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성씨)

(卞, 邉)씨는 중국한국의 성씨이다.

법 변 卞[편집 | 원본 편집]

(卞)씨는 중국 주(周)나라 문왕의 여섯째 아들인 조숙진탁(曺叔振鐸)의 후손이 변(卞)이라는 땅을 하사받고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卞)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78,68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59위이다. 본관은 초계, 밀양 등 20본이며, 대본은 초계 변씨이다.

초계 변씨(草溪 卞氏)는 당(唐)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예부상서(禮部尙書)을 지낸 변원(卞源)이 743년(경덕왕 2) 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효경(孝經)》 등을 가지고 신라에 동래하여 정착한 것이 시초라 하나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로 한다. 그의 아들에 의하여 변광(卞光)의 장파(長派), 변요(卞耀)의 중파(仲派), 변휘(卞輝)의 계파(季派)로 갈라졌다.[1]

생원 변요(卞耀)의 손자 변고적(卞高迪)이 밀양에 세거(世居)하면서 밀양 변씨(密陽 卞氏) 분파하였다. 변고적의 6대손 변옥란(卞玉蘭)은 1346년(고려 충목왕 2)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판서,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후 조선이 개국되자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에 임명되고 개국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변옥란의 아들 변중량(卞仲良)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백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로서 1395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변중량의 동생 변계량(卞季良)은 조선 태종 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 1420년(세종 2) 집현전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에 올랐다.

2000년 인구는 초계 변씨 49,506명, 밀양 변씨 16,911명이다.

姓 변 邉[편집 | 원본 편집]

(邉)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52,869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63위이다. 본관은 원주, 황주, 장연 등 19본이다.

장연 변씨[편집 | 원본 편집]

장연 변씨(長淵 邉氏)는 황해남도 장연군을 본관으로 한다. 《장연변씨세보(長淵邉氏世譜)》에 따르면, 시조 변유령(邉有寧)은 중국 농서(隴西) 사람이며 송나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習秘侯)를 지내고 신라에 귀화하여 대아찬(大阿餐)을 지낸 변경(邉鏡)의 증손이다. 그는 1138년(인종16) 중문지후(中門祗侯)에 이르렀고 고려 인종 때 연성부원군(淵城府院君:장연의 옛 지명)에 봉해지고 장연(長淵)에 정착하였다고 한다.[2] 2000년 기준 인구는 1,931명이다.

황주 변씨[편집 | 원본 편집]

황주 변씨(黃州 邉氏)는 황해북도 황주군을 본관으로 한다. 시조 변려(邉呂)는 《황주변씨세보(黃州邉氏世譜)》에 따르면, 중국 농서(隴西) 사람으로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로 귀화하여 취성(取城:황주의 옛 지명)에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1232년(고종 19) 몽골군이 송경(松京)을 침입하자 강화(江華)로 피나간 고종을 시종(侍從)하는데 공을 세워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져 식읍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시조 변려는 장연 변씨 시조 변유령의 현손이라 한다. 석계공파(石溪公派), 명산공파(明山公派), 운곡공파(雲谷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치재공파(恥齋公派), 자하공파(紫霞公派), 망암공파(望菴公派), 휴암공파(鵂巖公派), 청암공파(淸庵公派), 사용공파(司勇公派), 절충공파(折衝公派)로 나뉘었다.[3] 2000년 기준 인구는 6,848명이다.

원주 변씨[편집 | 원본 편집]

원주 변씨(原州 邉氏)는 강원도 원주시를 본관으로 한다. 원주 변씨는 황주 변씨의 분파이다. 변려(邉呂)의 현손 변순(邉順)이 1268년(원종 9) 사신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원(元)나라에 가서 심양(瀋陽)의 장수로 있다가 천호후(千戶侯)에 봉작을 받았다. 그의 손자 변안렬(邉安烈)은 공민왕과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하고 귀국하여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을 격퇴시켜 2등공신(二等功臣)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개성(開城)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추성보조일등공신(推誠輔祚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輔祚功臣)로서 이성계(李成桂), 유실(柳實) 등과 함께 운봉(雲峰), 부령(扶寧)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한방언(韓邦彦)과 함께 단양(丹陽)과 안동(安東)에 침입해 온 왜구를 격퇴시켜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1388년(우왕 14)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이르렀으나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제거하고 쫓겨난 우왕(禑王)을 복위 시키려다가 김저(金佇)와 함께 죽었다. 그는 공민왕의 인척인 원주원씨(原州元氏)의 딸과 혼인하여 원주에 정착하였다. 후손들은 변안렬을 시조로 하고 원주(原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4] 2000년 기준 인구는 37,505명이다.

각주

Wikipedia-ico-48px.png
이 문서는 한국어 위키백과변 (성씨) 문서 15580711판에서 분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