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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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 원본 편집]

로마 공화국의 팽창[편집 | 원본 편집]

에트루리아, 라틴 동맹과의 전쟁[편집 | 원본 편집]

에트루리아 출신 왕을 축출하게 되자 로마 내에 있던 에트루리아인들도 떠나갔다. 이로써 에트루리아와의 관계 악화, 뛰어난 토목 기술로 로마 경제를 활성화시켰던 주역들이 떠나갔으므로 로마의 인구수는 감소하고 기술과 경제력이 약화된다. 국력이 약화되자 로마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온 라티움 인근 지역도 로마에 등을 돌리고 그렇게 라틴 동맹은 와해되는 듯하다가,,, B.C. 494년 동맹은 다시 재건된다.

B.C. 405년 Veii(베이)[1]를 공격하고 B.C. 396년 함락한다.

켈트족의 로마 약탈[편집 | 원본 편집]

B.C. 390년 ‘켈트족(갈리아족, Gual족)’이 에트루리아의 여러 도시를 거쳐 로마까지도 굴복시켰다. 이는 공화정 로마 최초의 군사적 패배로 기록되었다. 켈트족은 7개월간 로마를 점령하고 살인,약탈,방화를 자행했다. 갈리아족의 남하 목적은 약탈이었던 것. 로마가 협상책으로 금덩어리 300kg을 제공하자 갈리아인들은 철수한다. 갈리아족이 로마에 남긴 피해는 컸고 다시 라틴 동맹 세력들이 로마에 등을 돌린다.

삼니움 전쟁[편집 | 원본 편집]

이후 로마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재기하게 된다. 로마는 라티움 동맹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B.C. 4C 초 여세를 몰아서 동남쪽 캄파니아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B.C. 326년 라티움 동쪽에 있는 산니움 정복에 나섰다. 산니움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에트루리아와 움브리아가 로마를 공격하면서 전쟁은 3대 1의 양상으로 흘러간다. 로마는 B.C. 290년까지 에트루리아, 움브리아, 산니움 세 지역을 모두 정복한다. 이를 산니움 혹은 삼니움 전쟁이라고 부른다.

피로스 전쟁과 포에니 전쟁[편집 | 원본 편집]

이탈리아 북부와 중남부를 수중에 넣게 된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의 중심 도시 타렌툼과의 전쟁을 B.C. 282년 개시한다. 타렌툼은 스파르타인들이 건설한 식민도시로 타렌툼은 로마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리스 도시 국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피로스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에 진출하고 싶어했으므로 피로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온다. 그는 로마와 싸워 첫 번째 전투에선 승리하나 계속되는 전투에 B.C. 275년 자기 병력이 줄어드니 철수하여 피로스 전쟁은 종결된다.[2]

B.C. 273년 로마는 타렌툼을 정복한다. 이로써 이탈리아 남부까지 다 손에 넣은 로마. 이후 로마는 지중해로 진출하고 싶어하고 시칠리아섬을 놓고 카르타고와 격돌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다.

로마는 무조건 피정복 지역민들을 억압하기보다는 피정복 지역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 동화시키는 정책 방향으로 펼쳤다. 로마 주변의 정복 지역인 라티움 주민들에게는 참정권이 없는 시민권(civitas sime suffragio 시비타스 시이 서프라지오)을 부여했으며 정복한 이탈리아 남부 시민들에게는 아예 시민권 자체를 주지 않았었다. 나중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나머지 이탈리아 반도 주민들에게도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자고 법안을 내나 부결되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편집 | 원본 편집]

포에니 전쟁을 치른 후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떠오른다. 기원전 141년 지중해 지역은 거의 로마의 영역에 복속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두운 사회적 면모도 드러난다. 이에 대해선 그라쿠스 형제 참고.

로마의 집정관이 로마시를 집적 공격한 사례에 대해선 루키우스 술라의 행적 참고.

귀족과 평민의 대립[편집 | 원본 편집]

공화정 로마의 초기 정치 구조는 귀족에 의한 권력 독점이었고 귀족과 평민이 섞여 있는 백인회도 평민과 귀족이 충돌 시 귀족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한 공화정 역사가 계속 진행되고 전쟁을 치르면서 조국을 위해 싸운 평민들에게는 빚만 돌아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과 평민의 대립 구도가 이어졌다. 이후 평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귀족과 평민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졌는데 아래는 평민들이 이루어낸 법이다.

기원전 449년 12표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은 로마 최초의 성문법이다. 여태까지 로마 법률은 관습법에 기초한 불문법으로 공화정 초기에 이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자는 귀족이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객관화된 법이 됨에 따라 법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 평민들의 불이익을 제거했다.

  • 카눌레이우스 법
    B.C. 445년 제정. 카눌레이우스는 호민관이다. 카눌레이우스가 발의한 법으로 귀족과 평민 간의 결혼을 인정한 법이다. 현실엔 오랫동안 적용하지 못한 법이었으나 법적으로 신분 이동 가능성은 있었다.
  •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
    B.C. 367년 제정.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 둘 다 호민관으로 이 둘이 발의한 법이다. 집정관(consul) 두 명 중 한 사람은 평민으로 선출한다는 법. B.C. 366년 공화정 역사 최초로 평민 출신 집정관이 등장한다. 그 집정관은 바로 이 법안을 발의한 섹스티우스.
  • 호르텐시우스 법
    B.C. 287년 제정. 호르텐시우스는 독재관 평민 출신으로 이 인물이 이 법을 제정했다. 발의한 게 아니라 제정했다. 평민회에서 결의한 건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에게도 적용한다는 법이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편집 | 원본 편집]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자리잡은 로마는 시민과 원로원계급의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되고 민중파의 일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승리하여 갈리아를 복속시켜 시민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이를 견제하고자 한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반역자로 규정하였고, 이에 반발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도하하여 카이사르의 내전을 발발시킨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공화파에 의해 곧 암살당한다.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가 되어 실현한 원수정 체제 아래에서 팍스 로마나를 일구었다.

공화정 로마의 정치 구조[편집 | 원본 편집]

행정부[편집 | 원본 편집]

행정관들은 전원 무보수로 일했다. 월급이란 없었다.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집정관(consul)
  • 설립 연도: 기원전 509년
  • 임기: 1년
  • 연령: 40세 이상부터 가능
  • 선출: 백인회(민회)에서 집정관 선출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시작될 때부터 생긴 관직으로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직이다. 집정관은 2명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독재 방지를 위해서이다. 집정관은 집정관끼리 서로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며 집정관 두 사람 뜻이 일치해야 행정 효력 발휘가 가능하다. 행정부 수반이자 백인회(민회) 소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군 통수권자이다. 전쟁터에 직접 출정하는데 보통 전쟁이 일어나면 1명이 군 통수권자로써 출정하고 다른 1명이 로마 내정을 담당한다. 비상 상황이 되면 로마 집정관 2명 모두 전쟁터에 출정하기도 한다. 로마를 멸망 위기까지 내몰았었던 제2차 포에니 전쟁인 한니발 전쟁에서, 로마 집정관 두 명 모두 출정해 두 명 다 한니발 부대의 손에 목숨을 잃은 적이 있다.
전직 집정관(proconsul)}}
집정관이 전쟁하러 먼 거리로 출정나가는 경우, 전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전쟁터에 나간 집정관의 임기가 끝났다고 도중에 로마까지 돌아와 집정관을 교체할 수 없는 노릇. 전쟁터에 나간 집정관의 임기가 끝난 때에는 로마에선 따로 집정관을 새로 선출하고 전쟁터의 집정관은 전직 집정관이 되어 계속 군대를 통솔한다. 속주 총독 역할을 맡기도 했다.
법무관
  • 설립 연도: 기원전 366년
  • 임기: 1년
  • 연령: 40세 이상부터 가능
  • 선출: 백인회(민회)에서 법무관 선출
초기에는 1명이었지만 로마의 영토가 확대되어 인구가 늘어나자 인원 확충이 불가피해져 이 직책이 16명까지 증대한다. 집정관의 부재 시, 집정관의 역할을 대신 했으며 때로는 군 지휘관으로 출전하기도 했다.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회계 감사관
  • 임기: 1년
  • 연령: 30세 이상부터 가능
  • 선출: 초기 - 집정관이 회계 감사관 임명 ⇨ 기원전 421년 이후 - 백인회에서 회계 감사관 선출
초기엔 이 직책이 2명이었지만 공화정 말기에는 40명으로 증대했다. 국가의 재정 집행에 대해 감사하는 역할.
감찰관
  • 설립 연도: 기원전 443년
  • 임기: 1년 반 이상[3]
  • 연령: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 선출
    • 초기 - 5년마다 백인회에서 감찰관 두 명 선출.[4]
    • 후기 - 모른다.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 호구 조사를 통해 재정 상태 감찰하고 신분을 그에 걸맞게 분류.
  2. 재정 상태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은 시민들을 고발하고 시민권을 박탈했다. 시민권 박탈 결정권 보유 직책이다.
  3. 원로원 의원 결정권: 종신직인 원로원. 원로원 의원이 죽으면 공석에 보통 로마의 전직 행정부원들이 들어가는데 그 때에 누가 로마 원로원으로 들어가게 될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
  4. 풍기 문란 감찰 역할.
  5. 국가 재정 전반 관할.
안찰관
귀족 2명, 평민 2명으로 구성된 직책}}
  • 설립 연도: 불분명
  • 임기: 1년
  • 연령: 30세 이상부터 가능
  • 선출: 백인회에서 안찰관 선출
  1. 축제와 경기 개최 담당
  2. 치안 담당
  3. 도로 보수
  4. 교통 정리
  5. 상하수도 관리 담당
  6. 위법 행위에 대한 벌금 부과
  7. 식량 공급 관리
독재관(dictator[5])
  • 설립 연도: 기원전 501년
  • 임기: 6개월
  • 연령: 상관 없다. 대체로 경력이 있거나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는 인물이 독재관으로 추대되었다.
  • 선출: 집정관이 독재관 임명. 하지만 임명 후엔 집정관도 독재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임시직으로 특별한 경우에 만들어지는 직책이며 비상 시엔 집정관을 제치고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국가 비상 사태시 국가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권력을 독재관 한 명에게 몰아준다. 사공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함이다. 임기가 끝나거나 위기가 종식되면 직책이 해제된다. 2차 포에니 전쟁 때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독재관을 선출한 적이 있다.
호민관
  • 설립 연도: 기원전 494년
  • 임기: 1년
  • 선출: 평민회에서 호민관 선출
초기엔 2명이었으나 이후 10명으로 증대한다. 평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직책. 평민에게만 호민관 자격이 주어지며[6] 집정관 결정에 거부권 행사가 가능하다. 그러나 전시 상태에선 집정관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면책 특권이 있다.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신체불가침 특권이 있다. 호민관의 몸에 상해를 가하면 형벌에 처한다. 그러나 공화정 말기 때 이 특권은 지켜지지 않는다. 이후 호민관이 맞아죽는 일이 생기는데, 공화정 말기 로마 개혁을 주도했던 그라쿠스 형제다.

원로원[편집 | 원본 편집]

민회[편집 | 원본 편집]

쿠리아회[편집 | 원본 편집]

백인회[편집 | 원본 편집]

독재관과 호민관을 제외한 모든 행정관을 선출. 평민회가 창립되기 이전엔 행정부에서 상정한 법률을 심의해서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평민회[편집 | 원본 편집]

기원전 471년에 창설. 평민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호민관 선출을 담당했다. 행정부에서 상정한 법률을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B.C. 287년부터 평민회에서 이뤄진 결정은 귀족에도 그대로 적용했다(호르텐시우스 법).

각주

  1. 에트루리아 핵심 도시
  2.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른 승리라는 걸 뜻한다.
  3. 호구 조사하는데 1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4. 5년마다 선출한 이유는 호구 조사를 5년에 한 번씩 시행했기 때문이다.
  5. 라틴어로 '디타토르'라고 읽는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독재자(dictator)라는 말의 어원이 로마의 관직인 독재관에서 유래했다.
  6. 그러나 이게 항상 지켜지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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