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자유의지(自由意志, 영어: Free Will)는 철학의 용어로, 구속당하거나 강제당하는 것 없이 순수하게 로부터 비롯되는 의지를 말한다.

개요

형이상학윤리학에서 논쟁거리인 개념으로,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을 두고 "자유로운 행위"라고 부른다. 기초적이면서도 직관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 상황: 철수가 은행강도 짓을 저질렀다
    • 시나리오 A: 괴한들이 철수를 보고 은행강도 짓을 하라고 협박했다. 지금 철수 몸에는 원격 폭탄이 부착되어있다.
    • 시나리오 B: 누군가가 철수의 음료수에 환각제를 탔다. 그 환각제를 복용하면 은행강도 짓을 하고 싶어진다. 철수가 그 음료를 마셨다.
    • 시나리오 C: 철수가 길을 걷다 그냥 스스로 마음을 먹고 은행강도 짓을 저질렀다.

시나리오 A의 경우 철수는 괴한들에 의해 "강제로" 은행강도 짓을 저지른 것처럼 보인다. 시나리오 B에서도 철수가 은행강도짓을 한 것은 "스스로 마음을 먹은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 같다. 반면에 시나리오 C에서 철수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은행강도 짓을 저지른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시나리오 C는 시나리오 A, B와 확연히 대조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때 시나리오 C에서 철수는 직관적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자유의지라는 것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즉 자유의지는 과거 화학에서 가정하던 플로지스톤처럼 허구적인 개념이라고 가정해보자. 즉 자유로운 의지도, 자유로운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가정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가정이 맞다면 문명을 가진 인류가 지금껏 쌓아온 , 제도, 윤리, 종교 거의 대부분이 와르르 무너지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통상 도덕적 책임의 필요조건이라고 여겨진다. 즉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상기 예시를 다시 들어보자. 철수가 괴한에게 협박당한 시나리오 A와 환각제를 먹은 시나리오 B의 경우, 철수는 자유의지를 발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철수는 은행강도 짓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의지라는 것이 없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시나리오 C는 시나리오 A·B와 다를 바가 없다. 자유의지란 것은 없으므로, 시나리오 C에서도 철수는 자유의지를 발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 필요조건이 만족되지 않으므로 철수는 시나리오 C에서도 은행강도 짓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즉 시나리오 A와 B에서 철수에게 처벌을 내리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시나리오 C에서도 철수가 처벌을 받을 근거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귀결은 인류가 지금껏 수립한 대부분의 법, 윤리, 종교에서 감히 허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한 입증 근거가 아니다. 다만 자유의지가 인류가 지금껏 쌓아온 제도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는지, 따라서 자유의지의 유무가 얼마나 중대한 함축을 낳는지를 알려주는 것일 뿐이다.

위 시나리오에서 자유의지의 적용 범위를 판단하는 것은 국회의원과 판사의 재량에 불과하다. 형량 감경 사유인 정신 질환의 범위를 정하는 것도 결국 정신의이다. 이들이 과연 표면적이고 상투적인 정황 이상으로 타인 내면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어차피 모든 존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게 아니고, 범법자가 될 소지가 있는 자유의지인지 뭔지를 갖길 원해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 어떤 흉악범도 내력을 살펴보면 참작의 여지를 어떻게든 찾을 수 있는데, 겉보기에 비슷한 정도의 범죄 유혹을 받더라도 자신이 원치 않은 생득적인 성격과 사고 능력에 따라 인생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정하기 위해 정상참작을 하는 것이지만, 결국 정상참작 자체는 행위의 결정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자유의지가 설령 존재한다고 한들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어렵다. 이렇듯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한 사회 질서의 불완전성을 인지하게 되면 그 누구도 마음 편하게 징죄할 수 없고, 보복이 아닌 교화와 격리, 예방을 중시하게 된다.

종교, 특히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는 자유의지가 구원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보통 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으로 자유의지를 내세우는데, 자유의지를 받았기에(자유의지 신수설은 강제로 가지도록 결정되고 자유의지로 작동하도록 결정된 자유의지가 정말 자유의지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절대선인 신을 거부하고 악행을 저지른다는 주장은 결국 자유의지가 사실상 자유가 아니거나 악의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리벳 실험

'자유의지가 있다'는 주장은 운명을 중시한 고대부터 오랫동안 의심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의심은 생물학심리학이 발전하면서부터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런 자유의지의 유무에 관해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신경과학 실험 중 하나가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이 1980년대에 수행한 소위 리벳 실험(Libet Experiment)이다. 리벳 실험의 골자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피험자는 EEG 기구를 착용한다. 이때 EEG로는 대뇌피질 운동영역에서 발생하는 준비 전위(readiness potential)을 측정한다. 준비 전위란 근육 운동이 이뤄지기 전에 측정되는 두뇌 활동 신호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준비 전위가 측정되는 시점을 RP라고 하자.

피험자의 앞에는 버튼 하나가 놓여있고, 피험자가 원하는 때 아무 때나 그 버튼을 눌러도 된다. 이때 버튼을 누르는 시점을 A라고 하자. 다만 버튼을 누르기 전 피험자는 '__자기가 버튼을 눌러야겠다고 느낀 것을 깨달은 시점__'을 타이머를 보고 확인해야만 한다. 해당 시점을 W라고 하자.

해당 실험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실험한 결과, 세 시점 RP, A, W의 시점은 평균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 RP: -500 밀리초
  • W: -200 밀리초
  • A: 0 밀리초

즉 위 측정대로라면 버튼을 누르기 위해 근육이 준비를 시작하는 시점은 버튼을 누르기 0.5초 전이며,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은 버튼을 누르기 0.2초 전이다. 그런데 이는 놀라운 결과다. 왜냐면 상식적인 생각은 '버튼을 눌러야지'라고 마음을 먹은 다음에야 근육을 움직일 준비를 하는 것일텐데, 위 실험 결과는 '버튼을 눌러야지'라고 의식적으로 마음을 먹기 전에 이미 근육은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셈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버튼을 누르겠다고 의지를 발휘하기 전에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통상 다음과 같은 함축을 같는다고 해석된다: "자유의지"를 '이렇게 행동해야지!'라는 스스로의 의식으로 정의하자. 그렇다면 어떤 행동을 실행하겠다는 자유의지는 그 행동보다 뒤늦게 나타난다. 따라서 그 행동이 자유의지 때문에 발생한다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란 기껏해야 '그림자' 같은 것일 뿐이다.

이후 유사한 방식을 통해 '의식 시점' 이미 6초 전부터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예측하는 더욱 발전된 시험 또한 이루어진 바 있다. 이러한 실험 결과가 '자유의지' 개념에 관해 어떤 함축을 갖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많은 부분이지만, 적어도 현대에 자유의지를 두고 이루어지는 논쟁은 이런 리벳 실험의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루어진다.

결정론과의 관계

전통적으로 결정론은 자유의지와 아귀가 잘 안 맞는다고 여겨졌다. 은 전지하므로 모든 미래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신학적 결정론이든, 라플라스의 악마로 대표되는 근대과학적 결정론이든, 위 두 형태 중 어떤 것이든 결정론이 맞다면 자유의지의 설 자리는 좁아지는 것 같다. 왜냐면 모든 것이 결정되어있다면, 우리는 '달리 행위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며, 이는 곧 우리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정론과 자유의지 간의 관계를 정확히 해명해야할 필요성이 생기며, 아래 견해들은 이런 양자 간의 관계에 대한 잘 잘려진 사례들에 해당한다.

양립가능론

양립가능론(Compatibilism)은 결정론이 참이면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주장 또한 참인 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즉 우리가 '달리 행위할 여지가 없었다고 한들', 여전히 우리의 행위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입장에 해당한다. 현대 철학자 중엔 대니얼 데닛이 대표적인 양립가능론자다. 양립가능론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현대적 논변으로는 프랭크퍼트 사례를 참조할 수 있다.

설령 양립가능론자더라도 자유의지를 강하게 긍정하는 게 아니라, 자유의지의 존재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없다고 단정하지는 않되, 존재 여부에 대한 판단이나 그 의미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도 상당히 많다. 즉 신이 없다 단정하지는 않지만 가정할 필요가 없으니 생략해도 된다고 보는 불가지론적 무신론자와 유사하다.

양립불가능론

양립불가능론은 결정론이 참인 동시에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주장 또한 참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강한 결정론

강한 결정론(Hard Determinism)은 결정론이 참이므로, 자유의지는 없다는 입장이다. 강한 결정론을 옹호했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스피노자가 있으며, 그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당대에 큰 스캔들이 되었다.

자유의지주의

자유의지주의(Libertarianism)는 자유의지가 있다는게 참이며, 곧 결정론은 거짓이라는 입장이다. 일부 현대 자유의지론자는 양자역학코펜하겐 해석이 비결정론적임을 들어 자유의지론을 옹호하고자 하나, 이러한 입장은 소위 '우연 논변', 즉 "만약 인간의 행동이 비결정론적이라 한들, 그 행동이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라면 그게 어떻게 자유의지냐?"라는 반론을 해결해야만 한다. 관련된 현대적 논의는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을 참조할 수 있다.[1]

철학사의 사례

데모크리토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니체

해리 프랭크퍼트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