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성씨)

(夫)씨는 한국의 성씨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제주 부씨 단본이다.

제주 부씨[편집 | 원본 편집]

제주 부씨(濟州夫氏)는 제주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탐라 개국설화에 등장하는 부을나(夫乙那)이다. 조선 초에 진용교위(進勇校尉) 후령별장(後領別將)을 지낸 부언경(夫彦景)을 1세조로 한다.

기원[편집 | 원본 편집]

제주 고씨, 제주 양씨와 같은 유래를 가지고 있다.

탐라 개국설화에 의하면 시조 부을나(夫乙那)는 탐라(耽羅) 한라산(漢拏山) 북쪽 모흥혈(毛興穴)에 솟아나온 세 신인(神人) 중의 한 명이다. 양을라, 고을라, 부을라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 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개척되었다. 후에 벽랑국(碧浪國)으로부터 오곡(五穀)의 종자(種子)와 6축(六畜)을 가져온 세 공주를 아내로 삼고 활을 쏘아 화살이 닿는 곳를 일도(一徒), 이도(二徒), 삼도(三徒)라 부르고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이 땅에서 솟아나니 맏이를 양을나, 버금을 고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三人은 거친 들판을 돌아 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붉은 진흙으로 봉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한 사람 따라와 있었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3人 및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 씨앗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에 사자(使者)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3왕녀를 낳고 이르되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人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 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3왕녀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룩하시옵소서"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

3人은 나이 차례로 나누어 배필을 삼고 샘물이 달며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활을 쏘아 터를 정하니 良乙那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 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夫乙那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

東國通鑑(동국통감)은 성종15년(1484) 간행되어 長曰良(장왈양)이라 하고 長爲良說(장위양설)이 굳어졌으며, 이후에도 살펴보면 효종4년(1654)에 李元鎭(이원진)牧使(목사)도 三姓穴條(삼성혈조)에 良高夫(양고부)라고 썼고 숙종29년(1703)에 李衡祥(이형상)牧使(목사) 역시 三姓祠 上樑門(삼성사 상량문)에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함에 있어서 삼성신인 강생(三姓神人 降生)의 사적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한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었다. 王朝實錄(왕조실록 42~P.163)에 의하면 영조5년(1771)에 高漢俊(고한준)등이 主上(주상)께 奏請(주청)하는 상소문에도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또한 李丙燾(이병도)著의 韓國史(한국사)에도 良高夫(양고부)요, 金泰能(김태능)著의 濟州島史論攷(제주도사논고)에도 良高夫(양고부)라 했으며 國史大事典(국사대사전)•한국사대사전 등에도 良高夫(양고부)라고 기록하였으며, 玄容駿(현용준)著 「濟州島神記(제주도신기)」에도 良高夫(양고부)라 수록이 되어 있다.

"제주목(濟州牧)" 본주(本州)는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주(州)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태초(太初)에는 사람과 물건이 없었는데, 신선[神人]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지금도 주산(主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맏을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세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다.

시조[편집 | 원본 편집]

부을나 이후의 상계가 실전되어 조선 초에 진용교위(進勇校尉) 후령별장(後領別將)을 지낸 부언경(夫彦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분파[편집 | 원본 편집]

부언경의 증손 부삼로(夫三老)가 세종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형제 중 첫째 아들 부유렴(夫有廉)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제주도를 지켰고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한 그의 아들 부세영(夫世榮)의 아들 부각(夫恪), 부협(夫協), 부열(夫悅), 부신(夫愼), 부폭(夫幅), 부홍(夫弘) 6형제는 제주6파(濟州六派)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부삼로의 막내 아들 부유성(夫有成)이 육지로 건너가 경기도(京畿道) 연천(蓮川)에 세거하였다.

인물[편집 | 원본 편집]

  • 부종인(夫宗仁, 1767년 ~ 1822년) : 조선 문신. 29세 되던 해인 1795년(정조 19) 제주 별시에 입격해 전시직부의 특권을 얻어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대정현감(大靜縣監)‧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부종인은 상대(霜臺:사헌부)의 검찰관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사헌부 지평으로 오랫동안 해치를 쓰고 법부를 지켰으나 청렴 강직하여 많은 사람들이 흠모했다. 처음 서울로 상경하고 정조임금을 뵈었을 때 정조 임금은 부종인을 보고 "이 사람은 탐라의 큰 집안 자손"이라고 하시며, 유관(儒官)만이 맡을 수 있는 별검에 제수했다. 1797년 정조 임금이 현직관료를 대상으로 응제할 때 수석으로 합격하자 정조 임금께서 친히 청요직 중 하나인 예조좌랑으로 발탁했다. 이때부터 부종인은 시종신으로서 정조 임금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과거 급제자[편집 | 원본 편집]

제주 부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 무과 급제자 2명을 배출하였다.[1]

  • 부종인(夫宗仁, 1767년생) : 문과(文科) 조선 정조 19년(1795년)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 부시흥(夫時興, 1657년생) : 무과(武科) 조선 숙종 4년(1678년) 정시 을과(乙科)
  • 부사민(夫士敏, 1758년생) : 무과(武科) 조선 정조 8년(1784년) 갑진(甲辰) 정시(庭試) 병과(丙科)

관련 문서[편집 | 원본 편집]

참고자료[편집 | 원본 편집]

  • 뿌리찾기운동본부 편저, 《한글판 우리집의 족보》, 서울, 민중서원,1998-04-25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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