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

남궁(南宮)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다. 남궁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18,74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93위이다. 본관은 함열 단본이다.

기원[편집 | 원본 편집]

남궁씨의 유래는 중국의 고대에서 비롯된다. 본래 황족인 희성(姬姓)이었다. 은나라(상나라)에 이르러 남()쪽 궁()에 살았다하여 남궁(南宮)으로 성을 정하였다고 한다.

남궁씨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남궁괄(适=括)로 추정된다. 남궁괄은 주문왕(周文王)의 사우(四友) 중 한 사람이다. 그가 대장군으로 있을 때 폭군인 은나라 주왕(紂王-BC1154~1111)에 의해서 투옥된 문왕을 기지를 발휘하여 구해내기도 하였다. 그는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공신으로 이상서(二尙書)에 오르고 한 지방을 식읍으로 받아 다스리게 되었으며 그 곳의 지명을 그의 성을 따라 남궁현()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사위가 된 남궁괄()과는 동명이인이다.

한국 남궁씨의 원조는 주나라의 남궁수(南宮修)이다. 남궁수는 기자(箕子)와 함께 조선에 동래(東來)하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기자조선을 건국하고 사도(司徒)의 직에 올라 백성들에게 시서와 예악을 가르쳤으며, 음식의 예법과 제사에는 편두를 쓰게 하며 의관제도와 직제를 중국과 같게 하였다고 한다.

함열 남궁씨[편집 | 원본 편집]

함열 남궁씨(咸悅 南宮氏)의 시조는 고려 성종 때의 대장군 남궁원청(南宮元淸)이다. 그는 991년(고려 성종 10년) 대장군이 되어 여진족을 백두산(白頭山) 북방까지 몰아내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임명되고 감물아백(甘勿阿伯)에 봉해졌다. 이후 세보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 남궁득희(南宮得禧)을 1세조로 하였다. 남궁득희의 증손 남궁민(南宮敏)은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간의대부를 지냈다. 함열 남궁씨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5명, 무과 급제자 9명, 사마시 53명, 음관 24명을 배출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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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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