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로마조 초대 황제).jpg
Augustus (아우구스투스)
본명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투르니우스
(Gaius Octavius Thurinus)
존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칭호 프린켑스(제 1시민)
부모 가이아스 옥타비우스 (친부)
카이사르 (양부)
재위 로마 제국의 황제
BC 27 ~ BC 14
생몰 BC 63 ~ 14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라틴어: CAIVS IVLIVS CÆSAR OCTAVIANVS, 기원전 63년 9월 23일~서기 14년 8월 19일)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다. 황제가 된 이후로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플리비우스 아우구스투스(라틴어: IMPERATOR CÆSAR DIVI FILIVS AVGVSTVS), 곧 아우구스투스로 불렸다.

로마 제국의 창시자로,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모든것을 포함하여 그야말로 정치 9단. 만렙 정치가다. 안토니우스와의 결전(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여 공화정 로마의 패권을 잡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양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비하여 훨씬 장수를 누리며 로마를 제정으로 전환하였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옥타비아누스는 본래 기사 계급 출신인데, 이는 경제력은 있지만 전통과 권력, 영향력 측면에서는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는 뜻이다. 외종조부가 바로 그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의 외할머니 남동생에 해당했다. 옥타비아누스가 18세가 되었을 무렵 카이사르가 암살되는데, 유언장에서 아무런 경력도 없는 그야말로 듣보잡에 가문도 별 볼일 없는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 일당과의 내전을 거치고,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처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을 거쳐 마침내 기나긴 내전의 최종 승자가 된다. 내전을 마친 옥타비아누스는 '팍스(PAX)', 즉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그라쿠스 형제 이후에 지속적으로 발생한 로마 내부의 혼돈과 쿠데타, 전쟁을 단속한다. 그렇다고 정복 사업을 다 정지시킨 것은 아니고 지금의 독일 영토에 해당하는 게르마니아 지역을 정복하려 갖은 시도를 하지만 이는 실패한다. 동방의 파르티아는 외교적-군사적 압박을 통해 비교적 수월하게 안보 문제를 해결한다.

제정이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그 과정은 그야말로 정치9단스럽다. 내전을 마치고 자신의 정치적 지위가 굳건해지자 그는 본인의 모든 정치적 특권을 포기하고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그 대신 군 통수권(임페라토르), 거부권 및 신변안전권(호민관 특권), 원로원 제일인자(프린켑스), 종교지도자(제사장) 자리를 겸임하고 이를 종신으로 유지하겠다고 한다. 군 통수권이 갖는 권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원치 않는 정책을 입안 시키지 않을 거부권을 갖고, 원로원 지도자로서 최우선 발언권을 가지며 종교지도자로서 상징성까지 확보하는 1인. 군주제의 왕이 갖는 권력과 다를 것도 없는 엄청난 권력을 다 빼오면서도 이를 남발하지 않고 보수파를 자극하지 않으며 차근 차근 하나씩 확보하는 방식으로 이를 평생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체제가 군주제가 아니라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고, 다만 기존에 있었던 정치체제를 변혁한 개혁정치라는 것 정도만 인식했다. 군주제를 '정치 권력을 한 가문이 세습하는 제도' 정도로 인식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로마 공화정은 엄밀히 말하면 귀족정치로, 유력 가문의 정치적 특권이 세습되는 것은 로마인의 관점에서 횡포나 전횡이 아니었다. 권력이 유명무실해졌지만 어쨌든 원로원은 존속했고, 집정관도 매년 선출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을때까지 원로원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깔아뭉개거나 자극하지 않았고 야금 야금 권력을 잠식해나갔다.

로마의 국경선을 확보하고 평화의 시대를 유지하였으며, 세제 개혁을 통해 재정을 풍족하게 유지했고, 정치적 안정을 이끌어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자신의 혈연을 이어받은 자손에게 자신의 지위를 상속시키고자 했으나 모두다 사망하였다. 결국 그의 지위는 티베리우스에게 상속되었다.

후대의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로마제정으로 전환한 데 있어서 비판의 여론이 있다. 선대의 카이사르는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이 없었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왕이 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의혹 + 종신 독재관이 됨에 따른 원로원과 귀족의 반발로 암살당한 전적이 있고, 시민들도 공화국이 왕국이나 제국으로 바뀌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편법을 써서, 제정을 선포할 때 자신을 1등 시민이라고 칭함으로서 권력은 손에 넣었으나 권위를 가지지 못하여 후대에 수많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황제의 자리를 탐하는 결과를 낳게 되어, 군인들은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수도로 진군하여 황제를 바꿔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선대 왕이 죽으면 귀족들끼리 서로 황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피튀기는 내전이 벌어졌다. 동로마 제국의 가장 뛰어난 황제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는 바실레이오스 1세도 선대왕을 폐위시키고 직접 황제 자리에 앉은 인물이다. [1] 이 문제로 1453년에 멸망하는 순간까지 동로마 제국은 몸살을 앓게 된다.

이모저모[편집 | 원본 편집]

미국 드라마 《ROME》에서 묘사된 아우구스투스는 그야말로 적절. 여리고 곱상한 외모. 친화력의 달인이었던 카이사르와는 달리 그는 그렇게 친근하거나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타입은 아니었고 상당히 예민하고 까칠한 성품. 도무지 속내를 알수없고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통찰력. 하지만 그의 어머니와 카이사르가 내연관계 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그의 모친은 이미 그 전에 사망한 상태였다.

당대에도 미남으로 소문났으며 현재에도 남아 있는 그의 조각상들을 살펴봐도 차가운 인상이기는 하지만 굉장한 미남이다. 그에 반해 여성 편력에 대해서 몇 가지 떠도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없었고, 유부녀였던 리비아 드루실라를 남편과 이혼(딱히 불화가 있었다는 말은 없지만 직접적으로 강압했다는 말도 없으며 전 남편이 이것에 대해 아우구스투스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즉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고대 로마의 성문화는 개방적이었으며 이혼과 재혼은 대단히 흔했다. 이들 신앙에서 최고신인 제우스부터가 슈퍼바람둥이인걸) 시킨 후에는 아내에게 대단히 충실했다고 한다.

어록[편집 | 원본 편집]

둘러보기[편집 | 원본 편집]

역대 로마 제국 황제
카이사르(독재관)
로마 제정 성립
초대 아우구스투스 2대 티베리우스

각주

  1. 물론 이건 선대왕이 미쳐버렸기 때문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