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쿠스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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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형제(Gracchi)는 고대 로마정치인 형제들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형)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동생)를 가리킨다.

내력[편집 | 원본 편집]

이 두 형제는 기원전 2세기,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에 개혁을 주도했던 호민관들이다. 그라쿠스 형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들이며, 이들의 아버지는 여러 행정 관직(호민관, 안찰관, 법무관, 집정관 등)을 역임했다.

이들이 개혁을 주도할 때(기원전 2세기 말)의 로마 공화정에선 경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었다. 오랜 기간동안 진행된 전쟁이 평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특히 2차 포에니 전쟁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진행되어 농경지가 황폐화되었다. 해외에 파병된 병력들은 자신의 생업을 돌볼 겨를이 없었으며 영토가 확대되면서 속주에서 값싼 곡물이 들어와 로마 국내 농산물의 가격 경쟁력이 하락하였다.

군납업, 공공사업(도로, 다리 놓기), 대부업 등으로 돈을 벌은 귀족들은 토지에 돈을 재투자, 토지를 막 사들여 토지 소유의 편중화가 일어났다. 로마에서 토지에는 사유지와 국유지가 있었는데 국유지는 임차가 가능했다. 임차한 국유지는 자신의 소유가 아니지만 상속이 가능하며 다른 사람에게 양도도 가능했다. 귀족들은 대농장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로써 귀족과 평민 사이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또한 평민들은 새로 정복한 지역들로부터 유입된 노예가 일자리를 다 차지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기고 어쩌다가 구해도 낮은 임금에 허덕이게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 결론적으로 평민들은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공화정 정부에 대한 불만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 귀족 중심의 사회에 반기를 드는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편집 | 원본 편집]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기원전 163년~기원전 132년)는 제3차 포에니 전쟁 참전 경력이 있다. 29세인 기원전 137년에 회계 감사관[1]으로 선발되었다.

기원전133년엔 호민관으로 취임했다. 호민관은 원래 평민만 가능하였으나 그라쿠스 같은 귀족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평민만 자격이라는 호민관 규정이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티베리우스의 행보와 개혁안[편집 | 원본 편집]

농지법 상정 : 국유지 보유의 상한선을 설정했다.

  • 1인당 보유한 국유지를 500유게룸(iugerum)으로 제한. 국유지를 보유한 사람에게 아들 1명이 있으면 750유게룸까지, 아들 2명이 있으면 1000유게룸까지 제한했다. 아들 3명 이상부터는 더 이상 유게룸을 추가하지 않고 아들 2명 있는 집과 마찬가지로 1000유게룸까지 제한했다.
  • 이미 상한선을 초과하여 보유하고 있는 자들은 그 초과분을 국가에 반납하고 보상금을 받는다.
  • 국가에 반환된 토지는 빈민들에게 분배한다.
  • 국유지는 양도가 불가능하다(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이 소유한 국유지를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게 불가능하다.)

위의 법안 내용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토지 보유의 한계선을 설정했기 때문에 기존의 기득권층인 귀족이 좋아할 리가 없었겠지만 내용 자체에 대해 반발은 없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가 이 법안을 원로원의 조언을 구하지 않고 평민회에 상정해 통과시켜 버리는 데 이 과정이 문제였다. 로마에서는 법안을 상정하면 원로원의 조언을 구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을 무시해버린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이후 농민들에게 선행투자비를 국가의 재원으로 지원하자는 법률을 상정해 이번엔 원로원에게 자문을 구하지만 원로원이 이 법안에 대해 거부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페르가몬에서 들어오는 세금[2]을 선행투자비로 지원한다는 법안을 상정해 이번에도 원로원에 자문을 구하지 않고 민회에 통과시켜버린다.

이는 원로원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되었고 공화전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원로원 측에서는 티베리우스가 민중들에게 인기를 얻어 정치적 힘을 키운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으며 티베리우스의 민중을 위한 법안은 민중을 위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힘을 얻기 위한 도구로 여겼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호민관직의 재선에 도전한다. 그러나 기원전 180년에 만들어진 빌라법에 따르면 행정관직의 동일 인물이 2년 연속 연임할 수 없다고 나와있다. 빌라법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도전한 티베리우스를 놓고 호민관 선출 담당인 평민회에서 토론을 벌인다. 일부 원로원 의원들이 군사를 이끌고 회의장을 습격해 티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 300명을 쇠몽둥이로 때려죽인다. 호민관에게는 신체 불가침 특권이 있었지만 이런 특권은 무시당하고 티베리우스는 살해당했다.

공화정 로마는 최초로 내부의 유혈 사태를 맞이했다. 지난 200년 동안에도 귀족과 평민이 정치판에서 대립하긴 했지만 유혈 충돌이 일어난 경우는 없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편집 | 원본 편집]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Gaius Sempronius Gracchus, 기원전 154년~기원전 121년)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친동생으로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이 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행보와 개혁안[편집 | 원본 편집]

  • 농지법 : 티베리우스가 죽은 이후 이 법은 시행되지도, 폐지되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였다. 가이우스가 형의 농지법을 평민회에 재상정하고 평민회는 이 법을 재승인한다.
  • 식민법 : 이탈리아와 카르타고에 식민 도시를 건설해 빈민들을 이주시키자는 법안. 카르타고로 이주하는 자들에게는 일정 면적의 토지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소유권을 제공한다는 내용. 평민회에서 통과시킨다.
  • 곡물법 : 식민 도시로 이주하는 걸 원치 않은 빈민들에겐 속주에서 생산된 밀을 국가 재정으로 사들여 이들에게 싼 값에 판매한다는 내용의 법안. 원로원이 국가 재정 부담과 연가로 밀을 판매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든다는 이유로 이 법안에 대해 거부하나 평민회에선 이 법안을 통과시킨다.
  • 시민권법 : 현재 로마와 로마 인근 라티움 지역의 주민들에겐 완전한 시민권이 주어져있는데 나머지 이탈리아 반도의 주민들에게도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도록 하는 법. 나머지 이탈리아 반도의 주민들은 참정권 없는 시민권(civitas sime suffragio 시비타스 시이 서프라지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도 참정권까지 부여된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이유는 이들도 로마 병력으로 출전해 지난번 전쟁에서 나름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원로원과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까지도 이 법안에 대해 거부 표시를 한다. 자신들의 기존 기득권에 반하는 법안이기 때문이다. 이 법안은 부결된다.

가이우스의 인기가 높아지고 여세를 몰아 기원전 122년 호민관 재선에 성공한다. 이 자를 재선시킨 평민회에선 당연히 빌라법은 무시했다. 이에 대해 원로원은 형 티베리우스 때처럼 가이우스의 독주에 우려를 한다.

기원전 121년 가이우스는 3선에 도전한다.

한 하급 관리가 가이우스의 추종자들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가이우스를 제거할 명분을 찾던 원로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기원전 121년 집정관 오피미우스(opimius)와 결탁하고 오피미우스는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한다. 가이우스와 3,000명의 그의 추종자들은 무력으로 저항했지만 거의 모두 살해당한다. 가이우스의 머리를 잘라 로마 광장에 전시하고 가이우스의 몸뚱아리는 추종자들 시체와 함께 테베레 강에 내다버렸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가 남긴 의의[편집 | 원본 편집]

고대 로마에서 원로원의 권위가 사상 처음으로 도전받았고 공화정 내부의 문제 해결에 폭력이 동반된 사례가 사상 처음으로 등장했다.

각주

  1. 회계 감사관은 30세 이상부터 된다. 로마 공화정 직책들은 취임하는 해와 선발하는 해가 다르다. 티베리우스는 29세 때 선발되어 30세 때 회계 감사관으로 취임했다.
  2.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3세가 유언으로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넘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