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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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코 황제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황제를 뜻하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석상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CAIVS IVLIVS CAESAR, 기원전 100년~기원전 44년)는 고대 로마군인이자 정치인이다.

로마가 낳은 걸출한 인재로서 인류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 공화정 체제의 모순으로 혼란을 겪던 로마를 대대적으로 개혁한 위대한 정치가라는 평가와 공화정을 박살낸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갈리아의 제부족을 쓸어버리며 영향력을 높인 후, 로마 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파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구현하려 했던 원수정 체제는 그의 후계자이자 양자인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충실히 구현하였다.

저서로 《갈리아 전기》, 《내전기》가 있다. 특히 갈리아 전기는 고전 라틴어를 학습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교본 중 하나이다.

'브루투스 너마저'는 카이사르 본인이 한 말은 아니며, 후대에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극의 대사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출신 및 청년기[편집 | 원본 편집]

카이사르 가문은 로마의 유서 깊은 유력 가문이었지만, 카이사르 대에 와서 로마 정계를 휩쓴 유력 인물을 배출하지는 못하여 그 세가 많이 위축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의 고모부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로, 한미한 가문 출신이지만 유구르타 전쟁과 갈리아 족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군공을 세우고 군제 개혁을 실시한 당대의 실력자였다. 마리우스는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지만 평민 출신으로 입지전적인 출세를 한 인물인데다가 평민이 주축을 이루는 군대를 대표하는 실력자로서, 민중파의 상징적 인물이 된다. 거기다가 마리우스의 후계자 노릇을 한 킨나의 딸과의 결혼을 통해 카이사르는 유년기부터 민중파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유년기는 독재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집권시기였다. 때문에 카이사르는 유년기의 많은 시간을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유랑하면서 지내게 된다.

술라의 사후 로마로 돌아와서 변호사 활동과 법무관 활동으로 공직에 발을 디디고 차근 차근 경력을 쌓아 나간다. 동년배의 폼페이우스보다는 한참 느리지만...

제1차 삼두정치[편집 | 원본 편집]

41세가 된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도전할 만한 경력과 나이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 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던 민중파를 상징하던 인물인 탓에 원로원 귀족들의 견제가 매우 심했고, 특별한 전공이나 업적이 없었던 탓에 그 견제를 극복할 만한 열렬한 민중들의 지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폼페이우스크라수스 와의 야합을 통해 집정관 당선에 성공한다. 폼페이우스의 경우 엄청나게 쌓아올린 군공 탓에 민중들의 지지가 확고했으나 원로원의 견제가 워낙 심했고, 때문에 견제가 덜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표를 대신 받아 집정관이 되고, 크라수스가 돈을 대는 3자 협상 구조였다.

결국 집정관이 되는데 성공 한 카이사르는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하여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을 만한 법안을 여럿 내놓는다. 원로원 의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지만 정치적 수완과 폼페이우스의 개인적 인기, 민중의 지지를 적절히 활용 하여 모두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를 통해 폼페이우스의 지지세력을 자신에 대한 지지세력으로 포용하는데 성공하고 유력가문의 정치유망주 A에서 순식간에 로마 정계의 거물이 된다. 이를 굳히기 위해서 로마 공화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군공이었다. 군공을 세우기 위해 그는 자신의 임지(집정관 임기가 끝난 전직 집정관이 총독으로 부임하는 땅)를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로 선택한다. 카이사르가 더이상 거물이 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던 원로원은 이를 저지하고자 하나 이 또한 실패한다.

갈리아 전쟁[편집 | 원본 편집]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는 것은 경제적인 가치는 딱히 없었으나[1] 기원전 390년 무렵 갈리아 족의 대규모 남하로 인해 로마 시내가 개털리고 초토화 된 기억이 있고, 기원전 102년에도 대규모 남하를 한 적이 있으나 이때는 카이사르의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휘 하에 로마가 막아낸 적이 있다. 갈리아 지역을 재패하는 것은 로마 제국의 안보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모부에 이어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역을 정복하면 민중파의 후계 구도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다는 부분이 있었다.

로마에 순종적인 부족은 특권을 주어 다른 부족에 대한 지배권을 주고, 반항하는 부족은 군사력으로 짓밟는 정복 작업을 차례 차례 거듭하며 갈리아 지역을 제패해 나가던 가운데, 갈리아 전쟁 7년차에 대위기를 맞이한다. 베르킨게토릭스라고 하는 젊은 대족장을 중심으로 갈리아 전역이 봉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봉기한 갈리아인들은 친 로마 갈리아 부족을 차례 차례 공격하기 시작했고 카이사르는 이를 막아내기에 급급해진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도 카이사르군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고, 결국 청야 전술로 로마를 몰아내기로 결의한다. 유일하게 청야 전술에 참여하지 않은 갈리아인들의 도시 아바리쿰은 카이사르의 공격을 받아 초토화되고 약탈당하는데, 이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중심으로 갈리아인들의 단합이 더욱 굳건해지는 결과를 맞이한다. 청야전술에 말려서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점점 이탈리아 반도 쪽으로 밀려나게되고, 종국에는 전 갈리아 인들이 베르킨게토릭스 휘하의 반 로마 진영에 가담하게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 당시 카이사르의 상황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상태로, 7년간 온갖 고생을 해 가며 정복한 부족들은 다 등을 돌렸고, 점령한 영토는 죄다 잃었으며, 병사도 잃었기에 이 상태로 로마에 귀국하는 순간 카이사르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나는 상태였다.

그러나 상황을 오판한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에게 정면 대결, 즉 회전을 걸어버린다. 이 시대의 로마 군단병은 그 구성 성분을 로마 시민으로 제한했기에 머릿수에 있어서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당대 유럽세계 최강이었는데 엄격한 규율, 수백년 동안 지중해 각지의 다양한 민족과의 전쟁을 통해 발달한 전투 전술교리, 시민병이기에 유지되는 강한 결속력과 높은 사기로 인해 그냥 아무나 긁어모은 잡병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리엔트 군주들도 2~3배 규모의 용병단을 투입한 로마와의 전쟁에서 번번히 발리곤 했었다. 하물며 오리엔트 용병보다도 질적으로 떨어지는 갈리아 군이 로마군에 정면으로 꼬라박은 것은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인생 최악의 위기를 반전시킬 기회였다. 갈리아 군은 쪽수를 믿고 삼방향으로 포위했지만 되려 삼방향에서 각개격파 당하며 탈탈 털린다.[2]

베르킨게토릭스는 서둘러 패잔병을 수습하여 알레시아에 농성하고, 카이사르 휘하의 5만여 로마군은 알레시아를 포위한다. 뒤이어 베르킨게토릭스를 구원하기 위하여 알레시아를 포위한 로마군을 또 다시 갈리아 군이 포위하고, 35만의 갈리아 군을 로마군은 앞뒤로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또 털어버렸다. 되려 갈리아 전역의 군대가 결집되어 로마를 상대했는데도, 전략적으로 우월한 상황임에도 탈탈 털리고 또 털리는 상황이 발생해버리자 베르킨게토릭스도 전의를 완전히 잃고 항복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7년간의 정복활동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으나 총결집된 갈리아 군대를 두 차례 완파함으로써 위기를 반전시키고 갈리아를 완전히 재패할 수 있게 된다. 호전적이고 순종을 모르던 갈리아인은 이후 충실한 로마 속주민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내전[편집 | 원본 편집]

카이사르가 갈리아에 가 있는 10년 동안, 이른바 "삼두정치"에 끌려다니기만 하던 로마 원로원의 정세가 바뀌기 시작한다. 우선 삼두의 한 축인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로 떠난 원정 도중에 카르헤 전투라고 일컫는, 로마 공화정 역사상 최악의 졸전으로 평가되는 전투 끝에 전사하게 되면서 역사에서 퇴장하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애초에 평민파로 분류되던 인물이 아니라 되려 원로원 보수파를 상징하는 술라의 심복이었고, 술라의 쿠데타 과정에서 평민파(=민중파)를 철저하게 숙청하는데 앞장서던 인물이다. 정치적으로 반대 진영에 속해있었지만 일시적으로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하였고,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의 결혼을 통해서 유지되던 정치적 동맹이었는데, 율리아가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게 되면서 그 결속이 약해지게 된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속주 총독이 되어 있는 동안 원로원에서 폼페이우스가 자신의 뜻대로 정국을 주도해 주길 기대했으나 이는 점차 어긋나기 시작한다.

10년 임기의 총독을 마치고 로마에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갈 준비를 한다. 엄청난 전공을 쌓은 카이사르가 개선식을 마치고 선거에 출마하면 집정관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전에 군대를 해산하고 시민으로서 로마에 들어오라고 명령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반역으로 간주한다는 통첩을 날린다. 10년전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군대를 해산했다가 자기 부하들에게 퇴직금 봉토도 나눠주지 못하고 원로원 의원들에게 휘둘리는 것을 본 바 있는 카이사르는 이를 따를 수가 없었다. 같은 보수파였던 폼페이우스에게도 그러했는데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인 자신이 그대로 이행했다가는 정치적 생명 뿐만 아니라 일신이 정말로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먼저 호민관 안토니우스를 통해 원로원에게 편지로 타협안을 제시했는데, 폼페이우스가 갈리아 총독을 사임한다면 자신도 따라서 사임하겠다고 했다. 카이사르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이었음에도 원로원은 약이라도 빨았는지 쿨하게 이를 무시하고 이에 안토니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하자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한다.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카이사르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 이 새X들이!

주사위는 던져졌다

뭔가 단호한 결심을 한 후 할 수 있는 간지나는 대사로 알려진 이 유명한 발언은 이때 나왔다. 다만 카이사르는 세간에 알려진 거침없고 고민없는 행동파스러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개인적으로는 예민하면서도 결단의 시기에 수없이 전전긍긍하며 갈등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물론 우유부단한 것과는 다르다. 결정을 내린 뒤에는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타입. 다만 저 발언은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다가 '씁 어쩔수 없지. 주사위는 다시 주울 수 없는걸' 하는 심정으로 한 말이지 우리 말로 낙장불입 '너이 원로원노무 ××야 내가 당장 군단병을 이끌고 가서 니놈들의 ×××를 박살내 버리겠어' 하는 심정으로 호쾌하게 한 발언은 아닌데 세간에는 후자와 같은 느낌으로 알려져 있다.

10년간 변방에서 구르고 구른 카이사르의 군단병이 루비콘 강(이탈리아와 속주의 경계)을 건너자 원로원은 난리가 났다. 휘하의 병사들 또한 카이사르가 실각하면 자신들은 십년 넘게 군대에서 생사를 넘나든 것에 대한 보상 한푼 못받고 무일푼이 될 처지였기 때문에 결속력은 대단했다. 폼페이우스를 위시한 원로원파는 처음에는 이탈리아 내에서 카이사르와 싸우려고 생각했지만 이탈리아 내의 로마 동맹시민들의 여론이 카이사르 쪽이었다. 로마 시민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던 동맹시민들은 당연히 기득권의 반대파인 카이사르를 지지했고 배후지의 지지 없이 이탈리아 내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의원을 비롯한 지지세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떠난다.

폼페이우스는 전성기 때 지중해와 동방 전역에서 화려한 전공을 쌓았기 때문에 이탈리아 밖에서도 지지 세력이 많았다. 이탈리아만 떠나면 폼페이우스 파 세상이었고 이 덕분에 오히려 전황은 폼페이우스에게 유리한 편이었다. 다만 카이사르 세력은 카이사르 1인을 중심으로 같은 이해 관계를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 지휘 체계가 간결하고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10년을 변방에서 구른 정예병들이 남아 있었다.

카이사르는 단기 결전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하여 군대를 이끌고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인 발칸 반도 쪽으로 떠난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폼페이우스의 보급기지를 점거해 나갈 계획을 세우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항구도시인 디라키움 이었다. 폼페이우스도 디라키움을 잃을 수는 없었기에 병력을 집결시키는데 그 규모가 카이사르보다 컸다. 갈리아에서 적은 병력으로 더 많은 적을 포위해서 대승을 거둔 기억 때문인지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을 둘러싼 포위망을 구축하는데, 재해권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사실 큰 의미가 있는 포위망이라기보다는 결전을 유도하기 위해 싸움을 거는 목적이었다. 폼페이우스도 당대의 명장인지라 그 목적을 뻔히 알고 말려들지 않았다. 소모전으로 출혈을 유도하다가 한번의 공세로 포위망을 허물어 버리는데 성공한다. 전략/전술적으로 카이사르의 명백한 오판이었지만 임기응변과 행동의 카이사르 답게 전황이 불리하자 지체없이 퇴각을 명령하여 주 전력을 보존한 채로 퇴각하는데 성공한다.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패배했지만 카이사르는 여전히 발칸 반도 쪽에 남아서 폼페이우스의 보급선을 교란하며 깽판을 친다. 하지만 깽판이라고 해 봐야 발칸 반도 전 지역이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인지라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운영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재해권이 없는 카이사르 쪽의 보급 및 운영이 훨씬 빡빡했다. 사실 폼페이우스는 버티기만 하면 자신이 이긴다는 것을 분명히 알 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근거지 내에서 카이사르가 깽판치는 것을 방조하는 것은 그의 평판을 나쁘게 만들 것이었으며 원로원 의원들도 결전을 주장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세간의 이목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게 신경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알면서도 카이사르가 던진 떡밥을 덥썩 물고 결전에 나선다.

파르살로스 회전이라고 알려진 이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측의 병력은 보병 45,000명에 기병 7,000명이었고, 카이사르 측은 보병 22,000명에 기병 1,000명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분명 명장이었지만 임기응변이나 승기포착에 능하기 보다는 실수를 하지 않고 견실하게 병력을 운영하는 타입이었다. 보병전력과 기병 전력 모두 우세하지만 카이사르의 중보병은 10년을 전장에서 구른 최정예 베테랑이었고, 반면 폼페이우스의 중보병은 실전 경험이 적었다. 따라서 상식인인 폼페이우스는 숫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기병 전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측면을 분쇄하고 포위 섬멸해서 단번에 내전을 끝낼 전술을 세운다. 하지만 임기응변과 꼼수의 달인인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싸움에서 어떤 전술을 쓸지 훤히 알고 있었다.

결전 당일, 카이사르의 주전력인 중무장 보병의 돌격으로 전투가 개시된다. 역시나 견실한 폼페이우스는 돌격에 돌격으로 응수하지 않고, 카이사르 보병대가 먼 거리를 달려와 숨이 차고 대열이 흐트러 질 때 공격을 하려고 생각하지만 경험으로 다져진 카이사르 보병대는 '어? 쟤들은 맞돌격 안하네?' 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멈췄다. 그리고 숨을 고르고 전열을 갖춘 후 재돌격을 개시한다. 그리하여 전황은 카이사르의 공세로 시작된다. 인간흉기들이 득시글 하는 카이사르 군단병이었지만 어쨌든 숫적으로 두배 이상 우위인 폼페이우스는 그럭 저럭 공세를 막아낸다.

보병전이 교착상태가 되자 폼페이우스는 정석대로 기병대를 투입해 측면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한다. 카이사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초라한 기병대와, 숫적 불리를 극복하기 위해 같이 편성해둔 경보병들과, 베테랑 카이사르 군단 중에서도 정예병들만 가려뽑아 구성해 둔 2천의 별동대를 투입한다. 고대 로마 당시의 기병은 등자와 안장도 없었고, 말의 덩치도 품종개량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과 말이 합쳐진 질량 덩어리가 돌격력을 살려 공격한다면 보병대가 이를 방어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돌격력이 적은 상태라면? 돌격력이 줄어든 상태에서 안장도 등자도 없이 다리힘만으로 말 허리를 눌러 말을 컨트롤하는 이 시대의 기병을 제압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7천의 폼페이우스 기병대와 1천의 카이사르 기병대가 서로를 향해 돌격하고, 한 차례의 충돌이 있고 난 후 카이사르 기병대는 충분한 공간으로 전진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기수를 돌려 상대 기병대를 향해 다시 돌격할 준비를 한다. 7천의 폼페이우스 기병대가 카이사르 기병대와의 충돌 이후 눈앞에 보게 된 것은 최정예 병사들로 편성된 2천의 중보병 별동대였다. 한차례의 충돌 이후 돌격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말의 습성을 잘 아는 용맹한 보병이 이들을 덮치고, 전열을 가다듬은 카이사르 기병대가 이들의 뒤를 다시 공격한다. 게다가 회전이 벌어진 파르살루스 평원은 대규모 기병을 운영하기에 썩 좋은 지형도 아니었다.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는 허무하게 분쇄된다. 설령 기병 전력을 제외하고라도 폼페이우스가 불리한 전황은 아니었건만, 측면 교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재빠르게 측면과 배후로 병력을 투입하였고, 한번 포위에 성공하게 되자 전투는 그대로 끝나버린다. 카이사르 쪽의 사상자는 6백 남짓한 반면 폼페이우스는 6천여 명이 전사하고 2만 4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카이사르는 의도대로 단기 결전을 통해 적의 주력을 분쇄하는데 성공하게 되고, 우세한 병력과 유리한 보급선을 가지고도 한큐에 주력군을 다 날려버린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를 떠나 이집트로 도망간다. 폼페이우스가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자 지중해 세계의 여론은 단번에 카이사르 지지 쪽으로 뒤집어지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와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나일강변에서 암살당한다.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폼페이우스를 생포하게 되면 그래도 구국의 영웅이었던 그를 로마법으로 처형할 수는 없고, 살려두면 평생 우환이 될 것이었기에 난감했을 텐데 매우 땡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나 정치 9단. 로마 구국의 영웅을 함부로 죽였다고 폭풍분노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헤헤 저 당신의 원수인 폼페이우스 죽였는데 고맙져?' 라고 하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세력을 몰아내고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를 통치자의 자리에 앉혀놓는다. 피 안묻히고 폼페이우스 제거하고, 고대 지중해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었던 이집트를 수중에 넣으면서도 민중에게 내세울 명분까지 얻어냈다.

독재관 취임[편집 | 원본 편집]

로마의 절대권력을 얻은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에 취임한다. 그리고 자신의 지지세력인 민중들을 위한 여러 개혁법안을 절대권력을 통해 관철시키고 카이사르에 대한 로마 시민의 지지는 극에 달하고, 원로원 보수파들의 반감 또한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카이사르가 과연 왕정을 실시하고 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할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로마 공화정 시기에 왕정에 대한 평가는 지금 시대에 나치를 평가하는 분위기와 대동소이했다. 한마디로 절대로 추구해서는 안 되는 절대악과도 같은 제도였다. 공화정이라는 우수한 정치 체제 덕분에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고 믿는 로마인들에게 왕이 될 야심을 드러내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였다. 이를 아는 카이사르는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은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강조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었다. 권력자들의 권력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고, 카이사르의 권력욕은 누가 봐도 끝이 없었는 데다가 그는 원로원의 권위와 로마의 전통에 위배되는 행동을 수도없이 반복해왔다. 원로원 보수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고, 일부 카이사르의 심복들 또한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내정 개혁을 갈무리한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한다. 파르티아는 이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로마에게 위협이 될 만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고, 크라수스가 전사한 카르헤 전투의 굴욕을 갚아줄 필요도 있었다. 카이사르가 이 원정마저 성공하게 된다면 로마 시민의 지지는 절정에 달할 것이며 왕이 되겠다고 선언해도 그 누구도 토를 달 수가 없는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 매우 분명해 보였다.

암살[편집 | 원본 편집]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가 소집된 이 날, 카이사르 반대파들은 그를 암살하기로 마음먹었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주동자였는데, 카시우스야 처음부터 원로원파였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카이사르파로 분류된 두 명의 브루투스, 마르쿠스 브루투스데키무스 브루투스도 포섭되었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내전때 원로원파로 가담하긴 했지만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와 공공연한 애인관계였기 때문에 거의 자식 배려하듯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갈리아 원정 때부터 군단장을 맡은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그런 그가 왜 암살에 가담했는지는 불분명하다.

3월 15일, 암살자들은 원로원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카이사르가 돌아다니며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때를 암살 시점으로 작정한다. 열 네명의 의원들이 카이사르를 둘러쌌고 카이사르는 스물 세 군데의 칼빵을 맞고 자신의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 흉상 아래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 원로원 의원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 라는 소문이 퍼지자 로마 시민들은 집으로 도망가 문을 걸어잠근다. 암살자 일당들은 최고권력자를 암살하는 계획을 세우고도 차후 방안을 수립하는 것에 있어 대단히 안일했는데, 그냥 카이사르를 암살하기만 하면 "로마는 독재자로부터 해방되었다" 라고 원로원 의원들과 로마시민들이 전부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카이사르에 대한 민중의 인기는 상당했다. 독단적이고 독재적인 정치를 행하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높으신 분들의 관심과 불만이었고 민중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입안해주고 군공마저 화려한 영웅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는 안토니우스의 선동연설에 넘어간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묘사하지만, 그런 것 없이도 카이사르의 장례식장에서 카이사르의 시신에 붙은 불이 솟구치자 민중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폭동을 일으킨다.

이후 암살자 일당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로 일컬어지는 옥타비아누스의 일련의 내전을 거쳐서, 최후의 승자는 옥타비아누스가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가문으로 입적하여 그의 이름을 승계하고, 왕정을 극도로 혐오하는 분위기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차근 차근 권력을 잠식해 나가는 방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동양권에서 황제로 번역하는 이 직책(엠퍼러 / Emperor)은 라틴어로는 '임페라토르(Imperator)' 인데, 이는 사실 군 통수권자를 일컫는 단어로 기존에 없던 직책이 아니다. 즉,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를 왕이나 황제로 선포하는 대신 단순히 로마 최고 권력자인 카이사르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따름이라는 주장으로 이런 직책을 선택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자신에게 위임된 모든 권력을 원로원에게 이양하는 대가' 로서 임페라토르 지위, 거부권을 포함한 호민관 특권 지위, 원로원의 제1인자를 의미하는 '프린켑스(Princeps)'[3] 지위를 종신으로 누리며 세습 가능하게 해 달라는 제의를 하고 원로원은 이를 승인한다. 이것이 로마 제정의 시작이다. 독어권에서는 이 황제 지위를 '카이저(kaiser)', 카이사르의 독일어식 발음으로 일컫게 되고 러시아에서는 다시 이를 '짜르(czar)'라고 일컫는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살아서는 왕 또는 황제가 된 바가 없지만 그의 이름은 황제의 대명사로 일컬어 지게 된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사실 대부분의 서양계 절대권력자, 즉,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서양사의 절대권력자들에 대해서 동양계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쟁쟁한 인물들을 다 제치고 절대권력을 쟁취한 인물이니 당연히 비범한 개인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열렬한 추종자를 거느릴 개인적 카리스마도 대단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절대권력자들의 성장 과정은 정치적 의도니 뭐니 하는 것만 빼고 행보 그 자체만 보면 전형적인 창작물의 주인공의 모험기와 똑같다. 단지 이런 절대권력자에게 시달린(?) 당사자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를 섞어서 평가할 수 있지만, 절대권력자에게 시달리지 않은 제3의 인물들은 절대권력자의 부작용을 접할 일이 별로 없고 긍정적인 대외적 성과만 접하다보니 영웅시할 수밖에 없다.[4]

일례로 시오노 나나미의 에세이 《로마인 이야기》가 가장 널리 읽힌 고대 로마 역사에 대한 책이고, 이 책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크고 아름다운 권력을 쟁취한 인물이라면 무조건 열렬히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찬양하는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보니 카이사르에 대한 우호적 평가가 많다. 물론 카이사르에 대한 우호적 평가가 다 근거 없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공화정 로마의 통치체계는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리는 거대 국가가 되면서 분명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노예농장 경영은 로마 중산층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두자면 카이사르는 어디까지나 쿠데타와 내전을 통해서 권력을 쟁취한 인물이다. 명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그 명분은 국가의 위기 같은 것이 아닌 개인의 위기였다. 개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나라를 지키라고 맡긴 군대를 이용해 권력을 쟁취했고, 내전을 통해 그것을 공고히했다. 이는 정당화 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단지 시류가 그에게 매우 유리하게 조성되어 카이사르 개인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로마 전체의 위기를 같이 극복하는 결과를 낳긴 했지만.

정치적 평가[편집 | 원본 편집]

희대의 문무겸장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토론에서는 말빨로 동시대 원로원 의원을 수차례 개털어버렸고, 군중을 휘어잡는 연설 능력도 겸비했다. 글빨도 탁월해서 《갈리아 전기》와 같은 라틴 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저서도 남겼고 여자도 잘 꼬셨다(응?).

토지개혁과 친 민중적 정책에 대해서는 평가가 좋긴 하지만 태생적으로 카이사르의 지지기반은 민중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귀족파의 거물이었던 술라와 철천지 원수이자 대척점으로 있었던 마리우스가 그의 고모부였다. 태생적으로 그는 민중의 지지에 정치생명을 걸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공화정이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면서 생긴 고질적 문제점, 정책 입안의 난항이라던가 노예농장 경영으로 인한 중산층 붕괴와 같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다.

군사적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당대 로마 최고의 장군이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당대 최강의 로마 장군 후보였던 폼페이우스를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털어버림으로 이를 확실하게 증명한 바 있다. 부대에 대한 장악력과 통솔력은 최고였고,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과 순발력이 엄청났다. 다만 전략/전술적인 측면에서는 이게 무슨 명장이야 싶은 OME스러운 삽질도 심심찮게 했다. 그런데 그런 삽질을 일거에 뒤집어버리는 임기응변과 순발력, 결정적인 기동 한방으로 상황을 뒤집어버리는 승부사 기질이 탁월했다.

어록[편집 | 원본 편집]

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한 말 중 가장 유명한 두 말 중 하나이다. 중근동의 동맹국(이라 쓰고 속국이라 읽는) 폰투스의 파르나케스 2세 왕이 로마에 반기를 들자 5일 만에 진압하고 전투결과를 요약하여 로마에 올린 보고서가 딱 저 12자. 사실 이는 카이사르가 원체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간결한 것을 선호하는 취향이라 저렇게 줄여 쓴 것도 있지만, 정적인 폼페이우스를 까려고 쓴 감도 있다. 폰투스는 사실 전에도 반란을 일으킨적이 있었는데 그 때 폼페이우스가 제압하는데 한참 걸린 반면 카이사르는 단 5일만에 제압했기 때문에[5] '이거 뭐... 싱거워서 더 할 말도 없다 이런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 상대한다고 그렇게 개고생을 했니? ㄲㄲㄲ' 같은 뉘앙스로 쓴 것이다.

A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

사실 확실한 기록이 여럿 남아 진위 여부 확인이 가능한 위의 발언과는 달리 이 발언은 사실 출처가 다소 불분명하다. 당대 역사를 기록한 문헌에서는 관련 기록이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유일하게 확실하게 확인이 가능한 기록이 당대 역사가 겸 정치인이였던 수에토니우스가 쓴 <카이사르전> 하나뿐인데 말 그대로 진짜 이거 하나 뿐이라 이게 정말 맞는지 어쩐지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말인즉 수에토니우스가 창작한 것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카이사르전의 내용을 기준으로 전문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뎠다!"[6] 라고 한다. 물론 앞서 서술했듯 진위여부가 불투명해 신봉할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뿐. 참고로 진짜로 카이사르가 저 말을 했든 아니면 수에토니우스가 창작했든 어느 쪽이건 간에 저 말 자체는 그리스의 시인이자 희곡 작가인 메난드로스가 먼저 했었다.

각주

  1. 카이사르 개인에게는 큰 경제적 이득을 주었다.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와 그리스를 장악한데 비해 카이사르는 자신의 지지기반이 없었는데, 갈리아를 장악하면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갈리아 부족장들을 원로원에 편입시킨 이유도 이 때문
  2. 괜히 갈리아 전기의 내용이 주구장창 식량모으는 이야기인 이유가 있다. 굳이 전략을 짤 필요도 없으니....
  3. 뜻은 '1등 시민'이라는 뜻으로, 말인즉 일단 단어만 놓고 보면 아우구스투스는 법적으로는 길 가는 이름없는 로마 시민과 같은 사회적 직책을 지니고 있으나, 대신 시민은 시민이되 국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각종 특권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 된다. 나중에 이것이 영어로 프린스(prince)가 된다. 그러나 프린스는 나중에 왕(king)의 등장으로 좀 격하되지만.
  4. 일례로 몽골칭기즈 칸은 칭기즈 칸에게 시달린 바가 없는 한국에서는 영웅으로 취급되어 전기가 나오는 등 긍정적인 이미지로 퍼져 있지만, 그 칭기즈 칸에게 정복당했던 중국과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피에 쩔은 희대의 개또라이 대마왕'으로 취급되고 있다. 한국에서 유명한 노래인, 실제 인물 칭기즈 칸을 소재로 한 동명의 독일 노래 《칭기즈 칸》의 경우 한국에서는 흥겨운 멜로디에 영웅으로 취급되는 칭기즈 칸이 주인공이라 즐거운 노래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 독일어 가사는 칭기즈 칸을 욕하는 내용이다.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해보면 몰려오는 낯 뜨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5. 다만 한 가지 알아둘점은 폼페이우스가 폰투스를 제압할때 당시 폰투스의 지도자는 당대 최고의 로마 명장 여럿 물먹인 유능한 왕 미트리다테스 6세였고 카이사르가 상대한건 그보다 조금 더 떨어지는 능력만 지닌 그의 아들 파르나케스 2세 왕으로 당연히 상대가 달랐다. 물론 애초에 디스 목적이였으니 그런건 의도적으로 무시하게 되겠지만... 사실 폼페이우스도 잘한건 없는게 그 미트리다테스 6세를 꺾게 된 계기가 전임자들이 미트리다테스 6세의 힘을 살살 빼주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주워먹은 거였다(그럼에도 미트리다테스 6세는 제법 버텼다만).
  6. 「로마인 이야기 4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시오노 나나미 저, 김석희 옮김,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