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룡문

  • 蒼龍門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수원 화성의 동쪽 성문으로 이 부근에 동장대와 연무대, 국궁체험장 등이 자리하고 있다. 형태는 화서문과 거의 동일한 형태의 성문이며 화서문과 마찬가지로 반달형태의 옹성이 문 바깥쪽을 두르고 있는 형태이다. 때문에 화서문처럼 보물로 지정이 되어야 할 법 한데 되지 못한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문루와 홍예가 완전히 파괴되는 피해를 입어서 거의 대부분을 1975년의 복원공사 당시 복원하였기 때문. 참고로 여기서 문루는 문 위의 누각이며, 홍예는 성문의 아치형태를 뜻한다. 한마디로 성문 자체가 완파되었다는 소리.

특성[편집 | 원본 편집]

창룡문 일대의 성문은 동북공심돈부터 봉돈에 이르기 까지 거의 일직선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성문이다. 거기다 인근 지형은 거의 평지로 화성의 성벽 중 가장 방어력이 취약할 수 있는 부분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유로 앞에 옹성을 둘러놓았으며, 성문 바로 옆에 동노대(東弩臺)를 설치하여 치성의 역할과 원거리 공격을 같이 할 수 있게 하였다. 거기에 북쪽에 자리한 동북공심돈 역시 인근에 별다른 지형지물이 없는 것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 창룡문은 과거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대에도 1번 국도43번 국도이 만나는 교차점이다(창룡문 사거리) 때무에 수원이나 경기도 지역의 교통방송에서는 어김없이 이 창룡문 사거리가 등장한다. 그만큼 상습정체구간이라는 소리다

다만 당시 주요 교통로는 동문과 서문이 아닌 남문과 북문이었으며, 주요 상권이 이미 팔달문 주변에 형성되어 있어서 용인쪽으로 가는 사람들도 창룡문보다는 팔달문을 더 애용했다고 한다.

기타 이야깃거리[편집 | 원본 편집]

  • 창룡문 왼쪽에는 축성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마디로 완전 실명제로 건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것을 각자상석이라 한다. 조선시대 건축된 성곽의 특징으로 기록의 이미와 함께 성벽에 문제가 생겼을 시 이에 대한 책임소재 등을 따지는건축 책임자에게 곤장을 치는 용도로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