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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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라틴어|IMPERIUM ROMANUM}}, {{그리스어|Βασιλεία των Ῥωμαίων}})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던 국가이다.
'''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Ῥωμαίων)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던 국가이다.  


== 역대 황제 ==
== 수도 ==
== 역사 ==
== 역사 ==
=== 고대 로마: B.C. 753 ~ A.D. 476 ===
=== 제정 수립 이전 ===
==== 로마의 건국 ====
==== 왕정 시대 ====
신화는 존재하지만 사료로는 알기 어렵다. 후대 역사가 중 Vergilius(베르길리우스, B.C. 70-19)의 <아이네이스><ref>후대 역사가들이 저술한 고대 로마 연구 저서 중 대표작</ref>에서 로마 건국의 역사가 나온다.
자세한 것은 [[로마 왕국]] 문서 참고
==== 공화정 시대 ====
자세한 것은 [[로마 공화국]] 문서 참고
=====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자리잡은 로마는 시민과 원로원계급의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민중파의 일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갈리아를 복속시키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다.


이를 견제하고자 한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반역자로 규정하였고, 이에 반발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도하하여 [[카이사르의 내전]]을 발발시킨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공화파에 의해 곧 암살당한다.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초대 황제가 되어 실현한 원수정 체제 아래에서 [[팍스 로마나]]를 일구었다.
로마 인근 알바 롱가(Alba Longe) 공주 일리아<ref>‘레아’나 ‘실비아’라고도 부른다.</ref>가 있었다. 작은 아버지 아물리우스가 알바 롱가의 왕이 죽고 난 후 왕위를 찬탈하고 일리아를 무녀로 만들어버린다. 어느 날 일리아는 강가에서 잠자고 있었는데 전쟁의 신 아레스(마르스)일리아의 모습에 반한다. 그리고 일리아와 아레스는 육체적 사랑을 나눈다. 이 둘 사이에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들이 바로 훗날 로마 건국의 주역인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 작은 아버지 아물리우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나중에 크면 자기 왕위를 찬탈할까 걱정이 되어 로마의 테베레 강에 쌍둥이를 실어 보낸다. 암늑대 하나가 강물에 떠내려오는 쌍둥이를 구해내 젖을 먹이고 키운다. 그 후 지나가는 목동이 이 아이들을 발견하고 데려가 키운다.
=== 원수정 시대 ===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은 시점을 [[로마 공화정|공화정]]이 종식되고, 제정이 시작된 시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라틴어]]로 [[군주]]를 뜻하는 렉스(Rex)라는 칭호의 사용을 거부하고, '''제1시민'''을 뜻하는 '''프린켑스(Princeps)'''를 칭했다. 또한 공식적으로 공화정의 폐지를 선언하지 않고, 오히려 공화정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공화정의 시스템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통치했다. 이렇게 공화정도 아니고 제정도 아닌 애매한 체제라서 프린켑스에서 따온 '''프린키파투스(Principarus)'''라고 부르고, 이것의 번역어가 바로 '''원수정'''이다. 이 체제는 팍스 로마나라는 전성기를 이끈 원동력이었으나 군인 황제 시대에 이르러 한계를 드러냈고, 3세기 말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형적인 [[군주제]]라 할 수 있는 전제정을 도입하면서 종식되었다.
성인이 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아물리우스를 살해하고 알바 롱가 인근에 ‘로마’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를 세운다. ‘로마’는 로물루스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 팍스 로마나 ====
 
'''로마의 평화'''라는 뜻을 가진 로마 제국의 전성기로, 로마가 강력한 패권으로 주변국들을 제압하여 장기간 평화가 유지된 시대를 뜻한다. 그래서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 팍스는 강력한 패권 국가의 주도하에 형성된 평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오현제 시대까지 200여년간 유지되었으나, 콤모두스의 폭정으로 인해 제국이 쇠퇴하면서 종식되었다.
왕권을 놓고 대립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결국 이 둘은 로마를 분할 통치하기로 한다.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아우구스투스가 개창한 '''[[로마 제국]] 최초의 왕조'''인데, 역대 황제들에게 적장자가 없어서, 여러 귀족 가문들의 복잡한 혼맥에 의해 제위가 결정된 시대이다. 이 가문들 가운데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로마 왕정|왕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며, 세력도 가장 막강했기에, 시대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부른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을 통치. 동생 레무스가 경계를 넘어오게 되자 형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아벤티누스 언덕까지 통합시킨다. 이후 로물루스는 로마의 초대 왕으로 등극한다. 이 때가 B.C. 753.
===== 네 황제의 해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5대 황제 네로가 민심을 잃고 축출되어 자살한 후, 반란군을 이끈 갈리아 총독 갈바가 로마에 입성하여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갈바는 얼마 안 가서 네로의 친구였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에게 살해되었고, 오토가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오토 역시 비텔리우스라는 군벌에게 살해당하고,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비텔리우스 역시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는데, 비텔리우스를 제거한 베스파시아누스가 플라비우스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내전이 종식되었다. 이러한 개막장 사건들의 연속이 불과 1년 동안 일어났기에, 이를 네 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 왕정 로마: B.C.753 ~ B.C. 509 ====
===== 플라비우스 왕조 =====
{{^|제 1대 왕 로물루스}}
이전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주도한 두 가문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가였던 반면, 플라비우스 가문은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서야 중앙 정계에 진출한 신흥 가문이었다. 이 가문 출신의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의 명을 받고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러 파견되었다가, 중앙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장남 티투스에게 유대인 반란 진압을 맡기고, 본인은 상경하여 비텔리우스를 제거함으로써 황제로 즉위했다.
재위 기간은 B.C. 753 ~ B.C. 715
 
이웃에 있는 사비니 왕국의 여성들을 로마의 축제에 초대했다. 하지만 사비니 여성들이 그 축제에서 로마 남성들에게 강탈당하고 로마 남성들과 결혼을 하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사비니 왕국의 왕이 로마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미 로마인의 아내가 된 사비니 여성들이 전쟁 중단을 요청하여 로마와 사비니 사이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사비니 족의 상당수가 로마로 이주해 오고 로마는 사비니 자유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br>
 
로마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군사 병력도 증대되었다. 로물루스 통치 시기에 ‘백인대’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내는데 이름 그대로 100명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로마 군편제의 최소 단위이다. 로마의 유력 가문 원로들을 모아 [[원로원]]도 창설했는데 이 당시에는 100명으로 구성되었다.
 
{{^|제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
재위 기간은 B.C. 715 ~ B.C. 673
 
누마 폼필리우스는 사비니인인데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았으며 로마로 이주해온 인물도 아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원로원이 누마 폼필리우스를 왕으로 추대했고 쿠리아회<ref>당시 일종의 민회이다. 귀족과 평민으로 구성되어있고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의견 기구.</ref>에선 이를 승인해주었다.
 
1년을 12개월 355일로 하는 달력 태양력이 만들어졌고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에 누마 달력에서 1년을 10일 더 늘리게 되어 현재 세계에서 사용하는 태양력 달력의 기원이 된다.
 
일종의 사제 조직을 만들었다. 사제 조직은 종교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공무원으로 그렇다고 성직자는 아니었다. 사제 조직 최고 수장은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다.
 
{{^|제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재위 기간은 B.C. 673 ~ B.C. 642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라틴계 로마인으로 인근에 있던 알바 롱가를 정복했다. 알바 롱가의 주민들을 로마로 강제 이주시키고 알바 롱가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유력 가문은 로마 귀족이 되었고 원로원 의석도 제공되었다. 이 시기에 알바 롱가 주민의 유입으로 인원이 늘어나 로마의 군사 병력이 또 증대되었다.
 
{{^ 제 4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
재위 기간은 B.C. 642 ~ B.C. 617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사비니계 로마인으로 제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외손자이다. 군사적 요충지인 자니콜로 언덕과 7개의 언덕(팔라티누스, 아벤티누스 등) 사이의 테베레 강에 두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한다. 평화시에는 로마 시 본거지인 7개의 언덕에 거주하다 유사시 자니콜로 언덕으로 대피하기 위해 건설한 다리이다.
 
로마에서 약 20km 떨어진 티레니아 해에 인접한 항구 도시 오스티아를 정복해 로마가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다. 당시엔 소금이 화폐로도 이용되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했다는 건 경제적,군사적 거점을 확보했다는 뜻이 된다.
 
{{^|제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재위 기간은 B.C. 616 ~ B.C. 579
 
제 5대 왕은 에트루리아계 로마인으로 에트루리아인들은 자발적으로 로마에 들어와 살았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알파벳]]을 전파<ref>알파벳은 페니키아에서 최초로 사용되어 이후 그리스, 남부 이탈리아 지역, 에트루리아 순으로 전파되었다.</ref>했고 건축과 토목 기술을 전파해주었다.
 
로마인들은 주로 언덕 쪽에 거주하고 언덕 아래 쪽엔 습기가 많아 사람이 거주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로마인들과 에트루리아인들은 지하 수로를 건설해 지면에 있는 물을 다 빼내 테베레 강으로 흘러보내서 언덕 아래 지역들을 평지로 만들고 돌로 포장해 넓은 광장을 만들어냈다. 광장(포럼)은 이후 정치 경제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규모의 토목 건축 사업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경제를 활성화시켰으며 로마인들의 생활 수준을 높였다. 이 때 원로원 의원이 200명으로 늘어났다. 로마의 인구 수가 많아졌으므로 원로원 의원 수도 늘어나는 게 당연지사. 이후 왕정 말기 공화정 초기엔 원로원 의원 수는 300명이 된다.
 
{{^|제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재위 기간은 B.C. 578 ~ B.C. 535
 
제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사위이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이 인물을 데려다 키웠다. 이 인물은 원로원의 결의만으로 왕이 된 특수 사례로 민회의 승인이 없었다. 세르비우스 성벽을 구축하고 장인의 토목 건축 사업을 이어받아 마르스 광장을 신설한다. 마르스 광장은 군사 집결지이자 민회의 투표 장소가 되었다.
 
이 시기에 군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제 6대 왕 이전에는 백인대(100명)가 군 편제의 최소 단위였다. 로마는 왕정 초기 때 3부족이 있었고 한 부족당 10개의 쿠리아를 가지고 있었다. '쿠리아'란 로마의 행정구역 단위이다. 각 쿠리아마다 백인대를 하나씩 만들었었다. 보병 기준으로 보면 1개의 쿠리아당 백인대 하나이므로 한 부족(=10개 쿠리아) 당 백인대 10개이므로 병력 1000명, 로마엔 세 부족이 있었다고 했으므로 로마의 총 보병 병력은 3000명이었다.
 
기병은 1개의 쿠리아 당 10명씩, 한 부족(=10개 쿠리아)이면 병력 100명, 로마의 총 기병 병력은 300명이었다. 보병과 기병을 합한 로마의 총 병력은 3300명. 제 6대 왕 이전까지 로마의 병력 구조는 이러하였다.
 
군제 개편을 위해 모든 로마 시민권자들을 재산 상태에 따라 6계급으로 구분한다. 제1계급이 재산이 가장 많은 자들이고 최하위 계급인 제6계급이 재산이 없는 자들이다. 제6계급에서 제1계급으로 갈수록 시민이 부유해진다. 다음 표는 보병 기준이다.
{| class="wikitable"
| 계급
| 선출해야 할 백인대 수
| 병력
|-
| 제 1계급
| 80
| 8000명
|-
| 제 2계급
| 20
| 2000명
|-
| 제 3계급
| 20
| 2000명
|-
| 제 4계급
| 20
| 2000명
|-
| 제 5계급
| 30
| 3000명
|-
| 제 6계급
| 5
| 500명
|}
 
제1계급에서 제6계급까지의 보병을 합하면 총 175백인대(=17500명)가 된다.<br>
제1계급에서 백인대를 가장 많이 창출하도록 지시한 이유는 지킬 게(재산) 있어야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고 두번째로 제5계급에서 백인대를 많이 창출하도록 지시한 이유는 모든 계급 중에서 제5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제6계급은 흔히 프로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렸으며 그 뜻은 가진 게 자식밖에 없는 자라는 뜻이다.<ref>재산이 거의 없다는 의미이다.</ref> 제6계급은 비전투부대로 갑옷이나 무기를 제작하거나 전투 개시 때 나팔을 부는 역할을 맡았다. 비전투부대인 이유는 제6계급은 지킬 게 없는 데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병은 모든 계급들 중 제1계급만 18백인대를 창출하도록 했고 다른 계급에선 기병을 제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로써 기병까지 합하면 로마의 총 병력은 175백인대(=17500명) + 18백인대(=1800명) = 193백인대(= 19300명)가 되었다. 유심히 보면 로마의 총 193백인대 중에 제1계급만 기병, 보병을 합해 총 98백인대이다. 이는 과반수인데 로마 국정 운영의 주도권이 제1계급에 있었다는 걸 나타내며 재산을 많이 가진 자가 병역의 의무도 가장 많지만 그에 걸맞게 권리도 가장 많은 것이었다.
 
이 시기에 백인회가 창설되면서 쿠리아회의 기존 기능인 전쟁 승인, 왕 선출 등의 권리를 백인회가 이어받았다.  
 
{{^|제 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재위 기간은 B.C. 534 ~ B.C. 509
 
이름에서 ‘수페르부스’는 ‘건방진,거만한’이라는 의미이다. 즉, 후대에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라고 불린 인물이다. 제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손자이자 제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사위이다. 제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딸 툴리아와 혼인했다. 그리고 툴리우스에게 자객을 보낸다. 툴리아는 자객의 공격을 받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아버지를 마차로 짓밟는다. 수페르부스는 무력으로 원로원과 민회를 무시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를 하였다. 유피테르 신전을 건설하는 등의 업적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민중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 이 인물에겐 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셋째 아들 섹스 투스라는 아들은 자신의 친척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사랑했다. 콜라티누스가 전쟁터를 나간 틈을 타서 루크레티아를 겁탈하고 루크레티아는 자살한다.
 
로마인들은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가족을 로마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한다. 툴리아는 도주했고 섹스 투스도 도주하려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혀 최후를 맞이했다.
 
===== 왕정 로마의 정치 구조 =====
{{^|왕}}
<s>당연히</s> 종신직이었으나 <s>의외로</s> 세습직은 아니었다. 민회인 쿠리아회에서 왕을 선출했으며 왕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다. 군사 통수권 소유, 종교 의식 관장, 쿠리아회의 승인을 거쳐 전쟁과 평화 조약 체결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원로원}}
[[원로원]] 참조. 이후 공화정 시기에도 이들의 위상은 여전했다.
 
{{^|쿠리아회}}
민회. 귀족과 평민으로 이루어져있다. 참고로 이들은 모두 시민권 보유자였다. 왕과 국가관리를 선출하며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제출한 정책에 대해서 승인 혹은 거부 권한이 있었다. 전쟁 승인권 권한 보유.
 
제 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때 군대 편제 개혁을 실시해 새로운 백인회가 만들어졌다. 때 쿠리아회가 갖고 있던 기능은 백인회로 넘어갔다. <s>정치 구조에서 공기화되면서</s> 쿠리아회는 기원전 218년에 해체된다. 참고로 쿠리아는 로마의 최소 행정 단위로 로마엔 쿠리아 30개가 있었다.  
 
==== 공화정 로마: B.C. 509 ~ B.C. 31 ====
에트루리아 출신 왕을 축출하게 되자 로마 내에 있던 에트루리아인들도 떠나갔다. 이로써 에트루리아와의 관계 악화, 뛰어난 토목 기술로 로마 경제를 활성화시켰던 주역들이 떠나갔으므로 로마의 인구수는 감소하고 기술과 경제력이 약화된다. 국력이 약화되자 로마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온 라티움 인근 지역도 로마에 등을 돌리고 그렇게 라틴 동맹은 와해되는 듯하다가,,, B.C. 494년 동맹은 다시 재건된다. 
 
B.C. 405년 Veii(베이)<ref>에트루리아 핵심 도시</ref>를 공격하고 B.C. 396년 함락한다.
 
B.C. 390년 ‘켈트족(갈리아족, Gual족)’이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를 거쳐 로마까지도 굴복시켰다. 이는 공화정 로마 최초의 군사적 패배로 기록되었다. 켈트족은 7개월간 로마를 점령하고 살인,약탈,방화를 자행했다. 갈리아족의 남하 목적은 약탈이었던 것. 로마가 협상책으로 금덩어리 300kg을 제공하자 갈리아인들은 철수한다. 갈리아족이 로마에 남긴 피해는 컸고 다시 라틴 동맹 세력들이 로마에 등을 돌린다.
 
이후 로마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재기하게 된다. 로마는 라티움 동맹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B.C. 4C 초 여세를 몰아서 동남쪽 캄파니아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B.C. 326년 라티움 동쪽에 있는 산니움 정복에 나섰다. 산니움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에트루리아와 움브리아가 로마를 공격하면서 전쟁은 3대 1의 양상으로 흘러간다. 로마는 B.C. 290년까지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산니움 세 지역을 모두 정복한다. 이를 산니움 혹은 삼니움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탈리아 북부와 중남부를 수중에 넣게 된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의 중심 도시 타렌툼과의 전쟁을 B.C. 282년 개시한다. 타렌툼은 [[스파르타]]인들이 건설한 식민도시로 타렌툼은 로마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리스 도시 국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피로스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에 진출하고 싶어했으므로 피로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온다. 그는 로마와 싸워 첫 번째 전투에선 승리하나 계속되는 전투에 B.C. 275년 자기 병력이 줄어드니 철수하여 피로스 전쟁은 종결된다.<ref>'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른 승리라는 걸 뜻한다.</ref>
 
B.C. 273년 로마는 타렌툼을 정복한다. 이로써 이탈리아 남부까지 다 손에 넣은 로마. 이후 로마는 지중해로 진출하고 싶어하고 [[시칠리아 섬]]을 놓고 [[카르타고]]와 격돌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다.


로마는 무조건 피정복 지역민들을 억압하기보다는 피정복 지역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 동화시키는 정책 방향으로 펼쳤다. 로마 주변의 정복 지역인 라티움 주민들에게는 참정권이 없는 시민권(civitas sime suffragio 시비타스 시이 서프라지오)을 부여했으며 정복한 이탈리아 남부 시민들에게는 아예 시민권 자체를 주지 않았었다. 나중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나머지 이탈리아 반도 주민들에게도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자고 법안을 내나 부결되었다.  
황제로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의 실정으로 야기된 중앙 징계의 혼란을 바로잡고 콜로세움 건설 등의 업적을 쌓았다. 한편 티투스는 마사다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반란 진압을 완수한 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축출했다.


[[포에니 전쟁]]을 치른 후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떠오른다. 기원전 141년 지중해 지역은 거의 로마의 영역에 복속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두운 사회적 면모도 드러난다. 이에 대해선 [[그라쿠스 형제]] 참조.
이후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자 제위를 계승했으나,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과 2차 로마 대화재라는 대재앙이 연달아 터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과로사]](...)하고 말았다.


로마의 집정관이 로마시를 집적 공격한 사례에 대해선 [[루키우스 술라]]의 행적 참조.
티투스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기에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즉위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과 잦은 대립을 하다가 암살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다.


===== 귀족과 평민의 대립 =====  
도미티아누스의 암살로 인해 플라비우스 왕조는 대가 끊겼으나,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한 시기였기에 플라비우스라는 이름 자체는 상당히 인기 있는 이름으로 남았다. 그래서 [[중세 로마]] 초기까지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공화정 로마의 초기 정치 구조는 귀족에 의한 권력 독점이었고 귀족과 평민이 섞여 있는 백인회도 평민과 귀족이 충돌 시 귀족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한 공화정 역사가 계속 진행되고 전쟁을 치르면서 조국을 위해 싸운 평민들에게는 빚만 돌아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과 평민의 대립 구도가 이어졌다. 이후 평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귀족과 평민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졌는데 아래는 평민들이 이루어낸 법이다.  
===== 오현제 시대 =====
오현제는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다섯명의 현명한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 그들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로 꼽히는 시대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 쇠퇴의 씨앗이 뿌려진 시대라는 평가도 있어서, 양면성을 가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제외한 황제들은 친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여서 제위를 물려주는 '''양자 계승'''이라는 독특한 제위 계승을 택해서, 이 시대를 '''양자 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오현제 시대와 콤모두스의 치세를 묶어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오현제 시대의 막을 연 네르바 가문과 마지막을 장식한 안토니누스 가문의 이름을 딴 것이다.
==== 콤모두스의 폭정과 다섯 황제의 해 ====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현제 가운데 유일하게 친아들을 얻어서 제위를 세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친아들로서 제위를 계승한 콤모두스는 폭정과 기행으로 민심을 잃고 암살당하고 말았다.


기원전 449년 12표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은 로마 최초의 성문법이다. 여태까지 로마 법률은 관습법에 기초한 불문법으로 공화정 초기에 이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자는 귀족이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객관화된 법이 됨에 따라 법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 평민들의 불이익을 제거했다.
콤모두스 암살 이후 페르티낙스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그는 봉급을 짜게 준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근위대에게 살해당했고, 근위대는 봉급을 가장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는 자를 모시겠다며,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경매의 매물로 올리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 카눌레이우스 법 - B.C. 445년 제정. 카눌레이우스는 호민관이다. 카눌레이우스가 발의한 법으로 귀족과 평민 간의 결혼을 인정한 법이다. 현실엔 오랫동안 적용하지 못한 법이었으나 법적으로 신분 이동 가능성은 있었다.
여러 부호들이 참가한 경매에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낙찰받는데 성공하여 황제로 즉위했는데, 돈으로 황제 자리를 산 것이었기에 그의 제위는 극도로 취약했다.


*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 - B.C. 367년 제정.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 둘 다 호민관으로 이 둘이 발의한 법이다. 집정관(consul) 두 명 중 한 사람은 평민으로 선출한다는 법. B.C. 366년 공화정 역사 최초로 평민 출신 집정관이 등장한다. 그 집정관은 바로 이 법안을 발의한 섹스티우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알비누스, 니게르 등 3명의 지방 총독이 페르티낙스의 복수를 외치며 제각기 황제를 칭하고 궐기했는데, 페르티낙스 살해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즉위, 3명의 자칭 황제 등장이 모두 같은 해에 일어났기에 이를 '''다섯 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 호르텐시우스 법 - B.C. 287년 제정. 호르텐시우스는 독재관 평민 출신으로 이 인물이 이 법을 제정했다. 발의한 게 아니라 제정했다. 평민회에서 결의한 건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에게도 적용한다는 법이다.
그리고 다섯 황제의 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알비누스, 니게르 등을 모두 제압하고 세베루스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종식되었다.
==== 세베루스 왕조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오현제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장기간 재위하며 제국의 중흥을 이끌었고, 그의 사후에는 유언에 따라 장남 카라칼라와 차남 게타가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 공화정 로마의 정치 구조 =====
그러나 카라칼라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게타와 그의 지지자들을 숙청하면서 다시 쇠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라칼라는 그의 본명을 딴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하여 모든 로마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카라칼라 욕장 등의 공공 시설을 건설했으며, 나름대로 군사적 능력도 있어서 군인들의 지지도 받은 황제였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권력 독점을 위해 친동생을 숙청하는 바람에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황제가 원로원과 자주 대립하여 국정이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을 야기했다.
====== 행정부 ======
{{넘겨주기 있음|감찰관|안찰관|호민관|받침=y}}


카라칼라는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가 북아프리카 출신 군인 마크리누스에 의해 암살되었고, 마크리누스가 원정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황제를 칭하자, 카라칼라와 사이가 안 좋던 원로원은 이를 인준하였다.


행정관들은 '''전원 무보수로 일했다. 월급이란 없었다.'''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s>위키 운영자 오프라인 국가 버전</s>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의 동생 율리아 마이사가 세베루스 왕조를 지지하는 군인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마크리누스는 얼마 안 가서 축출되었고, 그녀의 손자인 엘라가발루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집정관(consul)}}
엘라가발루스는 여장하고 동성애를 즐기는 등의 기행을 일삼고, 동방 속주 출신이라서 시리아의 바알 신앙을 맹목적으로 신봉하였으며, 놀고 먹는데만 열중했으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실권자였기에 제국은 나름대로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율리아 마이사 사후, 자신이 실권을 갖고 통치해야 할 시기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비정상적인 행보를 계속하여 파행을 불러왔다.
*설립 연도: 기원전 509년
*임기: 1년
*연령: 40세 이상부터 가능
*선출: 백인회(민회)에서 집정관 선출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시작될 때부터 생긴 관직으로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직'''이다. 집정관은 2명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독재 방지를 위해서이다. 집정관은 집정관끼리 서로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며 집정관 두 사람 뜻이 일치해야 행정 효력 발휘가 가능하다. 행정부 수반이자 백인회(민회) 소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군 통수권자이다. 전쟁터에 직접 출정하는데 보통 전쟁이 일어나면 1명이 군 통수권자로써 출정하고 다른 1명이 로마 내정을 담당한다. 비상 상황이 되면 로마 집정관 2명 모두 전쟁터에 출정하기도 한다. 로마를 멸망 위기까지 내몰았었던 [[제2차 포에니 전쟁]]인 한니발 전쟁에서, 로마 집정관 두 명 모두 출정해 두 명 다 한니발 부대의 손에 목숨을 잃은 적이 있다.  
또한 그런 주제에 권력욕도 있어서 외할머니에 의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사촌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숙청하려 했는데, 이를 눈치 챈 알렉산데르의 어머니 율리아 마이아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역관광당해서 살해되었다.


{{^|전직 집정관(proconsul)}}
이후 황제로 즉위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공언했으며, 엘라가발루스와는 달리 능력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마마보이(...)라서 자신을 옹립한 어머니 율리아 마이아가 국정농단을 일삼는 것을 묵인했다. 결국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트라키아 출신의 군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어 살해당했고,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했다.
집정관이 전쟁하러 먼 거리로 출정나가는 경우, 전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전쟁터에 나간 집정관의 임기가 끝났다고 도중에 로마까지 돌아와 집정관을 교체할 수 없는 노릇. 전쟁터에 나간 집정관의 임기가 끝난 때에는 로마에선 따로 집정관을 새로 선출하고 전쟁터의 집정관은 전직 집정관이 되어 계속 군대를 통솔한다. 속주 총독 역할을 맡기도 했다.
==== 군인 황제 시대(3세기의 위기) ====
 
원수정 체제에 모순은 정세의 불안정을 낳았고, 3세기에 접어들어 세베루스 왕조의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당한 뒤 군인이 추대하는 군인 황제들이 등장하여 정세의 불안정은 더 심해진다. 그 시기에 게르만족,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침략이 심해지고 국방 경비가 약화되면서 경제도 흔들리는 등 제국은 [[3세기의 위기]]를 겪는다.
{{^|법무관}}
*설립 연도: 기원전 366년
*임기: 1년
*연령: 40세 이상부터 가능
*선출: 백인회(민회)에서 법무관 선출
 
초기에는 1명이었지만 로마의 영토가 확대되어 인구가 늘어나자 인원 확충이 불가피해져 이 직책이 16명까지 증대한다. 집정관의 부재 시, 집정관의 역할을 대신 했으며 때로는 군 지휘관으로 출전하기도 했다.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회계 감사관}}
*임기: 1년
*연령: 30세 이상부터 가능
*선출: 초기 - 집정관이 회계 감사관 임명 ⇨ 기원전 421년 이후 - 백인회에서 회계 감사관 선출
 
초기엔 이 직책이 2명이었지만 공화정 말기에는 40명으로 증대했다. 국가의 재정 집행에 대해 감사하는 역할.
 
{{^|감찰관}}
*설립 연도: 기원전 443년
*임기: 1년 반 이상<ref>호구 조사하는데 1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ref>
*연령: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선출
**초기 - 5년마다 백인회에서 감찰관 두 명 선출.<ref>5년마다 선출한 이유는 호구 조사를 5년에 한 번씩 시행했기 때문이다.</ref>
**후기 - 모른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 호구 조사를 통해 재정 상태 감찰하고 신분을 그에 걸맞게 분류.
# 재정 상태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은 시민들을 고발하고 시민권을 박탈했다. 시민권 박탈 결정권 보유 직책이다.
# 원로원 의원 결정권: 종신직인 원로원. 원로원 의원이 죽으면 공석에 보통 로마의 전직 행정부원들이 들어가는데 그 때에 누가 로마 원로원으로 들어가게 될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
# 풍기 문란 감찰 역할.
# 국가 재정 전반 관할.
 
{{^|안찰관: 귀족 2명, 평민 2명으로 구성된 직책}}
*설립 연도: 불분명
*임기: 1년
*연령: 30세 이상부터 가능
*선출: 백인회에서 안찰관 선출
 
# 축제와 경기 개최 담당
# 치안 담당
# 도로 보수
# 교통 정리
# 상하수도 관리 담당
# 위법 행위에 대한 벌금 부과
# 식량 공급 관리
 
{{^|독재관(dictator<ref>라틴어로 '디타토르'라고 읽는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독재자(dictator)라는 말의 어원이 로마의 관직인 독재관에서 유래했다.</ref>)}}
*설립 연도: 기원전 501년
*임기: 6개월
*연령: 상관 없다. 대체로 경력이 있거나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는 인물이 독재관으로 추대되었다.
*선출: 집정관이 독재관 임명. 하지만 임명 후엔 '''집정관도 독재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임시직으로 특별한 경우에 만들어지는 직책이며 '''비상 시엔 집정관을 제치고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국가 비상 사태시 국가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권력을 독재관 한 명에게 몰아준다.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함이다. <s>[[나무위키 운영진 IRC 친목질 사태]]에서 admin001 생각하면 된다.</s>  임기가 끝나거나 위기가 종식되면 직책이 해제된다. 2차 포에니 전쟁 때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독재관을 선출한 적이 있다.
 
{{^|호민관}}
*설립 연도: 기원전 494년
*임기: 1년
*선출: 평민회에서 호민관 선출
 
초기엔 2명이었으나 이후 10명으로 증대한다. 평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직책. 평민에게만 호민관 자격이 주어지며<ref>그러나 이게 항상 지켜지는 건 아니었다.</ref> 집정관 결정에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 그러나 전시 상태에선 집정관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면책 특권이 있다.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신체불가침 특권이 있다. 호민관의 몸에 상해를 가하면 형벌에 처한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 때 이 특권은 지켜지지 않는다. 호민관이 맞아죽는 일이 생기는데... 그 맞아죽는 호민관이 공화정 말기 로마 개혁을 주도했던 그라쿠스 형제이다.
 
====== 원로원 ======
{{참조|원로원}}
 
====== 민회 ======
* 쿠리아회
* 백인회
독재관과 호민관을 제외한 모든 행정관을 선출. 평민회가 창립되기 이전엔 행정부에서 상정한 법률을 심의해서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 평민회
기원전 471년에 창설. 평민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호민관 선출을 담당했다. 행정부에서 상정한 법률을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B.C. 287년부터 평민회에서 이뤄진 결정은 귀족에도 그대로 적용했다(호르텐시우스 법).
 
====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자리잡은 로마는 시민과 원로원계급의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되고 민중파의 일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승리하여 갈리아를 복속시켜 시민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이를 견제하고자 한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반역자로 규정하였고, 이에 반발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도하하여 [[카이사르의 내전]]을 발발시킨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공화파에 의해 곧 암살당한다.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가 되어 실현한 원수정 체제 아래에서 [[팍스 로마나]]를 일구었다.
 
==== 군인 황제 시대 ====
그러나 원수정 체제에 모순은 정세의 불안정을 낳았고, 3세기에 접어들어 세베루스 왕조의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당한 뒤 군인이 추대하는 군인 황제들이 등장하여 정세의 불안정은 더 심해진다. 그 시기에 게르만족,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침략이 심해지고 국방 경비가 약화되면서 경제도 흔들리는 등 제국은 [[3세기의 위기]]를 겪는다.  


=== 전제정 시대 ===
==== 제국의 분열, 서로마의 멸망 ====
==== 제국의 분열, 서로마의 멸망 ====
후에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정 개편을 통하여 제국의 생명을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원수정 체제에 내제한 모순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후 다시 내전을 벌어지게 하였으며, 이 내전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한다.  
후에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정 개편을 통하여 제국의 생명을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원수정 체제에 내제한 모순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후 다시 내전을 벌어지게 하였으며, 이 내전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룩했던 행정 개편을 더 확고히 하였고, 군제를 개혁하였으며,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등 사회 체계도 개조하였다. 이 황제들의 개혁을 통해 나라의 정세가 3세기에 비해 안정되었으나, 제국은 하나의 황제가 다스리기에는 국경선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었고, 이에 정제, 부제가 동방, 서방을 통치하는 방식으로 안보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를 이어받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치세가 끝나고 그의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가 각각 제국 서방과 동방을 맡게 되면서 제국은 두 개로 분리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룩했던 행정 개편을 더 확고히 하였고, 군제를 개혁하였으며,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등 사회 체계도 개조하였다. 이 황제들의 개혁을 통해 나라의 정세가 3세기에 비해 안정되었으나, 제국은 하나의 황제가 다스리기에는 국경선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었고, 이에 정제, 부제가 동방, 서방을 통치하는 방식으로 안보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를 이어받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치세가 끝나고 그의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가 각각 제국 서방과 동방을 맡게 되면서 제국은 두 개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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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제국 서부와 동부는 하나의 로마 제국이었기 때문에 동부 황제와 서부 황제 중 선임 황제인 쪽이 상대방에게 간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절멸하고 각각 다른 혈통의 황제가 즉위하면서 따로 노는 일이 잦아졌고, 제국 동부가 제국 서부를 버린 꼴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이 심했고 또한 경제력 역시 로마에 비해 떨어졌다. 서로마는 60년간 [[스틸리코]]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아에티우스]] 등 유능한 사령관들의 활약 덕분에 버텼으나 그 이후는 이름뿐인 유명무실한 황제가 차례차례로 등극하면서 몰락해갔고, 476년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공식적으로 제국 서부와 동부는 하나의 로마 제국이었기 때문에 동부 황제와 서부 황제 중 선임 황제인 쪽이 상대방에게 간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절멸하고 각각 다른 혈통의 황제가 즉위하면서 따로 노는 일이 잦아졌고, 제국 동부가 제국 서부를 버린 꼴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이 심했고 또한 경제력 역시 로마에 비해 떨어졌다. 서로마는 60년간 [[스틸리코]]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아에티우스]] 등 유능한 사령관들의 활약 덕분에 버텼으나 그 이후는 이름뿐인 유명무실한 황제가 차례차례로 등극하면서 몰락해갔고, 476년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 중세 로마(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A.D. 330~1453 ===
==== 중세 로마(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A.D. 330~1453 ====
{{참조|비잔티움 제국}}
{{참고|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 동로마 제국 = 중세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 동로마 제국 = 중세 로마 제국


사실상 다 같은 말이다. 다만 서유럽 역사가들이 중세 로마를 이전이라 비교하려고 만든 말이지만 사실상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이었다. 공식 명칭또한 'Imperium Romanum'.
사실상 다 같은 말이다. 다만 서유럽 역사가들이 중세 로마를 이전이라 비교하려고 만든 말이지만 사실상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이었다. 공식 명칭또한 'Imperium Romanum'.


==== 동로마 제국 ====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고토회복전쟁을 통해 과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잠시 되찾았으나 전염병이 돌고 재정난이 심해지면서 얼마 가지 못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떠오르면서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마케도니아 왕조, 콤니노스 왕조가 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일시기 문을 닫게 된다.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고토회복전쟁을 통해 과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잠시 되찾았으나 전염병이 돌고 재정난이 심해지면서 얼마 가지 못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떠오르면서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마케도니아 왕조, 콤니노스 왕조가 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일시기 문을 닫게 된다.


[[1261년]] 십자군 국가인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위를 회복하나, 풍파를 겪은 제국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이 아니었다. 제국은 소아시아의 영토를 잃어버렸고 그 땅에서 일어난 투르크인들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기에는 오스만의 속국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전사하면서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후 모레아와 트레비존드의 최후의 잔존 세력이 남아 저항했으나 모두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1261년]] 십자군 국가인 [[라틴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위를 회복하나, 풍파를 겪은 제국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이 아니었다. 제국은 소아시아의 영토를 잃어버렸고 그 땅에서 일어난 투르크인들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기에는 오스만의 속국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전사하면서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후 모레아와 트레비존드의 최후의 잔존 세력이 남아 저항했으나 모두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제국은 당대에는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겨졌으나, 근대에 들어 서구권 역사가들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과 분리된 역사로 여겨져왔다.
이 제국은 당대에는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겨졌으나, 근대에 들어 서구권 역사가들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과 분리된 역사로 여겨져왔다.
==문화==
===미술===
로마의 미술은 그리스의 헬레니즘 미술과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로마인들은 헬레니즘 미술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였으며 헬레니즘 문화권에 로마 제정기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23825&cid=40942&categoryId=33371 네이버 지식백과, 헬레니즘의 시대범위 (두산백과)]</ref> 하지만 로마인들은 단순히 그리스 미술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응용하고 취향에 따라 변화시켰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그 유명한 [[콜로세움]]{{ㅊ|우리가 인터넷에서 세우는 콜로세움이 아니다}}으로, 로마의 실용적인 구조와 그리스의 미적 양식이 잘 결합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콜로세움을 보면 여러 아치가 결합된 형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종전의 그리스 미술에선 확인할 수 없는 로마 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으로 로마인들은 이 기술을 이용하여 거대한 돔 형태의 천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판테온]]으로 기원전 25년 로마의 모든 신에게 예배하기 위해 만든 건축물이며<ref>이탈리아에서 보물찾기, 곰돌이 co., 강경호, 아이세움 ISBN 9788937848278</ref> 현대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고대 신전이기도 하다. 이는 이 신전이 나중에 교회로 개조되었기 때문.<ref>이 문단의 전반적인 내용은 서양미술사(E.H.곰브리치, 예경, ISBN 8970840656)의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ref>
== 평가 ==
기원전 753년이라는 건국 연도를 일단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이 제국은 약 [[2200년]]간 이어져왔다. 사실, 굳이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고 해도 가장 보편화된 위대하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제국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신성 로마 제국]]은 중세 서유럽에서 종교적 이유로 로마 황제위를 되살린 것이다. 일종의 설정놀음으로, 사실 로마 제국의 진정한 의의를 계승했던 것은 동로마 제국이 더 가깝다.
== 로마의 계승을 주장한 국가들 ==
근대 이전까지 유럽에서 '제국'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 제위와의 연관성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황위를 이었다고 주장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이 부활시킨 서로마 황제 제위이다. 막말로 교황이 '정통 로마'인 동로마 제국에게 꿀리니까 황제를 하나 만든 것에 가깝다.
[[러시아 제국]]은 로마 제국, 정확히는 동로마 제국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여조카라 러시아의 황제가 결혼을 해, 러시아 황제는 동로마 제국의 황위를 계승했다고 선언했다. 심지어는 로마, 제2로마 콘스탄티노플을 이어 제3로마가 바로 [[모스크바]]라고 선언까지 했다. 또한 러시아 제국의 문양을 동로마 제국의 쌍두독수리로 교체하였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정교회]]권의 최강대국으로서 역할한 역사도 있다. 그래서 모 [[러시아]] 학자는 로마 제국은 기원전 753년부터 러시아 제국이 망한 1917년까지로 잡는다. 그럼 2670년이 된다.
[[오스만 제국]]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는데, '로마 노바', 즉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국가가 자신들이니 자신들이 로마 황통을 이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을 '카이세리 룸', 즉 '로마의 황제'라고 자칭했다. 이 호칭은 뒤를 이은 [[바예지드 2세]]까지 이어지다가 나중에 술탄 직위에 병합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살아가던 정교회 신자들은 '룸', 즉 '로마인'이라고 불렸는데 근대에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오스만이 빌빌대기 시작하면서 저마다 독립국을 이루었다.


{{주석}}
{{주석}}
[[분류:멸망한 나라]]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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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5일 (수) 19:00 기준 최신판

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Ῥωμαίων)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지중해패권을 장악했던 국가이다.

역대 황제[편집 | 원본 편집]

수도[편집 | 원본 편집]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제정 수립 이전[편집 | 원본 편집]

왕정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자세한 것은 로마 왕국 문서 참고

공화정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자세한 것은 로마 공화국 문서 참고

공화정에서 제정으로[편집 | 원본 편집]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자리잡은 로마는 시민과 원로원계급의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민중파의 일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갈리아를 복속시키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다.

이를 견제하고자 한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반역자로 규정하였고, 이에 반발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도하하여 카이사르의 내전을 발발시킨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공화파에 의해 곧 암살당한다.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가 되어 실현한 원수정 체제 아래에서 팍스 로마나를 일구었다.

원수정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옥타비아누스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은 시점을 공화정이 종식되고, 제정이 시작된 시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라틴어군주를 뜻하는 렉스(Rex)라는 칭호의 사용을 거부하고, 제1시민을 뜻하는 프린켑스(Princeps)를 칭했다. 또한 공식적으로 공화정의 폐지를 선언하지 않고, 오히려 공화정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공화정의 시스템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통치했다. 이렇게 공화정도 아니고 제정도 아닌 애매한 체제라서 프린켑스에서 따온 프린키파투스(Principarus)라고 부르고, 이것의 번역어가 바로 원수정이다. 이 체제는 팍스 로마나라는 전성기를 이끈 원동력이었으나 군인 황제 시대에 이르러 한계를 드러냈고, 3세기 말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형적인 군주제라 할 수 있는 전제정을 도입하면서 종식되었다.

팍스 로마나[편집 | 원본 편집]

로마의 평화라는 뜻을 가진 로마 제국의 전성기로, 로마가 강력한 패권으로 주변국들을 제압하여 장기간 평화가 유지된 시대를 뜻한다. 그래서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 팍스는 강력한 패권 국가의 주도하에 형성된 평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오현제 시대까지 200여년간 유지되었으나, 콤모두스의 폭정으로 인해 제국이 쇠퇴하면서 종식되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편집 | 원본 편집]

아우구스투스가 개창한 로마 제국 최초의 왕조인데, 역대 황제들에게 적장자가 없어서, 여러 귀족 가문들의 복잡한 혼맥에 의해 제위가 결정된 시대이다. 이 가문들 가운데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왕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며, 세력도 가장 막강했기에, 이 시대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부른다.

네 황제의 해[편집 | 원본 편집]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5대 황제 네로가 민심을 잃고 축출되어 자살한 후, 반란군을 이끈 갈리아 총독 갈바가 로마에 입성하여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갈바는 얼마 안 가서 네로의 친구였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에게 살해되었고, 오토가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오토 역시 비텔리우스라는 군벌에게 살해당하고,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비텔리우스 역시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는데, 비텔리우스를 제거한 베스파시아누스가 플라비우스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내전이 종식되었다. 이러한 개막장 사건들의 연속이 불과 1년 동안 일어났기에, 이를 네 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플라비우스 왕조[편집 | 원본 편집]

이전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주도한 두 가문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가였던 반면, 플라비우스 가문은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서야 중앙 정계에 진출한 신흥 가문이었다. 이 가문 출신의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의 명을 받고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러 파견되었다가, 중앙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장남 티투스에게 유대인 반란 진압을 맡기고, 본인은 상경하여 비텔리우스를 제거함으로써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로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의 실정으로 야기된 중앙 징계의 혼란을 바로잡고 콜로세움 건설 등의 업적을 쌓았다. 한편 티투스는 마사다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반란 진압을 완수한 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축출했다.

이후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자 제위를 계승했으나,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과 2차 로마 대화재라는 대재앙이 연달아 터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과로사(...)하고 말았다.

티투스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기에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즉위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과 잦은 대립을 하다가 암살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다.

도미티아누스의 암살로 인해 플라비우스 왕조는 대가 끊겼으나,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한 시기였기에 플라비우스라는 이름 자체는 상당히 인기 있는 이름으로 남았다. 그래서 중세 로마 초기까지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오현제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오현제는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섯명의 현명한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 그들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로 꼽히는 시대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 쇠퇴의 씨앗이 뿌려진 시대라는 평가도 있어서, 양면성을 가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제외한 황제들은 친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여서 제위를 물려주는 양자 계승이라는 독특한 제위 계승을 택해서, 이 시대를 양자 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오현제 시대와 콤모두스의 치세를 묶어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오현제 시대의 막을 연 네르바 가문과 마지막을 장식한 안토니누스 가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콤모두스의 폭정과 다섯 황제의 해[편집 | 원본 편집]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현제 가운데 유일하게 친아들을 얻어서 제위를 세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친아들로서 제위를 계승한 콤모두스는 폭정과 기행으로 민심을 잃고 암살당하고 말았다.

콤모두스 암살 이후 페르티낙스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그는 봉급을 짜게 준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근위대에게 살해당했고, 근위대는 봉급을 가장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는 자를 모시겠다며,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경매의 매물로 올리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여러 부호들이 참가한 경매에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낙찰받는데 성공하여 황제로 즉위했는데, 돈으로 황제 자리를 산 것이었기에 그의 제위는 극도로 취약했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알비누스, 니게르 등 3명의 지방 총독이 페르티낙스의 복수를 외치며 제각기 황제를 칭하고 궐기했는데, 페르티낙스 살해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즉위, 3명의 자칭 황제 등장이 모두 같은 해에 일어났기에 이를 다섯 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섯 황제의 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알비누스, 니게르 등을 모두 제압하고 세베루스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종식되었다.

세베루스 왕조[편집 | 원본 편집]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오현제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장기간 재위하며 제국의 중흥을 이끌었고, 그의 사후에는 유언에 따라 장남 카라칼라와 차남 게타가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카라칼라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게타와 그의 지지자들을 숙청하면서 다시 쇠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라칼라는 그의 본명을 딴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하여 모든 로마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카라칼라 욕장 등의 공공 시설을 건설했으며, 나름대로 군사적 능력도 있어서 군인들의 지지도 받은 황제였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권력 독점을 위해 친동생을 숙청하는 바람에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황제가 원로원과 자주 대립하여 국정이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을 야기했다.

카라칼라는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가 북아프리카 출신 군인 마크리누스에 의해 암살되었고, 마크리누스가 원정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황제를 칭하자, 카라칼라와 사이가 안 좋던 원로원은 이를 인준하였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의 동생 율리아 마이사가 세베루스 왕조를 지지하는 군인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마크리누스는 얼마 안 가서 축출되었고, 그녀의 손자인 엘라가발루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엘라가발루스는 여장하고 동성애를 즐기는 등의 기행을 일삼고, 동방 속주 출신이라서 시리아의 바알 신앙을 맹목적으로 신봉하였으며, 놀고 먹는데만 열중했으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실권자였기에 제국은 나름대로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율리아 마이사 사후, 자신이 실권을 갖고 통치해야 할 시기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비정상적인 행보를 계속하여 파행을 불러왔다.

또한 그런 주제에 권력욕도 있어서 외할머니에 의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사촌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숙청하려 했는데, 이를 눈치 챈 알렉산데르의 어머니 율리아 마이아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역관광당해서 살해되었다.

이후 황제로 즉위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공언했으며, 엘라가발루스와는 달리 능력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마마보이(...)라서 자신을 옹립한 어머니 율리아 마이아가 국정농단을 일삼는 것을 묵인했다. 결국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트라키아 출신의 군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어 살해당했고,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했다.

군인 황제 시대(3세기의 위기)[편집 | 원본 편집]

원수정 체제에 모순은 정세의 불안정을 낳았고, 3세기에 접어들어 세베루스 왕조의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당한 뒤 군인이 추대하는 군인 황제들이 등장하여 정세의 불안정은 더 심해진다. 그 시기에 게르만족,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침략이 심해지고 국방 경비가 약화되면서 경제도 흔들리는 등 제국은 3세기의 위기를 겪는다.

전제정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제국의 분열, 서로마의 멸망[편집 | 원본 편집]

후에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정 개편을 통하여 제국의 생명을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원수정 체제에 내제한 모순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후 다시 내전을 벌어지게 하였으며, 이 내전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룩했던 행정 개편을 더 확고히 하였고, 군제를 개혁하였으며,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등 사회 체계도 개조하였다. 이 황제들의 개혁을 통해 나라의 정세가 3세기에 비해 안정되었으나, 제국은 하나의 황제가 다스리기에는 국경선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었고, 이에 정제, 부제가 동방, 서방을 통치하는 방식으로 안보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를 이어받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치세가 끝나고 그의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아르카디우스가 각각 제국 서방과 동방을 맡게 되면서 제국은 두 개로 분리되었다.

공식적으로 제국 서부와 동부는 하나의 로마 제국이었기 때문에 동부 황제와 서부 황제 중 선임 황제인 쪽이 상대방에게 간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절멸하고 각각 다른 혈통의 황제가 즉위하면서 따로 노는 일이 잦아졌고, 제국 동부가 제국 서부를 버린 꼴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이 심했고 또한 경제력 역시 로마에 비해 떨어졌다. 서로마는 60년간 스틸리코아에티우스 등 유능한 사령관들의 활약 덕분에 버텼으나 그 이후는 이름뿐인 유명무실한 황제가 차례차례로 등극하면서 몰락해갔고, 476년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중세 로마(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A.D. 330~1453[편집 | 원본 편집]

비잔티움 제국 = 동로마 제국 = 중세 로마 제국

사실상 다 같은 말이다. 다만 서유럽 역사가들이 중세 로마를 이전이라 비교하려고 만든 말이지만 사실상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이었다. 공식 명칭또한 'Imperium Romanum'.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고토회복전쟁을 통해 과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잠시 되찾았으나 전염병이 돌고 재정난이 심해지면서 얼마 가지 못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떠오르면서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마케도니아 왕조, 콤니노스 왕조가 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일시기 문을 닫게 된다.

1261년 십자군 국가인 라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위를 회복하나, 풍파를 겪은 제국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이 아니었다. 제국은 소아시아의 영토를 잃어버렸고 그 땅에서 일어난 투르크인들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기에는 오스만의 속국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전사하면서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후 모레아와 트레비존드의 최후의 잔존 세력이 남아 저항했으나 모두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제국은 당대에는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겨졌으나, 근대에 들어 서구권 역사가들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과 분리된 역사로 여겨져왔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