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Ladenijoa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6월 20일 (토) 21:40 판

틀:넘겨주기 있음 Korean War 틀:학술 관련 정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즉,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그리고 냉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개요

발발 원인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도 냉전과 같이 겁나게 복잡하다. 대체적으로 소련 및 북한 짓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주의와 미국이나 기타 요인 탓이라고 주장하는 수정주의로 나뉘어 아직도 논쟁 중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 전통주의 시각이 우세한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 의견을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논의는 미국에서 시작했고 미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하고있으며한국전쟁에 대한 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보다는 미국이 연구의 중심이다.[1] 지금도 우드로 윌슨 센터의 냉전사 프로젝트 하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전통주의적 입장

대표적으로 윌리엄 스툭(William Stueck)[2]이 있는데 이 사람이 보기에 한국전쟁은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발한 것이다. 왜냐면 한국인들은 독립심이라는게 쥐뿔이만큼 없기 때문이다. 스툭은 한국인들은 외국인을 이용해서 외세를 물리치는 성격이 있고, 혼자서 결정하는 것보다는 외국에 의존하는 것이 강하다고 말했다. 본격 식민사관 그러면서 1876년 개항이후 친러니 친미니 친일이니 하면서 싸웠다고 말한다. 아무튼 그래서 전쟁은 소련이 일으킨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한국놈들 멍청해요. 그래서 전쟁 결정 못해요. 그러니 한국전쟁 소련이 일으킨 거에요.

국내에는 서울대 김영호 교수[3]가 대표적으로 있다. 이분은 스탈린의 롤백이론을 주창하고 계시다. 그분의 주장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이 졸라서 전쟁이 났어도, 아무튼 전쟁을 승인한 사람이 누구냐? 스탈린 아니냐? 그러니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최종결정권자가 스탈린이니 당연히 스탈린 책임이다. 라고 주장하신다. 뭐 일견맞는거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하고...

수정주의적 입장

대표적으로 브루스 커밍스가 있다. 커밍스는 지금은 유명하지 않지만 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대학생 필독서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었다. 그리고 애를 중심으로 해서 수정주의자들이 득세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식민지 시대의 유산의 결과라 본다. 식민지 시절 등장한 계급간 격차가 미소의 분할점령으로 심화되었고 그래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이야기한다.

근데 커밍스의 가장 큰 문제는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의 연구는 최상이다. 그러나 해방이후의 연구는 안습....예를 들어 남한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순간에도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든지,[4] 남한이 먼저 침공했다등 틀린 정보가 많다.

시몬스의 경우 김일성이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하였고, 한반도 내에 기반이 있는 세력에 비해 힘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계열이 대거 북한에 들어오는데 애들의 규모가 엄청난 양이었다. 그로 인해서 김일성의 권한은 더 불안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김일성은 박헌영을 괴롭히고 힘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던 박헌영이 이러게 된 이상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남침을 건의했고, 영토야욕이 있던 김일성이 이를 수용해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달려가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전쟁하게 해주세요. 김일성의 부탁에 스탈린이 승인했고 이로 인해서 한국전쟁이 발발되었다고 말한다.

둘을 조합한 현재 학계 정설

그런거 없다

아직도 겁나게 싸우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한국전쟁 연구를 주도하는 우드로 윌슨 센터에서도 한국전쟁의 원인을 두고 겁나게 치고박고 싸운다. 대표적으로 브루스 커밍스와 케서린 웨더스비의 논쟁이 있다. 같은 수정주의자임에도 싸운다, 사실 한국전쟁의 원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북한의 문서고가 개방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다.

다만 한국 학계에서는 일명 김일성 주도 스탈린 동조설 이라는 전통주의 학설이 중론이 되어있다.[5]

김일성 주도 스탈린 동조설이란 김일성이 강하게 적화통일을 원했고, 이를 위해서 스탈린에게 사정했고 이에 스탈린이 허락해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사실 시몬스의 수정주의적 시각과 스툭의 전통주의 시각을 짬뽕한 것인데, 그냥 한국에서는 먹히는 주장이다.

첨언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연구가 결론이 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연구는 앞서 말했듯이 한국이 주도하는게 아니라 미국이 주도해왔고, 주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우드로 윌슨 센터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왜냐면 한국전쟁은 냉전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케서린 웨더스비가 말했듯이, 한국전쟁의 원인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냉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6]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 원인만 파는 학자가 수두룩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아무튼 개인적으로 한국전쟁이 한국에서 발발한 전쟁이고 아직도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도 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은 정말로 슬픈일이다.

전쟁 발발과 전개

전쟁 전야

대부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무척이나 평온했다가 아무런 낌새도 없이 기습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만, 북한이 먼저 침공한 것과 철저하게 전면전을 계획해왔다는 점 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북측에는 소련, 남측에는 미국의 군정이 들어서자 이미 광복 직후부터 38선부근에 국지적인 교전이 수도없이 발발했다. 어찌보면 이때부터 전쟁의 위험은 가시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병준[7]은 한국전쟁 직전에 이미 모든 국민들이 전쟁을 예감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주한 미 대사관 직원의 수기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사람들의 반응이 모두 다 "올 것이 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기습전쟁이 아니라 예상된 것이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방치한 우리의 리승만 각하는 대인배인듯[8]

북한의 기습남침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이 휴전선을 넘었다. 당시 북한은 이미 38선 이북에 다수의 병력을 몰빵시키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 측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기강이 헤이해져 있었고, 때마침 농번기라 많은 군인들이 고향집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휴가를 나가는 등 말 그대로 막장이였다.[9]

반박 정병준의 경우 이미 전투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이나 북한 모두 전면적인 전쟁을 예상했다고 보고있다. 다만 그 전쟁의 시기가 농번기에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남한군의 기강이 헤이해졌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이후 지연작전을 펼친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을 볼때 잘못된 해석이라 여기고 있다.

사실 당시 한국군의 전력으로는 몇명의 병력이 전선에 모여있든 북한의 초반 공세를 막는건 무리였다. 한국군의 장비는 부실했고, 부실한 장비를 가지고는 적의 공세를 버티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은 불과 몇년전에 일본군이 몸으로 증명한 바있다. 그나마 그 시절의 일본군은 궤도라도 달린 전차가 굴러다니고, 전투기가 기총쏘며 날아다니고, 전함이 포라도 쏘는 군대였지 한국군은 그런거 없었다. 물론 현 시점에서는 당시의 타국 병기에 비교하면 '기술적으로 뒤쳐진'물건이라는 평가를 받는 태평양 전쟁 시절의 일본군 병기들이지만, 한국군은 이것도 없었다.

반박 한국군의 장비가 부실했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최근 나온 국방부발간 6.25전쟁사를 보면 또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분명 전차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이 운용했던 전차는 T-34전차이다. 어글리 탱크라는 말처럼 성능이 좋은 탱크는 아니었다. 미국도 그래서 대전차포를 1,000문을 지급했다. 춘천지구 전투에서 보여주듯이 충분히 대전차포로 요격했다면 초반에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즉, 한국군의 전력이 부족한 것이라 보기보다는 당시 화기를 제대로 운용할 병력이 적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육군은 개전 시점에 소수의 장갑차를 제외하면 단 한 대의 전차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고, 공군은 정찰기와 훈련기를 빼면 전투기/공격기/폭격기 보유량이 0이였는데다가, 해군은 그나마 전투함이라고 할만한 배를 개전 직전에야 간신히 한 척 사서 잽싸게 본토로 보내고, 참모총장이 세 척 더 사서 하와이에서 무장 세팅하고 있는데 전쟁이 터졌다. 반면 북한군은 소련의 원조 덕분에 한국군 장성들이 보면 침이 꼴딱 넘어갈 무기로 풀세팅된 상황이였고, 이 대로는 한국군이 아무리 저항을 해도 혼자만의 힘으로 남한지역의 공산화를 막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였다.

이런 사태가 터진 이유는 미국 측에서 '북한을 자극할 위험이 있고,[10] 공군같은 경우는 장비를 줘봐야 북한으로 들고 날라버리더라'라는 이유로 한국군의 장비 지원 요청을 꾸준히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사상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절이라 군인들의 월북이나 내전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는데, 육군은 지휘관이라는 놈이 부하들 데리고 월북을 하고,[11] 뱅기타고 둘이나 날라버리는걸 본 미국 입장에서는 '쟤들 장비 왜줘?'라는 소리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공군과 해군은 모금운동을 벌여서 병기를 사오는 웃지못할 판국이였고, 그나마 사온것도 훈련기인 T-6 택산과 작은 구잠함(Submarine Chaser) 4척(!)뿐이였다. 덕분에 개전 초기 한국군은 북한군의 T-34에 M8 그레이 하운드 장갑차로 덤비고, L-4 연락기의 날개에 바주카를 달고 나가서 쏘는 암울한 상황에 직면해야했다. 그 와중에도 소소한 전과를 내긴 냈고, 해군의 경우 부산지역으로 항해해오던 상륙함을 격침하는데 성공하는 등 나름의 노력은 했지만 한국군 만의 전력으로 북한군의 남침을 막는건 불가능했다.

반박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김홍일, 초대 국방장관 이범석 군원로들은 채병덕에게 찾아가서 한강 이남에서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강은 1Km의 폭이었고, 탱크가 있다고 해도 강은 건널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최고의 작전이었다. 그러나 채병덕은 당시 정치권의 요구인 서울수호를 지켜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이러한 건의들을 따 씹어버린다.[12][13][14] 심지어 1사단장이던 백선엽 등 현장지휘관들도 한강 이남으로 철수 방어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채병덕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패배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서울 이북에 있던 6개 사단들이 모두 화기와 중장비, 차량을 온전히 보전한 체 한강이남에서 방어선을 펼쳤다면 미군이 올 따까지 충분히 버텼을 것이라 보고있다. 즉, 한국군은 북한의 남침을 막을 능력이 있었으나 지휘관이............. 채병덕이기이....

이러한 전략적, 장비적 열세와는 별개로 개전 초 전선과 지휘부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서 개전 직후 1~2일동안 서울의 정부와 군 수뇌부가 정확한 전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겹치면서 한국군 지휘부는 개전 첫 이틀인 6월 26일까지 전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말았다. 이는 개전 직후 국방부 전황발표에서 옹진의 17연대가 해주에 진입했다는 발표를 한 것에도 기인한다. 이 발표는 국방부가 국민을 안심시키려고 한 거짓발표가 아닌, 유사시 17연대가 해주로 진격한다는 작전계획에 기반, 보고는 없었지만 17연대가 작계대로 하고 있겠지?라는 낙관적 추측으로 한 발표였다.[15]

이러한 전황 파악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6월 26일 오후서부터였다. 의정부, 개성 등 서울로 향하는 모든 길목에서 국군이 패퇴 중이라는 보고가 빗발친 것이다. 아울러 북쪽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과 패잔병들은 서울 시민만이 아니라 정부까지 공황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군 지휘부는 그나마 편제를 유지하며 방어전을 수행 중이던 1사단(사단장 백선엽)의 파주 방면이 방어선을 유지해주리라 기대하고, 확보한 예비병력을 있는 족족 의정부 축선으로 투입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축차투입 축차소모라는 병크스런 결과를 내고 말았다.

의정부 축선은 북한군도 병력을 집중투입하여 전선돌파를 시도한 곳으로, 6월 27일까지 옹진반도를 제외한 다른 전선에서 성공적으로 방어전이 수행 중이었던 반면,[16] 의정부 축선은 북한군 주력의 집중 투입, 특히 T-34의 집중 투입으로 인해 7사단이 완전히 괴멸당하고 말았다.

결국 의정부 축선이 붕괴하면서 6월 28일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한강 이북의 국군 세력은 모두 고립되어 저항하다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고, 혹은 신분을 숨긴 채 해산하였다. 그나마 파주 방면의 1사단은 모든 장비를 포기하고 한강 하구를 도하하여 후퇴하는데 성공했고, 강원도 춘천-홍천 전투에서 6사단이 대승을 거두어 북한군 2사단이 사실상 전열에서 이탈하고, 7사단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6사단은 이후 서울 함락에 따른 전선의 균형을 위해 원주를 거쳐 충주, 제천으로 후퇴한다.[17] 강릉의 8사단도 무사히 후퇴한다.

미국의 참전과 지연전

서울 함락 후 한국군에게 제대로 화기를 갖춘 사단은 춘천 축선에서 승리하고 퇴각하는 6사단과 강릉축선에 있던 8사단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1사단이 있기는 했지만 장비를 모두 포기하고 몸만 빼내 한강을 건넌 상태였다. 1사단만이 아니라 서울을 포기하면서 예비물자 등을 죄 포기하고 가면서 장비와 물자를 건지지 못했다.[18] 그밖에 옹진에서 철수한 17연대, 지방의 소규모 병력과 경찰병력[19]가 있긴 했지만 당장 숫적인 열세가 명백했다.

다행히 김홍일 장군이 중심이되어 서울시흥전투사령부를 설립하고 편제가 무너져 퇴각하는 병력들을 시흥에서 모아서 재편하고 한강으로 보냈다. 김홍일 장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자 한국군의 작전은 지연작전으로 전환된다. 김홍일은 이미 중일전쟁에서 중화민국군 장성으로 지연작전의 경험이 있었기에 빠르게 작전은 수립될 수 있었다. 백선엽도 자서전 1판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아니었음 망했을지도 몰랐다고 말했으니 근데 최신판에서는 사라졌다.

이후 한국군은 중장비와 차량, 화력을 갖춘 6사단과 8사단을 중심으로 하여 1군단을 창설한다. 이후 한국군의 지연작전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특히 6사단의 동락 전투의 성공은 크게 칭송받는 전투 중 하나이다. [20] 이 지연작전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들어서 재조명되었다. 1사단이 장비 문제로 뒤로 빠지는 동안 1군단을 중심으로 동부전선에서의 지연전이 이뤄진다.

한편, 이승만 행정부가 개전 4일만에 국무회의를 열었던 것에 비하면 트루먼 행정부는 현지시간으로 개전 수시간 만에 비상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침공을 소련이 미국의 자유진영 의지 수호를 시험하려는 것이라 판단했다. 이에 트루먼 행정부는 단 하루만에 한국전쟁 참전을 승인하고 UN 안전보장이사회를 통보하였다. 그리고 더글라스 맥아더를 극동미군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역전의 용사들이 대부분 전역하고 일본에서 평화로운 점령군 생활을 만끽하는 이들이 중심이었으며, 그나마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일본에서 급히 소집하여 투입한 병력들이었다. 선발대인 스미스 특임대는 7월 5일 죽미령 전투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려다 실패, 사실상 괴멸되었다. 북한군의 전차를 격파할 화력이 부족하다는 한국군의 조언을 우습게 여기다가 T-34를 막지 못해 결국 무너진 것이다.이것들이 북한군 전차들이 귀여운 치하땅인줄 알았나...

스미스 특임대의 붕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투입된 미군 본대인 제24사단은 대전지구 전투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사단이 무너지고 사단장 딘 소장마저 북한군에 포로로 잡히는 상황에 처했다. 대전지구 전투의 패배와 24사단의 붕괴는 금강 방어선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한국군 지휘부와 맥아더 원수는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총투입한다.

한편, 지상전의 상황과 별개로 미 공군은 압도적인 항공력으로 북한 공군을 불과 1주일여만에 괴멸(...)시켰으며 해군 항모항공대와 공군 B-29 폭격기들이 미약한 북한의 방공망을 비웃으며 북한 영공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6월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평양이 폭격을 받기 시작했고, 북한 지상군은 미군의 맹공습을 몸으로 받아야 했다. 그러나 투입되는 미국 항공기들 대부분이이 후방거점을 폭격하는데 특화되는 전략폭격기들이다보니 개전 초 북한군이 받는 공습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다.

낙동강 전선

한국군은 있는 병력 없는 병력 쥐어짜내며 닥치는 대로 전선으로 보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소련군의 처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후방에서 학도의용병들까지 모집해서 어린 학생들에게 몇 시간동안 기초훈련만 시키고 최소한의 무장만 준 채 전선에 투입했다.[21] 미국도 일본에서 병력을 긁어내어 바로바로 투입했고, 본토의 예비병력을 투입시키기 시작하면서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다.

낙동강 전선에 있어 위기는 크게 세 차례 있었다. 첫번째는 다부동 전투로 1사단과 미군의 격렬한 저항, 그리고 왜관 일대에 대한 B-29의 융단폭격이 가해지면서 막아내었다. 두번째는 9월 초의 영천 전투유재흥 장군이 격전 끝에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또다른 위기로 통영 함락이 있었는데, 한국 해병대에 의한 통영 상륙작전으로 통영을 탈환하고 거제도로 가해지는 북한군의 위협을 차단하였다.

북한군도 한미연합군을 바다 속으로 밀어버리기만 하면 전쟁이 끝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더 이상 방어선으로 삼을 만한 지형도 없었다. 때문에 북한군도 후방의 모든 병력에 남한에서 징집한 병력까지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모조리 총투입하여 공세를 강화했으나 결국 돌파구 형성에 실패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군의 전력은 약화되었고, 반면 미군은 병력과 물자가 빠르게 증강되어 갔다. 아울러 후방의 거점도시들과 보급거점이 맹폭격을 받으면서 전선지원이 원활하지 않아 공세한계점에 도달했고, 전선 부대도 맹공습으로 대부분의 중장비를 상실했다.[22]

인천 상륙 작전

중국의 참전 그리고 1·4 후퇴

지리한 휴전협상

마침내 휴전 그리고

휴전 이후

전쟁의 영향

부정적 영향

수많은 인명피해

당장 전투로만 유엔군과 한국군에서 18만명이 전사하였으며,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전사하였다. 이런 전투 외에 각종 학살과 폭격 등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가 100만 단위에 육박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것. 이로 인한 전쟁과부와 고아의 발생은 덤이다.

한국사회의 지독한 레드 컴플렉스

이 전쟁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공산당이나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회가 되었다. 이후 독재정권에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반대파를 찍어누르는 구실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발목을 잡게 되는 원인이 된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우리가 공산당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 국가인데 뭔 소리냐! 우리를 전복시키려는거 보니 넌 빨갱이가 분명하다!'면서 무고한 시민 여럿 때려잡았다.

긍정적 영향

끔찍하기 이루말할 수 없는 전쟁으로 기왕이면 안일어나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전쟁이 몰고온 긍정적인 여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남북 대결 패러다임의 변화

사실 대한민국과 북한에는 당시 여러 호전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다. 상술한 박헌영도 그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서로를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리낌없이 하였고, 국지전이 빈번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러한 호전론자들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전쟁은 나쁜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강력하게 퍼지게 되어 남은 힘 조차 잃게 되었다. 덕분에 비록 '휴전' 관계임에도 오늘날까지 양국은 전쟁 한번 하지 않고 유지되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나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서로에게 과시하는 식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 이후 양국이 서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손실도 매우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양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그것을 잘 이어나갔지만 북한은 중간에 침몰하여 아직까지 밑바닥을 떠도는 중이다(...).

완전한 계급제 철폐

사실 한반도는 상술했듯 자주적인 독립이 아닌 외세에 의한 독립을 거두었기에 사회 구조가 그대로였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즉 일단 법으로는 모든 국민이 평등했지만, 앞집 김씨는 양반 출신 뒷집 정씨는 노비 출신 등 어디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평등'이 이루어지진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원래 살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피난을 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어디의 누구였는지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 와중엔 죽어서 아예 잊혀진 사람도 있고, 살아는 남았으나 기반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는 등 민족이 제대로 뒤엉켜버렸다.

게다가 이후 사회기반의 리셋으로 하루하루 끼니 걱정 하기도 모자랄 판국이 되어버린 탓에 먹을것을 잘 구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고 이런 판국에 양반이니 노비이니 하는 출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모두의 출신성분은 서서히 잊혀졌고 결국 비참하게나마 온 국민의 평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전쟁 덕분에 평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바로 이웃 국가인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근대 와서 심각한 내전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누구는 화족 출신이네, 누구는 부라쿠민 출신이네 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지금까지도 민족차별이 빈번한 국가로 남아 있다.

미국과의 유대감 강화

전쟁을 통해 미군과 국군이 함께 싸우면서 양국의 유대감이 강화되었다는 점 또한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국군은 미군과 함께 싸움으로서 미군의 최신식 장비와 그에 걸맞는 교리들을 다수 습득하여 전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근 백여년간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던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교전 경험을 갖게 되어 실력 또한 향상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여파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에게 있어 종전의 '일본을 처리하면서 떠안은 부산물'이라는 천덕꾸러기 취급에서 벗어나 함께 싸운 전우라는 정신적 유대감에 더불어 실제로 미국식 사회제도나 경제제도가 잘 도입되어 다른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유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유대감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도 한국과 미국은 서로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이다.

다만 한국과 미국이 강력한 우방국이라는 거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이 우리 편일거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도 결국 이익을 생각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국가이며, 이는 한국군이 하푼을 도입하려고 했을때 일본측의 로비를 받은 미국에서 하푼의 판매를 거절했었던 사실이나 M60 패튼을 대체하는 신형 전차의 도입 시도를 영 꺼림직하게 봤던 일 등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의 우방국인 것은 맞지만, 국제 정세에 따라서는 태도가 달라지지 말라는 법이 없으므로 맹신이 아닌 적절한 외교를 통해 우방국으로서의 관계를 튼튼히 유지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기타

UN군

국제연합(UN)이 정식창설된지 2년여만에 전쟁을 겪었고, 이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UN 회원국의 뜻을 모아 UN군을 창설, 한국에 파병했다. UN 평화유지군이 아닌 UN군으로서 침략자와 교전을 목적으로 한 경우는 2015년 현재까지도 이 때가 유일하다.

이는 국제연맹(UL)이 무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지 못하고 침략자에 의한 주변국 정복이 거듭된 3~40년대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교훈이 가져온 결과였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이나 일본의 중국 침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국제연맹과 국제사회 모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사상 최악의 대전쟁을 치뤘던 만큼, 침략자는 일찌감치 응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있었던 것이다.

당장 에티오피아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침략때 국제연맹을 통해 호소했지만 무시당하고 정복당한 역사가 있고, 독립을 회복한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아프리카의 빈국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강자에 의한 침략이 되풀이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같은 이유로 유럽권 국가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터키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내전을 끝내고 국가재건 및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기에 참전한 경우이다. 태국은 아예 2차대전당시 일본의 동맹국, 즉 추축국이었다. 워낙 듣보잡이라 미국이 신경도 쓰지 않은 상대였고 태국도 필사의 외교전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취소하는 식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했지만 미국 및 영국, 프랑스로부터 추축국 낙인이 찍힌건 똑같았고 이를 타개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되겠다는 제스처로서 참전한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모두들 위기에 처한 한국을 도와주러 온 나라들이다. 설사 정치적 이유에 따른 파병이더라도 그건 그 국가 정부의 입장이지, 파병된 사람들은 이역만리 타향땅에서 아무런 반대급부도 바라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감사히 여기자.

직접적으로 전투병을 참가시킨 국가만 위 16개국이고, 의료진을 보내거나 구호물자 등으로 지원한 나라는 더 많다.

관련 작품

같이 보기

대중매체

미국이 패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의외로 미국이 분명하게 패한 소말리아전이나 베트남전과는 달리 대중매체에서 다루어지는 빈도는 매우 적다. 애초에 미국 내에서 이 전쟁을 일컫는 별칭 중 하나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다. 사실 이는 '휴전'이라는 굉장히 애매한 수준으로 마무리 지어진 탓도 있고 또 이 전쟁으로 미국이 딱히 사회적으로 가지게 된 변화 또한 없기 때문이다. 가령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은 전에없는 호황을 누린 반면, 베트남전이나 소말리아전 등으로 인해 미국은 반정부, 자유주의 성향이 지독히 강해지는 등 괄목할만한 변화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전쟁은 그런 거 없었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을 중심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으로는 희대의 괴작 오! 인천뿐인데, 이조차 제작을 통일교에서 한거다.

재미있는 것은 냉전사 연구에서 한국전쟁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위의 '잊혀진 전쟁'이라는 말도 학계에서는 정말로 중요하게 다루고 많은 사람들이 아는데 비해서 일반 대중들의 인식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내에서는 당연히 다루는 매체가 매우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 오락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이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진다. 참전자들을 인터뷰해거나 초빙하여 행사를 갖는 등 여러 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 외의 지역에서는 글쎄올시다...

기타

대부분의 큰 사건이 그러하듯 여러 음모론이 끼어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남침(남쪽이 침공 당함)이 아니라 북침(북쪽이 침공 당함)했다는 주장,[23]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대부분의 주장들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은 착하게 가만히 있었는데 이용당한 것이라는 종북적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음모론은 많다. 대표적으로 처음 제시한 사람은 미국 언론인 스톤[24]이다. 1952년에 스톤은 한국전쟁이 리승만과 맥아더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맥아더가 대통령이 되려고 전쟁을 유도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콜코니 브루스 커밍스니 모두 남한이 먼저 침공했다고 주장했다.

각주

  1. 미국에서 일명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는 한국전쟁이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학계에서는 겁나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들이 모른다는 의미이다. 한국인만 아는 전쟁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니 주의하자.
  2. Stueck, William Jr. “The Korean War.” Leffler, Melvyn P. edit.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Cold War. Vol. I. 2010.
  3.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3호. 1997.
  4. 실제로는 한국전쟁 직전에 토지개혁했다. 모 학자 말로는 토지개혁을 안했으면 공산화되었을수 있다고 말한다.
  5.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 한국전쟁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없었다. 1980년대에 김학준이 처음으로 미국의 한국전쟁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것을 한국에서 한국전쟁 원인 연구의 시작점으로 본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는 전통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6. Weathersby, Kathryn.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3. http://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ACFB76.pdf. (Accessed 2015. 6. 9.) p.7.
  7. 정병준.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
  8. 이것때문에 남침유도설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정병준 교수의 책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은 무슨 음모같은 게 아니라 안보가 무능해서 무너진 게 맞다. 오히려 브루스 커밍스 같은 학자가 이승만을 과대평가 한 것. 이 책에선 남침유도설을 학술적으로 반박하는 부분이 따로 있기도 하니 관심 있으면 참고해보자.
  9. 다만 휴가로 인해 인원이 많이 빠져나간 부근은 수도권이었으며 웅진반도와 동부전선의 경우 북측의 이상한 움직임에 의한 지휘관의 결정으로 휴가가 아에 없었거나 인원 대부분이 복귀한 상태였다.
  10. 미국의 우려가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은 것이, 대통령 이승만을 포함하여 군 지휘부가 허구한 날 북진통일을 외치며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라는 온갖 개드립을 시전하고 있었다.
  11. 강태무, 표무원 월북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이며 대대장이었던 둘은 국군 내 좌파에 대한 숙군이 본격화되자 1949년 5월 동부전선에서 자기들이 맡은 대대를 통채로 이끌고 월북한다. 이 둘은 전쟁기간에도 병력을 이끌고 남침에 나선다.
  12. 하지만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군은 정부의 지시를 이행해야 하고, 정부가 수도 서울의 사수를 지시한 이상 이를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채병덕이 비판받아야 하는 건 서울 사수가 어렵다는 사실을 제대로 정부에 설득하지 못한 것과 불리한 조건이긴 했지만 서울 방어전에서도 잘못된 전술을 시행하여 방어도, 지연도 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13.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수도 함락은 승패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수도가 함락되더라도 이길 방법이 있지만 이는 해당 국가가 수도 함락의 충격을 받아낼 여력이 충분할 경우에나 가능하다. 개전 직후여서 미국이 참전한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군사부분에 문외한인 정부가 서울 사수를 지시한 건 합리적이진 못해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14. 당시 서울 사수는 누가보아도 멍청한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당시 군 원로이며 광복군 사령관이던 이범석, 지청천 등은 한강을 이용하자는 의견을 피력했다. 또한 당시 정치권에서도 이에 대해 동조하고 서울철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승만 조차도 서울을 포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성모와 채병덕이 수도 사수를 자신했고, 정치권의 요구보다는 채병덕의 자신감이 컸다. 결국 이승만은 채병덕의 자신감있는 발언에 서울철수를 포기했다. 하지만 이는 정치군인이던 채병덕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므로 절대로 서울사수가 당연한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이는 한 지휘관의 잘못된 실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15. 6월 25일의 국군 해주 진입 발표는 이후 북한과 종복세력에 의해 국군의 북침설의 근거로 허구한 날 이용되었다. 정작 백인엽 대령과 17연대는 필사의 탈출전을 하는 중이었다.
  16. 옹진반도는 당시 한국의 월경지로 육로로 연결이 되지 않아 병력이 1개 연대밖에 없었고, 북한군은 이곳에 사단급 제대를 대거 투입했다.
  17. 정병준은 자신의 책『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파주: 돌베게, 2006 에서 6사단이 대한민국을 구했다면서 극찬했다.
  18. 이건 명백한 대통령 이승만의 실책. 이승만은 서울을 포기하면서 이를 정부와 협의하지 않았다. 서울이 함락 위기이니 피신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걸 아무에게도 안 알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행정부도, 입법부도 붕괴할 뻔 했다. 이승만의 서울사수 방송에 일반 시민들만이 아니라 정부 고위급까지 다 속았다는 것. 이 사실이 확인된 건, 피신 다음날 아침 서울 사수 방침을 확인하려고 부통령 등이 경무대를 방문하면서였다. 이러니 장비와 인력을 동반한 조직적 철수가 될 수 있나...
  19. 현대 한국의 치안유지 역할을 맡는 경찰을 생각하면 안된다. 당시 경찰들은 실질적으로 군병력 및 전투인원 계산시에 포함될 정도로 치안 역할보다 전투 임무가 상당했다. 물론 군처럼 전면전에 대비하는 조직은 아니었지만 일반 고지방어전이나 참호전, 후방 방어전이나 게릴라전 등에는 충분히 투입하여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20. 충주에서 북한군 1개 연대를 완전히 전멸시켰다.(1950년 7월 7일)
  21. 국방부의 공식 입장은 학도병 등의 모집에 있어 강압적 징병은 없고 모두 자원 입대이다. 공식 입장일 뿐이지만.
  22. 대표적인 것이 T-34 전차다. T-34를 상대하기 위해 미군은 본토에서 重전차 M26 퍼싱을 급히 공수해왔으나 정작 전차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북한군의 전차 대부분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습으로 파괴된다. 그리고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추가적인 전차 지원을 하지 않았다.
  23. 참고로 이건 단어의 뜻을 헷갈려서 오해하는 경우도 좀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즉 남침을 '남쪽이 침공함', 북침을 '북쪽이 침공함'으로 헷갈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참고로 개그콘서트 시청자 의견 코너 2014년 11월 9일자 방송에서는 이걸 똥침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정리하자면 '내 손이 너의 똥꼬를 침공하면 그게 손침이냐 똥침이냐'는 내용이다(...).
  24.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