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제국

(중세 로마에서 넘어옴)
동로마 제국(330/395~1204, 1261~1453)
  • 그리스어 :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Basileia tōn Rhōmaiōn
  • 한국어 :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 비잔틴 제국
  • 영어 : East Roman Empire, Byzantine Empire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동로마 제국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27년에 성립된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인정된다. 과거에는 로마 제국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정치체로 간주되었으나 현 시점에 이르러서는 문화적, 시대적 차이를 구분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명칭[편집 | 원본 편집]

정식 국호는 로마 제국이다. 그리스어로는 바실레이아 톤 로메온 (Basileia tōn Rhōmaiōn)이며, 라틴어로는 그대로 '임페리움 로마눔'이다.

황제의 명칭은 남자의 경우 바실레브스(바실레우스, Basilleus). 여자인 경우 바실리사(Basillisa)라고 한다.

사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은 근세 역사가들이 중세 로마 제국을 고대 로마 제국과 비교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어원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100년도 더 지난 1557년 독일의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라는 사람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고대이름인 비잔티움에서 착안해 만든 "비잔티움 역사집"에서 유래하였다. 당대에는 이 제국이 '로마 제국'이었으며 이는 서유럽인들도 무슬림들도 인정하였다.

수도[편집 | 원본 편집]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다. 옛이름은 비잔티움, 정식명칭은 새로운 로마란 의미의 로마노바.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보랏빛 출생[편집 | 원본 편집]

콘스탄티노플의 황궁 높은 곳에는 온통 보라색으로 꾸며진 방이 있었다. 이 방은 콘스탄티노플과 그에 인접한 해안 전체가 보이는 전망좋은 곳이었으며, 황후는 이 곳에서 출산을 하게 된다. 이 방에서 태어난 아이는 보라색 방에서 태어난 아이로 불리며 후에 황위 계승 시 더 큰 정통성이 부여되는 비잔티움의 독특한 전통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불분명한 시작[편집 | 원본 편집]

구체적으로 동로마 시대가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하느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도 있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체제가 어느날 갑자기 로마 제국에서 뚝 떨어져나오거나,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단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근대에 들어 역사 기술의 편의를 위해 만든 구분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콘스탄티누스 1세(306-337)의 로마 재통일(324), 콘스탄티노플 착공 또는 니케아 공의회(325), 콘스탄티노플 천도(330), 동서로마 분열(395) 등을 제시하기 때문에, 4세기로 통틀어서 일컫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늦으면 서로마 멸망(476년)이나,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대인 7세기 초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시대구분의 문제[편집 | 원본 편집]

시대구분의 문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 항목을 참고 바람.

역대 황제[편집 | 원본 편집]

역대 황제 일람은 비잔티움 역대 황제를 참고 바람.

초기: 4~9세기[편집 | 원본 편집]

동서 분열 이전[편집 | 원본 편집]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1세의 3분할 통치 내내 적지 않은 혼란이 이어졌으며 율리아누스(361-363)의 시대에는 기독교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이교부흥정책이 전개되었으나 이미 '상호부조'(Diakonia) 집단을 중심으로 사회활동을 적극 전개하여 2세기 이래로 제국 하류 계층의 민심을 끌어안았기 때문에[1] 그리스-로마 다신교는 뒷받침해줄 세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원정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자, 제국의 기독교화는 더욱 분명한 흐름이 되었다.[2]

이후 제국에는 고트족 문제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훈족의 침공에 쫓겨 동로마 지역인 트라키아 지방으로 망명해 온 고트족들과 지역 로마 정부 사이에 충돌이 생겼고, 이로 인해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378년, 고트족 군대는 아드리아노플 인근에서 발렌스 황제가 지휘하는 로마군을 궤멸시켰다. 그 직후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의 적극적인 수습 덕분에 양자는 화해하고 한동안 고트족은 제국 동부 지역에 정착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 직후부터 점점 기독교 신앙, 특히 정통 교리 아래 제국을 통일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380년부터 아리우스파는 물론, 기존 다신교의 공식적인 제사 등의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게 되었으며 392년까지는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금지하게 되었다.[3](올림픽 경기 역시 이러한 와중에 폐지되었다. 비슷한 시점에 알렉산드리아 이교 신전에 속한 신전도서관도 폐쇄되었다. 그러나 이는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자체가 아니며, 신전도서관도 이 시기에 이르면 사실상 소장 중인 도서가 없다는 언급도 발견된다.[4])

동서 분열과 서로마의 멸망[편집 | 원본 편집]

전성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편집 | 원본 편집]

니카의 반란 진압[편집 | 원본 편집]
하기아 소피아 건설[편집 | 원본 편집]
로마법 대전[편집 | 원본 편집]
고토 회복 전쟁과 흑사병[편집 | 원본 편집]
동로마-반달 전쟁[편집 | 원본 편집]
동로마-동고트 전쟁[편집 | 원본 편집]
동로마-서고트 전쟁[편집 | 원본 편집]
흑사병:쇠퇴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편집 | 원본 편집]

포카스의 폭정, 페르시아의 침공[편집 | 원본 편집]

이라클리오스의 등장,동로마의 기사회생[편집 | 원본 편집]

새로운 위기:이슬람 제국[편집 | 원본 편집]

위기의 극복[편집 | 원본 편집]

674~678년 사이 이슬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5차례 공격하였으나 672년에 개발된 그리스의 불과 콘스탄티노플의 방어적 입지, 로마 해군의 존재로 말미암아 7세기 말의 위기는 그것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내분을 어느 정도 정리한 이슬람 제국이 700년대로 접어들면서 재차 공격을 준비하는 가운데 비잔티움 내부에서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폭압정책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 황제가 살해되고 찬탈이 연이어 일어나는 등 위험신호가 연달아 나타났다. 특히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의 폭동이 중요한 문제를 야기하곤 했다. 713년, 바르다네스 필리피코스(Bardanes Philipikos, 711-713) 황제를 폐위시키고 아나스타시오스 2세(Anastasios II, 713-715)를 등위시킨 이 군대는 715년,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로도스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재차 반란을 일으켜 테오도시오스 3세(Theodosios III, 715-717)를 앉히기에 이르렀다. 비잔티움의 방어가 흐트러지는 사이, 이슬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재차 준비하기 시작했다. 717년, 마슬라마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의 대군이 아나톨리아로 진격해오자 아나톨리콘 테마의 사령관이던 레온(Leon)이 반란을 일으켜 마슬라마의 군과 함께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니코메데이아(Nikomedeia) 인근에서 정부군은 레온의 군대에 패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도시오스 3세는 레온과 협상하여 황제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이 레온이 레온 3세(Leon III, 717-741)이다.

애당초 마슬라마의 군대에 협력할 생각은 딱히 없었던 레온은 이슬람 제국과 순식간에 적대관계로 돌아섰으며, 마침내 717년에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을 맞아, 적의 종심 깊숙이 들어와 보급선 유지도 힘들던 이슬람 제국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의 강력한 육로성벽을 뚫을 수 없었고, 해로에서도 그리스의 불을 적재한 비잔티움 함대에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718년 초, 본국의 지원 함대를 얻어 재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선원 다수를 이루던 기독교인들이 탈주하면서 그 역시 실패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군대가 마슬라마의 군을 공격함에 따라 피해가 누적되어, 칼리프의 명령에 따라 이슬람 군대는 철수하였다. 이로써 674년 이후로 계속되었던 생존의 위기는 지나가게 되었으며 이슬람 제국의 침공 역시 소아시아에 한정되었다. 또한 740년, 아크로이논(니코폴리)에서 레온 3세의 군대가 이슬람군을 재차 대파하면서 이슬람의 위기는 일단 이것으로 소아시아 서부에서도 사라지게 되었다.

종교정체성 논쟁: 성화상숭배 논쟁[편집 | 원본 편집]

체제개편[편집 | 원본 편집]

이사우리아 황실의 몰락[편집 | 원본 편집]

니키포로스 1세의 개혁: 내정과 유럽질서의 변혁[편집 | 원본 편집]

불가리아의 위협[편집 | 원본 편집]

중기: 9~13세기[편집 | 원본 편집]

제국의 역습[편집 | 원본 편집]

섭정통치 시대(913-944)[편집 | 원본 편집]

공세적 팽창(920-1045)[편집 | 원본 편집]

복잡계 사회의 위기(1045-1081)[편집 | 원본 편집]

콤니노스 체제(1081-1180)[편집 | 원본 편집]

콤니노스 왕가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1081년 4월 부활절 축일 기간에 마침내 제국군 총사령관 알렉시오스 콤니노스(Alexios Komnenos)는 사실상 완전히 힘을 상실한 니키포로스 3세를 대체하고 시민의 지지를 받으며 황제로 올라섰다. 하지만 내전의 와중에 알렉시오스를 따르던 용병부대들이 무질서하게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사건 때문에 공개적인 참회 요구가 잇따랐고 이에 알렉시오스 1세(1081-1118)가 공식으로 이 부분을 참회함에 따라 논란이 가라앉았다. 알렉시오스 1세가 막 제위에 올랐을 때 비잔티움 제국은 그야말로 파산의 벼랑 끝까지 몰려있는 상태였다. 1070년대 들어서 미하일 7세 행정부가 시도했던 강력한 경제적 통제와 재정개혁은 사회적 저항에 맞닥뜨리면서 붕괴되었고 뒤이은 니키포로스 3세의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정권지지도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품계칭호를 남발했다. 문제는 이 품계칭호가 비잔티움 정부의 재원형성을 위한 일종의 국채-연금 형식으로 운영된 제도였다는 것이다. 칭호를 판매해서 얻는 수익은 없거나 헐값으로 처리되어 적은데 단기간에 연금으로 지불하는 금액이 폭증하자 기존에 관료의 연봉과 이 연금지불을 담당하던 행정부서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결국 니키포로스 3세 정권이 수립된지 겨우 1년 만에 연금지불은 전체 재정을 담당하는 일반재정국으로 옮겨갔고 1080년이 되자 1년 세입을 완전히 넘어서버렸다. 재정위기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1025년경까지 대강 700년 동안 순도 90% 이상을 유지해왔던 표준금화가 지속적인 재정 지출로 인해 그 손실분을 충당하느라 금의 순도가 낮춰지는 현상이 발생했고 1054년경 이후 약 73% 선에서 정지되었으나 1060~70년대의 위기를 거치면서 급격히 더 낮아졌다. 1081년에 이르면 순도가 다양한 7종의 금화가 제대로 된 교환비율도 정해지지 않은 채 제멋대로 유통되어 경제의 교란이 심각해졌다. 심지어 이 무렵 재무장관조차 최대 70% 이상의 순도인 금화에서 최소 11%짜리 금화에 이르는 7종을 모두 1:1 비율로 교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혼란은 가라앉질 않았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러한 위기를 감당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개혁도 곧바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절반인 소아시아에서는 튀르크 유목민들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는 채로 횡행하며 도시와 촌락을 파괴하고 있었고 에게 해안에서는 차카 베이가 막강한 함대를 배경으로 수많은 섬들을 제압한 채 비잔티움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그나마 안전히 보존되고 있는 것은 유럽의 영토였다. 그리고 그것을 마저 파괴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알렉시오스의 즉위 1개월 후인 1081년 5월,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노르만족을 지휘하는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비잔티움 황제위를 주장하며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노르만-비잔티움 전쟁(1081~1085)[편집 | 원본 편집]
노르만 공국의 등장[편집 | 원본 편집]

11세기 유럽에서는 노르만족의 이동이 서서히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1044~1046년 사이 루스와 비잔티움의 전쟁이 벌어진 뒤, 아직 비잔티움의 영토였던 남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노르만족이 서서히 문제거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053년, 활발해지는 노르만족을 저지하기 위해 교황 레오 9세(1049~1054)가 치비타테 전투(Battle of Civitate)를 일으켰으나 교황 등의 연합군이 패배하고 교황까지 포로로 잡히는 결과로 끝났다. 이때 비잔티움 제국 역시 연합군을 구원하기로 약조하였으나 1053년경 비잔티움군은 수만의 군세를 갖고 있는 페체네그족과의 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제때 적절한 지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교황청이 비잔티움에 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갖게 되었고 때마침 폭발한 교황청-콘스탄티노플 대교구청 사이의 논쟁이 이에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그 결과로 일어난 것이 동서교회 대분열 사건(1054)이다. 해당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초조함이 어느 정도로까지 흐름을 바꿀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치비타테 전투 이후, 교황은 기스카르의 오토빌 가문이 통치하는 남이탈리아의 패권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대신 노르만-시칠리아 공국은 교황의 세력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교황의 명분을 등에 업은 노르만 공국은 빠른 속도로 남이탈리아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요르고스 마니아키스 등의 유능한 사령관이 남이탈리아를 안정화시켰던 때(1042년경)와 달리 1050년대의 비잔티움령 남이탈리아는 본토의 계속된 내적, 외적 위기로 인해 방치되는 경향이 있었고 결국 다수의 지역이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1068년경이 되면 남이탈리아 총독부가 위치한 바리(Bari) 만이 사실상 유일한 비잔티움령 이탈리아로 남아 있었다. 물론 명목상 베네치아 공화국이 비잔티움의 보호령이었고 아말피 공화국 등도 간접적인 보호령이었지만 실제 통제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이 바리 역시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로 종결되는 대 셀주크 전쟁 와중에 함락되었다.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로 로마노스 4세(1068-1071)가 실각하고 콘스탄티노스 10세(1059-1067)의 아들인 미하일 7세(1071-1078)가 제위에 오르자 비잔티움 제국은 대외적인 여러 위기를 회피하고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시칠리아 노르만 공국에 대한 유화책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기스카르의 딸을 미하일 7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Konstantinos Doukas)와 결혼시켰으며 여러 품계칭호와 공물을 보내주었다. 한동안 로베르 기스카르는 이에 만족했으나 미하일 7세 정권이 국영곡물저장고 정책 등으로 삽질을 여러 번 푸다가 대중봉기로 무너지면서 콘스탄티노플 제위에 대한 야심을 기르게 되었다. 이에 1081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오늘날 알바니아에 위치한 디라히온(에피담노스도 불렸으며 두라초라고도 한다. 오늘날은 두러스로 불린다.)에 상륙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 역시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던 중앙야전군 2만을 모두 동원하여 디라히온에서 맞서게 된다. 역사에서는 이 서전을 두라초 전투(1081)로 기억하고 있다.

콤니노스 개혁[편집 | 원본 편집]

알렉시오스 1세가 제위에 올랐을 때 비잔티움 제국은 여러 측면에서 위기에 빠져 있었다. 재정적인 측면에서는 위의 항목에서도 보았듯이 전임자인 니키포로스 3세 때까지 계속된 방만한 지출과 지지자를 끌어모으기 위한 무리한 작위-연금제도의 운용 때문에 사실상 국가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실물경제 측면에서도 1053년 이래 지속적으로 기준화폐의 순도절하가 극심해지면서 서로 순도가 다른 11종의 금화들이 난립하여 경제를 교란시키고 있었다. 특히 미하일 7세 시대에 제작된 금 순도 10%대의 악폐들이 그 선두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제국정부는 재정적자의 문제로 인하여 한 때 서로 다른 이 금화들을 동일한 환율로 교환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국가경제에 심각한 물의를 일으켰다. 알렉시오스 1세가 올랐을 때에는 따라서 이 문제를 즉각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일단 국가를 운용할 재정이 고갈되었던 상황이었기에 알렉시오스는 과감히 작위자들에 대한 연금지불을 영구적으로 정지시켜버렸다. 사실상 디폴트 선언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종교회의를 열어 교회 소유의 보물을 국고로 환수함으로써 만성적인 재정위기를 일시적으로나마 돌파하고자 하였다. 종교계에서는 이 제안에 당혹하였으나 국가적 위기임을 감안하여 이를 가납하였다. 이로서 알렉시오스는 당장 국가를 운영할 국고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내부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축인 화폐개혁은 한동안 방치되었다. 1092년에 들어서야 제국 정부는 화폐를 통폐합하는 정책을 시작했으며 17년 동안의 조정 끝에 1109년에 이르러 각 화폐간의 교환율 역시 확정하게 되었다.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개혁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비잔티움 정부는 11세기 이전의 정부가 적용해왔던 관점을 상당수 바꾸었고 이는 실제로 화폐정책의 현실에서 많은 차이점을 드러냈다. 우선 기준화폐이자 표준금화인 이스타메논 솔리두스(Histamenon Solidus)가 기존에는 90~95%의 순도를 유지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콤니노스 체제 하에서 새로 규정된 표준금화인 이페르피론(Hyperpyron)은 약 85% 정도의 비교적 낮은 순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존의 화폐를 추가지출 없이 보존, 이용하면서도 지방의 더 넓은 시장에서 요구하는 화폐량을 맞출 수 있도록 화폐총량을 늘리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콤니노스 경제체제에서는 더 이상 솔리두스라는 표준금화를 기준화폐로 삼지 않았다. 대신 미하일 7세 치세인 1070년대부터 생산된 저순도 금화(금 순도:2~6%)를 금화의 반열에서 호박금화(Electrum tracea)로 낮추고 이것으로서 국가가 운용하는 주요 화폐로 삼았다. 그렇기에 화폐량이 부족해지는 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1107년, 알렉시오스는 또한 개혁칙령(Reform edict)을 내려 행정제도, 관직제도 전반을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거대하게 편제되어 있던 기존 행정조직과 관직이 대거 삭제되었다. 본디 존재하였던 체신성(Logotethe of Drome)이 이때 폐지되었고 기타 기능을 공유하였던 여러 관청들의 역할이 각 한군데 씩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각 관청간의 이견을 조절할 수 있는 대 회계관(Megas Logariastes)직이 신설되었고 이 모든 부서들을 최종적으로 조율하는 대 비서관(Megas Logotethes, 사실상 총리직) 역시 신설되었다. 한편 지방행정에서는 9세기 이래로 지역사령관(Strategos, Doux)과 그 기능이 구분되는 판사(Krites)가 파견되었던 것과 달리 콤니노스 체제 아래에서 다시 지역군사령관(Doux)에게 행정, 사법, 군사의 기능을 집중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오히려 11세기 및 그 이전보다도 군사령관 자체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어 그 임기가 2, 3년으로 제한됨은 물론 임기가 끝날 때마다 중앙 재정부서의 엄격한 검토를 받게 되었다.

입, 사법의 영역에서도 콤니노스 시대에 들어 체계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12세기에 들어 비잔티움 사회의 도시화, 분업화가 크게 진전하였던 까닭에 법률 관계 사안들의 중요성이 다대하여졌고 이에 따라 다양한 민사법정, 재무법정이 마련되었다. 변호사와 법관들은 1045년에 세워진 법학대학을 통해 배출되었으며 마누일 1세 치세(1143-1180)에 이르기까지 피고, 원고, 변호인, 법조인들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절차와 양식들이 마련되었다. 또한 민형사 소송의 소요기간을 각기 2, 3년으로 제한한다는 옛 법령을 재적용하게 되었고 징세 행정에 대한 행정재판이 제기되는 경우에 피해자들을 배려하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대안적 체제의 부재(1180-1204)[편집 | 원본 편집]

후기: 13~15세기[편집 | 원본 편집]

제국들의 잔치(1204-1263)[편집 | 원본 편집]

4중전선의 악몽(1263-1329)[편집 | 원본 편집]

체제 개혁과 내전(1328-1354)[편집 | 원본 편집]

무력감의 시기(1354-1384)[편집 | 원본 편집]

생존 투쟁(1384-1453)[편집 | 원본 편집]

동방에서 온 구원:티무르[편집 | 원본 편집]
추기경의 관VS 술탄의 터번[편집 | 원본 편집]
로마 제국의 최후[편집 | 원본 편집]

멸망 이후의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제국의 잔재들이 사라지다[편집 | 원본 편집]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멸망[편집 | 원본 편집]
트라페준타 제국의 멸망[편집 | 원본 편집]
테오도로 공국의 멸망[편집 | 원본 편집]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의 멸망[편집 | 원본 편집]

외전1: 제3의 로마, 러시아[편집 | 원본 편집]

외전2: 몬페라토의 팔레올로고스 가문[편집 | 원본 편집]

외전3: 메갈리 이데아[편집 | 원본 편집]

경제[편집 | 원본 편집]

초기: 4~9세기[편집 | 원본 편집]

중기: 9~13세기[편집 | 원본 편집]

후기: 13~15세기[편집 | 원본 편집]

군대[편집 | 원본 편집]

초기: 4~9세기[편집 | 원본 편집]

중기: 9~13세기[편집 | 원본 편집]

후기: 13~15세기[편집 | 원본 편집]

사회[편집 | 원본 편집]

정치체제[편집 | 원본 편집]

비잔티움 공화정 문제[편집 | 원본 편집]

병원[편집 | 원본 편집]

연구자/연구사[편집 | 원본 편집]

  1. Anthony Millier, The Birth of Hospital of the Byzantine Empi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7, pp.70-72
  2. 존 노리치, 남경태 역, 비잔티움 연대기, 바다출판사, 2006, 145-154쪽
  3. 앞의 책, 162-187쪽.
  4. http://ko.wikipedia.org/wiki/%EC%95%8C%EB%A0%89%EC%82%B0%EB%93%9C%EB%A6%AC%EC%95%84_%EB%8F%84%EC%84%9C%EA%B4%80#.EC.BD.A5.ED.8A.B8_.EC.A3.BC.EA.B5.90_.ED.85.8C.EC.98.A4.EB.8F.84.EC.8B.9C.EC.9A.B0.EC.8A.A4.EC.9D.98_.EB.B2.95.EB.A0.B9.2C_.EC.84.B8.EB.9D.BC.ED.8E.98.EC.9D.B4.EC.98.A8.EC.9D.98_.ED.8C.8C.EA.B4.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