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

양자역학(量子力學, 영어: Quantum Mechanics)은 기본입자 크기의 미시적인 세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양자역학이란 학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Quantum)이란 단어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본래 이 개념은 광전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으로, 에너지라는 양이 연속체가 아닌 어떤 종류의 '입자'로서 행동하는 것 같더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온 개념이다.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주제는 원자보다 작은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이다. 양자역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렇게 작은 미시세계에서도 모든 것이 연속일 줄 알았으나, 이론으로 예측하고 실험으로 관찰되어 입증되는 물리량이 연속적이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 양자화(Quantization)된 값으로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과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왔으며, 이후 현대 인문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고전 양자론[편집 | 원본 편집]

플랑크의 흑체 복사 이론[편집 | 원본 편집]

흑체 복사. 여러 온도에서의 실제 흑체 복사와 고전역학적 예측값이 표시되어 있다.

맥스웰 방정식열역학의 등장으로 머지않아 고전 물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19세기 말, 몇몇 과학자들은 흑체에서 나오는 복사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흑체 복사란 열역학적 평형 상태에 있는 물체에서 나오는 복사를 뜻하며, 예를 들어 완벽하게 밀폐된 오븐의 벽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오븐을 가열했을 때 새어나오는 빛이 있다. 이러한 빛이 가지는 성질은 통계역학을 통해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렇게 이론적으로 설명해 보니 전혀 터무니없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적외선으로 대표되는 저진동수 대역의 복사에 대해서는 이론과 실험 결과가 들어맞았지만, 자외선으로 대표되는 고진동수 대역에서는 실제 실험 결과 그 세기가 0으로 줄어드는 데 비해 이론에 의하면 세기가 무한대로 발산하게 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자외선 파탄이라고 부른다. 만약 고전 물리학이 옳다면, 우리는 차갑게 식은 오븐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무한대의 감마선에 피폭되어 죽어버릴 것이다.

막스 플랑크가 흑체 복사에 대한 연구를 할 무렵에는 아직 자외선 파탄이라는 명칭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고전적 이론을 통한 설명이 실제 관측 결과와 심각한 불일치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플랑크의 연구는 관측 결과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모델을 찾는 것을 목표로 했고, 설명하기 복잡하며 어려운 전제조건과 사고 과정을 거친 끝에 1900년 플랑크는 관측 결과와 매우 정확히 들어맞는 이론적 모델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찜찜한 부분이 남아 있었는데, 바로 모델을 세우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아무렇게나 제한 없이 분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단위 에너지들인 콴타(quanta)들로만 분배될 수 있다고 가정했다는 것이다.[1] 이는 깁스가 처음 제시한 기본 가정인 에너지 등분배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2] 그러나, 플랑크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도 한동안 과학계에서 이게 얼마나 혁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을지는커녕 과연 무슨 의미인가조차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플랑크 자신도 이러한 콴타의 개념이 순전히 수학적인 의미만 있으며 실제 물리적인 의미는 없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개념인가에 대한 해답은 흑체 복사와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편집 | 원본 편집]

광전 효과의 개념도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이 한 쪽에서 흑체 복사에 대해 연구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전혀 새로운 신기한 현상을 연구하고 있었다. 몇몇 과학자들은 금속의 표면에 자외선을 쬐었을 때 전하를 잃는 현상을 발견했고, 이를 광전 효과라고 불렀다. 이 현상은 비교적 쉽게 설명할 수 있어 보였다. 빛은 곧 전자기파이므로, 금속 내의 전하가 빛의 전자기장에게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금속 표면을 탈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빛의 세기는 곧 전자기파의 세기이므로, 더 강한 빛을 쪼이면 전자는 더 강한 세기의 전자기장 에너지를 흡수할 것이고 더 큰 에너지를 가진 채로 탈출할 것이다. 만약 빛의 세기가 약하더라도 충분히 오랫동안 쪼이면 전자는 오랜 시간동안 충분한 에너지를 흡수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전자가 충분한 에너지를 흡수해야만 탈출할 수 있으므로, 빛을 쪼이기 시작한 뒤 약간 시간이 지나야 전자들이 탈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을 더 자세히 연구하자 곧 이상한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자가 가진 에너지는 빛의 세기와는 관련 없었고 빛의 진동수와만 관련이 있었다. 아무리 강한 빛을 쪼여도 특정 진동수보다 낮은 진동수의 빛이라면 전자가 전혀 탈출하지 않았다. 전자는 에너지를 흡수할 시간이 없이 빛을 쬐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탈출하였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세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하나는 브라운 운동을 통해 원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문이었다. 또 하나는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잘 알려진 논문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에너지 콴타의 개념을 도입해 빛의 특성을 설명하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데 성공하였다. 플랑크는 콴타가 단지 수학적인 개념에 불과할 것이라다고 추측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콴타가 정말 물리적으로 실존하며 광전 효과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빛의 에너지는 실제로 불연속적인 단위 에너지들의 합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 에너지 콴타의 개념은 훗날 광자로 불리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으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보어의 원자 모형[편집 | 원본 편집]

보어의 원자 모형

한편,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원자의 구조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원자의 구조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었다. 원자의 내부에는 전자라는 음의 전하를 띤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에른스트 러더포드는 그 유명한 알파선 산란 실험을 통해 원자의 대부분은 텅 빈 공간에 불과하며, 원자 질량의 대부분은 아주 작은 크기의 원자핵에 뭉쳐져 있고, 그 원자핵은 양의 전하를 띤다는 것을 밝혀냈다. 원자 내의 전자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 즉 빛을 스펙트럼으로 분해했을 때 불연속적인 특정 진동수만 나타나며 다른 진동수의 빛은 전혀 방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원자의 구조에 대한 모형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러더포드는 자신의 발견을 태양계와 비슷하게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공전하는 모형을 제안했지만, 이 모형은 근원적으로 불안정했다. 고전 전자기학에 의하면 공전하는 전자는 에너지를 빛의 형태로 방출하며 빠르게 에너지를 잃어 원자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고, 공전하는 전자가 방출하는 빛 역시 실제 관측 결과와는 다르게 연속적인 진동수를 가져야만 했다.

여기에 대한 보어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자가 안정적으로 돌 수 있는 특정 궤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특정 궤도는 여러 개가 있으며, 각각의 궤도는 불연속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가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전자는 한 안정 궤도에서 다른 안정 궤도로 '점프'할 수 있으며, 이때 두 궤도의 에너지 차이에 해당하는 만큼의 빛을 흡수 또는 방출한다고 가정하였다. 이 빛은 플랑크가 밝힌 콴타로 표현될 수 있다.

고전 양자론의 형성과 위기[편집 | 원본 편집]

이 세 명의 물리학자들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물리학을 고전 양자론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새로운 학문이 단번에 받아들여진 건 아니었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심지어 저 세 명도 서로의 이론을 반박하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그 중 제일 많은 공격을 받았던 것은 단연 가장 혁명적이었던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이었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플랑크는 자신의 이론조차도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믿었으며,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한때 자신의 주장을 반쯤 철회하기까지 했다. 닐스 보어는 자신의 원자 모형을 구상하면서 광양자 가설은 제외했고, 나중에는 새로운 복사 이론을 주창하며 광양자 가설을 파기시키려는 시도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결국 모든 반박들을 이겨내며 살아남았다. 광양자설은 미국의 컴프턴과 사이먼이 수행한 컴프턴 효과 실험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보어의 원자 모형은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회의적이었던 독일의 좀머펠트에 의해 수소 원자의 스펙트럼을 완벽하게 설명하는데 성공하면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렇게 당시의 양자론은 차츰 하나의 정립된 이론으로서 발전해 갔으며, 계속해서 그 적용 범위를 넓혀갔다. 이를 이끈 선봉은 단연 보어의 원자 모형이었으며, 가히 고전 양자론의 최전성기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고전 양자론의 한계 역시 곧 드러났다. 고전 양자론은 매우 현상학적인 이론이었으며, 어째서 그런 불연속적인 양자화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담론은 거의 없었다. 비록 몇몇 혁명적인 개념들이 도입되기는 했지만, 보어의 대응 원리에서 볼 수 있듯이 고전 양자론은 아직 고전 물리학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접근 방식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이었던 문제는, 보어의 원자 모형이 수소 바로 다음 원자인 헬륨의 스펙트럼조차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전 양자론은 위기를 겪게 되었고, 새로운 혁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새로운 혁명은 정말로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불과 수 년 사이에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수많은 이론들을 제안하였으며, 각 이론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며 통합되고, 그에 대한 해석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과도기[편집 | 원본 편집]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가설[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을 받아들여 1924년 훨씬 더 혁명적인 아이디어인 물질파 가설을 발표하였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에 의하면 빛은 입자일 개연성이 높지만, 이미 영의 이중슬릿 실험에서 밝혀졌듯이 빛은 파동의 성질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의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빛의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띤다면, 다른 입자들 역시 파동의 성질을 띠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전자와 같은 다른 입자들도 파동의 성질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 끝에 그는 물질파라 불리는 파동을 예견하였다. 또한 드 브로이는 이 가설을 응용해 보어의 원자 모형에서 나타나는 안정 궤도의 조건을 재해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전자는 그 물질파가 정상파를 이룰 때 안정되기 때문에, 전자 궤도의 둘레가 물질파 파장의 정수배가 되는 궤도가 안정된 궤도라고 분석하였다.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가설은 에르반 슈뢰딩거에게 큰 영향을 끼쳐 양자역학의 탄생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드 브로이는 물질파 가설을 제안하면서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띠게 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지는 않았고, 1927년에야 이에 대한 설명을 제시했지만 곧 주류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였다. 다만 물질파 가설은 아직 양자역학의 비주류 이론 중 하나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비주류라기엔 고딩 교육과정에선 이것 나오는데

파울리의 배타 원리[편집 | 원본 편집]

한편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고전 양자론 자체와 씨름하고 있었다. 당시 고전 양자론은 헬륨의 방출 스펙트럼 문제 말고도 다른 문제에 맞닥뜨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자기장 내에서 수소원자의 방출 스펙트럼이 이상하게 갈라지는 현상인 이상 제만 효과가 발견된 것이다. 당시의 고전 양자론은 양자수라는 개념을 이용해 원자의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하고 있었다. 당시 존재하던 양자수는 총 3개가 있었으며, 각각은 원자 내의 전자 상태가 가지는 물리량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한 종류의 양자수는 전자가 도는 궤도의 각운동량 크기를 뜻했다. 하지만 이 3개의 양자수로는 도저히 방출 스펙트럼을 설명할 수가 없었으며, 당시 물리학자들은 어떻게든 이론적 계산값이 실험 결과와 맞도록 특수한 규칙들을 계속해서 추가시키던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원자에 대해서는 양자수가 정수들로 표현되었지만, 어떤 원자에 대해서는 정수+1/2로 표현되는 식이었다. 게다가 기존의 보어 및 파울리의 정상파 개념으로는 정수+1/2의 양자수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애당초 왜 전자들이 전부 다 하나의 같은 양자수를 가지지 않고 서로 다른 양자수들을 가지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난잡한 상황에 질린 파울리는 잠시 관심을 끊고 다른 분야를 연구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다시 돌아와서 중요한 연구 결과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4년에 파울리가 제안한 것은 두 가지로, 그 첫 번째는 네 번째 양자수의 도입이었다. 이 양자수를 도입함으로써 파울리는 이상 제만 효과의 상당 부분[3]을 설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두 번째 제안은 바로 파울리의 배타 원리로, '서로 다른 두 전자는 동일한 양자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원리를 창안하였다. 양자상태를 나타내는 값이 바로 양자수이므로, 배타 원리는 어째서 전자들이 서로 다른 양자수들을 가지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배타 원리의 진정한 의미는 고전 양자론에 있던 고전역학적 설명을 제거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원자 모형에서 각각의 양자수들은 실제 고전역학적 의미를 가졌던 데에 비해, 파울리가 제창한 네 개의 양자수 및 배타 원리는 고전역학적 설명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양자론적인 개념으로서 도입된 것이었다. 파울리에게 있어서 원자 내부에 전자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는 의미 없는 질문이었으며, 중요한 것은 실제로 관측되는 결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안한 양자수들의 의미나 배타 원리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궤도'나 '각운동량'과 같은 고전역학적인 설명을 배제한 채 철저하게 개념적인 혁명을 요구하였다.

양자역학[편집 | 원본 편집]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편집 | 원본 편집]

비록 이상 제만 효과는 파울리에 의해 어느 정도 설명되었지만, 아직 고전 양자론은 헬륨 원자의 방출 스펙트럼과 같은 수많은 난점이 남아 있었다. 이에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더 이상 기존의 방법으로는 원자론을 설명하기에 한계가 왔으며,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방법을 통해 접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다만 헬륨 원자는 새로운 이론을 시작하기에 지나치게 복잡했기 때문에, 하이젠베르크는 수소 원자보다도 더 간단한 이상적인 이론적 모형에서 시작해 자신의 이론 체계를 쌓아올렸다. 또한 그는 보어와 파울리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불연속적인 에너지 개념과 추상적인 이론적 모형을 통해 관찰 가능한 양만을 고려하는 방식을 택했다. 북해의 헬골란트 섬에서 2주간의 휴가를 보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이론을 완성시켰고, 돌아온 뒤 자신의 논문을 친구인 파울리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4]

아직은 모든 게 모호하고 불확실하지만, 전자는 더 이상 궤도를 돌지 않는 것 같네.

실제로 그의 이론에서는 전자의 궤도는커녕 그 어떠한 시각적 모형도 없었으며, 그의 이론은 오직 실제 관측 가능한 개념만을 사용해 수학적으로만 구축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뒤이어 자신의 스승이었던 물리학자 막스 보른에게 보냈고,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수학이 바로 행렬의 곱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게 해서 1925년 하이젠베르크와 보른, 그리고 보른의 제자인 요르단의 협업으로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인 행렬역학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물리학계의 반응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한 가지 이유는 행렬역학이 수학적으로 매우 생소하고 어려웠다는 것이었고, 다른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가 그의 이론에서 반영한 보어와 파울리의 관점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불과 1년 뒤에 훨씬 친숙하고 납득하기 쉬운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다른 이론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슈뢰딩거의 파동역학[편집 | 원본 편집]

하이젠베르크가 전혀 새로운 물리학을 창조해내던 동안,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던 물리학자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에르빈 슈뢰딩거 역시 새로운 이론의 필요성을 느끼고 연구했지만,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와 파울리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과는 달리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과 드 브로이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는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에서 큰 영감을 받았고, 결국 1926년 새로운 양자역학 체계인 파동역학을 만들어내었다. 뒤이어 슈뢰딩거는 자신의 파동역학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물리적으로 동일함을 증명하였다.

파동역학은 당시에 친숙했던 파동 방정식을 통해 원자 내의 전자를 설명하였고, 그 결과는 실험과 기막힐 정도로 잘 일치하였으며 현재까지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파 가설에서도 등장한 문제가 파동역학에서도 등장했는데, 바로 과연 그 파동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며 입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냐는 것이었다. 파동역학은 파동함수의 계산을 통해 언제나 올바른 결과를 내놓았지만 정작 자신이 다루는 그 파동함수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에 대해 슈뢰딩거는 파동함수가 뜻하는 것이 전자의 밀도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설명은 불완전했다.

파동함수의 본질에 대해 보다 정확한 설명을 한 사람은 막스 보른과 볼프강 파울리였다. 그들은 파동함수가 의미하는 것이 '확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르면 파동함수는 전자가 존재할 수 있는 위치의 분포를 확률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파동함수의 세기가 클수록 그 지점에서 전자가 발견될 확률이 높은 것을 의미했다. 슈뢰딩거 본인은 이런 확률적, 통계적인 개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설명은 물리학계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불확정성 원리[편집 | 원본 편집]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행렬역학을 계속해서 연구하였다. 행렬역학의 관점에서 원자 내의 전자의 정확한 위치나 속도는 알 수 없고, 사실 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애초에 실제적인 물리량으로서의 의미가 없는 개념일 뿐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키던 하이젠베르크는 이 문제에 행렬의 특성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렬은 곱셈의 교환법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어 위치 X와 운동량 P의 곱인 XP와 PX는 다른 값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성질을 이용해 하이젠베르크는 간단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확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1927년 유도해냈다. 이것이 바로 불확정성 원리이다.

[math]\displaystyle{ \sigma_{x}\sigma_{p} \geq \frac{\hbar}{2} ~~ }[/math]
가장 널리 알려진 형태의 수식

이 성질을 나타내는 가장 간단한 사고실험으로 감마선 현미경이 있다. 현미경으로 무언가를 관찰할 때 그 분해능이 사용하는 빛의 파장과 비례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즉 짧은 파장의 빛을 사용하면 할수록, 보다 선명하게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제 전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상상해보자. 여기에 일반적인 파장의 빛을 쏘면 전자는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분해능이 낮아 전자의 위치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장이 매우 짧은 감마선을 쓰면 전자의 위치를 또렷하게 관찰할 수 있고, 파장이 짧으면 짧을수록 관찰되는 위치의 정확도 역시 높아진다. 하지만, 빛의 파장이 짧다는 것은 곳 광자가 가지는 운동량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고, 전자에 비춰지는 빛은 그 운동량을 전자에 전달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감마선으로 전자를 관찰하면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있으나 운동량은 광자와의 충돌으로 교란되기 때문에 그 값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반대로 매우 긴 파장의 빛을 쓰면 전자에 전달되는 운동량은 거의 없지만, 분해능이 매우 낮아지기 때문에 위치 값을 알기가 어려워진다. 즉,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둘 다 동시에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한계가 단지 실험상의 한계가 아닌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한계라는 것이다. 보어와 파울리, 하이젠베르크는 계속해서 실제로 관찰되는 물리량만이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전자의 위치나 운동량을 관찰하는 유일한 방법은 광자를 쏘는 등의 방법으로 그 전자와 상호작용을 하는 것인데, 이러한 상호작용은 필연적으로 불확정성을 불러온다. 다시 말해, 관찰자는 필연적으로 불확정성이 존재하는 물리량만을 관측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물리적으로 불확정성이 존재하는 물리량만이 실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애당초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가지는 전자'라는 개념은 물리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가상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5차 솔베이 회의[편집 | 원본 편집]

지상 최강의 정모.jpg

1927년 10월 브뤼셀에서 열린 5차 솔베이 회의는 양자역학의 역사, 아니 물리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당장 사진에 나온 참석자들 중 절반이 넘게 이미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이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역사적인 회의였을지 상상할 수 있다. 그렇게 대단했던 이 회의에서 가장 유명했던 것은 보어와 아인슈타인 간의 논쟁으로, 불확정성 원리로 대표되는 보어 측의 주장을 아인슈타인 측이 공격하고, 그러면 보어 측이 이를 반박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앞서 말했지만, 이때까지 양자역학을 다루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보어-파울리-하이젠베르크로 이어지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아인슈타인-드 브로이-슈뢰딩거로 이어지는 관점이었다. 전자의 관점은 오직 관측 가능한 물리량만이 의미를 가지고, 양자 세계는 불연속적이며 '도약'이 존재하고, 비결정론적이며 확률적인 관점에서만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후자의 관점은 '파동'을 통해 직접 관측할 수는 없는 원자 내부 구조와 같은 것들을 표현하려 하고, 불연속적인 개념이나 확률적인 해석을 거부하며 보다 고전적, 결정론적인 해석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양측의 대립은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유명한 대화를 통해 볼 수 있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 신에게 명령하지 말게나.
— 닐스 보어

이 회의에서 막스 보른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역학의 '혁명'이 이제 종료되었으며, 더 이상 진행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아직 양자역학의 물리적 실체가 덜 밝혀졌다는 입장을 가졌던 아인슈타인에게 매우 실망스러운 결론이었으며, 이에 아인슈타인은 아직 혁명이 진행될 여지가 남아 있음을 보이기 위해 보어-파울리-하이젠베르크가 세운 양자역학의 허점을 찾아내려고 시도했다. 그중에서 특히 5차 솔베의 회의 중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로, 아인슈타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관점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있음을 보이는 사고 실험을 고안함으로써 보어를 공격했고, 보어는 그 사고 실험의 맹점을 찾아내 어째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는지 설명함으로써 불확정성 원리를 방어하였다. 최종적으로,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불확정성 원리가 건재함을, 더 넓게는 그들의 관점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였다.

코펜하겐 해석[편집 | 원본 편집]

1920년대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며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호와 공식들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립했다. 그 결과에 수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관점들이 덧붙어 정립된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을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부른다. 이는 이론이나 법칙이 아니며, 단지 이미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정립된 이론을 일상적인 언어로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코펜하겐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코펜하겐 해석을 대신할만한 다른 해석들을 제안했지만, 아직까지는 코펜하겐 해석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해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코펜하겐 해석은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정립되었기 때문에 명확한 서술이 존재하지는 않으며, 때로는 학자들끼리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내용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코펜하겐 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5]

  1. 양자계의 상태는 확률밀도를 의미하는 파동함수 [math]\displaystyle{ \Psi }[/math]로 나타내어지며, 이는 양자계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이다.
  2. 양자계를 관측하면 그 즉시 파동함수는 붕괴하며, 단 하나의 결과만을 남긴다.
  3.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묶여 있는 두 물리량은 결코 동시에 어느 이상의 정확도로 측정할 수 없다.

첫 번째 해석을 다시 말하면, 파동함수를 통해 알아낼 수 없는 정보는 단지 알 수 없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원자 내에서 전자가 정확히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 없다. 파동함수는 원자 내에서 전자가 존재할 확률만을 알려주며, 정확한 위치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자 내에서 전자의 정확한 위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확률만이 실재한다.

하지만 분명 파동함수는 모호한 확률만을 알려줄 뿐인데, 때로는 실제로 전자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물론 위치를 여러 번 측정하면 통계적으로 파동함수가 예측하는 확률적 분포가 드러나므로 양자역학 그 자체는 건재하지만, 이 현상은 앞서 서술한 첫 번째 해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따라서 등장한 해석이 바로 '파동함수의 붕괴'이다. 우리가 양자계를 관측하려면 실험 기기와 양자계가 서로 상호 작용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파동함수는 매우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특정 지점으로 파동함수가 집중되며, 나머지 모든 곳에서는 파동함수가 0으로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파동함수의 붕괴라고 부르며, 이 덕분에 우리는 전자의 위치가 특정 지점에 있다는 것을 관측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로 인해 우리는 서로 연관된 두 물리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 물리량을 어느 정확도로 관측하려 하면, 필연적으로 파동함수가 붕괴되면서 다른 물리량의 정확도가 낮아진다. 예를 들어, 관측되지 않은 전자는 여러 파장을 가진 파동함수의 중첩으로 이뤄져 있으며, 운동량은 파장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전자의 운동량은 불확실하며 확률로만 표현된다. 이때 운동량을 무한히 정확하게 관측하려고 시도하면, 파동함수는 붕괴하고 특정 파장을 가진 파동함수만이 남게 된다. 문제는, 단 하나의 파장만을 가진 파동은 모든 공간에 걸쳐 일정하게 퍼져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전자의 위치는 모든 공간에 걸쳐 존재할 수 있게 되고 위치 불확정성은 무한대가 된다. 반대로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관측하려면 여러 파장을 가진 파동이 무한히 중첩되어야 하며, 따라서 전자가 가질 수 있는 운동량의 불확정성은 무한대로 발산하게 된다. 단,이러한 초기 이론과는 달리,최근 일본에서의 실험 결과에 의하면 이는 무한대가 아니며, 1.5배에 미치지 않은 수치로 수렴한다고 한다.

비판[편집 | 원본 편집]

코펜하겐 해석이 비록 널리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물리학자 역시 많았다. 슈뢰딩거는 자신의 파동역학이 확률이라는 모호한 형태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했고, 따라서 그는 이 확률의 개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보여주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을 고안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러 사고실험을 통해 코펜하겐 해석을 반박하려고 시도했으며,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 로젠이 공동으로 제시한 EPR 역설은 아직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코펜하겐 해석은 이 모든 공격을 방어해내는데 성공했고,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비국소성과 같은 이해하기 어렵고 논쟁적인 개념이 도입되기도 했지만, 아무튼 코펜하겐 해석은 모순점 없이 양자역학의 수학적 이론이 가진 의미를 해석해 내었다.

하지만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방법이 코펜하겐 해석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이 코펜하겐 해석을 대체할만한 다른 여러 해석들을 제안했으며, 이 중 몇몇은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가장 유명한 '대안 해석'은 다세계 해석으로, 파동함수의 붕괴를 통해 한 가지 결과만이 확정된다는 코펜하겐 해석의 골치아픈 문제를 피하고, 대신 모든 결과가 각기 다른 세계에서 동시에 실재하게 된다는 해석이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전자를 이곳에서 관측했다면 전자가 저곳에 존재할 확률은 붕괴를 통해 사라졌다고 설명하지만, 다세계 해석에서는 우리 세계에서는 전자가 이곳에 관측되었고 다른 세계에서는 전자가 저곳에서 관측되었을 뿐이며, 확률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세계에서 현실화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숨은 변수 이론은 또 다른 대안 해석으로, 코펜하겐 해석이 확률만을 유일한 물리적 실체로 인정했던 점을 반박한다. 숨은 변수 이론에 따르면 설사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물리량이라고 해도 실제로 존재하며, 양자역학이 '불완전한' 확률만을 알려주는 것과 달리 '완전한' 이론을 통해 실제 '숨은' 변수들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이 이론을 가장 열렬히 주장했던 자는 바로 아인슈타인으로, 그는 확률로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비결정론적인 코펜하겐 해석 대신 결정론적인 숨은 변수 이론을 옹호하였다. 결국 그는 그 '완전한 이론'을 만드는 데 실패한 채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데이비드 보옴과 같은 일부 물리학자들에게 계승되었고 그들은 계속해서 숨은 변수에 대해 서술하는 이론을 탐색하고 있다.

잘못 알려진 사실들[편집 | 원본 편집]

많은 현대물리학이나 양자역학 교재에서, 불확정성에 대하여 잘못 기술하거나 잘못된 오개념(혹은 이미 고사된 방식)을 서술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현미경. 특히나 교양서적이나 시크릿 같은 사이비 단체에서 애용하는 오개념이므로 이것을 두둔하는 사람은 위키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된다!

두번째로 가장 유명한 오개념은 바로 에너지의 불확실성이다. 에너지와 시간의 불확정석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러한 유도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에너지는 불확정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오차는 실험기기로 인한 오차이다. 기계가 점점 더 좋아비싸질수록 이러한 불확정성은 감소하는 현상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또한 이 오개념은 필드에서 활동하지 않는 교수들조차 오해하는 개념인데 심지어 이것을 온갖 유도로 증명해보이지만 모두 잘못된 것이다.그 유명한 바이저조차 이 개념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바이저를 아는 학자들은 "허허 교육만 하시는 양반이라..." 라며 응답을 피한다카더라. 심지어 유도 과정에서 방정식을 t 로 편미분해버리면서 이것이 에너지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기상천외한 방식을 아직 사용되는 교재가 있다. 아주 오래전에 사용하던 방식이라, 필드에서 멀어진 학자들이 교육할 때 주로 범하는 실수.

각주

  1. 이것을 플랑크가 양자론적인 관점에서 일부러 의도하였는지, 아니면 고전적인 관점에서 실수로 (또는 잘 모르고) 가정했는지는 불분명하다.
  2. 그러나 사실 에너지 등분배 법칙은 당시엔 분명하게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플랑크는 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3. 이상 제만 효과를 완벽히 설명 가능하게 된 것은 나중에 상대론적 양자론이 완성된 뒤의 일이다.
  4. The Birth of Quantum Mechanics
  5. Copenhagen Interpretation

참고 문헌[편집 | 원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