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코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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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코베인
Kurt Cobain
파일:Oldies - Kurt Cobain by Rose Robin.jpg
인물 정보
본명 커트 도널드 코베인
(Kurt Donald Cobain)
출생 1967년 2월 20일
미국 워싱턴주 애버딘
사망 1994년 4월 5일 (26세)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배우자 코트니 러브
음악 활동
장르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
악기 보컬, 기타
소속그룹 너바나

커트 도널드 코베인(Kurt Donald Cobain)은 미국 음악가이다. 그런지 록 밴드 너바나를 결성해 큰 인기를 얻었으나 1994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음악, 비극적인 삶과 죽음은 당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현재까지 회자되는 대중음악의 아이콘 중 한 명이 되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데뷔 이전[편집 | 원본 편집]

커트 코베인은 1967년 2월 20일 미국 워싱턴주 애버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도널드 릴랜드 코베인(Donald Leland Cobain)은 20살의 자동차 정비공이었고 어머니 웬디 엘리자베스 코베인(Wendy Elizabeth Cobain)[1]는 18살의 웨이트리스였다. 이들은 고등학교에서 만나 커트를 임신했으며 졸업 직후 바로 결혼했다. 1970년, 커트가 3살이 되던 시기에 여동생 킴벌리(Kimberly)가 태어났다. 코베인 가족은 집안 형편이 넉넉치 못했기에 아이들을 친가나 외가에 맡기는 일이 잦았다. 그의 친척들 중에서는 음악, 미술 등 예술계에 종사하는 인물들이 많았는데, 자연스레 커트 코베인 역시 노래와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두 아이를 키우는 경제적 어려움과 지속된 가정 불화로 인해 1976년 코베인 부부는 이혼하게 되고, 커트는 아버지 도널드 코베인에게, 킴벌리는 어머니 웬디 코베인에게 양육되게 된다. 이는 당시 9살이던 커트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이혼 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집을 나와 트레일러에서 살게 된다. 이 시기 커트 코베인은 학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굴기 시작한다. 병원에서 ADHD 진단을 받은 커트는 약물 치료를 받게 되나 증상이 완화되지 않자 중단한다.[2]

도널드 코베인은 1978년 제니 웨스테비(Jenny Westeby)와 재혼하며 애버딘 근교의 몬테사노(Montesano)로 이주한다. 제니에게는 이미 민디(Mindy)와 제임스(James)라는 자녀들이 있었는데 커트는 처음에는 이들과 비교적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79년 도널드와 제니 사이의 첫 아이 채드 코베인(Chad Cobain)이 태어나자 커트는 새 가족들에게 격렬하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커트와 가족들 간의 사이는 크게 벌어졌고, 그는 학교에서도 온갖 사건을 일으키는 문제아가 되어 대마초, , 담배 등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버지 도널드는 커트의 반항기를 잠재우기 위해 강제로 미식축구, 야구, 레슬링 등의 스포츠부에 가입시켰다. 커트는 여러 운동부를 전전했고 그 중 레슬링에는 나름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본인이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기에 별 소용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운동부에 들어왔는데도 운동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나 게이 친구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3], 체구가 작고 말랐다는 이유 등으로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커트 코베인의 돌출 행동은 갈수록 심해졌고, 상담사의 권유로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동급생 제시 리드(Jesse Reed)의 집에서 한동안 하숙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과 미술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커트 코베인은 아버지 곁을 떠나 어머니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본격적으로 전업 뮤지션을 목표로 연습하기 시작했으며, 피컬 매터(Fecal Matter)라는 이름의 밴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2주 남긴 시점에서 졸업하기에는 학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격적으로 학교를 자퇴하고, 곧이어 어머니 웬디에 의해 전격적으로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커트는 친구네 집에 신세를 지거나 아파드 복도, 병원, 다리 밑 등에서 노숙했다. 1986년 연말, 그는 월셋방을 구하고 리조트 청소부로 취직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록 밴드의 공연을 보거나 연습을 하며 생활했다. 비록 그가 구상하던 밴드 '피컬 매터'는 제대로 된 공연도 못 해보고 분해되었지만, 대신 그의 친구 크리스 노보셀릭베이스 기타를 맡은 새로운 밴드가 결성된다. 커트 코베인은 고민 끝에 새롭게 결성된 밴드의 이름을 "너바나(Nirvana)"로 결정한다.

너바나의 결성과 성공[편집 | 원본 편집]

밴드 결성 뒤 커트는 음악에만 몰두하다 태업으로 해고되었으며, 올림피아에 살던 연인 트레이시 머랜더(Tracy Marander)의 아파트에 얹혀살았다. 트레이시는 초기 너바나의 활동을 물심양면 지원해 주었으나 결국 커트의 경제 능력 부족을 이유로 결별하게 된다. 이 무렵 첫 드러머였던 애런 버카드(Aaron Burckhard)가 얼마 못가 탈퇴하자 밴드는 멜빈스의 드러머 데일 크로버(Dale Crover)를 임시로 드럼 자리에 앉힌다. 데일 크로버를 드러머 삼아 단돈 20달러로 녹음한 너바나의 데모 테이프는 올림피아에서 그런대로 주목을 받았고, 당시 전도유망한 그런지 밴드들을 영입하던 시애틀의 인디 음반사 서브 팝의 눈에 띄게 된다. 밴드는 서브 팝과 계약, 정식 드러머 채드 채닝(Chad Channing)을 영입해 1989년 첫 음반 Bleach를 발매한다. 음반은 대학 라디오에서 호평을 받고 4만 장이 팔려, 커트는 처음으로 음악으로 돈을 적게나마 벌 수 있었다. 한편 트레이시와 헤어진 커트는 전설적인 라이엇 걸 밴드 비키니 킬(Bikini Kill)의 멤버 토비 베일(Tobi Vail)과 연인이 되었고, 그의 영향을 받아 페미니스트가 된다. 토비 베일과의 관계 역시 얼마 가지는 못했지만 둘은 이후에도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

앨범과 투어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커트는 이윽고 자신들에 대한 서브 팝 레코드의 처우에 불만을 품기 시작한다.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던 서브 팝은 커트가 원하는 만큼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마침 당시는 지역 인디 밴드들이 하나둘씩 메이저 레이블로 옮기던 시기였고, 이에 발맞춰 너바나 역시 게펜 레코드 산하의 DGC와 계약하여 1991년 2집 Nevermind를 발표한다. DGC는 너바나의 새 음반에 25만장 정도의 판매량을 기대했다. 발매 직후 Nevermind는 음반사가 예상한 대로 빌보드 차트 144위에 진입하며 그냥저냥한, 그러나 인디 밴드로서는 성공적인 판매량을 올리는 듯 했다. 그러나 리드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의 대히트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다. 앨범은 1년 이상 차트에 머무르며 2011년까지 약 3000만 장 이상이 팔리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너바나는 단숨에 지역 인디 밴드에서 당대 최고의 록밴드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커트 코베인은 미디어에 의해 "X세대의 대변자"나 "90년대의 목소리"라는 식으로 떠받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Nevermind의 성공 이후 불안에 시달리며 헤로인을 비롯한 각종 마약에 중독되게 되었다.

1992년 2월 24일 하와이주 와이키키에서 커트 코베인은 밴드 의 프론트우먼이자 영화배우인 코트니 러브와 결혼식을 치뤘고, 같은 해 8월 18일 딸 프랜시스 빈 코베인(Frances Bean Cobain)을 낳는다. 이들은 1990년 1월 12일 포틀랜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처음 만났는데, 코트니는 커트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커트는 1987년 그녀가 출연한 영화 '지옥 특급(Straight to Hell)'을 봐서 코트니를 알고 있었다. 이들은 곧 사랑에 빠졌고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부부는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는데 커트가 당대의 인기 스타였다는 점 뿐만이 아니라 부부가 모두 헤로인 중독자였으며, 각종 사건사고에 연루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4] 결혼 뒤 코트니 러브가 임신 상태에서 헤로인을 한 것이 언론에 발각되어 이들 부부는 대중의 비난에 시달리고 법정에까지 출두하는 등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커트 코베인은 Nevermind의 깔끔한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다음 앨범에서는 좀 더 거친 음악을 담고자 했다. 93년 2월, 밴드는 미네소타의 외진 지역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외부와 고립된 채 새 앨범 녹음에 나섰다. 녹음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불과 2주만에 끝났다. 너바나가 새 앨범을 낸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종 매체에서 밴드의 근황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는데, 이에 커트는 '나 스스로가 싫고 죽고 싶다(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라 답하곤 했다. 이에 영감을 받은 커트는 음반의 제목을 아예 "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로 정하고 동명의 곡도 녹음했으나,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것을 우려해 제목을 교체하고 문제의 곡도 수록하지 않았다. 93년 발매된 너바나의 3집 In Utero는 지나치게 거칠고 공격적인 사운드로 인해 상업적 성과는 비관적이었으나,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라 너바나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죽음[편집 | 원본 편집]

1994년 들어 커트 코베인의 헤로인 중독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94년 3월 4일, 커트는 유럽 투어 도중 로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는 이후 반나절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했으며, 진단 결과 다량의 수면제샴페인과 섞어 마셨던 것이 밝혀졌다. 이후 밴드의 일정은 모두 취소되었고 커트 코베인은 자택으로 돌아가 칩거한다. 3월 18일, 커트 코베인은 자기 방문을 잠근 뒤 자살을 시도한다. 이 소동은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해 그를 제압한 뒤 들고 있던 총과 약병을 압류하며 끝났다. 커트 코베인은 자살하려 한 것이 아니라 방 안에 갇혀 있었다고 주장했다. 3월 25일, 주위 사람들의 수 차례의 간곡한 설득 끝에 커트 코베인은 로스앤젤레스의 재활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30일 재활원에 입소한 커트는 그러나 바로 다음날 밤 담배를 피우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담을 넘어 재활원에서 도망친다.

재활원을 탈출한 뒤 커트 코베인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그는 택시를 타고 로스앤젤레스 공항으로 가 4월 1일 비행기로 시애틀의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때 건즈 앤 로지스의 멤버 더프 맥케이건(Duff McKagan)이 우연히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었는데, 너바나건즈 앤 로지스 사이의 좋지 않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만남은 별다른 마찰 없이 지나갔다. 훗날 더프 맥케이건은 당시 커트 코베인이 "기이해 보일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고 회고했다. 그 뒤 2~3일간 시애틀의 여러 곳에서 커트 코베인의 모습이 목격되었다. 4월 8일 코베인의 자택에 전자 경보장치를 설치하러 온 전기공 게리 스미스(Gary Smith)이 창문으로 커트 코베인의 시신을 발견하고 신고했다. 방 안의 화분에서 유서가 발견되었고 CD 플레이어에는 R.E.M.의 《Automatic for the People》의 CD가 삽입되어 있었다. 부검 결과 커트 코베인은 4월 5일 산탄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자살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커트 코베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유서에 쓰여 있던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불타 버리는 것이 낫다.(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5]라는 구절은 대단히 유명해졌다. 그의 죽음 이후 그런지는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27세의 나이로 죽었기에 27 클럽이라는 도시 전설이 다시금 유명세를 탔다. 시애틀 공원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커트 코베인의 장례식에는 700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골은 가족들에 의해 맥레인 강(McLane Creek)에 뿌려졌다. 커트 코베인은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대중음악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각종 음모론의 소재가 되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평생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는 부모의 이혼과 가난, 친구가 자살하거나 친구의 형의 자살 현장을 목격하는 등 성장기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유전적 요인이 원인으로 지목되지도 하는데, 실제로 코베인 가의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등의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고 그 중 2명이 자살로 생을 끝마쳤다. 한편 커트 코베인의 친척이자 정신과 간호사로 근무했던 베이 코베인(Bey Cobain)은 그에게 양극성장애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 평생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렸다. 이 복통은 간혹 위액까지 토해낼 정도로 심각했으며 우울증과 폭력적인 행동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89년 그를 진단한 의사는 심한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고 진단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은 딱히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는데, 커트는 본인의 경험을 근거로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고통이 완화되고 야채를 먹으면 고통이 악화된다고 생각했다.[6] 이 때문에 음식을 잘 먹지 못해 늘 마른 체구를 유지했다. 커트 코베인은 이 마른 몸을 컴플렉스로 여겨 주로 큰 사이즈의 옷을 입었다.
  • 기타를 워낙 오래 메고 있던 탓에 20대 이후 꾸준히 척추측만증에 시달렸다. 이 외에도 만성적인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다.
  • 왼손으로 기타를 쳤으나 왼손잡이는 아니었다. 기타 연주 외에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은 거의 오른손으로 했으며, 오른손잡이나 양손잡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어린 시절 "Boddah"라는 이름의 상상의 친구를 가지고 있었다. 유년기에 상상의 친구를 만드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특이하게도 커트는 성장한 이후에도 Boddah를 종종 언급했으며, 유서 역시 Boddah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 동성애, 양성애 지지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게이 친구와 자주 어울렸으며 음악가로서 성공한 이후로도 LGBT를 지지했다. 동성애자로 의심받는 일도 많았고 이로 인해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본인도 자신의 성 지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커트 코베인의 성 지향성은 아직도 의문의 대상이 되곤 한다. 페미니즘에는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비키니 킬의 토비 베일과 연애하며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십대 시절 같은 학급의 지체장애 여학생을 성폭행하려 하다 실패한 적이 있다. 이 일이 알려지며 친구들에게 놀림받았고 피해 학생의 아버지는 그를 경찰에 신고하려 했었으나 실제로 체포되지는 않았다.
  •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으며 뮤지션이 되기 전엔 만화가를 지망하기도 했다. 1985년 미술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입상은 하지 못했다. 너바나의 앨범 아트나 포스터의 디자인 등에 꾸준히 관여했으며 동료 밴드의 포스터나 홍보 전단 등을 디자인해 주기도 했다. 뮤지션이 된 이후로도 꾸준히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각주

  1. 결혼 전의 성은 프라덴버그(Fradenburg), 이혼한 뒤 팻 오코너(Pat O'Connor)와 재혼하여 현재 이름은 웬디 오코너(Wendy O'Connor)이다.
  2. 커트 코베인은 이때 받은 약물 치료를 견디기 힘들어했으며 이후 종종 의사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거나 나아가 자신의 마약 중독의 근원이 이 시기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3. 이 무렵 커트는 트럭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게이다(God Is Gay)"라고 낙서를 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4. 이 시기 펄 잼을 비방하고 건즈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와 싸움을 벌이거나, 곡의 인세를 자신에게 50% 이상 분배하려다 크리스 노보셀릭과 불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5. 닐 영이 1979년 발표한 곡 "My, My, Hey Hey"의 가사를 인용.
  6. 물론 사실과는 다르며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은 오히려 증세를 악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