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

개요[편집 | 원본 편집]

Sparta.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 중에 아테네와 투톱을 이뤘었다. 폴리스들 중에선 가장 면적이 넓었던 폴리스로 스파르타의 영토는 한 때 5000평방km까지 늘어나기도 했다.[1]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미케네 문명 말기 도리아인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스 북부에 살던 도리아인들은 남하하였고 그 중 일부가 펠로폰네소스의 스파르타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스파르타 근처의 라코니아 지역을 장악하였고(B.C. 8세기 중반) 이후 메세니아 평원을 장악하면서(B.C. 8세기 말) 대형 폴리스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인이 아닌 도리아인은 시민권은 없으나 자유민인 페리오이코이가 되었고, 비도리아계 주민들은 헤일로타이, 예속농민이 되었다. 이러한 계급체제는 메세니아 전쟁으로 통해 큰 변화를 경험하였다. 제1차 메세니아 전쟁(B.C. 725-705)을 통해 메세니아 일대를 장악한 스파르타는 그 지역 주민들을 페리오이코이로 만들거나 헤일로타이로 만들었다. 이는 제2차 메세니아 전쟁(B.C. 640-620)을 야기 시켰다. 스파르타의 통치는 가혹했고, 특히 페리오이코이나 헤일로타이들이 감당할 수준 이상을 요구했다. 이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메세니아의 반란은 대규모로 일어났기에 진압하는데만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스파르타의 체제를 만든 것은 B.C. 9세기의 전설상의 인물인 리쿠르고스(Lycurgus)에 의해서 성립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메세니아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처음에는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 해군을 크게 격파했으나 이 중요한 전쟁에서마저 전리품과 공적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아테네 민중들의 연속된 막장 짓거리로 아테네의 군대는 점점 약화[2]되었고 결국 스파르타 해군마저 아테네 해군을 이기고야 말았다. 결국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이기고 그리스의 유일한 최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 역시 체제상의 문제가 있었고 이겼음에도 알아서 몰락하다 결국 패배를 당했다.

이 문서의 전체 혹은 일부는 고대 지중해 세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정치 체제[편집 | 원본 편집]

과두정으로 Europontidae(유로폰티다이)와 Agiadae(아기아다이)라고 부르는 왕 2명과 28명으로 이루어진 귀족 출신 원로가 스파르타를 다스렸다.

[편집 | 원본 편집]

군 통수권자로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는 군 지휘권의 단일화를 위해 왕 중 한 명만 전쟁터로 출정했다. 신과 인간을 중계하는 사제 수장이기도 했다.

최고 행정관(에포르(Ephor))[편집 | 원본 편집]

임기: 1년

자격: (법률상) 스파르타 시민[3] 누구나 입후보 가능, (실제로는) 귀족들

5명으로 구성했으며 민회에서 이들을 선출한다.

< 역할 >

  1. 군사 교육 문제 관할
  2. 재산 분배 문제 관할
  3. 풍기문란 등 시민 생활 관할
  4. 신생아 양육 여부 판단. 그러니까 스파르타 주민이 낳은 아이를 검사해 신체가 허약한 아이는 강인한 스파르타의 주민이 될 수 없다고 하여 버린다..[4]
  5. 왕 해임 권한. 매 9년마다 왕의 연임 여부 결정
  6. 민회에서 통과된 입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 가능
  7. 민사 소송 관할

귀족 출신 원로[편집 | 원본 편집]

민회에서 이들을 선출한다.

< 역할 >

  1. 국내의 정치나 외교 문제를 심의
  2. 민회에 입법안을 상정
  3. 형사 소송 관할

민회[편집 | 원본 편집]

30세 이상 스파르타 시민(남자)으로 구성된 의결 기구로 원로 회의에서 상정한 입법안을 가결하거나 부결할 수 있다. 귀족과 평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는 평민이 더 많았지만 귀족이 주도했다.

사회 체제[편집 | 원본 편집]

시민과 스파르타의 문화[편집 | 원본 편집]

시민의 5 ~ 10 %만 시민권자로 시민(남자)들은 끊임없는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고 토지 경작은 국가 노예가, 상공업은 거류 외지인이 담당했다. 최고 행정관이 보아서 태어난 아이 중 신체가 허약하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는 내다버렸다 아이는 부모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소유라는 의식이 강했다.

스파르타에서 태어났고 최고 행정관의 검사에 통과된 남자 아이들은 태어난 후 6세가 될 때까지 자신의 엄마에게서 강인한 정신 교육을 받고 7세가 되면 국가가 운영하는 집단 훈련소에 입소한다. 20세가 될 때까지 집단 훈련소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병영 생활 19 ~ 20세 쯤 되면 국가 노예를 죽이는 과정 시험이 있는데 국가 노예를 암살하는 데에 성공해야 한다. 암살의 대상이 되는 국가 노예는 노예들 중에서도 신체적 조건이 뛰어났다. 20세부터 30세까지는 진짜 병영 생활을 치뤘다.

남자들은 결혼할 수는 있었지만 가정 생활은 허락되지 않았고 남자들은 병영 생활이 끝나는 30세 이후가 되면 가정 생활이나 사회 생활이 허락되지만 수시로 군사 훈련이나 전쟁터에 60세가 될 때까지 이끌려나간다. 30년 예비군 생활

여자들은 튼튼하고 자립심이 강한 여성이 당시 스파르타 사회상에서 이상적이었다. 소녀 시절부터 체력을 단련했으며 달리기, 투창, 원반 던지기, 레슬링 훈련을 받았다.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어야 건강한 (남자) 전사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했었기 때문이다. 병영 생활을 하는 남편 대신에 자식의 양육이나 가사를 전담했다. 사치는 허용되지 않았으며 장신구 등으로 치장해 멋을 내거나 꾸미는 것도 금지되었다.

스파르타 사회에선 개인주의보단 공동체주의를, 국가에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고 지향했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성향은 군사력 자체는 강했을지 몰라도 학문과 예술 발전과 같은 문화적인 면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 낙후되는 결과를 낳았다.

정복 지역 주민들[편집 | 원본 편집]

스파르타가 정복하거나 편입한 지역의 주민들은 스파르타의 시민권을 가지지 못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스파르타의 국가 소속 노예가 되었고 일부는 거류 외지인(페리오이코이)이 되었다. 거류 외지인들은 상공업에 종사하였다.

스파르타의 국가 소속 노예(헤일로타이)들은 스파르타 인구 중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국가 노예는 시민들에게 할당되었지만 국가 소유였으며 시민이 자신에게 할당된 국가 노예를 다른 사람에게 매매하거나 해방시켜 줄 수는 없었다. 국가 노예는 국가에서 시민들에게 분배된 토지 인근에 거주하면서 토지를 경작하고 토지에서 난 생산물은 최소한 자신들이 먹을 것을 제외하고 국가와 시민에게 공납했다.

각주

  1. 5000평방km라면 경기도 면적의 절반 정도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아테네는 1700평방km로 폴리스들 중에선 두 번째로 보유 영토가 넓었다.
  2. 그래도 쌓은 게 있어서 어지간한 폴리스보다 강했으나 스파르타처럼 진짜 강적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3. 스파르타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폴리스(도시 국가)들의 '시민'의 범위는 '자국민 성인 남자'만 해당된다. 여성, 어린이, 노예, 외지인은 '시민'이 아니다.
  4. 국가의 방침이기 때문에 이 아이의 부모는 최고 행정관의 결정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한다. 아니면 최고 행정관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데리고 스파르타 밖으로 도주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