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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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갓 겉모양만 아름답게 꾸미고 견고하게 쌓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참으로 옳지 않지만, 겉모양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병법(兵法)에 상대방의 기를 먼저 꺾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소하(蕭何)는 미앙궁(未央宮)을 크게 지었고, 또 말하기를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루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가 꺾이게 하는 것도 성을 지키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조, 1줄 요약 :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
수원화성 화서문.JPG
수원 화성
수원화성.JPG
장안문 옆의 북동치에서 동편으로 바라본 수원 화성의 모습. 화포요새인 북동포루와 동북각루에 해당하는 방화수류정, 보병 거점인 동북포루가 보인다
건축물 정보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대지면적 411,534 m2
문화재 정보
종목 사적 제3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문화유산 (ii), (iii)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1997년 (세계유산)

수원화성(水原華城)은 경기도 수원시에 위치한 조선 정조시기 축성된 성곽이다.

한국 성곽 건축의 끝판왕. 실제로 이후로 지어진 성곽을 보아도 수원화성의 건설 개념에서 더 이상 발달하거나 진보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주 1] 통상 조선시대의 경우 행정중심지에는 형식상의 읍성을 두고, 유사시에 방어를 인근의 산성에서 하는 방식을 사용하였으나, 수원화성은 기존의 읍성과는 달리 자체적인 방어력이 상당하게 설계가 되어서 굳이 읍성을 버리고 산성에 가서 농성을 할 필요가 없는 수준으로 설계를 하여 건설한 성이다. 어찌보면 조선시대 성곽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이다.

참고로 원래의 수원읍성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해 있었으나(현재의 화성시 안녕동 일대로 정확히는 융건릉이 자리한 곳이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기 이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능으로 격상시키는 것과 동시에 읍성이 있던 곳으로 이장해 버리고(참고로 왕릉이 들어서면 인근 일정구역은 아무것도 건축을 할 수 없다) 화성을 건설하면서 자연스럽게 수원의 읍치가 화성 내부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의 수원시의 기초가 되게 된다. 즉 현재의 화성시 위치가 원래 수원읍성이 있던 동네이고, 지금의 수원 화성의 자리가 현재의 수원시가 되어버린 것. 역사적 위치를 따지면 화성시와 수원시 이 두 동네의 이름과 성곽이 서로 뒤바뀌어 버린 셈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원의 상징과도 같은 문화재이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엠블럼에도 수원 화성이 들어가 있을 정도.

제원[편집 | 원본 편집]

성둘레 5,744m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조선시대에 쉽게 볼 수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4개의 성문, 2개의 수문, 3개의 공심돈, 2개의 장대, 노대 2개소, 포(鋪)루 5개소, 포(砲)루 5개소, 각루 4개소, 암문 5개소, 봉돈 1기, 적대 4기, 치성 9개소, 은구 2개로 이루어진 총 48개의 시설물로 성곽이 구성되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의 시설물[주 2]이 소실되었다. 이 중 남수문은 2012년 6월 복원이 완료되었으나 팔달문에서 남수문에 이르는 구간은 현재 팔달시장이 성곽 자리에 정확하게 들어서 있는지라[주 3] 성곽이 있었던 위치만 바닥에 표시해 놓고 있는 상황이며, 이 때문에 나머지 소실구간은 복원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전체적으로 화강암을 사용해서 축성하였으며, 지대가 낮은 동쪽의 성벽은 흙으로 언덕을 만든 뒤(토성의 형태이다) 그 위에 돌로 성을 쌓아올렸다. 단, 적의 포격이 집중될 수 있는 일부 시설물들은 포격에 의해 성이 한번에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벽돌을 사용하여 건설되었다. 원래 화성에 성을 쌓을 것을 주장했던 사람 중 한명인 정약용은 중국처럼 벽돌로 성을 쌓을 것을 주장하였으나 인근에 화강암 채석장이 자리하여서 그냥 무난하고 흔한 재료인 화강암을 주로 사용하고, 일부 벽돌을 사용한 성이 되었다. 뒷이야기지만 벽돌의 경우 횡력에 약한 편이어서 해당 부분을 수시로 보수를 해 주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화강암으로 성을 쌓은 것이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던 셈이다.

주요 시설물[편집 | 원본 편집]

성문[편집 | 원본 편집]

  • 장안문 : 북문이자 정문. 통상 남문을 정문으로 하지만 화성은 북문이 정문이다.
  • 팔달문 : 화성의 남문.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장안문팔달문의 옹성측 성문에는 다섯개의 물구멍인 일명 오성지(五星池)가 있어서 화공에 대비하도록 되어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구조였다고 한다
  • 창룡문 : 화성의 동문. 1번 국도이 이 앞으로, 43번 국도이 창룡문을 통과하는 방향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수원지역의 교통방송에 수시로 등장한다.
  • 화서문 : 화성의 서문.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암문 : 화성에는 서남암문, 서암문, 북암문, 동암문, 남암문의 5개 암문이 존재했다. 이 중 남암문은 팔달시장 자리쯤에 있었으나 현재는 시가지의 확장으로 사라져서 복원되지 않은채로 있어 현존하는 암문은 총 4개이다.
  • 수문
    • 화홍문 : 화성을 가로지르는 수원천의 북쪽 수문이다. 참고로 이쪽이 상류측이다.
    • 남수문 : 화성을 가로지르는 수원천의 남쪽 수문이다. 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2012년 복원을 하였다. 그런데 수문의 역할을 하는 홍예문의 형태를 복원하는데 있어서 논란이 존재한다. 화성성역의궤의 모양은 오각형의 이중 석축으로 건설이 되었는데 새로 복원한 남수문의 홍예는 그냥 밋밋한 사각형의 석재를 사용하고 그냥 단일 석축의 홍예문을 만들어버린 것. 이유는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쉽게 얘기해서 남수문의 복원 논란은 화성성역의궤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궤의 모양과 다른 결과물이 튀어나와 발생하는 논란이다. 하지만 실제로 복원과정에서 이 부분을 알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일제시대 정비된 수원천을 당시 원형대로 100% 돌리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데다, 당시 지표 높이와 현재의 지표 높이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완전하게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한 것은 당시 남수문 복원에 참여했던 분의 고민[1]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니까 한번 읽어보도록 하자.

장대[편집 | 원본 편집]

화성장대(서장대). 전시 지휘소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장대는 성내에 존재하는 일종의 군사 지휘소라 할 수 있다. 화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 두 장대가 존재하는데, 동장대는 동문인 창룡문 인근에,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 동장대 : 동편에 위치한 장대이다. 평시에 왕이 군사들을 사열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사열식을 하는 목적이 있어서인지 주변은 평지에 가까운 공터가 꽤 넓게 펼쳐져 있다. 사열식을 하지 않을 때에는 군사들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었으니 어찌보면 연병장이 맞을지도(...) 지금은 사열식은 하지 않지만, 여기에 활터가 자리하고 있다.
  • 서장대 : 화성의 서쪽 팔달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2층의 건물로 이 위에 서 있으면 화성 전체가 조망이 가능하다. 동장대가 평시 지휘소였다면 서장대는 화성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가장 적의 공격이 닿기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곳은 전시 지휘소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지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치(雉)[편집 | 원본 편집]

치성(雉城)이라고도 한다. 성벽에서 凸자 모양으로 돌출된 부분으로 고구려 시기부터 유래된 한국 성곽의 특성이다. 일직선으로 성벽을 쌓을 경우 성의 방어선이 단조롭게 되고, 방어시 공성측을 공격하는 각도가 제한되지만, 이 치를 통해서 다른 각도에서도 성벽을 서로 엄호할 수 있게 만든 것. 이름은 화성의 경우 아무런 구조물이 없는 형태부터 시작하여, 누각을 올린 각루, 분대규모의 병력이 숙박을 할 수 있는 일종의 GP에 해당하는 포(鋪)루, 건물을 올려놓고 그 안에서 화포를 사용하는 포(砲)루의 형태, 그리고 성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벽 양편에 설치하는 적대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참고로 이 치(雉)라는 이름은 을 뜻하는 것인데 꿩이 구석에 잘 숨어서 밖을 빼꼼하니 잘 살피는 것에 빗대서 지어진 이름이다. 공식적으로는 치나 다른 시설물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지만, 성문 인근의 성벽을 살짝 휘어지게 만들어서 치의 형태를 가지게 건설된 구간도 몇 곳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창룡문 인근의 성벽은 치도 아니고 적대도 아니지만 형태상 둥그스름한 형태의 치성에 가깝다.

  • 적대 : 성문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문 옆에 설치한 치성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치보다는 대형화된 형태이며, 바로 옆 성벽보다 왠지 높은 높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공성전에서 왜군의 장창의 길이가 일반적인 성벽의 길이와 거의 맞먹어서 방어를 하는데 어려움이 발생, 공격이 집중되는 성문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일반적인 치보다는 높고 대형화된 적대를 만든 것이다.[주 4] 화성의 경우 장안문과 팔달문 옆에 각각 2개씩의 적대가 성문 양편에 존재하였는데 현대에 들어서 장안문쪽의 적대(북동적대, 북서적대)는 복원이 되었으나, 팔달문쪽의 적대는 인근에 도로와 건물들이 너무 많이 들어차 있는 덕분에 현재는 철거되어 있는 상태이다. 여담으로 장안문쪽 북서적대에는 홍이포 1기가 야외전시되어 있다.
북동노대에서 바라본 동북공심돈의 모습
  • 공심돈 : 공심돈 이전의 단계는 내부를 완전히 채워넣은 적대이다. 이 적대를 보다 대형화하고, 속을 비운 요새시설이 바로 공심돈으로 병력이 성벽 위에 노출되는 적대의 약점을 보완하고 일종의 망루 역할을 겸하게 하는 용도로 건설되었다.
    • 동북공심돈
    • 서북공심돈
    • 남공심돈 : 팔달문 부근에 있었던 시설이다. 현재는 철거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살펴본 형태는 서북공심돈과 거의 비슷하지만, 성벽에 일치시킨 것이 아니라 동북공심돈처럼 성가퀴와 약간의 간격을 두어 건설되었다.
  • 각루(閣樓) : 치성 위에 누각을 올려놓은 것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햇빛과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시설. 평시에는 연회장소나 놀이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화성에는 총 4개의 각루가 있다. 이 중 동북각루와 서북각루에는 온돌 시설이 갖춰져 있어서 포루(鋪樓)와 같이 병력의 숙박 및 휴식이 가능하게 되어있다.
    • 동북각루 : 방화수류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 동남각루
    • 서남각루 : 특이하게 본성 바깥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용도를 통해서 연결된다. 화양루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 서북각루
  • 포루(鋪樓) : 단순히 누각만 올린 각루와는 달리 온돌 시설까지 갖춰놓은 보병 분대급 초소이다. 순찰을 돌면서 해당 지역마다 거점을 삼아서 도는 방식으로 진행한 듯. 실제 내부에 들어가 보면 키 160남짓의 사람 서너명이 누워서 자거나 대여섯명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정도의 규모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온돌 부근에는 굴뚝까지 갖춰놓고 있다.
화성의 포루(砲樓) 중 하나인 남포루의 모습
  • 포루(砲樓) : 화성 치성(雉城) 형태 시설물의 끝판왕. 일반 치성이 단순한 냉병기를 투사하는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 포(砲)루는 성 밖으로 튀어나온 치의 내부에 화포를 장비하여 아예 원거리에서 적을 공격하는 시설이다. 단순히 화포만 두는 것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경사진 지붕을 두어서 외부의 투사무기에 어느 정도 방어력을 가지도록 만들었으며(이를 피탄경시라고 한다), 벽돌로 만들어서 대포병 사격에 의해 성벽이 한번에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내부는 2~3층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각 층에서 화포공격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 외부에서 이 포루를 구별하는 방법은 성가퀴에 나 있는 구멍의 모양이 열쇠모양으로 되어 있으면 바로 화포가 준비되어 있었던 보루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화포의 반동으로 포가 위쪽으로 튀는 것과 화포의 연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감안하여 열쇠 모양의 구멍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화성에는 모두 5개의 포루(砲樓)가 자리하고 있다.(북동포루, 동포루, 남포루, 서포루, 북서포루) 이 중 북동포루, 동포루, 북서포루는 성 바깥쪽은 우전각지붕의 형태를, 내부쪽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한 특이한 형태이다.

기타시설[편집 | 원본 편집]

서노대(西弩臺), 팔달산 위에 있으며, 쇠뇌인 노를 발사하기 위한 시설이다.
  • 노대(弩臺) : 노대는 대형 쇠뇌(弩, ballista)를 설치하고 발사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당연히 일반적인 활보다 더 멀리, 더 많은 양의 화살을 한번에 발사할 수 있는데, 화성에는 동북노대와 서노대 두 곳에 설치가 되어 있다. 서노대는 서장대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북노대는 창룡문 부근에 치성의 형태로 성벽에 돌출되어 있다. 창룡문 인근에는 별도의 치성이 없는 대신 노대를 돌출시켜 성벽의 방어력을 보강한 듯.
    • 북동노대 : 창룡문바로 북쪽에 위치한 치성의 형태로 있다. 다만 현재 복원된 북동노대는 화성성역의궤의 모습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으로는 여장이라고도 하는 성가퀴의 형태가 의궤에서는 둥글둥글한 모양인데 복원된 모습은 어째 위쪽이 평평한 일반 평여장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
    • 서노대 : 서장대 바로 옆에 붙어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모양.
화성의 봉돈. 봉화를 올리는 시설이다.
  • 봉돈 : 봉화를 올리기 위한 봉수시설이다. 총 5개의 봉수를 올릴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각각의 봉화 방향이 약간씩 다른 방향으로 되어서 전국의 봉화망으로 연결이 된다. 이 봉돈도 성벽에 붙어있는 대신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이 곳곳에 뚫려있다. 화성의 봉돈은 특이한 것이, 보통 일반적인 봉수시설은 산꼭대기에 위치한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는 치성의 형태로 성벽에 붙여서 건설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다른 봉수시설에서는 보기 어려운 형태. 참고로 이 봉수대는 당시 오산쪽에서 들어오는 봉화와 용인쪽으로 연결되는 봉화 두 방향을 통하여서 전국의 봉수망으로 연결되게 되어있었다.[주 5]
  • 용도(甬道) : 암문중 하나인 서남암문에서 뻗어나가는 양편에 성가퀴가 있는 통로이다. 서남암문에서 서남각루인 화양루까지 연결되는 통로로,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 연결되어 있다. 다만 본성에서 길게 삐져나온 곳인지라 방어력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2개의 치(용도동치, 용도서치)를 설치하였으며, 용도가 점령될 것에 대비하여 용도로 통하는 서남암문 위에 서남포사를 설치[주 6]하여 감시기능을 이중으로 하였다 참고로 용도의 끝인 화양루 위에 서면 멀리 오산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그만큼 중요한 위치라는 소리. 사실 이것은 팔달산의 능선이 좀 애매하게 남쪽으로 삐져나와서 생긴 시설이다. 팔달산 남쪽 능선 끝까지 성을 쌓자니 너무 비용이 많이 깨질 것 같고 그렇다고 성벽을 두르지 않자니 성의 방어력이 취약해질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 결국 일종의 타협책으로 능선을 따라서 외성과 비슷한 개념의 성벽길을 낸 것이다.
  • 은구 : 성 내 물을 밖으로 빼내기 위한 일종의 물구멍. 팔달문 부근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특성[편집 | 원본 편집]

수원 화성 치성의 성가퀴이다. 양쪽의 구멍은 평평한 방향이지만 가운데의 구멍은 아래쪽을 향하는 각도로 뚫려 있다. 또한 성벽에 붙은 적을 바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기도 하다.
  • 당시 도시계획이 워낙에 잘 된 편에 속하였기 때문에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21세기인 현재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성 내부 동네는 문화재 보호법 때문에 개발 자체는 지연되고 있어서 조금 애매해진 상황이긴 하지만…….
  •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까지 겪으면서 성곽 여러 군데가 부서졌지만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하여 거의 대부분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였다. 현대에 복원된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화성성역의궤의 존재인데, (이론 상으로는) 성이 통째로 날아가더라도 원형 그대로 다시 만들 수 있으므로 역사적 가치가 전혀 훼손되지 않기 때문.
  • 화성성역의궤의 내용도 참 대단한데, 구간마다 돌이나 물자를 얼마나 썼는지는 물론이고, 공사 책임자나 담당자의 이름까지 참으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프로토스 싸다구 칠 기록덕후 조선의 위대함이 느껴지는 부분. 그리고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면 거기 적힌 사람이 코렁탕을 취식했다 카더라 성 완공 후 정조가 마음에 드는 구역의 공사자를 불러 포상을 하였다는 기록은 실제로 있다.
  • 성곽 자체의 방어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냉병기 시대에 외침을 당한 적이 없는 성인지라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일단 약 300~400미터 간격으로 치와 포루·각루·공심돈 등의 방어시설이 서로의 사각을 메워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약점이라고 할만한 부분을 찾기가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지형적 이점을 가지는 산성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읍성과 비교할 경우 수원화성은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에 가까운 방어력을 자랑한다(화포로 상호 엄호가 가능한 거리이다). 다만, 이는 성곽에 병력과 장비가 제대로 배치되었을 때를 전제로 한 것이며 한양도성과 같이 전면적인 외침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주 7]
  • 성가퀴(여장): 성벽 전체에 성가퀴(여장)를 둘러놓았다. 보통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성곽을 보면 성가퀴는 문루 부근 일부에만 건설해 놓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렇게 성벽 전체에다가 성가퀴를 둘러놓은 성은 수원 화성과 한양도성 정도의 성 밖에 없다. 즉 수도와 동급의 성가퀴를 둘러놓았다는 것. 거기에 성가퀴 자체도 그냥 몸만 숨기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구멍을 여러 각도로 뚫어놓아 성가퀴에 몸을 가린 채로 투사무기(특히 조총)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으며, 성벽에 바짝 붙는 적도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바로 아래로 향하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 수원화성 제1종 지구단위계획에 따라 장안구 영화동·연무동과 팔달구 북수동·신풍동·남수동 내에는 5층 이상 건물을 지을 수 없다.
  • 수원화성 내부에는 화성행궁이 자리하고 있다.
  • 화성의 성벽은 외측만 돌로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워 메우는 외축내탁(外築內托)의 축성술을 사용하였다.

수원화성 일주[편집 | 원본 편집]

성 전체의 길이는 약 5km정도[2]로 그냥 앞만 보고 걷는다면 약 1.5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크고 아름다운(...) 성의 특성상 실제로는 어른 걸음으로 3시간 이상은 잡아야 넉넉하게 성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참고로 화성은 팔달산 효원의 종 부근과 장안문 인근, 그리고 팔달문 동편의 오르막구간 시작 지점에 매표소가 있다. 1인당 1천원인데 수원시민이라면 신분증을 제시하고 그냥 통과가 가능하다. 물론 통로가 한곳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회피를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착한 위키러라면 그냥 제 돈 주고 통과하자. 참고로 이 수입은 화성의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금액이다.

화성의 관람코스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안내하고 있는 곳의 홈페이지로 수원문화재단이 있으니 참조하도록 하자.

참고로 수원시와 카톡친구를 맺으면 아예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원래는 2016년 기준으로 50% 할인이었는데 이게 대박을 치자 2017년에는 아예 무료입장으로 돌린 것. 이외에 매년 2회 있는 관광주간에도 무료입장이 된다.

일주코스[편집 | 원본 편집]

화성의 순성은 성벽 위(성 내부) 길과 성 바깥쪽 길 모두 도보로 가능하다. 아래 코스는 정문인 장안문부터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코스이며, 성 안과 성 밖을 오갈 수 있는 통로는 굵은 글씨로 표기하였다.

장안문↔북동적대, 북동치[주 8]↔북동포루(砲樓)↔화홍문↔동북각루(방화수류정)↔북암문↔동북포루(鋪樓)↔동암문↔동장대↔동북공심돈창룡문 사거리 육교↔동북노대↔창룡문↔동일포루(鋪樓)↔동일치[주 9]↔동포루(砲樓)↔동이치↔봉돈↔동이포루(鋪樓)↔동삼치↔동남각루↔남수문↔팔달문로(남수문부터 팔달문까지는 성벽이 존재하지 않는다.↔팔달문[주 10]↔팔달문부터 남문로데오 공연장까지는 성벽이 존재하지 않는다↔남치[주 11]↔남포루(砲樓)↔서남암문(서남암문 밖은 용도를 따라 서남각루인 화양루까지 연결된다. 용도 중간에는 용도동치와 용도서치가 자리하고 있다)↔서삼치[주 12]↔서포루[주 13]서암문↔서장대, 서노대[주 14]↔서이치↔서포루(砲樓)↔팔달산로 육교[주 15]↔서일치↔서북각루↔화서문서북공심돈↔북포루(鋪樓)↔북서포루(砲樓)↔북서적대↔장안문 매표소

화성관광열차[편집 | 원본 편집]

팔달산-연무대 방면[주 16]
회차 팔달산 출발 연무대 도착
1회 10:00 10:30
2회 10:25 10:50
3회 11:10 11:40
4회 11:35 12:05
5회 13:15 13:45
6회 13:40 14:10
7회 14:25 14:55
8회 14:50 15:20
9회 15:35 16:05
10회 16:00 16:30
11회 16:45 17:15
12회 17:10 17:40
13회(6~9월, 금요일) 17:55 18:25
연무대-팔달산 방면[주 16]
회차 연무대 출발 팔달산 도착
1회 9:50 10:20
2회 10:30 11:05
3회 11:00 11:30
4회 11:45 12:15
5회 12:10 12:40
6회 13:50 14:20
7회 14:15 14:45
8회 15:00 15:30
9회 15:25 16:55
10회 16:10 16:40
11회 16:35 17:05
12회 17:20 17:50
13회(6~9월, 금요일) 17:45 18:10

워낙 성의 길이가 길이이고 코스가 은근슬쩍 긴지라 그냥 걸어서만 구경하라고 하면 행군체험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녀를 동반하거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이라면 일단 화성열차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탑승장소는 팔달산과 연무대(동장대 인근) 두 곳인데 소요시간은 대략 30분 내외이다.

화성열차의 코스는 다음과 같다

  • 팔달산(성신사) - 화서문 - 장안공원(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의 성벽) - 장안문 - 화홍문 - 연무대(동장대 인근)

해당 코스는 화성 전체 중 약 절반정도 길이에 해당하는 코스이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걸으면 된다

탑승 티켓은 팔달산 매표소와 연무대 매표소에서 구입이 가능하며, 요금은 개인 기준으로 어린이 700원, 청소년 1,100원, 어른 1,500원에 해당하며, 단체는 당연히 할인이 들어가서 이보다 저렴하다. 참고로 단체인원 기준은 20명이니까, 혹시 단체로 화성 구경을 계획중이라면 참고하도록 하자.

운행 시간표는 우측 참조.

참고로 주말에는 오후 1시쯤 되면 이미 전체 열차표가 매진이 뜬다. 이 점을 확실히 알아보고 가도록 하자.

야경관광[편집 | 원본 편집]

야간에는 화성 일대에 경관조명을 설치해 놓는다. 화성의 야경은 낮에 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바뀌기 때문에 이 야경을 보는 것도 새로운 볼거리라 할 수 있다.

교통[편집 | 원본 편집]

일단 가장 가까운 전철역은 화서역수원역이다. 두 역에서 내린 다음 버스를 이용하여 화성쪽으로 갈 수 있다. 다만 화서역은 교통편이 영 좋지 않아서(버스가 일단 자주 안온다) 보통 수원역을 많이 이용하는 편. 수원역 7번출구쪽의 버스정류장에서 장안문이 써 있는 버스를 아무거나 집어타면 화서문장안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화서문이 먼저 나오고 장안문이 그 다음인데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린 다음에 일주를 하면 된다. 이외에 분당선 매교역 7번 출입구 방향에서 팔달문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이외에 창룡문쪽으로도 버스가 돌아다니니까 수원 동쪽이나 북쪽에 산다면 이쪽으로 가는 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사건·사고[편집 | 원본 편집]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이런 저런 사건사고에 휘말린 경우가 몇 있다. 다음은 그 목록이다.

  • 1996년 화재로 서장대가 전소되었었다.
  • 2006년 5월 1일 서장대에 방화사건이 일어나서 누각 2층이 모두 소실되었다.[3] 방화범은 토지보상문제에 불만을 품고 서장대에 불을 질렀다고... 숭례문 방화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 문화재에 대한 인식 자체가 글러먹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 2008년 4월 1일 초등학생 2명이 라이터를 가지고 불장난을 하는 바람에담배 피운건 아니고? 창룡문 인근 잔디와 억새가 불에 타버렸다. 다행히 성곽까지 불은 번지지 않았지만 잔디밭에 설치한 조명시설 바로 앞까지 불이 번지면서 대형화재가 발생할 뻔 했다고.
  • 2011년 4월 6일 창룡문 인근에서 화재가 발생, 갈대밭을 홀라당 태워먹었었다.
  • 2012년 1월 29일에는 한 20대 남성이 팔달문 앞에서 폭죽놀이를 하다가 잔디밭 일부를 태워먹었었다. 같은 해 2월 26일에는 장안문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노숙인 소행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하기도...[4]
  • 2013년 3월 29일 한 중학생의 장난으로 창룡문 인근에 화재가 발생하였다.[5] 다행이 잔디밭만 태워먹고 성곽은 태우지는 않았다고.
  • 2014년 한 지적장애인의 방화로 팔달문에 화재가 발생할 뻔 했었다. 다행이 팔달문 마당에서 바로 불을 꺼 버렸다고.

각주[편집 | 원본 편집]

내용주[편집 | 원본 편집]

  1. 이후 축성되는 성곽은 화성 규모의 성은 없고 상당수가 초지돈대같은 소규모 요새시설이 전부이다
  2. 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
  3. 팔달시장 골목이 딱 성곽이 있던 자리이다. 만일 복원을 한다면 시장을 통째로 옮겨야 할 판
  4. 이 적대의 방어력과 높이를 보다 강화시킨 것이 바로 공심돈이다
  5. 정확히는 당시 화성군 장안면 흥천대 해봉으로 부터 봉담음 건달사의 간봉의 봉수를 받아서 용인 석성산 육봉의 봉수로 전달되는 구조였다.
  6. 일반적으로 암문위에는 시설물을 설치하지 않는다.
  7. 실제로 제대로 방어를 하려면 상당량의 화포와 진천뢰, 조총 등이 필요하다. 조선이 그렇게 화약이 넉넉한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8. 두 시설물은 서로 붙어있다
  9. 동일치 바로 옆에 지하도처럼 통로가 뚫려 있다.
  10. 팔달문은 로터리 한가운데 있어서 도보 접근이 불가능하다
  11. 남치와 남포루 사이에 성벽을 뚫은 통로가 존재한다
  12. 서삼치 인근에 팔달공원 출입로가 자리하고 있다
  13. 인근에 효원의 종이 자리하고 있다
  14. 두 시설물은 서로 붙어있다
  15. 성벽을 뚫어놓은 곳이다. 참고로 이 통로로 화성관광열차가 돌아다닌다
  16. 16.0 16.1 동절기인 11~2월간에는 11회까지만 운영한다

참조주[편집 | 원본 편집]

  1. 남수문
  2. 용도 구간 포함시 6km정도
  3. 최찬흥 심언철 기자. “화성 서장대 방화…누각 2층 전소”, 2006년 5월 1일 작성.
  4. 수원화성국제연극제 불법 논란 등 문제투성이”, 2013년 6월 2일 작성.
  5. 박아름 기자. “중학생 불장난에 수원 화성 잔디밭 일부 화재”, 2013년 3월 3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