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Lyk0104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6월 29일 (월) 22:49 판 (→‎UN군)

틀:학술 관련 정보 틀:넘겨주기 있음 Korean War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틀:날짜/출력 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즉,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그리고 냉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개요

발발 원인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도 냉전과 같이 겁나게 복잡하다. 대체적으로 소련 및 북한 짓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주의와 미국이나 기타 요인 탓이라고 주장하는 수정주의로 나뉘어 아직도 논쟁 중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 전통주의 시각이 우세한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 의견을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논의는 미국에서 시작했고 미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하고있으며한국전쟁에 대한 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보다는 미국이 연구의 중심이다.[1] 지금도 우드로 윌슨 센터의 냉전사 프로젝트 하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전통주의적 입장

대표적으로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2]이 있는데 이 사람이 보기에 한국전쟁은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이다. 왜냐면 한국인들은 독립심이라는게 쥐뿔이만큼 없기 때문이다. 스툭은 한국인들은 외국인을 이용해서 외세를 물리치는 성격이 있고, 혼자서 결정하는 것보다는 외국에 의존하는 것이 강하다고 말했다. 본격 식민사관 그러면서 1876년 개항이후 친러니 친미니 친일이니 하면서 싸웠다고 말한다. 아무튼 그래서 전쟁은 소련이 일으킨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한국놈들 멍청해요. 그래서 전쟁 결정 못해요. 그러니 한국전쟁 소련이 일으킨 거에요.

국내에는 서울대 김영호 교수[3]가 대표적으로 있다. 이분은 스탈린의 롤백이론을 주창하고 계시다. 그분의 주장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이 졸라서 전쟁이 났어도, 아무튼 전쟁을 승인한 사람이 누구냐? 스탈린 아니냐? 그러니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최종결정권자가 스탈린이니 당연히 스탈린 책임이다. 라고 주장하신다. 뭐 일견맞는거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하고...

수정주의적 입장

수정주의 시각의 시작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윌리엄 A. 윌리엄스의 The Tragedy of American Diplomacy가 출간되면서 부터였다. 윌리엄스는 냉전은 미국의 잘못된멍청한외교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를 기점으로 다양한 수정주의자들이 등장하는데 한국전쟁관련 대표적인 인물은 브루스 커밍스다.[4] 커밍스의 등장 이후 학계에서는 수정주의자들이 득세했다. 본격 수정주의자들의 시대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일제강점기때 등장한 계급간 격차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해방 후 미소 분할점령으로 인해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게되었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근데 커밍스 주장의 문제점은 한국전쟁의 간접적인 원인(계급간 갈등 등)은 설득력이 있으나 직접적인 원인[5]에 대한 설명이 미흡한 것이 문제이며 간간히 틀린 정보도 많다는 것이다.[6]

시몬스의 경우 김일성이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고, 한반도 내에 기반이 있는 세력에 비해 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계열이 대거 북한에 들어오는데 애들의 규모가 엄청난 양이었다. 그로 인해서 김일성의 권한은 더 불안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괴롭히고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던 박헌영이 이러게 된 이상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남침을 건의했고, 영토야욕이 있던 김일성이 이를 수용해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달려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전쟁하게 해주세요. 김일성의 부탁에 스탈린이 승인했고 이로 인해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다고 말한다.

둘을 조합한 현재 학계 정설

그런거 없다

냉전이 끝난지 25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결정이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수정주의와 전통주의 사이의 중도적인 상황으로 보는 편이지만 학계에서 확실하게 결정난 것은 아니다. [7] 사실 한국전쟁의 원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북한의 문서고가 개방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다만 한국 학계에서는 일명 김일성 주도 스탈린 동조설[8] 이라는 전통주의 학설이 중론이 되어있다.[9]

참고적으로 한국사람들은 한국전쟁 원인이 결론이 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연구의 중심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아직도 첨예하게 논쟁 중인 부분이 이 부분이다. 왜냐면 한국전쟁 원인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냉전의 원인이 달라지기 때문이다.[10] [11]

북한의 기습남침과 수도 서울 함락

북한군의 남침계획과 기습남침

한국전쟁 직전 상황도.gif

북한군의 남침계획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국방부에서는 “1950년 6월 말에 전면공격으로 전쟁개시 2일차에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한국정부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중략… 이를 위해 북한군은 수도 서울을 전쟁 개시 2일차에 신속히 점령하고, 한강이북에 전개된 국군 전방사단의 주력을 격멸하도록 하는 것”[12]이라 말하고 있다.[13]

가장 확실한 것은 북한군의 작전은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총 3단계의 작전을 구상한다. 1단계에서 국군 주력을 격멸하고 2단계에서 국군 증원병력 격멸 및 전과확대 마지막 3단계에서는 국군 잔적 소탕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북한군 작전도.jpg

북한군은 국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해서 포위소멸구역을 설정하고 서울을 2중, 3중으로 포위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주력을 격멸하고자 하였다. 먼저, 북한군은 서울을 직접 공격하는 제1, 제3, 제4보병사단으로 서울이북에서 1차 포위를 시도하고, 2차로 개성-김포로 진출하는 북한군 6보병사단과 춘천-가평-하남으로 진출하는 북한군 제2보병사단이 한강이남에서 다시 한 번 국군 주력을 포위 격멸하는 것이었다.[14] 북한군은 이러한 작전 하에 틀:날짜/출력 새벽 4시 기습 남침하였다.

전쟁 초기 국군의 대응

국군은 4시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습을 국지적으로 파악했으나, 05:15 동천-포천지구에서 날라온 급보에 따라 05:30 전군에 비상령을 하달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신성모 국방장관에서 전화로 연락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직접 차를 몰고 장관 관사에가 7시에 적 침공상황을 보고했다. 당시 비서의 회고에 의하면, “자못 놀라고 당황하는 표정이었으며 짐작은 하였지만 적이 일요일에 기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던 것 같았다”라고 하였다.[15][16][17]

개전과 동시에 국군의 전황은 좋지 않았다. 통신망 두절로 인해서 10시에 채병덕이 의정부지구 7사단을 방문한 다음에서야 이것이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남침임을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수도사단 및 서울근처에 있는 예비대를 투입하고, 후방 3개 사단[18]에게 이동을 명령했다. 또한 군수지원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개전한지 4시간이 지났고 북한군의 빠른 진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19]

해군의 경우, 25일 9시 해군본부 작전명령 갑 제18호에 따라 전 군에 비상경계돌입과 전투준비를 하였다. 해군은 해안방어와 적 게릴라부대 공격 저지에 초점을 두었는데 특히 2함대의 경우, 6월 25일 야간 대한해협에서 적 게릴라부대 600명을 태운 선박을 격침했고, 옥계 근해에서도 25,26 양일간 북한군 766 게릴라부대와 제945육전대의 상륙선박을 격침했다. 인천의 제1함대의 경우 웅진에 고립된 제17연대의 해상철수를 지원하였다.

개전 당시 육군 지도부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5시에 상황을 파악하였으나 신성모 국방장관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그를 찾느라 2시간을 낭비해야 했고,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김백일 대령은 9시가 넘어서야 육본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보고를 받고 가장 먼저 도착한 이치업 대령이 자신들의 상관들이 부재중임을 알고, 당시 작전국 선임 장교로써 전군에 비상령을 내렸다. 이에 전군에 비상령은 당일 6시부터 7시 사이에 하달되었고, 개전 2시간이 지나서였다.

또한 당시 국군은 23일 24:00에 비상경계가 해제되면서 장병에게 휴가와 외출 · 외박을 주었고, 대부분의 부대에는 병력이 부족하였다. 이에 육군본부는 장병소집을 위해 전화, 전령, 방송, 가두방송 등 모든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래서 25일 14:00가 넘어서야 80~90%의 장병이 소집될 수 있었다.

그러나 통신망 두절로 인해서 전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거기에 6사단과 8사단과의 연락이 두절되면서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개전 이후 이승만은 신성모를 불러 “군사 경력자들의 자문을 받아 난국을 타계하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장관은 26일 10시에 국방부로 현역 및 재야원로 군사경력자를 불렀다.[20] 이 회의에서 신 장관과 채 총참모장이 설명한 전황의 요지는 “현재 군은 의정부에서 북한군을 반격하고 있으며 전황은 유리하게 진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홍일 소장은 의정부 정면에서의 공세이전이 위험하고 한강 이남에서의 결전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범석, 김석원 두 사람도 동조하였다. 그러나 신 장관과 채 총참모장의 뜻을 꺾지 못한 채 폐회하였다.[21][22][23][24]

군 원로회의 이후 채병덕 총참모장은 비상국무회의(26일 11시)에서도 “적을 의정부 밖으로 격퇴하였다. 3일 안으로 평양까지 점령하겠다.”라는 낙관론을 전개하였다. 26일 심야에 의정부 축선이 다급해지는 상황임을 파악하자 육해공 총참모장과 국방장관은 정부의 망명을 고려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에 있던 비상국무회의에서 신 장관과 채 총참모장은 낙관론만 전개하였다. 또 회의 이후 국회에도 참석하여 “서울만은 사수할 것이며 반격으로 전환하여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발언만 되풀이하였다. 이때 신성모는 국무총리 자격으로 정부의 이동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27일 05:00 신성모는 정부 이동을 명령하고 방송을 지시하였다. 혼선을 빚은 후 6시에 방송이 나갔지만 곧 취소되고 정부가 이동하지 않는다는 정정발표가 있었다.

6월 27일 09:00 전황이 좋지 않음을 알게된 신성모 장관은 수도 사수가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지만, 분위기가 싸해지자 말을 바꾸고 정부는 이동하더라도 군은 서울을 사수하자는 발언을 하였다. 그래서 정부와 국방부, 해군과 공군은 수원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육군본부는 서울에 잔류하기로 하였다.

개전 초 정부의 대응

앞에서 서술했듯이 채병덕 총창모장은 5시에 즉시 신성모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 직접 짚차를 타고 장관 관사에 가서 보고하였다. 이때가 25일 07:00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0:00에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후 11:00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주재 하에 임시국무회의가 열리나, 전황에 대한 정보가 없어 산회하였다. 14:00 대통령 주재 하에 속개된 국무회의에서 채 총참모장은 북한군의 침공을 국군이 반격할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이에 이 대통령은 긴급명령 1호(비상사태하의 범죄처단에 관한 특별조치령) 등을 공표하였으나 계엄령은 선포되지 않았다.

남침상황보도는 25일 07:00 중앙방송에서 처음으로 보고하였다. 이 당시 방송의 요지는 국군이 잘 사수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과 휴가 중인 장병들은 긴급히 원대로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당일 12:00 국방부 정훈국은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였지만 국군이 격퇴하고 있다”는 요지의 발표를 하였다. 이후 국방부는 “국군 17연대가 해주로 돌입하였다.”라는 오보를 냈다. 그러나 이러한 방송은 시민들이 피난민으로부터 듣는 상황과 너무나도 다른 내용이었지만 전황의 호전만을 바라는 시민들의 심리로 인해 낙관적인 보도를 믿게 되었다.

26일 08:00 의정부를 탈환하고 북진중이다 라는 방송이 나갔다. 그러나 27일 06:00 갑작스런 정부의 수원이전 소식은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에 당황한 공보처장은 내용을 바꾸어 6시 발표내용을 취소하였다. 27일 22:00부터 23:00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방송이 나갔다. “국군이 잘 버티고 있으니 국민은 참고 기다리면 된다.최근에 들어본거 같은 건 착각이겠지?”는 요지의 방송이었다.

한강교 폭파와 수도 함락

한강교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2시간 뒤에 한강에 있는 모든 교량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폭파 예정시간은 27일 16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 대령[25]은 서울 시민의 피난조치도 강구하지 않고 군부가 먼저 철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더욱이 시민과 서울 북쪽에서 전투중인 국군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교를 조기에 폭파하는 것은 안 된다며 반대하였으나, 임진강 철교 등 중요한 교량이 시기를 놓쳐 파괴되지 못했음을 전례로 들면서 한강교 파괴는 강행되었다. 파괴가 지연되기도 했으나 혼선으로 인해서 한강교를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가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국군의 46%인 4만 4000여 명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또한 차량 1,318대가 모두 서울에 남아있어 국군의 기동력 상실과 북한군의 기동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6월 28일 한강교 폭파로 인해서 고립된 국군은 급조한 나룻배를 이용해 한강이남으로 도하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빚어졌고, 사단과 연대 등 군사조직자체가 와해되었다. 이에 국군은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신설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퇴각병들의 병과와 소속을 따지지 않고 홍성부대를 편성하여 노량진부근에 투입하여 한강 방어선을 급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육군본부 참모들이 병력을 수습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이 부분을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대신하고 육군본부 참모들을 육본이 있는 수원으로 보냈다. 또한 민간인을 동원하여 안양과 시흥의 두 곳에 취사장을 설치하고, 집결된 병력을 중심으로 혼성사단을 편성하여 한강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서울 함락 후 한국군에게 제대로 화기를 갖춘 사단은 춘천 축선에서 승리하고 퇴각하는 6사단과 강릉축선에 있던 8사단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1사단이 있기는 했지만 장비를 모두 포기하고 몸만 빼내 한강을 건넌 상태였다. 1사단만이 아니라 서울을 포기하면서 예비물자 등을 죄다 포기하고 가면서 장비와 물자를 건지지 못했다.[26] 그밖에 옹진에서 철수한 17연대, 지방의 소규모 병력과 경찰병력[27]가 있긴 했지만 당장 숫적인 열세가 명백했다.

평가

최근까지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의 패배에 대한 이야기는 '국군의 장비가 열악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되어왔다. 이 설명이 틀린바는 아니지만 한국전쟁 초기에서 국군의 패퇴는 장비보다는 방어준비태세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 컸다.

국군은 분명히 북한보다 열악했다. 전체 벙력은 2:1로 차이가 났고, 화력면에서도 큰 차이를 내었다. 북한군은 122mm 곡사포와 76mm 곡사포, 45mm 대전차포, 82mm 박격포 120mm 중박격포 등 다양한 장비로 무장을 했고, 그에 반하여 국군은 105mm 곡사포와 37mm 대전차포, 57mm 무반동총, 2.36인치 로켓포, 60mm 박격포, 81mm 박격포만 보유한 상황이었다. 특히 국군의 57mm 대전차포나 2,36인치 로켓포는 북한의 T-34/85 전차를 격퇴하기는 부족함이 많았다. 또한 국군 공군이 보유했던 L-4/L-5는 북한군의 미그기보다 성능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국군이 패배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국군의 병력 및 장비면에서의 준비태세 미흡보다는 전쟁지휘 및 방어작전계획부분에서의 실책이 더욱 크다. 국군의 방어작전계획은 존재했으나 개전 1개월 전에 감행된 대대적인 인사조치 왠지독소전 초기를 보는거 같냐?는 국군이 방어작전계획을 숙달하는데 어려움을 만들었다. 또한 국군의 첩보원이 북한군에 침투하여 T-34/85전차를 촬영하여 보고했으며 전선에서 북한군이 증가됨을 첩보부에서 보고를 했음에도 수뇌부는 이를 단순한 병력교체로만 판단하는 실책을 범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전쟁지도측면에서 국군 수뇌부는 혼란만을 보여주었다. 전면남침임을 파악하는데까지 6시간이 걸렸고(6월 25일 10:00에 파악) 6월 26일 오후 전황이 불리한 상황임에도 반격!! 북진!! 이라는 허울뿐인 구호만 외쳤다. 결국 이 허울뿐인 구호는 방송을 통해 전파되었고 이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을 한강이북에 고립시키는 문제를 만들었다.

국군의 전술측면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물론 국군 1, 6, 8사단은 충분히 역할을 다했으나[28] 의정부의 7사단은 개전초기 북한군의 포화에 크게 당해 병력의 상당수를 상실했다. 이후 병력을 수습하고 저지하고 있었으나 북한군의 공세는 1개 사단이 막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국군 지도부는 의정부 축선에 2, 3, 5사단 총 3개 사단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투입을 동시에 한 것이 아니라 도착하는대로 투입하면서 축차투입이라는 우를 범했고, 결국 3개 사단은 모두 북한군을 저지하지 못했고 이는 의정부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이는 전 전선의 붕괴를 의미했다.

국군의 전쟁 초기 패배는 그릇된 전황파악으로 전쟁지도능력부재로 인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채병덕은 일본군 출신이었으나 그가 복무한 지역은 조선이라는 후방이었다. 또한 국군 지도부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군단이상의 제대를 통솔해본 경험은 김홍일 장군이 유일하였다.[29] 전 군의 장성 및 지휘부의 경험부족은 국군 초기 패배를 설명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다행힌 것은 이후 김홍일 장군이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취임하고 이후 1군단 군단장이 되면서 효과적인 지연작전을 펼치게 되었고 이는 국군이 총이나 대전차포, 박격포 등 화기[30]가 열악한 상황에서도 60일이나 버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미국의 참전과 지연작전

미국의 참전

미국은 주한미국대사 무초(John J. Muccio)의 전문을 통해 한국전쟁이 시작됨을 인지한다. 미국은 개전한지 7시간 26분이 지난 후에야 전쟁 상황을 공식을 접수하였다. 이때 신성모와 채병덕은 국군 반격!, 북진! 북진! 외치고 있을 때다......미 국무부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비상연락계통을 이용해 전 미국 지도부에게 연락을 취한다. 당시 미국은 토요일이었고 대부분의 지도층은 휴가 중이었다. 대통령 트루먼도 미주리 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으로 인해 미국 지도부는 신속히 집결한다.

미국 현지시간 6월 25일 19:40분 백악관 블레어하우스에서 회의가 진행된다. 이 회의에서 북한의 남한 침공은 “소련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거나, 남한을 정복해서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을 유도하기 위한 것”[31][32]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5개의 사항을 결정하였다. ⓵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도록 할 것 ⓶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이 제안한 군수물자를 보내게 할 것 ⓷ 이미 지시된 제7함대를 일본으로 파견할 것 ⓸ 미 공군은 극동지역에 있는 소련 공군기지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할 것 ⓹ 소련의 다음 행동 지역이 어디인지 파악할 것 미국 현지시간 6월 26일이 되자 한국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제2차 블레어하우스 회의가 개최되지만 회의 내용은 제1차랑 대동소이 하였다.

전쟁 초기 미군의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주로 탄약 지원을 주로 하였는데, 105mm 곡사포 90문, 60mm 박격포 700문, 카빈소총 40,000정 화기와 함께 105mm 포탄 105,000발, 81mm 박격포탄 265,000발, 60mm 박격포탄 89,000발, 소총탄 2,480,000발이 주산으로 긴급 지원하였다.[33]

6월 29일 맥아더장군이 한국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수원공항에 도착하였다. 수원학교에 있는 육군본부 임시거처에서 전선에 대한 상황을 브리핑 받는 중 맥아더 장군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이 사태에 대한 건의사항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채병덕 총참모장은 “2백만 남한 장정을 징집하여 침략을 격퇴하겠다.”고 말했다.[34] [35][36]

한강남안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미군의 참전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뉴욕 해럴드 트리뷴지의 히긴스 양에게 “나에게 미군 2개 사단만 준다면 나는 한국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37]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말해놓고 필리핀을 날려먹은 적이 있었지

맥아더 장군이 시찰보고서가 도착하자 미군은 미국 현지시간 6월 30일 새벽 4:57 2개 사단을 추가로 파병하고 그날 오전에 미군의 대규모적인 파병이 결정되었다. 또한 안보리를 통해 UN군 파병이 결정되었다.

한강선 방어작전

한강선 방어작전은 국군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 3개 혼성사단(수도⦁제2 ⦁제7)사단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 1군단을 6일간이나 방어한 작전이다. 그것도 열악한 화기와 장비를 가지고이 작전은 6사단과 8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사활을 걸고 방어에 임하였던 기간 중에 최대의 작전이었으며 또한 승부의 향배를 결정짓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38]

한강선 방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당시 미 고문관 헤즈렛은 “미 지상군이 전개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여기 한강에서 3일간 버텨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조언하였다. 이에 채병덕 총참모장은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신설하였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 시흥사는 병력을 수습하여 병력이 500명 선이 채워지면 곧바로 혼성X대대로 명명하여 한강선으로 투입하였다. 그리고 이 혼성 대대를 통제하기 위해서 혼성 사단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이 혼성 사단은 말만 사단이었지 병력은 1개 연대 규모에 보유하는 공용화기는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이었다.

시흥사가 한강지역의 방어선을 재편하는 동안 6월 29일 맥아더 장군이 시찰을 오게 되었다. 여기서 김홍일은 맥아더에게 “지금 국군이 장비와 탄약의 절대량이 부족함을 알리고 이에 대한 시급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수도사단 방어진지로 안내했다. 여기서 유명한 일화가 나왔다.[39]

맥아더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에게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는지 묻자, 김홍일 장군은 “적의 탱크가 도하 오는 것을 어떻게 저지하느냐에 달려있으며, 이를 위해서 미 공군이 한강철교를 완전히 파괴시켜주기를 요청했다. 한강철교가 파괴되어 적 탱크의 도하에 시일이 걸린다면 한강선에 있는 국군 2만 5천명으로 적 5만명을 10일 동안 이곳에 묶어둘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채병덕과 비교된다. 이에 맥아더도 김홍일 장군의 말에 동의했다고 한다.

미국의 참전과 지연전

이후 한국군은 중장비와 차량, 화력을 갖춘 6사단과 8사단을 중심으로 하여 1군단을 창설한다. 이후 한국군의 지연작전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특히 6사단의 동락 전투의 성공은 크게 칭송받는 전투 중 하나이다. [40] 이 지연작전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들어서 재조명되었다. 1사단이 장비 문제로 뒤로 빠지는 동안 1군단을 중심으로 동부전선에서의 지연전이 이뤄진다.

한편, 이승만 행정부가 개전 4일만에 국무회의를 열었던 것에 비하면 트루먼 행정부는 현지시간으로 개전 수시간 만에 비상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침공을 소련이 미국의 자유진영 의지 수호를 시험하려는 것이라 판단했다. 이에 트루먼 행정부는 단 하루만에 한국전쟁 참전을 승인하고 UN 안전보장이사회를 통보하였다. 그리고 더글라스 맥아더를 극동미군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역전의 용사들이 대부분 전역하고 일본에서 평화로운 점령군 생활을 만끽하는 이들이 중심이었으며, 그나마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일본에서 급히 소집하여 투입한 병력들이었다. 선발대인 스미스 특임대는 7월 5일 죽미령 전투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려다 실패, 사실상 괴멸되었다. 북한군의 전차를 격파할 화력이 부족하다는 한국군의 조언을 우습게 여기다가 T-34를 막지 못해 결국 무너진 것이다.이것들이 북한군 전차들이 귀여운 치하땅인줄 알았나...

스미스 특임대의 붕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투입된 미군 본대인 제24사단은 대전지구 전투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사단이 무너지고 사단장 딘 소장마저 북한군에 포로로 잡히는 상황에 처했다. 대전지구 전투의 패배와 24사단의 붕괴는 금강 방어선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한국군 지휘부와 맥아더 원수는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총투입한다.

한편, 지상전의 상황과 별개로 미 공군은 압도적인 항공력으로 북한 공군을 불과 1주일여만에 괴멸(...)시켰으며 해군 항모항공대와 공군 B-29 폭격기들이 미약한 북한의 방공망을 비웃으며 북한 영공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6월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평양이 폭격을 받기 시작했고, 북한 지상군은 미군의 맹공습을 몸으로 받아야 했다. 그러나 투입되는 미국 항공기들 대부분이이 후방거점을 폭격하는데 특화되는 전략폭격기들이다보니 개전 초 북한군이 받는 공습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다.

낙동강 전선

한국군은 있는 병력 없는 병력 쥐어짜내며 닥치는 대로 전선으로 보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소련군의 처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후방에서 학도의용병들까지 모집해서 어린 학생들에게 몇 시간동안 기초훈련만 시키고 최소한의 무장만 준 채 전선에 투입했다.[41] 미국도 일본에서 병력을 긁어내어 바로바로 투입했고, 본토의 예비병력을 투입시키기 시작하면서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다.

낙동강 전선에 있어 위기는 크게 세 차례 있었다. 첫번째는 다부동 전투로 1사단과 미군의 격렬한 저항, 그리고 왜관 일대에 대한 B-29의 융단폭격이 가해지면서 막아내었다. 두번째는 9월 초의 영천 전투유재흥 장군이 격전 끝에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또다른 위기로 통영 함락이 있었는데, 한국 해병대에 의한 통영 상륙작전으로 통영을 탈환하고 거제도로 가해지는 북한군의 위협을 차단하였다.

북한군도 한미연합군을 바다 속으로 밀어버리기만 하면 전쟁이 끝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더 이상 방어선으로 삼을 만한 지형도 없었다. 때문에 북한군도 후방의 모든 병력에 남한에서 징집한 병력까지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모조리 총투입하여 공세를 강화했으나 결국 돌파구 형성에 실패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군의 전력은 약화되었고, 반면 미군은 병력과 물자가 빠르게 증강되어 갔다. 아울러 후방의 거점도시들과 보급거점이 맹폭격을 받으면서 전선지원이 원활하지 않아 공세한계점에 도달했고, 전선 부대도 맹공습으로 대부분의 중장비를 상실했다.[42]

인천 상륙 작전

중국의 참전 그리고 1·4 후퇴

지리한 휴전협상

마침내 휴전 그리고

휴전 이후

전쟁의 영향

부정적 영향

수많은 인명피해

당장 전투로만 유엔군과 한국군에서 18만명이 전사하였으며,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전사하였다. 이런 전투 외에 각종 학살과 폭격 등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가 100만 단위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것. 이로 인한 전쟁과부와 고아의 발생은 덤이다.

한국사회의 지독한 레드 컴플렉스

이 전쟁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공산당이나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회가 되었다. 이후 독재정권에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반대파를 찍어누르는 구실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게 되는 원인이 된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우리가 공산당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 국가인데 뭔 소리냐! 우리를 전복시키려는거 보니 넌 빨갱이가 분명하다!'면서 무고한 시민 여럿 때려잡았다.

긍정적 영향

끔찍하기 이루말할 수 없는 전쟁으로 기왕이면 안일어나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전쟁이 몰고온 긍정적인 여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당시 여러 호전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상술한 박헌영도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서로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국지전이 빈번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러한 호전론자들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전쟁은 나쁜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강력하게 퍼지게 되어 남은 힘 조차 잃게 되었다. 덕분에 비록 '휴전' 관계임에도 오늘날까지 양국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유지되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과시하는 식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 이후 양국이 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손실도 매우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그것을 잘 이어나갔지만 북한은 중간에 침몰하여 아직까지 밑바닥을 떠도는 중이다(...).

완전한 계급제 철폐

사실 한반도는 상술했듯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을 거두었기에 사회 구조가 그대로였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즉 일단 법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했지만, 앞집 김씨는 양반 출신 뒷집 정씨는 노비 출신 등 어디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평등'이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피난을 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어디의 누구였는지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 와중엔 죽어서 아예 잊혀진 사람도 있고, 살아는 남았으나 기반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는 등 민족이 제대로 뒤엉켜버렸다.

게다가 이후 사회기반의 리셋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 하기도 모자랄 판국이 되어버린 탓에 먹을것을 잘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고 이런 판국에 양반이니 노비이니 하는 출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출신성분은 서서히 잊혀졌고 결국 비참하게나마 온 국민의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전쟁 덕분에 평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근대 와서 심각한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누구는 화족 출신이네, 누구는 부라쿠민 출신이네 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까지도 민족차별이 빈번한 국가로 남아 있다.

미국과의 유대감 강화

전쟁을 통해 미군과 국군이 함께 싸우면서 양국의 유대감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국군은 미군과 함께 싸움으로서 미군의 최신식 장비와 그에 걸맞는 교리들을 다수 습득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근 백여년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전 경험을 갖게 되어 실력 또한 향상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여파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 종전의 '일본을 처리하면서 떠안은 부산물'이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벗어나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정신적 유대감에 더불어 실제로 미국식 사회제도나 경제제도가 잘 도입되어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유대감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이다.

다만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우방국이라는 거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이 우리 편일거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도 결국 이익을 생각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국가이며, 이는 한국군이 하푼을 도입하려고 했을때 일본측의 로비를 받은 미국에서 하푼의 판매를 거절했었던 사실이나 M60 패튼을 대체하는 신형 전차의 도입 시도를 영 꺼림직하게 봤던 일 등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의 우방국인 것은 맞지만, 국제 정세에 따라서는 태도가 달라지지 말라는 법이 없으므로 맹신이 아닌 적절한 외교를 통해 우방국으로서의 관계를 튼튼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기타

UN군

국제연합(UN)이 정식창설된지 2년여만에 전쟁을 겪었고,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UN 회원국의 뜻을 모아 UN군을 창설, 한국에 파병했다. UN 평화유지군이 아닌 UN군으로서 침략자와 교전을 목적으로 한 경우는 2015년 현재까지도 이 때가 유일하다.

이는 국제연맹(LN)이 무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지 못하고 침략자에 의한 주변국 정복이 거듭된 3~40년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교훈이 가져온 결과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이나 일본의 중국 침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국제연맹과 국제사회 모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치뤘던 만큼, 침략자는 일찌감치 응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있었던 것이다.

당장 에티오피아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침략때 국제연맹을 통해 호소했지만 무시당하고 정복당한 역사가 있고, 독립을 회복한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프리카의 빈국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강자에 의한 침략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같은 이유로 유럽권 국가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터키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내전을 끝내고 국가재건 및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기에 참전한 경우이다. 태국은 아예 2차대전당시 일본의 동맹국, 즉 추축국이었다. 워낙 듣보잡이라 미국이 신경도 쓰지 않은 상대였고 태국도 필사의 외교전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취소하는 식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했지만 미국 및 영국, 프랑스로부터 추축국 낙인이 찍힌건 똑같았고 이를 타개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되겠다는 제스처로서 참전한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모두들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도와주러 온 나라들이다. 설사 정치적 이유에 따른 파병이더라도 그건 그 국가 정부의 입장이지, 파병된 사람들은 이역만리 타향땅에서 아무런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감사히 여기자.

직접적으로 전투병을 참가시킨 국가만 위 16개국이고, 의료진을 보내거나 구호물자 등으로 지원한 나라는 더 많다. 놀랍게도 일본도 구호물자를 보내주었던 국가 중 하나에 속해있다.

관련 작품

같이 보기

센추리언(전차)

대중매체

미국이 패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의외로 미국이 분명하게 패한 소말리아전이나 베트남전과는 달리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는 매우 적다. 애초에 미국 내에서 이 전쟁을 일컫는 별칭 중 하나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43] 이다. 사실 이는 '휴전'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수준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도 있고 또 이 전쟁으로 미국이 딱히 사회적으로 가지게 된 변화 또한 없기 때문이다. 가령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린 반면, 베트남전이나 소말리아전 등으로 인해 미국은 반정부, 자유주의 성향이 지독히 강해지는 등 괄목할만한 변화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거 없었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중심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으로는 희대의 괴작 오! 인천뿐인데, 이조차 제작을 통일교에서 한거다.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다루는 매체가 매우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락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참전자들을 인터뷰해거나 초빙하여 행사를 갖는 등 여러 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 외의 지역에서는 글쎄올시다...[44]

기타

대부분의 큰 사건이 그러하듯 여러 음모론이 끼어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남침(남쪽이 침공 당함)이 아니라 북침(북쪽이 침공 당함)했다는 주장,[45]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대부분의 주장들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착하게 가만히 있었는데 이용당한 것이라는 종북적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음모론은 많다. 대표적으로 처음 제시한 사람은 미국 언론인 스톤[46]이다. 1952년에 스톤은 한국전쟁이 리승만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려고 전쟁을 유도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콜코니 브루스 커밍스니 모두 남한이 먼저 침공했다고 주장했다.

각주

  1. 미국에서 일명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는 한국전쟁이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학계에서는 겁나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들이 모른다는 의미이다. 한국인만 아는 전쟁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니 주의하자.
  2.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
  3.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4. 커밍스는 지금은 유명하지 않지만 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대학생 필독서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었다.
  5.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남한과 미국이 남침한 결과라 설명한다든지, 미국의 음모였다든지 등
  6.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든지 등
  7. 이는 냉전에 대한 해석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있다. 냉전의 원인을 어디에 둘 것이냐에 따라 한국전쟁의 원인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8. 김일성이 강하게 적화통일을 원했고, 이를 위해서 스탈린에게 사정했고 이에 스탈린이 허락해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사실 시몬스의 수정주의적 시각과 스툭의 전통주의 시각을 짬뽕한 것인데, 그냥 한국에서는 먹히는 주장이다.
  9.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없었다. 1980년대에 김학준이 처음으로 미국의 한국전쟁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것을 '한국에서 최초의 한국전쟁 원인 연구'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는 전통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남북한이 아직 대치 중인데 수정주의 시각이 가능할려나
  10. Weathersby, Kathryn.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1] (Accessed 2015. 6. 9.) p.7.
  11. 사족이지만 어떻게 국내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가 미국보다 적은지 모르겠다. 슬픈 일인듯
  1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5
  13. 북한군의 문서고가 개방되지 않는 이상 이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1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13
  1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58
  16. 당시에 북한군이 침공할 것이라고는 모두가 예상한 상황이었다. 이에 국군은 약 6개월간 비상경계령을 내렸고 개전하기 딱 이틀 전에 그 비상경계령을 해제하였다.
  17. 비상 경계령을 갑자기 해제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당시 6월 25일이면 모내기 시즌이었다. 당시 남북한 모두 농업국가였기에 설마 모내기를 포기하겠어 라는 사고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고 한다.
  18. 제2, 제3, 제5사단으로 이 사단들은 여수 · 순천 반란사건 이후 등장한 빨치산 토벌 중에 있었다.
  19. 의정부 축선만 밀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국군이 쳐발린거라 알고있는데 의정부 7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사단들, 임진강의 1사단, 춘천의 6사단, 강릉의 8사단들은 밀리기는 했지만 충분히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물론 7사단이 무너지고 의정부 방면이 뚫리면서 전선이 붕괴되었지만 말이다.
  20. 참가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 공군 총참모장 김정렬 준장, 해군 총참모장 대리 김영철 대령, 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 송호성 준장(전 경비대총사령관), 유동열(전 통위부 부장), 이범석(전 광복군참모장), 이청천(전 광복군사령관), 김석원 예비역 준장(제1사단장) 등이었다.
  21. 참석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석원의 경우 신 장관이 ‘동해안에서 300명의 적이 투항하였고 제17연대는 해주에 진격하고 있다.’라 낙관하고 있었고, 채 총참모장은 ‘반격, 북진한다.’고만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22. 김홍일 소장은 회의에서 '각 부대와의 통신망과 지휘체계 확립이 우선이며, 결전을 할 것이면 어느 선에서 병력을 집중할 것인지? 지연작전을 한다면 어디까지 퇴각할 것 인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묵살 당했다고 한다.
  23. 이종찬 대령의 경우 서울고수론을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UN군이 참전할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한강선 철수 아니면 서울 사수 밖에 선택지가 없는데 둘 다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서울시민을 돌보지 않고 퇴각하다가 결국에는 패하였다’라는 말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서울을 고수하는 것을 택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2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2』, 서울, 2005, p.67
  25. 서울고수론을 주장했던 인물 추가사항은 위에서 찾아보길 바람
  26. 이건 명백한 대통령 이승만의 실책. 이승만은 서울을 포기하면서 이를 정부와 협의하지 않았다. 서울이 함락 위기이니 피신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걸 아무에게도 안 알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행정부도, 입법부도 붕괴할 뻔 했다. 이승만의 서울사수 방송에 일반 시민들만이 아니라 정부 고위급까지 다 속았다는 것. 이 사실이 확인된 건, 피신 다음날 아침 서울 사수 방침을 확인하려고 부통령 등이 경무대를 방문하면서였다. 이러니 장비와 인력을 동반한 조직적 철수가 될 수 있나...
  27. 현대 한국의 치안유지 역할을 맡는 경찰을 생각하면 안된다. 당시 경찰들은 실질적으로 군병력 및 전투인원 계산시에 포함될 정도로 치안 역할보다 전투 임무가 상당했다. 물론 군처럼 전면전에 대비하는 조직은 아니었지만 일반 고지방어전이나 참호전, 후방 방어전이나 게릴라전 등에는 충분히 투입하여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28. 1사단의 경우 임진강을 이용해 방어전선을 구축하여 북한군의 진군을 저지시켰고, 중동부의 6사단의 경우 북한군 2개 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북한군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야기했다. 또한 동부 8사단의 경우 산악이라는 조건 속에서 병력이 분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또한 퇴각과정에서 질서있게 퇴각하여 전투력 손실을 최소화하였다. 개전 초기 활약했던 6사단(김종오 대령)과 8사단(이성가 대령)은 전투력을 거의 온존하게 보유하여 이후 지연작전에서 핵심적인 축으로 활동하게 된다.정병준은 자신의 책『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 에서 6사단이 대한민국을 구했다면서 극찬했다. 강릉의 8사단의 경우는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발간 『6.25전쟁사』에서 한국전쟁 당시 가장 건실하고 전투력을 잘 보존한 부대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29. 중일전쟁당시 중화민국군에 소속되어 중화민국군 군단을 통솔하여 일본군을 저지한 경력이 있다. 이러한 그의 업적으로 인해서 중화민국군에서 외국인신분으로 소장까지 달게된다.
  30. 한강교 폭파로 인해 고립된 5개 사단은 병력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모든 화기를 포기하였다. 여기에는 개인화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3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87
  32. 참고로 이는 한국전쟁 원인의 전통주의적 입장의 시초가 된다.
  33.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p.95-96
  3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103
  35. 이 논평은 들은 맥아더는 국군이 망한 이유를 알것 같다고 참모에게 이야기했다 카더라
  36. 총참모장의 전쟁 구상이 너무 막연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김홍일 소장은 아군의 숫자와 적군의 숫자를 파악하고 이에 따라 시급한 것이 무엇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고하였다.
  37.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104
  3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3』, 서울, 2006, p.125
  39. 맥아더가 혼성8연대 진지에 있는 일등중사를 보자 ‘너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거냐?"라고 물으니 중사왈 "너나 나나 군인이고 군인은 명령에 죽는거 아니겠냐? 그러니 나는 철수명령이 내려지면 철수하고 아니면 여기서 죽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니 맥아더가 감동을 먹었다는 이야기
  40. 충주에서 북한군 1개 연대를 완전히 전멸시켰다.(틀:날짜/출력)
  41. 국방부의 공식 입장은 학도병 등의 모집에 있어 강압적 징병은 없고 모두 자원 입대이다. 공식 입장일 뿐이지만.
  42. 대표적인 것이 T-34 전차다. T-34를 상대하기 위해 미군은 본토에서 重전차 M26 퍼싱을 급히 공수해왔으나 정작 전차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북한군의 전차 대부분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습으로 파괴된다. 그리고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추가적인 전차 지원을 하지 않았다.
  43. 미국에서 Korean War가 Forgotten War인 이유는 학계에서 특히 냉전분야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엄청난 이슈인데 비해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없다는 의미가 더 크다.
  44. 사실 국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임팩트가 강한 것도 아니다. 뭐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참전용사들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고, 6.25 참전용사라는 명칭자체가 박정희정권이던 1961년에서야 등장했으니....지금의 한국전쟁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도 1961년 이후 교육의 힘이었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45. 참고로 이건 단어의 뜻을 헷갈려서 오해하는 경우도 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남침을 '남쪽이 침공함', 북침을 '북쪽이 침공함'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참고로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자 방송에서는 이걸 똥침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정리하자면 '내 손이 너의 똥꼬를 침공하면 그게 손침이냐 똥침이냐'는 내용이다(...).
  46.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