인권외교로 박정희 대통령과 척을 지고 "미군 나가겠다!" "안 된다.날 쏘고가라!"며 소동을 벌였던 지미 카터 행정부는―그래서 유신 정권 몰락에 아주 약간 기여를 하게 되지만―한국인에게 "그 천하의 미국마저 빡쳐서 버리려고 하다니!"라는 충격을 선사했다. 그 충격 먹은 인사 중 한 명이 김재규였다.- 집권 말기에 이란 대사관 인질사건에서 대차게 말아먹고 소련아프간을 침공하는 둥 '강한 미국'을 바라는 미국인들 입장에서도 '어어 이건 아닌데' 상태가 되며 카터 행정부는 전형적인 레임덕에 빠져들게 된다.

김대중 석방과 계엄군 꺼져라를 외치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을 때 부산항에 미 항모가 들어왔단 소식을 들은 민주화 운동가들은 '미군이 전두환을 무찌르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려고 왔다'고 환호했으나 실상은 자국민을 구조하기 위함이었고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부를 사실상 승인하고 만다.[1] 하여간 카터 행정부는 전두환과 일대 결전을 벌일 여력도 없고 겨우 이룬 데탕트 화해 무드도 아프간 침공으로 망했어요가 되자 걍 동북아에서 기존의 반공 삼각동맹이나 다시 확인하는 거 말곤 할 일이 없었다. 그래도 카터 대통령은 필리핀 마냥 야당인사가 대낮에 총격받아 비명횡사 하는 꼴을 동맹국인 대한민국에서 또다시 재현되는 꼴은 도저히 볼 수가 없기에, 그나마 없는 힘도 쥐어짜서 김대중의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제5공화국은 비록 피로 광주를 물들였지만 국내의 반발도 여전했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력도 강력했기 때문에 김대중을 일단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가 나중에 다시 석방하게 된다. 이때 석방 조건으로 국내에 있지 말고, 또한 다시는 국내 정치에 관여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김대중은 이 조건을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추종자들과 부인 이희호 여사의 설득으로―당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마지못해 안기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두환 앞으로 탄원서를 쓰게 된다. 이 탄원서가 앙망문이다. 그리고 김대중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미국으로 목숨만 겨우 건져 망명하게 된다. 한편 5공은 "김대중 쪽 좀 팔아보거라 으헤헤헤헤"라면서 이것을 공개했고 민주화 이후 1992년에 언론에 의해 또다시 공개되었다. 사실 이렇게 반체제 인사를 위협하여 정계에서 은퇴시킨 정권이 더 쪽팔려야 하는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과 지금의 일베은 그것을 몰랐나 보다. 피해자를 가해자화 시키는 한 예 그리고 이 우아한 구어체로 작성된 격조높은 편지는 조용히 망각의 강을 따라 흘러가나 싶었는데....

발굴[편집 | 원본 편집]

운지를 발굴해낸 디시인사이드가 이것을 가만보고 있지 않았다! 국내야구 갤러리에서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야버지의 아들답게 일베저장소를 중심으로 활발히 쓰였다. 물론 이 드립이 전성기일 땐 일베와 대척점에 놓인 사이트에선 앙망 두 글자만 써도 뼈와 살이 분리되고 불가촉천민 수드라(=일베충)로 신분이 추락함은 물론 아예 해당 커뮤니티에서 강제 퇴출당할 각오를 하는 게 좋을 정도였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앙망'이라는 단어가 21세기 들어서는 노년층 외에는 사용하지 않게 된 어휘였기 때문이다. 사극에서는 가끔 나온다. 대하사극 정도전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용법[편집 | 원본 편집]

주로 바란다, 부탁한다와 동의어로 쓴다. 이 글을 발견한 디시인사이드에서는 XX영상 품번 좀 앙망함. OO게임 공략법 좀 앙망함 라는 식으로 쓴다. 혹은 고소고발 드립이 난무할 때 상대방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선처를 요구하면서 굴복 할 때 주어를 당사자로 바꾸어 이 앙망문을 쓴다. 하지만 상대가 진보좌파라면 역효과가 난다

전문[편집 | 원본 편집]

두 개가 작성되었는데 두 번째로 쓰여진 것이 가장 유명하며 앙망문의 유래가 되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재소생활이 2년반에 이르렀사온대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과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읍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 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서 2-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 하여주시면 감사천만이겠읍니다.

아울러 말씀 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 12월 13일 김 대 중

참고로 원문은 국한문 혼용체이다. 작성 시점은 맞춤법이 개정되기 전이다.

각주

  1. 이에 충격먹은 일부 민주화 세력은 흐콰하여 반미가 된다. 문제는 그나마 미국 아니었으면 싸그리 죽었을 인간들이 그나마 미국 덕분에 그 정도 선에서 끝난줄도 모르고 반미중뽕이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