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타운급 항공모함

5전단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2월 30일 (일) 10:31 판

틀:군함 정보

Yorktown class aircraft carrier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미국항공모함 이며 태평양의 전설이 된 신화적인 항공모함이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통하며 활약하였고 이들의 항로가 곧 태평양 전쟁의 흐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크타운급 3척은 진주만 공습부터 산호해 해전미드웨이 해전을 거치며 전투의 주역으로 활약하였고 과달카날 전역 이후 요크타운과 호넷 모두 격침되고 2번함 엔터프라이즈 홀로 살아남아 전 일본을 상대로 태평양의 전황을 뒤엎으며 종전까지 생존하는 등 해전사에 큰 족적을 남긴 군함이다.

개발

항공모함을 건조할 당시 워싱턴 해군조약에 가입해 있던 미 해군은 군함을 새로 만들 계획이 있었지만 미국에게 배정된 톤수는 135,000톤 이었다. 이 중 렉싱턴급 두 척과 레인저급의 건조로 인하여 남은 톤수는 5만 5천톤이었다. 미 해군은 레인저급 항공모함을 운영하며 얻은 경험을 통하여 항공모함은 최소 2만톤급은 되야한다는 결론을 얻었으며, 그 결과 2만톤급 항모 2척과 1만 5천톤급 경항모를 건조하기로 결론을 내렸고 경항모로 와스프를, 2만톤급 항모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두척을 건조하였다.

이후 일본이 군축조약에 탈퇴함으로서 다시 군비경쟁이 일어나며 미 해군은 새로운 항공모함이 필요했고 새로운 설계를 적용한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것보다 이미 성능이 인증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을 한 척 더 건조하는 것이 빨랐으므로 3번째 함인 호넷을 건조하였다.

성능

파일:800px-Yorktown-class carrier technical drawing 1953.jpg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은 워싱턴 해군조약의 잔여 쿼터로 건조된 항공모함으로 조약에 따른 배수량 조정으로 결핍된 부분들이 존재하나 대부분의 설계들은 완벽했고 태평양 전쟁 초반에 큰 활약을 벌일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항공

요크타운급은 당시 정규 항모로 분류되던 항모로서 비록 선체는 더 크지만 순양전함 개조 항모였던 렉싱턴급 항공모함 보다 많은 함재기를, 일반적으론 60대에서 최대 90대까지 운용할수 있었다. 요크타운급은 대전기 항모답게 일직선 비행갑판을 가지고 있었고 선체 선수 부분에 2개의 유압식 케터펄트를 장착하고 있었고 갑판에는 3개의 승강기를 배치해두고 있었다. 요크타운급이 운용하던 함재기는 초기엔 F4F 와일드캣 전투기와 SB2C헬다이버,SBD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를 운용했고 어벤저 뇌격기를 운용했다. 나중에 F6F헬캣이 배치되기도 했지만 이때는 엔터프라이즈 한정이다.

선체성능

요크타운급은 개방형 격납고 방식을 채용했고 비행갑판에는 사실상 장갑을 두르지 않는 설계를 택했다. 이런 개방식 격납고는 내부 유폭을 밖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지속적인 선체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었다. 실재로 요크타운급의 끈질긴 생존성도 이런 개방식 격납고가 한몫 했으며 비행갑판도 목재로 만들어 파손되었을 때 그 부분만 걷어내고 긴급히 복구할수 있는 피해 통제에 적합한 방식이였다. 그러나 항공 폭격에는 상당한 방호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조약 때문에 방뢰 능력이 취약했다는 단점이 있었다.

실전

전쟁 전

태평양 전쟁에서

해전 역사상, 이들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항공모함은 없었다. 운좋게 진주만 공습에서 살아남은 요크타운과 두 자매는 전함들이 궤멸된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이 되었고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는 일본 해군과 맞서게 된다.

1942년, 일본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1] 태평양 함대 대부분을 상실한 미군의 유일하게 가용가능한 몇 안되는 전투함들 이였던 이들은 일본의 웨이크 섬 침공과 괌 제도 침공 전투 이후 섬을 일본군들에게 넘겨주며 물러날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열세에 놓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작전에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을 투입시키기로 했는데 그것이 일반 폭격기를 항모에서 이함시키는 전후무후한 작전인 둘리틀 작전이였다. 작전에 투입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중 호넷이 갑판에 B-25미첼 폭격기 편대를 적제하고 엔터프라이즈가 호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결국 1942년 4월 18일 아침 7시, 호넷과 엔터프라이즈는 일본 남부 1200킬로미터 까지 도달했으나 하필 일본 연안경비정 니토마루[2]에 발각되고 어쩔수 없이 작전 시간을 10시간 앞당긴 8시 20분에 작전을 개시할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호넷에서 이함한 둘리틀 소령의 1번기가 추락 직전에 이함에 성공했고 뒤이어 다른 폭격기들 모두 이함에 성공시킨 뒤 호넷과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홀시 제독의 항모타격대는 급속히 후퇴했다. 둘리틀 특공대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 폭격을 해내며 보복작전을 성공시켰고 당시 일본에게 본토가 공격당했다는 큰 정신적 타격을 입혔다.

파일:800px-Army B-25 (Doolittle Raid).jpg

당시 호넷에서 이함하는 B-25 미첼 폭격기

그러나 한번의 승리로 불리한 전황을 바꾸기는 힘들었다. 1942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 요크타운과 렉싱턴급 항공모함 렉싱턴은 파푸아뉴기니로 진주하는 일본군 연합함대를 막기 위해 산호해에서 전투를 벌였고 진주만 공습의 원흉 쇼카쿠와 즈이카쿠, 일본군 경항모 쇼호 및 아오바를 비롯한 일본군 중순양함과 첫 항모간 결전을 치르게 된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 전함들이 사라진 태평양에서 미 해군은 함대간 포격전이 아닌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한 해상 항공전을 역사상 처음으로 산호해에서 일본 해군과 펼치게 되며 요크타운은 일본 경항모 쇼호를 격침시키고 일본 항모부대의 함재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8일, 요크타운의 함재기는 쇼카쿠에 2발의 10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해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반격으로 뇌격을 피해야 했고 12시 경에ㅈ급강하 폭격기로 부터 두발의 폭격 피해를 입었지만 요크타운은 별 문제 없이 전열에서 이탈했다. 그러나 렉싱턴은 반격으로 뇌격과 폭격에 큰 피해를 입어 결국 렉싱턴이 격침되고 말았다. 비록 살아남았지만 폭격 피해가 작지 않았고 대파된 요크타운은 하와이 진주만 모항으로 예인된다. 비록 이 해전에서 요크타운이 전술적으론 패배했지만 방어선을 돌파하고 일본 해군에 피해를 입히며 전략적으로 승리했고 이 해전의 양상이 함대간 전함들의 결전이 아닌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한 해상 항공전 양상으로 바꾸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었다.

파일:800px-USS Yorktown (CV-5) in a dry dock at the Pearl Harbor Naval Shipyard, 29 May 1942 (80-G-13065).jpg

수리중인 요크타운

이후 요크타운은 몇개월간의 복구로 다시 전선에 복귀했으며 둘리틀 작전 성공 후 남태평양 전역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과 합류한다. 비록 산호해 해전에서 선전했지만 미국이 태평양에 투입한 5척의 항공모함 중 한척인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새러토가도 이탈해 요크타운급 세 자매만이 유일한 태평양의 미 해군 항모였다. 반면 일본군은 남방작전에 성공하면서 남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야마모토는 하와이를 공격해 미 해군을 태평양에서 몰아내자는 주장을 하였으나 일본군의 역량 정도론 터무니 없던 망언인데다 중국전선에 집중하고 싶은 육군의 반발 등 여러 이유로 중태평양의 거점인 미드웨이를 타격해 장기적으로 미군의 하와이 축출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멍청한 일본군은 미군에게 통신 감청 사실을 노출시키고 역이로 그 감청을 이용한 미군에게 공격지를 노출시켰고 한심하게도 미드웨이가 공격지란 게 함대 전체 말단 수병마저 알 정도로 일본은 자만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6월 3일, 미 해군은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했고 1942년 6월 4일 운명이 날 당일 아카기,카가,소류,히류를 비롯해 항모 공격대가 미드웨이 공습에 실패했고 역으로 가한 미군의 반격 역시 막혔지만 일본 함대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그 후 오전 7시, 플래처 제독은 TF16의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TF17의 요크타운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고 152기의 항공기들이 이함해 일본 함대를 공격하러 나갔다. 그러나 최초로 도달한 호넷의 뇌격기 부대들과 뒤이어 도달한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의 뇌격기 부대들은 큰 피해만 입은 채 공격에 실패했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당분간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것 같던 그 때, 카가의 견시가 급작스런 경보를 알리며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바꾼 운명의 5분이 시작되었다.

파일:300px-Dauntless bomb drop.jpg

적기 직상! 급강하!

견시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잠수함 찾다 함대에 합류하던 아라시를 따라 엔터프라이즈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들이 일본 함대 상공에 도달했고 지체할것 없이 곧장 급강하 하여 공습을 감행한다. 도합 50발의 폭탄이 투하되며 4발의 명중탄이 카가의 지휘부를 전멸시키고 카가를 침몰시켰으며 아카기 역시 두번째 시도에서 명중된 한발의 폭탄이 유폭을 유발해 침몰되었다. 엔터프라이즈 급강하 폭격기들은 초반 카기에 집중되었고 임무를 상기한 멕클러스키 소령에 의해 아카기도 박살나면서 일본이 보유한 최고의 항모 두척이 격침되었다. 뒤따라 날아온 요크타운의 함재기들은 소류를 폭격했고 1000파운드 폭탄 3발이 갑판을 관통해 폭발하면서 소류는 순식간에 침몰하였다. 그러나 히류가 생존해 있었고 히류는 곧바로 반격해 요크타운에게 3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요크타운은 이미 히류의 공격에 대비해 조치가 취해져 있었고 뛰어난 피해복구능력으로 2시간 만에 작전 수행능력을 회복했다. 문제는 결과적으론 요크타운에겐 이것이 불운으로 작용했는데, 2차 공격대가 2시간 만에 피해를 복구한 요크타운을 엔터프라이즈로 착각해 재공격을 가하여 2발의 어뢰를 명중시켜 요크타운을 격침시킨다.

미군은 가련하게 발버둥치는 히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에서 폭격기 20대를 발진시키고 호넷도 16대의 뇌격기를 발진시키고 침몰하는 요크타운의 3폭격비행대대도 소식을 듣고 복수를 위해 반격작전에 참가했다. 결과적으로 히류는 4발을 골고루 얻어맞고 대파되었고 결국 침몰하며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요크타운이 침몰한 후 이제 살아남은 요크타운급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에겐 가장 힘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살아남은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과달카날 섬과 솔로몬 제도를 잇는 관문인 산타크루즈에서 미군 항모전단을 완전히 격파하려는 야마모토에 의해 다시 쇼카쿠,즈이카쿠를 포함한 즈이요와 준요로 구성된 일본 항모전단과 산타크루즈 해전을 치르게 된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먼저 일본 항공모함 부대를 발견하고 먼저 공격을 감행해 즈이요를 대파시키지만 이미 즈이호와 나머지 항모에선 공격대가 출격한 이유였고 이들의 연이은 대규모 폭격과 뇌격으로 인해 엔터프라이즈는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스콜 속에 숨어 공격을 피할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호넷이 대파되었으며 엔터프라이즈는 쇼카쿠와 즈이호를 노리고 공격대를 발진시키지만 즈이호의 제로센 부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엔터프라이즈는 7기의 손상을 입었고 즈이호는 9기의 제로센을 상실했다. 그 후 엔터프라이즈기 겪은 전투는 엔터프라이즈를 죽음의 목전까지 몰고 갔고 문제가 생긴 엔터프라이즈의 대공관제를 전함 사우스다코다에게 의존한 채 사방에서 공격해호는 일본기에 맞섰고 폭탄 두발이 명중되었다. 엔터프라이즈는 3차 공격대의 뇌격으로 급격한 회피기동 끝에 9발의 어뢰으를 피하고 다시 스콜 속으로 들어깄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국 엔터프라이즈를 포기한 야마모토의 단념으로 엔터프라이즈는 생존한다. 대파된 호넷의 항공대까지 수용해 거의 100대 이상의 함재기를 수용하게 된 채 전열에서 이탈하지만 호넷은 대파된 채로 여전히 물 위에 떠있었고 일본은 다시 3차례다 호넷을 공격했지만 호넷은 생명을 끈질기게 놓지 않았다. 일본이 공격을 단념 한 후 미군은 중순양함 노샘프턴으로 인양하려 했지만 일본군의 재공격 우려로 호넷을 포기한 뒤 폭탄과 어뢰로 자침시키려 했으나 실패한 미군이 일본군의 접근을 알고 물러난 후 역시 호넷을 노획하려던 일본군은 호넷의 손상도가 심각하다는걸 인지하여 인양을 포기한 채 구축함 아키구모와 마키구모에 뇌격명령을 내려 마침내 호넷은 침몰한다.

엔터프라이즈 역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아 퇴각했고 뉴칼레도니아 누메아에서 공작함 베스탈과 미군 기술자들의 수리 끝에 전열에 복귀했고 태평양에 남은 유일한 미군 항공모함이 되며 일본을 상대로 외로운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는 다시 살아남아 과달카날 전투에 참여해 3차 솔로몬 에서 헨더슨 비행징을 포격하던 일본 8함대의 초카이와 키누가사를 격침시키며 그 귀환을 화려하게 알렸다. 이후 엔터프라이즈는 11월 15일 까지 일본 항공세력과 해군을 상대로 헨더슨 비행장의 비행단과 같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했고 수송선단을 전멸시키며 남태평양에서의 싸움은 엔터프라이즈의 승리로 끝났다.

엔터프라이즈는 1943년 전열에 복귀한 렉싱턴급 새러토가와 여전히 일본군과 싸웠고 공세로 전환한 미군을 따라 새 함재기로 무장한 후 중태평양에서 새로운 항모인 에식스급 항공모함과 함께 길버트 제도와 마샬 제도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그해 말 본토에서 수리받은 뒤 1944년 연초부터 미군의 일명 개구리 뛰기 라는 도서 상륙작전을 지원하며 신나게 구른다.

1944년 6월에는 일본 해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필리핀 해 해전에 에식스급 항모들과 참가해 다이호와 쇼카쿠를 비롯한 항모전단을 격멸하고 야간까지 치러진 전투에서 함대 전체가 등화관제를 해제한 채 함재기 착함을 유도하기도 했고 필리핀의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군의 상륙을 지원하고 즈이카쿠의 최후를 목격하는 등 나름대로의 활약을 하다 이오지마에서 카미카제에 승강기가 파손되는 큰 손상을 입고 진주만에서 수리하던 중 종전을 맞는다.

전후

USS Enterprise (CVS-6) awaiting disposal at the New York Naval Shipyard on 22 June 1958.jpg

엔터프라이즈는 종전 후 해외의 미군들을 복귀시키는 메직 카페트 작전을 마지막 작전으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요크타운급들은 분명 우수한 항모였지만 수많은 전투로 손상되고 제트기 시대엔 부적합 했기에 퇴역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였는데 전쟁 이후 유지가 힘든 대형 함선들이 폐기되어 갔고 엔터프라이즈 역시 그러한 위기에 처했다. 전공과 상징성이 있는 미 해군 승리의 상징같은 존재였던 엔터프라이즈 였지만 미 의회나 상층부는 기념함 보존에 회의적이였는데다 출신 수병과 협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존되지 못하고 스크랩 처리되며 화려했던 함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자매함

USS 요크타운

파일:800px-USS Yorktown (CV-5) during the Battle of the Coral Sea, April 1942.jpg

USS 엔터프라이즈

파일:300px-USS Enterprise (CV-6) underway c1939.jpg USS 호넷

파일:300px-Aft view of USS Hornet (CV-8), circa in late 1941 (NH 81313).jpg

여담

각주

  1. 선전포고는 있었으나 암호 해독에 시간이 걸렸고 해독된 내용도 선전포고라고 받아들이기엔 미국 입장에선 애매했다.
  2. 징발된 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