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성씨)

(洪)씨는 성씨의 하나이다. 홍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518,63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의 성씨 인구 순위 20위이다.

연원[편집 | 원본 편집]

중국[편집 | 원본 편집]

씨는 중국 돈황(감숙성 서북부)의 공공씨(共工氏) 후손이 원수를 피해 공(共)자에 수(水)자를 붙여 홍(洪)자를 만들어 성씨로 삼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크게 황제염제 계통으로 나뉘며, 후대에 다섯 가지 계통이 추가되어, 7~8가지 계통이 된다고 한다.

한국[편집 | 원본 편집]

씨의 본관은 남양(南陽), 풍산(豊山), 홍주(洪州), 의성(義城), 회인(懷仁), 개령, 부계 등 41본이 있으며, 이 중 가장 인구가 많은 본관은 남양 홍씨이다.

남양 홍씨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지낸 홍은열(洪殷悅)을 기세조(起世祖)로 하는 당홍계(唐洪系)와 고려시대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는 토홍계(土洪系)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남양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일대의 옛 지명이다.

남양 홍씨 당홍계[편집 | 원본 편집]

남양 홍씨 당홍계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를 지낸 홍은열(洪殷悅)이다.

고구려 27대 왕인 영류왕 때 당나라 8학사 중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가 유학(儒學)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했으며, 고구려가 망하고 삼한 통합(三韓統合)에 따라 신라 선덕여왕 때 유학 발전에 공(功)을 세워 문무왕 때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져셔 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의 계대(繼代)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고려 개국공신이며 삼중대광태사인 홍은열(洪殷悅)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1] 2000년 인구는 117,638가구, 379,708명이다.

남양 홍씨 토홍계[편집 | 원본 편집]

남양 홍씨 토홍계의 시조는 고려 고종(1213년) 때 금오위별장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이다. 그의 선계는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으나, 남양(오늘날 화성시)에 대대로 살던 토착 성씨로 전해진다.[2] 2000년 인구는 9,250가구, 30,662명이다.

의성 홍씨[편집 | 원본 편집]

의성 홍씨(義城 洪氏) 시조 홍유(洪儒)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태사를 지냈으며, 처음 이름이 홍술(弘述)이나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홍(洪)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고, 사후 태조묘정에 배향되었다. 태조의 제26비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洪氏)의 아버지이다. 2000년 인구는 68가구, 206명이다.

홍주 홍씨[편집 | 원본 편집]

홍주 홍씨(洪州 洪氏) 시조 홍규(洪規)는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벽상익찬공신(三重大匡壁上翊贊功臣)으로 책훈되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해풍은 충청남도 홍성군 일대의 옛 지명이다. 홍규(洪規)는 고려 태조 왕건의 제12비인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의 아버지다. 홍주 홍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3] 2000년 인구는 302가구, 935명이다.

풍산 홍씨[편집 | 원본 편집]

풍산 홍씨(豊山 洪氏)의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1242년(고려 고종 29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지냈다. 시조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면 신성포 오산당에 있다.[4] 풍산 홍씨는 조선 후기 세도 가문으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홍봉한, 홍인한, 홍낙성, 홍국영 등이 있다. 2000년 인구는 11,222가구, 36,420명이다.

회인 홍씨[편집 | 원본 편집]

회인 홍씨(懷仁 洪氏)의 시조 홍연보(洪延甫)는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인물로 홍윤성(洪允成)이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2등이 되고, 예종 때에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2000년 인구는 39명이다.

홍씨 성을 쓰는 인물[편집 | 원본 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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