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Yorktown class aircraft carrier
USS Yorktown (CV-5) Jul1937.jpg
1번함 요크타운
선박 정보
종류 정규 항공모함
건조 3척
운영 미국
취역 1938년[1]
퇴역 1947년[2]
모항 하와이 진주만
제원
엔진 9개의 증기터빈식 보일러
추진력 12만 마력
속도 32노트
항공기 F4F 와일드캣
F6F 헬캣
SBD 돈틀리스
TBF 어벤저 뇌격기
전장 250미터
선폭 33미터
흘수 7미터
배수량 19800톤(호넷-20100톤)
25500톤 (만재)

요크타운급 항공모함(Yorktown class aircraft carrier)은 제2차 세계 대전미국의 정규 항공모함이다.

진주만부터 태평양 전쟁의 종전까지, 중요한 전투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펼친 함급으로 이들의 항로가 곧 태평양 전쟁의 흐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태평양의 전세를 바꾸고 해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개발[편집 | 원본 편집]

이 항공모함을 건조할 당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가입해 있던 미 해군은 군함을 새로 만들 계획이 있었지만 미국에게 배정된 톤수는 135,000톤이었다. 이 중 렉싱턴급 항공모함 두 척과 레인저급 항공모함의 건조로 인하여 남은 톤수는 5만 5천 톤이었다. 미 해군은 레인저급 항공모함을 운영하며 얻은 경험을 통하여 항공모함은 최소 2만 톤급은 되야한다는 결론을 얻었으며, 그 결과 2만 톤급 항모 2척과 1만 5천 톤급 경항공모함을 건조하기로 결론을 내렸고 경항모로 와스프를, 2만 톤급 항모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두 척을 건조하였다.

이후 일본이 군축조약에 탈퇴함으로서 다시 군비경쟁이 일어나며 미 해군은 새로운 항공모함이 필요했고 새로운 설계를 적용한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것보다 이미 성능이 인증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을 한 척 더 건조하는 것이 빨랐으므로 세 번째 함인 호넷을 건조하였다.

설계 및 성능[편집 | 원본 편집]

Yorktown-class carrier technical drawing 1953.jpg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은 워싱턴 해군조약의 잔여 쿼터로 건조된 항공모함으로 조약에 따른 배수량 조정으로 결핍된 부분들이 존재하나 대부분의 설계들은 완벽했고 태평양 전쟁 초반에 큰 활약을 벌일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항공[편집 | 원본 편집]

요크타운급은 당시 정규 항모로 분류되던 항모로서, 비록 선체는 더 크지만 순양전함 개조 항모였던 렉싱턴급 항공모함보다 많은 항공기 운용 능력을 지녀 일반적으론 60대에서 최대 90대까지 운용할 수 있었다.

요크타운급은 대전기 항모답게 일직선 비행갑판을 가지고 있는 한편, 선체 선수 부분에 2개의 유압식 캐터펄트를 배치하여 항공기를 이함시켰고 착함 시 후미의 와이어로 착함하는 함제기들을 걸어 제동하는 어레스팅 와이어를 갖고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갑판에는 비행갑판의 중앙을 따라 3개의 승강기를 배치하는 구조로,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항공기 이착함 시엔 승강기의 작동은 불가능했다.

요크타운급이 운용하던 함재기는 초기엔 F4F 와일드캣 전투기와 SB2C 헬다이버, SBD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를 운용했고 어벤저 뇌격기를 운용했다. 나중에 F6F 헬캣이 배치되기도 했지만 이때는 요크타운과 호넷이 침몰한 뒤의 일이라 엔터프라이즈 한정이다.

무장[편집 | 원본 편집]

선체[편집 | 원본 편집]

요크타운급은 개방형 격납고 방식을 채용했고 비행갑판에는 사실상 장갑을 두르지 않는 설계를 택했다. 이런 개방식 격납고는 내부 유폭을 밖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지속적인 선체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었다. 실재로 요크타운급의 끈질긴 생존성도 이런 개방식 격납고가 한몫 했으며 비행갑판도 목재로 만들어 파손되었을 때 그 부분만 걷어내고 긴급하게 복구할 수 있는 피해 통제에 적합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항공 폭격에는 상당한 방호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조약 때문에 방뢰 능력이 취약했다는 단점이 있었다.

운용[편집 | 원본 편집]

전쟁 전[편집 | 원본 편집]

태평양 전쟁에서[편집 | 원본 편집]

1942년, 진주만 공습은 미 해군 태평양 함대의 모항 진주만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전함 애리조나와 펜실베니아를 비롯, 미국민들의 사랑을 받던 웨스트버지니아까지 격침되며 태평양 함대의 전함 전력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미 해군의 태평양 제해권은 상실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은 단편적으로 봤을 땐 대 성공이었으나, 항는 제 기능을 잃지 않았고[3][4]가장 중요한 목표물인 항공모함은 진주만에 없었다.

한편, 먼 바다에서 훈련을 받다 복귀 예정이었던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 호넷은 태풍으로 외해에서 대기하고 있다 하루 늦게 입항하게 되었고 운 좋게 진주만 공습에서 살아남을수 있었다.

진주만에 입항한 후 살아남은 요크타운과 두 자매는 전함들이 궤멸된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이 되었고 곧바로 전장으로 나갈 준비에 착수한다. 이 때 항모 기동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윌리엄 홀시 제독은 처참한 진주만의 모습을 보고 분노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W Halsey.jpg
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되어있을 것이다.

결국 1942년, 일제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5] 전쟁은 시작되었고 당장 일본군과 싸울수 있는 유일한 전력이었던 요크타운급 항모 3척은 기나긴 항해를 시작한다.

그 사이 시작된 일본군의 공세로 웨이크 섬과 괌 제도가 침공당했고 필리핀까지 빼았기며 일제는 남태평양까지 파죽지세의 진격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으로 이를 저지할 전력을 상실한 미군은 섬들을 포기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 사기를 고취하고 전세를 타개할 수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일반 대형 폭격기를 항모에서 이함시키는 전후무후한 작전인 둘리틀 특공대였다.

작전은 덴노가 있는 도쿄를 공습함으로써 진주만을 되갚아 주고 꺾여있던 전세의 주도권을 잡기 위함으로, 항모에서 이함해 일본군이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공습을 가하는 것이었다.

폭격기를 발진시킬 주역 항모는 3번함 호넷이 맡게 되었고 갑판에 미첼 폭격기 편대를 태운 호넷은 엔터프라이즈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으로 북진했다. 그리고 1942년 4월 18일 아침 7시, 호넷과 엔터프라이즈는 일본 남부 1200킬로미터 까지 도달했으나 하필 일본 연안경비정 니토마루[6]에 발각되고 어쩔 수 없이 작전 시간을 10시간 앞당긴 8시 20분에 작전을 개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호넷에서 이함한 둘리틀 소령의 1번기가 추락 직전에 이함에 성공했고 뒤이어 다른 폭격기들 모두 이함에 성공시킨 뒤 호넷과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홀시 제독의 항모타격대는 급속히 후퇴했다. 둘리틀 특공대는 일본 도쿄오사카 등지에 폭격을 해내며 보복 작전을 성공시켰고 당시 일본에게 본토가 공격당했다는 큰 정신적 타격을 입혔다.

이함하는 B-25 미첼 폭격기

그러나 한 번의 작전으로 불리한 전황을 바꾸기는 힘들었다. 1942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 요크타운과 렉싱턴급 항공모함 렉싱턴은 파푸아뉴기니로 진주하는 일본군 연합함대를 막기 위해 산호해에서 전투를 벌였고 진주만 공습의 원흉 쇼카쿠와 즈이카쿠, 일본군 경항모 쇼호 및 아오바를 비롯한 일본군 중순양함과 첫 항모간 결전을 치른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 전함들이 사라진 태평양에서 미 해군은 함대간 포격전이 아닌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한 해상 항공전을 역사상 처음으로 산호해에서 일본 해군과 펼치게 되며 요크타운은 일본 경항모 쇼호를 격침시키고 일본 항모부대의 함재기를 다수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 여기에 8일, 요크타운의 함재기는 쇼카쿠에 두 발의 10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해 피해를 주기까지 했으나,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반격으로 뇌격을 피해야 했고 12시 경에 급강하 폭격기로 부터 두발의 폭격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요크타운은 피해를 입고도 별 문제 없이 전열에서 이탈했으나, 렉싱턴은 일본군의 반격으로 격침되고 말았다.

요크타운 역시 비록 살아남았지만 폭격 피해가 작지 않았고 대파된 요크타운은 하와이 진주만 모항으로 예인된다. 비록 이 해전에서 요크타운이 전술적으론 패배했지만 방어선을 돌파하고 일본 해군에 피해를 입히며 전략적으로 승리했고 이 해전의 양상이 함대간 전함들의 결전이 아닌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한 해상 항공전 양상으로 바꾸게 되는 효시가 되었다.

수리중인 요크타운

이후 요크타운은 몇 개월간의 복구로 다시 전선에 복귀했으며 둘리틀 작전 성공 후 남태평양 전역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과 합류한다. 비록 산호해 해전에서 선전했지만 미국이 태평양에 투입한 5척의 항공모함 중 한 척인 렉싱턴이 격침되었고 새러토가도 피해를 입곤 이탈해 요크타운급 세 자매만이 유일한 태평양의 미 해군 항모였다.

반면 일본군은 남방작전에 성공하면서 남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상황에서 둘리틀 특공대의 동경폭격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대낮에 수도를 유유히 비행하며 덴노가 있는 고쿄 인근까지 무방비하게 노출시켰다는 충격은 미군이 본토를 위협 가능한 거점을 말소하고 장기적으로 미군을 서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작전이 필요했다. 이에 야마모토는 하와이를 재 공격해 미 해군을 태평양에서 완전히 몰아내자는 주장까지 하였으나 일본군의 역량 정도론 터무니 없던 망언인데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중국 전선에 집중하고 싶은 육군의 반발 등, 여러 이유로 중태평양의 거점인 미드웨이를 타격해 장기적으로 미군의 하와이 축출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미군에게 통신 감청 사실을 노출시키고 역으로 그 감청을 이용한 미군에게 공격기도를 노출하게 되었고 6월 3일, 미 해군은 일본 함대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1942년 6월 4일 운명이 날 당일 정규항모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를 비롯해 항모 공격대가 아침이 밝아오는 미드웨이 섬에 공습을 개시하며 미드웨이 해전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공습은 실패했고 뒤를 이은 미드웨이에서의 미군 반격 역시 막혔지만, 일본 함대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오전 7시, 마침내 플래처 제독은 TF16 함대의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TF17 함대의 요크타운에게 출격 명령을 내리며 152기의 항공기들이 항모에서 이함해 일본 함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운용 미숙으로 이함한 뇌격기, 폭격기, 전투기 부대들은 흩어져 축차적으로 날아가 버렸고 최초로 도달한 호넷의 뇌격기 부대들과 뒤이어 도달한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의 뇌격기 부대들은 일본군의 대공포화와 전투기들에 의해 큰 피해만 입곤 공격에 실패했고 어찌어찌 발사한 어뢰마저 폭발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당분간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것 같던 그 때, 카가의 견시가 급작스런 경보를 알리며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바꾼 운명의 5분이 시작되었다.

Dauntless bomb drop.jpg
적기 직상! 급강하!

견시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엔터프라이즈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들이 일본 함대 상공에서 내리꽃혔고 도합 50발의 폭탄이 일본 함대의 위로 투하되어 그 중 5발(비공식 10발)의 명중탄이 카가의 지휘부와 갑판을 박살내며 카가를 격침시킨다. 아카기는 함 중앙에 명중된 한발의 폭탄이 명중탄의 전부였지만 기폭된 폭탄이 격납고 내부의 탄약과 유류를 유폭시켰고 거대한 폭발과 함께 굉침했다.

흩어졌던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 폭격기 부대는 미군 잠수함 노틸러스를 쫓다 뒤늦게 함대로 귀환하던 아라시를 따라서 일본 함대를 발견했고 공격에 들어갔으나 지휘의 혼선으로 초반 카기에만 공격이 집중되었고 마침 임무를 상기한 멕클러스키 소령에 의해 몇몇의 폭격기 편대가 아카기로 기수를 틀며 아카기 공격에도 성공한 것이었다.

뒤이어 날아온 요크타운의 급강하 폭격기들은 불타며 가라앉는 아카기와 카가 사이에서 살아남아 있던 소류를 발견해 공습에 들어갔고 투하된 1000파운드 폭탄 세 발이 소류의 갑판에 명중한 다음 작렬하면서 소류도 카가와 아카기의 뒤를 따랐다.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는 3척의 일본 항모를 바닷속으로 처박아 주었으나, 아직 히류가 생존해 있었고 히류는 곧바로 공격대를 출격시켜 반격에 나선다. 히류의 공격대는 요크타운에게 세 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요크타운은 이미 히류의 공격에 대비해 조치가 취해져 있었고 뛰어난 피해복구능력으로 2시간 만에 작전 수행 능력을 회복했다. 문제는 결과적으론 요크타운에겐 이것이 불운으로 작용했는데, 2차 공격대가 2시간 만에 피해를 복구한 요크타운을 엔터프라이즈로 착각해 재공격을 가하여 두 발의 어뢰를 명중시켜 요크타운을 전열에서 이탈시킨다.

그러나 미군은 저항하는 히류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돈틀리스 폭격기 20대와 호넷에서 출격한 16대의 뇌격기와 함께, 집을 잃은 요크타운의 제3폭격비행대대도 소식을 듣고 복수를 위해 반격 작전에 참가했다. 결과적으로 히류는 네 발을 골고루 얻어맞고 대파되었고 결국 침몰하며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요크타운이 침몰한 후 이제 살아남은 요크타운급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에겐 가장 힘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살아남은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과달카날섬솔로몬 제도를 잇는 관문인 산타크루즈에서 미군 항모전단을 완전히 격파하려는 야마모토에 의해 다시 쇼카쿠,즈이카쿠를 포함한 즈이요와 준요로 구성된 일본 항모전단과 산타크루즈 해전을 치르게 된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먼저 일본 항공모함 부대를 발견하고 먼저 공격을 감행해 즈이요를 대파시키지만 이미 즈이호와 나머지 항모에선 공격대가 출격한 이유였고 이들의 연이은 대규모 폭격과 뇌격으로 인해 엔터프라이즈는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스콜 속에 숨어 공격을 피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호넷이 대파되었으며 엔터프라이즈는 쇼카쿠와 즈이호를 노리고 공격대를 발진시키지만 즈이호의 제로센 부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엔터프라이즈는 7기의 손상을 입었고 즈이호는 9기의 제로센을 상실했다.

그 후 엔터프라이즈기 겪은 전투는 엔터프라이즈를 죽음의 목전까지 몰고 갔고 문제가 생긴 엔터프라이즈의 대공관제를 전함 사우스다코다에게 의존한 채 사방에서 공격해호는 일본기에 맞섰고 폭탄 두발이 명중되었다. 엔터프라이즈는 3차 공격대의 뇌격으로 급격한 회피기동 끝에 9발의 어뢰를 피하고 다시 스콜 속으로 들어깄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국 엔터프라이즈를 포기한 야마모토의 단념으로 엔터프라이즈는 생존한다. 대파된 호넷의 항공대까지 수용해 거의 100대 이상의 함재기를 수용하게 된 채 전열에서 이탈하지만 호넷은 대파된 채로 여전히 물 위에 떠있었고 일본은 다시 세 차례 모두 호넷을 공격했지만 호넷은 생명을 끈질기게 놓지 않았다.

일본이 공격을 단념 한 후 미군은 중순양함 노샘프턴으로 인양하려 했지만 일본군의 재공격 우려로 호넷을 포기한 뒤 폭탄과 어뢰로 자침시키려 했으나 실패한 미군이 일본군의 접근을 알고 물러난 후 역시 호넷을 노획하려던 일본군은 호넷의 손상도가 심각하다는 걸 인지하여 인양을 포기한 채 구축함 아키구모와 마키구모에 뇌격명령을 내려 마침내 호넷은 침몰한다.

엔터프라이즈 역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아 퇴각했고 뉴칼레도니아 누메아에서 공작함 베스탈과 미군 기술자들의 수리 끝에 전열에 복귀했고 태평양에 남은 유일한 미군 항공모함이 되며 일본을 상대로 외로운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는 다시 살아남아 과달카날 전투에 참여해 3차 솔로몬에서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던 일본 8함대의 초카이와 키누가사를 격침시키며 그 귀환을 화려하게 알렸다. 이후 엔터프라이즈는 11월 15일 까지 일본 항공세력과 해군을 상대로 헨더슨 비행장의 비행단과 같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했고 수송선단을 전멸시키며 남태평양에서의 싸움은 엔터프라이즈의 승리로 끝났다.

엔터프라이즈는 1943년 전열에 복귀한 렉싱턴급 새러토가와 여전히 일본군과 싸웠고 공세로 전환한 미군을 따라 새 함재기로 무장한 후 중태평양에서 새로운 항모인 에식스급 항공모함과 함께 길버트 제도와 마샬 제도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그 해 말 본토에서 수리받은 뒤 1944년 연초부터 미군의 일명 개구리 뛰기라는 도서 상륙작전을 지원하며 신나게 구른다.

1944년 6월에는 일본 해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필리핀 해 해전에식스급 항공모함들과 참가해 다이호와 쇼카쿠를 비롯한 항모전단을 격멸하고 야간까지 치러진 전투에서 함대 전체가 등화관제를 해제한 채 함재기 착함을 유도하기도 했고 필리핀의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군의 상륙을 지원하고 즈이카쿠의 최후를 목격하는 등 나름대로의 활약을 하다 이오지마에서 카미카제에 승강기가 파손되는 큰 손상을 입고 진주만에서 수리하던 중 종전을 맞는다.

전후[편집 | 원본 편집]

USS Enterprise (CVS-6) awaiting disposal at the New York Naval Shipyard on 22 June 1958.jpg

엔터프라이즈는 종전 후 해외의 미군들을 복귀시키는 메직 카페트 작전을 마지막 작전으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요크타운급들은 분명 우수한 항모였지만 수많은 전투로 손상되고 제트기 시대엔 부적합했기에 퇴역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였는데 전쟁 이후 유지가 힘든 대형 함선들이 폐기되어 갔고 엔터프라이즈 역시 그러한 위기에 처했다. 전공과 상징성이 있는 미 해군 승리의 상징같은 존재였던 엔터프라이즈였지만 미 의회나 상층부는 기념함 보존에 회의적이었는데다 출신 수병과 협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존되지 못하고 스크랩 처리되며 화려했던 함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자매함[편집 | 원본 편집]

CV-5 요크타운 (Yorktown)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의 네임쉽이다. 요크타운의 함명은 미국 독립전쟁의 격전지에서 비롯된 이름이며 1934년 5월 21일 뉴포트 조선소에서 진수되어 1936년 4월 4일에 취역하였다. 렉싱턴급과 레인저급의 후계 항모이며 요크타운은 독일과의 전쟁이 한창인 대서양에 파견되어 호위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고 전쟁 기간 동안 초반엔 사보아 섬 등지에 병력을 충원시키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후 대표적인 전투인 산호해 해전에선 렉싱턴과 미드웨이 해전에선 엔터프라이즈와 호넷과 참가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뇌격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뛰어난 대미지 컨트롤 능력을 보여준 군함으로 유명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때문에 요크타운급 중에선 가장 먼저 희생된 비운의 군함이기도 하다.

엔터프라이즈는 요크타운급의 두 번째 함선으로 세계 해전사상 전후무후한 전훈을 남긴 군함으로도 유명하다. 함번은 요크타운의 뒤를 이은 CV-6이며 회색 유령이나 럭키 E(Lucky E)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고 요크타운이 진수된지 약 다섯 달 뒤인 1936년 10월 3일에 진수하여 1938년 5월 12에 취역하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유명한 전투는 대부분 참가하였고 대표적인 전투론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달 전역에서의 사보섬 해전, 산타크루즈 해전과 필리핀 해 해전 등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겨 단신으로 일제에 맞서 이긴 태평양 전쟁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엔터프라이즈가 격침시킨 일제의 군함으론 항공모함만 해도 5척이 넘고 전함 히에이와 야마토급 무사시가 엔터프라이즈의 손에 박살이 났다. 이 외에도 중순양함과 경항모 격침 및 중파 기록 역시 상당하고 이런 무쌍을 찍으면서도 요크타운급 중에선 유일하게 전후까지 생존하였으나 예산 문제나 함재기 대형화로 인해 퇴역 후 보존 처리하는 대신 헐값에 팔려 스크랩 처리되는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같은 전공을 세웠기에 수훈 기록도 어지간한 함선들도 비교하기 뭣할 정도로 화려하고 엔터프라이즈가 받은 훈장도 20개나 되며 그 받기 힘들다는 영국 왕실 해군성 깃발 수상과 대통령 표창 등등…… 엔터프라이즈가 태평양 전쟁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CV-8 호넷(Hornet)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의 막내, 함번은 CV-8이며 CV-6인 엔터프라이즈에서 왜 7이 빠져 있느냐면 요크타운급의 후계 함정으로 와스프가 건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름의 유래가 말벌인 호넷이다. 호넷은 해군조약이 파기된 이후인 1939년 9월 25일에 진수되어 1940년 12월 14일에 취역하였다. 워싱턴 해군조약 파기 이후 건조되어서 자매함들보다 배수량이 증가하였고 방호력에 좀 더 신경을 썼다. 호넷은 B-25 미첼 중폭격기를 해상에서 이함시킨 매우 특이한 이력을 지닌 함이며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하고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분전하다 격침된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과달카날 전역에 엔터프라이즈와 참가하였고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대파되었지만 끝끝내 침몰하지 않던 호넷을 미군은 인양 후 재수리해 쓰려 했으나 상황이 급박한지라 폭격과 뇌격으로 처분하려 했으나 호넷은 그것들을 또 버텨내었다. 그 이전에 이미 세 차례의 공습을 받고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지만 호넷은 살아남았고 결국 인양을 포기한 미군이 호넷을 버린 뒤 일본군의 노획 역시 불발된 채 일본군의 뇌격 처분으로 천천히 침몰하였다.

각주

  1. 요크타운
  2. 엔터프라이즈
  3. 대표적인 것이 유류저장고를 살려둔 것으로 유류저장고가 파괴되었으면 한동안 재급유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다음날 입항한 요크타운급 3자매는 물론, 태평양 함대 전 함정에 제약이 생겼을 것이다.
  4. 일본군이 전투 가능한 함선들을 우선 표적으로 선정한 것이 이유이며 이 전략적 오판으로 인해 미 해군은 반격의 탈출구를 찾게 된다.
  5. 선전포고는 있었으나 암호 해독에 시간이 걸렸고 해독된 내용도 선전포고라고 받아들이기엔 애매했다.
  6. 징발된 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