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바나

너바나
Nirv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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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정보
나라 미국
장르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
활동기간 1987-1994
레이블 서브 팝, DGC
웹사이트 http://nirvana.com/
전구성원
커트 코베인
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
기타 구성원은 해당 단락 참고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너바나(Nirvana)는 미국 워싱턴주 애버딘에서 결성된 그런지 록 밴드이다. 1987년 보컬/기타리스트 커트 코베인과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1994년 커트 코베인의 자살로 인해 해체되었다. 비교적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와 이후의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밴드의 이름은 불교 용어 열반에서 따왔다.

구성원[편집 | 원본 편집]

멤버[편집 | 원본 편집]

너바나의 대부분의 음악 활동을 소화한 주축 멤버들. 일반적으로 너바나의 멤버들이라고 하면 이들을 말한다.

전 멤버[편집 | 원본 편집]

아직 멤버 구성이 안정되지 않았던 초창기의 멤버들. 제이슨 에버맨을 제외하면 전부 드러머이다.

  • 애런 버카드(Aaron Burckhard) - 드럼 (1987년)
  • 데일 크로버(Dale Crover) - 드럼 (1988년)[1]
  • 데이브 포스터(Dave Foster) - 드럼 (1988년)
  • 채드 채닝(Chad Channing) - 드럼 (1988~90년)
  • 댄 피터스(Dan Peters) - 드럼 (1990년)[2]
  • 제이슨 에버맨(Jason Everman) - 기타 (1989년)

활동[편집 | 원본 편집]

결성과 "Bleach"[편집 | 원본 편집]

1985년 애버딘 고등학교 동문이던 커트 코베인크리스 노보셀릭은 당시 무명 밴드였던 멜빈스의 연습실에서 크리스의 동생 로버트의 주선으로 만난 것을 계기로 친해지게 되었다. 당시 피컬 매터(Fecal Matter)[3]라는 이름의 밴드를 구상하고 있던 커트는 크리스에게 베이시스트 가입 제안을 하나, 전업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망설이던 노보셀릭은 이를 거절한다. 그의 영입 무산으로 인해 피컬 매터는 커트와 친하던 멜빈스 멤버들이 피컬 매터 활동도 겸업하는 식으로 꾸려지게 되었다.

커트는 잇따른 거절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에게 끈덕지게 피컬 매터 가입을 제안했으며, 한편으로는 졸업을 2주 남긴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밴드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코베인의 첫 밴드 피컬 매터는 활동을 도와주던 멜빈스가 음악계에 데뷔하면서 86년에 녹음한 데모 테이프만을 남기고 허무하게 해체되고 만다.[4] 그러나 이 데모 테이프를 듣고 감명받은 크리스가 제안받은 지 2년 만에(...) 밴드에 합류하기로 결심한다. 새로운 밴드는 몇 달간의 회의 끝에 1987년 "너바나(Nirvana)"라는 이름으로 결정되었다.[5]

1988년 너바나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 시애틀 근교를 중심으로 서서히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밴드는 조금씩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멜빈스의 드러머 데일 크로버를 임시 드러머로 삼아 녹음한 데모 "데일 테이프(Dale Tape)"는 공개 이후 시애틀 인디 신에서 나름의 반향을 일으킨다. 이를 계기로 너바나는 영입할 만한 신예 밴드를 찾던 서브 팝 레코드의 눈에 띄게 된다. 이 시기 밴드는 몇 명의 드러머를 거친 끝에 채드 채닝(Chad Channing)을 정식 드러머로 영입하게 된다. 1988년 11월 서브 팝과 계약을 맺은 너바나는 데뷔 싱글 "Love Buzz"[6]를 발표했다. 한정판 1000장이 금세 동나는 등 첫 싱글이 좋은 반응을 얻자 밴드는 다음 달부터 바로 데뷔 앨범 녹음에 착수한다. 너바나의 정규 1집 "Bleach"는 1989년 6월 15일에 발매되었으며, 대학가 라디오에서 큰 반향을 얻고 4만 장이 팔리는 쾌거를 이룬다. 단번에 촉망받는 신예로 떠오른 너바나는 여세를 몰아 89년 영국EP "Blew"를 발매하고 첫 콘서트 투어를 시작해 성공적으로 끝마친다.

밴드의 성공적인 행보와 별개로 커트 코베인은 밴드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Bleach"는 어설프게 만들어진 앨범이었고 음악도 당시 시애틀에 유행하던 평범한 그런지 음악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커트는 다음 음반은 보다 감정적이고 멜로디가 살아있는 그들만의 개성적인 음악으로 채우기로 한다. 1990년 새 음반 작업 도중 채드 채닝이 멤버들과 마찰을 일으켜 탈퇴하고, 밴드는 다시 임시로 여러 드러머들을 교체해가며 두 번째 싱글 "Sliver"를 발매한다. 이 싱글은 이전까지의 너바나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보다 팝 음악에 가까워진 곡이었다. 같은 해 9월 멜빈스의 버즈 오스본의 소개로 하드코어 펑크 씬에서 활동하던 데이브 그롤이 정식 드러머로 들어온다. 데이브 그롤은 이후 밴드의 해체까지 드러머로 활약하게 된다.

"Nevermind"와 성공[편집 | 원본 편집]

1집의 성공 이후 너바나의 멤버들은 서브 팝 레코드의 대우에 대해 점차 불만을 품게 된다. 마침 그 무렵은 사운드가든을 필두로 여러 그런지 밴드들이 하나둘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하고 있었다. 많은 레코드사들이 시애틀의 신생 장르 '그런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Bleach"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너바나는 특히 주목받는 밴드 중 하나였다. 너바나는 투어 도중 알게 된 소닉 유스의 권유를 받아들여 많은 음반사 중 게펜 레코드 산하의 DGC와 계약하게 된다.

DGC와의 계약 이후 밴드는 시애틀을 떠나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서 부치 빅(Butch Vig)과 함께 본격적인 새 앨범 녹음에 나섰다. 커트 코베인의 의향대로 밴드는 기존의 거칠고 어두운 그런지와 차별되는 멜로딕하고 감성적인 곡들을 녹음해 나갔다. 그러나 정작 완성된 곡들을 들은 커트는 실망을 표했다. 부치 빅의 말끔한 프로듀싱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멤버들의 예상과는 상당히 다른 식의 앨범이 된 것이다. 멤버들은 앨범이 지나치게 '팝'적으로 윤색된 결과물이라고 반감을 표했지만, 이미 녹음과 믹싱 과정에서 상당히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재녹음 없이 그대로 앨범이 발매되게 되었다.

너바나의 정규 2집 "Nevermind"는 91년 9월 24일 발매되었다. 앨범의 리드 싱글로는 첫 번째 곡 "Smells Like Teen Spirit"이 선정되었다. DGC에서는 Nevermind에 약 25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대하고 있었다.[7] 밴드는 반신반의했으나 Nevermind가 빌보드 앨범 차트에 144위로 진입하고 초도 물량 5만 장을 빠르게 매진시키는 등 음반사의 예상대로 되어 가자 마음을 놓았다. 앨범 발표 직후 너바나는 당대 미국 인디 밴드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사태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Smells Like Teen Spirit"가 빌보드 싱글 차트 7위까지 오르는 기록적인 히트를 친 것이다. 앨범은 끊임없이 팔려나갔고 곡의 뮤직비디오가 MTV에서 24시간 내내 송출되었다. 주문이 폭주하자 음반사에서는 아예 다른 앨범 생산은 일시 중지하고 Nevermind만 찍어내기 시작했다. 너바나 열풍은 몇 개월 동안이나 식지 않았고, 이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었다. 1992년 2월 11일, 그 주에만 30만 장이 팔린 Nevermind는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를 제치고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8] "Nevermind"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대중음악 음반 중 하나이며, 2018년 현재 전 세계에서 30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러한 전대미문의 사태를 목격한 음반 회사들은 앞다투어 '너바나 같은' 밴드를 찾아 나섰고 이를 계기로 해서 얼터너티브 록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너바나는 인디 그룹에서 단번에 슈퍼스타가 되었고, 밴드의 리더 커트 코베인은 미디어에 의해 '시대의 목소리'라고 불리며 새로운 록 스타로 대접받게 되었다.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이러한 격렬한 반응을 불편해했고, 주류 미디어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1992년 2월 24일 투어 일정을 마친 커트 코베인은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에서 연인 코트니 러브와 결혼식을 치렀고 같은 해 8월 18일 딸 프랜시스 빈 코베인(Frances Bean Cobain)이 태어났다. 8월 20일에는 영국의 레딩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 헤드라이너로서 공연하고 이틀 뒤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Best Alternative Video'와 'Best New Artist' 부문을 수상했다.[9] 12월 12일에는 밴드의 B사이드 곡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Incesticide"가 발매되었다. 너바나는 명실공히 당대 최고의 밴드가 되었으나, 이 무렵 코베인 본인은 헤로인 중독에 빠지고 여러 구설수를 일으키게 된다.

"In Utero", 커트 코베인의 죽음과 해체[편집 | 원본 편집]

"Nevermind"의 사운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커트 코베인은 세 번째 음반의 프로듀싱을 스티브 알비니(Steve Albini)[10]에게 맡긴다. 커트는 그에게 스튜디오에서 정제된 부드러운 사운드가 아니라 밴드 그대로의 날 것의 사운드를 주문했다. 1993년 2월에 시작된 녹음은 단 2주만에 완료되었다. 밴드는 스티브 알비니가 프로듀싱한 음반의 거친 사운드에 전반적으로 만족했으나, 대중들의 반응을 우려해서 R.E.M.의 프로듀서였던 스콧 릿(Scott Litt)을 불러 싱글로 낼 몇 곡을 리믹스한다. 밴드의 정규 3집 "In Utero"는 9월 21일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른다. 앨범은 500만 장 이상이 팔리며 호평을 받았고 밴드는 미국을 시작으로 해서 월드 투어를 시작한다. 밴드는 라이브에서 기타 사운드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 평소 코베인이 존경하던 하드코어 펑크 밴드 점스(Germs) 출신의 기타리스트 팻 스미어(Pat Smear)를 라이브 멤버로 영입한다. 같은 해 11월 너바나는 뉴욕에서 MTV 언플러그드 공연을 녹화한다.

1994년 들어 시작된 유럽 투어는 3월 4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커트 코베인이 약물 중독으로 쓰러져 있는 것을 코트니 러브가 발견한 것을 계기로 중단되었다. 다량의 수면제샴페인에 섞어 마신 것이 원인이었다. [11] 그는 의식불명 상태로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반 나절이 지나서야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의사는 그가 심각한 헤로인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으며 치료가 시급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이 사건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예정되어있던 투어는 전면 취소되었고 커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거부하고 자택으로 돌아간다. 3월 18일, 커트 코베인은 자기 방문을 잠근 뒤 자살을 시도한다. 이 소동은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해 그를 제압한 뒤 들고 있던 총과 약병을 압류하며 끝났다. 3월 25일, 주위 사람들의 간곡한 설득 끝에 커트 코베인은 로스앤젤레스의 재활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입소 바로 다음 날 밤 커트는 몰래 재활원 벽을 넘어 탈출한 뒤, 그대로 행방이 묘연해진다. 친지들은 로스앤젤레스를 돌아다니며 커트 코베인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1994년 4월 8일, 시애틀의 자택에서 커트 코베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 그는 4월 5일 경에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산탄총을 쏴 사망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러 정황과 목격담으로 볼 때 코베인은 재활원에서 도망쳐 나와 4월 즈음에 시애틀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유서는 방 안의 펜이 꽃혀있던 화분 안에서 발견되었다. 정황이 워낙 명백했기에 경찰은 그의 사인을 자살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료했다. 1994년 4월 10일 커트 코베인의 장례식이 치러졌고, 시신은 화장되었다.

커트 코베인 사후 밴드는 해체되었다. 94년 11월 1일, 93년의 MTV 언플러그드 공연이 담긴 사후 라이브 앨범 "MTV Unplugged in New York"이 발매되었다. 드러머 데이브 그롤푸 파이터즈라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해 큰 성공을 거둔다. 2002년 10월 29일, 곡의 저작권 및 수익 분배에 대한 멤버들과 코트니 러브 간의 긴 소송전 끝에 밴드가 마지막으로 녹음한 곡 "You Know You're Right"이 수록된 베스트 앨범 "Nirvana"가 발매되었다. 이후로도 남은 멤버들은 가끔씩 몇몇 행사에서 뭉쳐서 일회성 공연을 하기도 한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너바나는 얼터너티브 록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후대의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커트 코베인은 죽음 이후 신화화되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아티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록 음악의 주류 장르였던 메탈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80년대 중후반에 정점을 찍은 메탈은 이후 새로운 흐름를 이끌어내지 못하며 대중으로부터 서서히 유리되어 갔다.[12] R.E.M.U2를 비롯한 몇몇 밴드들이 대중적 성과를 올리기는 했으나 대세를 뒤집기에는 부족했다. 80년대는 MTV를 위시한 화려한 볼거리를 앞세운 메인스트림 팝이 대세를 차지하고, 백인 음악에 가려져 있던 흑인 음악이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었으며, 특히 그 중 힙합이라는 신생 장르가 록의 장점을 빠르게 흡수해나가고 있었다. 몇몇 음악 잡지들은 록 음악 자체가 과거의 클래식 음악이나 재즈가 그렇듯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져 "듣는 사람만 듣는" 음악이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을 하기도 했다. 이 때 등장한 너바나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주류 음악계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며 록을 다시금 주류 음악으로 끌어올리게 된다. 너바나는 록이었지만 기존의 음악 차트 위 기성 록밴드들과는 확연히 다른 밴드였고 언론은 이들에게 "대안(Alternative)으로서의 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들을 시작으로 많은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등장해 록의 새로운 흐름을 구축하게 된다.

너바나는 당대 음악계에서 대단히 독창적인 밴드라고 평가받았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주류 음악계의 시각이고, 실제로는 당대 인디 신의 기존 그런지 밴드들과 픽시즈, 소닉 유스 등의 얼터너티브 밴드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그런지의 대표격인 밴드지만 1집 이후로는 일반적인 그런지와는 상당히 다른 음악을 했다. 소닉 유스의 노이즈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허스커 두, 리플레이스먼츠의 멜로딕한 펑크 록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픽시즈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았다.[13] 그럼에도 너바나가 이들을 능가하는 성공을 이룬 것은 그들의 탁월한 작곡 능력에 있었다. 너바나는 당대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 중에서는 확연히 대중적이었다. 너바나는 하드코어 펑크와 초기 얼터너티브 록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지만, 동시에 초기 비틀즈 음악을 좋아하고 투어 버스에서 내내 아바, 카펜터즈의 앨범을 돌리는 면도 있었다. 커트 코베인은 아무리 과격하고 거친 곡을 쓰더라도 언제나 멜로디와 훅을 중심으로 작곡했다.[14]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그런지에 가까웠던 초기에도 주로 '팝'적인 감각이 있는 밴드라고 평가받았다. 이러한 뛰어난 송라이팅 감각은 부치 빅의 깔끔한 프로듀싱과 만나 Nevermind에서 폭발하게 된다. 이미 너바나의 시도가 보편적이게 된 21세기의 청자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앨범이 발매된 1991년에 Nevermind의 내용물은 기존의 주류 록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어찌보면 당시의 대중들에게는 굉장히 낯선 음악이었다. 그럼에도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성공한 것은 그런 이질감을 묻어버릴 정도로 이들의 멜로디 감각이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Nevermind와 반대되는 거칠고 원초적인 사운드의 In Utero에서도 그러한 멜로디 감각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들의 노랫말 역시 기존 음악들과는 달랐다. 극단적으로 모호하면서도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이들의 가사는 90년대 청년들의 패배주의적 감성을 자극했다.

너바나만큼 짧은 기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뮤지션은 없었다. 이들로 인해 시작된 얼터너티브 록의 흐름은 록 음악이 대폭 축소된 201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너바나와 같은 성공을 이루는 얼터너티브 록 밴드는 매우 드물다. 비록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너바나는 평단의 호평과 대중성, 이후의 영향력까지 모두 손에 넣었으며 밴드의 프론트맨 커트 코베인은 흔히 "최후의 록 스타"라고 불린다. 너바나의 등장은 90년대 음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대중음악 역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디스코그래피[편집 | 원본 편집]

정규 앨범[편집 | 원본 편집]

EP[편집 | 원본 편집]

  • Blew - 1989년 12월 발매[15]
  • Hormoaning - 1992년 2월 5일 발매[16]

라이브 앨범[편집 | 원본 편집]

  • MTV Unplugged in New York - 1994년 11월 1일 발매
  • 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 - 1996년 10월 1일 발매
  • Live at Reading - 2009년 11월 3일 발매
  • Live at the Paramount - 2019년 4월 12일 발매

컴필레이션 앨범[편집 | 원본 편집]

  • Incesticide - 1992년 12월 12일 발매
  • Nirvana - 2002년 10월 29일 발매

각주

  1. 밴드 멜빈스의 드러머.
  2. 밴드 머드허니의 드러머.
  3. 배설물이라는 뜻이다.
  4. 피컬 매터의 곡 중 'Spank Thru'는 이후 너바나 활동시에도 주요 라이브 레퍼토리가 된다.
  5. 밴드 이름이 '너바나'가 된 것은 커트 코베인이 딱히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당시 펑크 록 밴드들에게 유행하던 과격한 이름이 아니라 뭔가 의미있는 이름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6. 네덜란드 록 밴드 쇼킹 블루의 1969년 곡을 리메이크.
  7. 음반 시장이 쪼그라든 지금은 인디 밴드가 음반을 25만장 판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음반 시장의 규모가 최고로 팽창했던 90년대에는 당대 탑 레벨의 인디 밴드라면 2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대할 수 있었다.
  8. 엄밀히 말하면 'Dangerous'는 이미 3주 이상 1위를 달성하고 서서히 내려오던 시기였으며, 너바나 역시 바로 다음 주에 가스 브룩스에 의해 내려온다. 그러나 "King of Pop"이라 불리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마이클 잭슨이 한낱 무명 인디 밴드에게 밀렸다는 것이 너무 임팩트가 커서 다들 그것만 기억한다. 안습
  9. 이 시상식에서 너바나는 원래 "Lithium"을 연주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레 (당시에는 미발표곡이던)"Rape Me"의 첫 소절을 연주해 방송이 중단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10. 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 빅 블랙의 멤버. 음반 프로듀서로도 활동하며 특유의 거친 프로듀싱으로 유명하다.
  11. 훗날 코트니 러브는 이 사건이 커트의 첫 번째 자살 기도라고 주장했다.
  12. 이 무렵 메탈에서는 블랙 메탈이나 데스 메탈 같은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으나 이들은 대중의 시선을 끌기에는 지나치게 과격한 장르였다.
  13. 커트 코베인은 너바나를 아예 픽시즈의 카피 밴드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14. 너바나는 80년대의 유명 파워 팝 밴드 칩 트릭과 자기들을 비교하며 너바나를 '기타가 좀 더 시끄러운 칩 트릭'이라 정의한 적이 있다. 본인들도 이러한 면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
  15. 정확한 날짜가 불명확하다.
  16. 오스트레일리아, 일본에서만 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