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

Vfx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8월 16일 (화) 10:49 판 (→‎3당 합당)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
— 노태우의 저서 제목

과도기 정부

개요

이 시기는 결손 민주주의로 평가받는다. 6.29 선언을 통해 오랜 군부 독재를 마치고 국민들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에 의해 민주화 정권의 염원이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하지만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민주화 운동의 거목인 김영삼김대중이 서로 반목하면서 어부지리격으로 전두환의 동기이자 신군부의 2인자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노태우는 신군부 출신이라는 낙인을 희석시키기 위하여 제5공화국과 단절을 시도했으며,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규제를 크게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국민들을 감시하고 각종 고문을 자행하였으며, 정치공작을 통해 3당 합당이라는 전무후무한 야합정치를 보여줬다. 하지만 이러한 야합은 부메랑이 되어 노태우의 발목을 잡는 독이 되었으며 정치적 리더쉽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 국민들은 노태우를 물태우[1]라고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노태우 정부는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 정권으로 돌아서는 과도기적 정부로 평가받는다.

역사

제5공화국의 강압적인 통치하에서도 계속된 민주화 요구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4ㆍ13 호헌 조치를 계기로 6월 민주항쟁으로 발전하였다. 6월 26일 거행된 국민평화대행진에는 당시 100만명이 참가했다고도 알려졌을 정도로 대규모 인파가 몰려 한목소리로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였다. 결국 거센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였고, 드디어 1987년 12월 16일 국민들의 손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는 13대 대통령선거가 진행되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 후보로는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었던 김영삼김대중이 유력한 주자로 거론되었고, 정치적 동반자 관계였으므로 무난히 단일화를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시킬 것으로 여겨졌으나 결국 두 사람은 단일화에 실패[2]하였고,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독자세력인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후보로 나섰다. 결국 전두환의 세력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의 4자 구도로 유세가 진행되었고, 김영삼은 부산경상남도를 지지기반으로, 김대중은 호남을 지지기반으로, 김종필은 충청남도를 지지기반으로 삼아 치열한 지역구도의 선거양상이 진행되었다. 노태우 역시 고향과 가까운 대구경상북도의 지지기반을 갖추었다. 선거 결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각자 지지기반을 중심으로 표를 나눠가지면서 결과적으로 노태우가 어부지리격으로 당선되어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다음해인 1988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6공화국의 시작과 동시에 노태우 정부의 5년이 시작되었다.

정치

5공 청산

취임 첫해인 1988년 10월 4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에 나선 노태우는 5공화국 비리 연내 청산, 북방외교 적극추진, 서울 올림픽 이후 국정운영을 천명했다. 특히 그 자신도 5공화국 창설에 기여했고, 정치적으로도 자신을 밀어준 5공화국 수장 전두환을 포함하였기에 당시에는 파격적인 정치적 행보로 비쳐졌다. 사실 이런 파격적 행보의 이면에는 당시 정치역학이 작용한 것으로, 1988년 5월 30일 출범한 제13대 국회는 여당인 민주정의당보다 야당인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등의 의석수가 많은 여소야대 국면이었다. 국회 출범후 야당은 연합하여 5공비리특별위원회를 결성하여 신군부의 독재정치와 비리를 청산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헌정사상 최초의 청문회이자 권력비리를 조사하는 의미가 컸고, 이 청문회는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는등 전국민적 관심을 받았다. 청문회에는 5공의 실세들이 대거 소환되어 야당의 집중적인 추궁을 받았고, 특히 당시 초선의원인 노무현은 5공 실세인 장세동을 비롯, 증인으로 소환된 현대그룹정주영, 5공의 우두머리인 전두환 등에게 논리적이면서 날카로운 질문을 하며 궁지로 몰아넣어 일약 청문회 스타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하였다. 원래 5공 출신인 노태우는 5공 청산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던 입장이었으나, 여소야대 국면에서 5공 청문회가 열리는 등 정치적으로 큰 압박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5공 청산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5공 청문회가 시작되고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은 설악산에 위치한 백담사에서 은거에 들어가는 등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이자 군대 동기인 노태우에게 배신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처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 없었던 노태우의 소속정당이자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은 5공 청문회 내내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증인으로 출석한 5공 실세와 관련인사들 역시 불성실한 증언과 위증 등으로 문제가 되었다. 특히 우두머리인 전두환은 일절 청문회에 응하지 않다가 겨우 나와서는 제대로된 증인선서도 없이 준비된 연설문을 낭독하며 불성실한 태도[3]로 청문회를 빠져나왔다. 청문회 전후로 비리가 밝혀진 전두환의 측근들이 구속되어 처벌을 받았으나, 결국 5공의 핵심인 전두환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 5공 청산의 원대한 계획은 용두사미로 마무리 되었다.

3당 합당

1990년 1월 22일, 당시 노태우가 소속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야당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통합되어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였다. 이는 여소야대로 인해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았던 노태우가 보수 대연합을 내세우고, 내각제 개헌을 밀약으로 삼아 야당과 밀실회동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김대중은 단호히 거절하였고, 김영삼과 김종필이 노태우와 야합하며 출범한 민주자유당은 일약 218석을 차지한 공룡 여당으로 탈바꿈하여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특히 군부세력에 항거하며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김영삼이 노태우와 한가족이 되는 모습은 민주화 세력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반응이 많았다.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키며 일거에 여소야대를 타파하며 주도권을 쥘거란 노태우의 예상과는 다르게,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제14대 총선에서는 계파갈등의 내분이 발생하는 내홍을 겪었고, 공천에서 탈락한 인사들이 반발하며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하거나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의 영입을 받아 선거에 출마하는 악재가 겹쳤다. 결국 총선 결과 218석의 공룡여당은 온데간데 없고, 전체 299석중 149석에 그치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이후 김영삼은 당권을 장악하고 노태우의 정치적 기반인 민정당계를 대거 축출시키며 사실상 민주자유당은 김영삼의 색깔로 바뀌게 되었다. 당권을 장악한 김영삼은 노태우를 강하게 압박하며 급부상하였고, 마땅히 이를 견제할 수 없었던 노태우는 결국 차기 대선후보를 김영삼으로 밀어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자신의 오른팔인 박철언을 차기 대선후보로 밀어주려던 그였지만, 김영삼은 격렬하게 반발하며 집단탈당과 반정부 투쟁을 거론하며 노태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려고 하였기에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민주자유당 총재를 이양하였다. 이후 정치적 중립성을 위하여 스스로 민자당에서 탈당하였고, 이후로 퇴임시까지 자신만의 정치적 색깔을 지닌 계파[4]를 만들지않고 조용히 정치인생을 마무리하였다.

사회

언론 자유화

1988년 1월 1일,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발표한 신년사에서 그간 금지되었던 정치인에 대한 자유로운 풍자를 적극 허용한다고 밝혔다. 특히 5공화국에서 시행한 대표적인 언론탄압정책인 보도지침을 사실상 해체하는 것이며, 탈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사건이었다. 다만 KBS 사장을 압박하여 퇴진시키고 친정부 성향의 사장으로 교체한 일이나 명절 등 특별한 시기에 기자들에게 용돈을 주는 등 완전한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면도 남아있었다.

범죄와의 전쟁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는 특별담화를 발표하며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주된 내용은 국가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하고 과소비와 투기, 퇴폐와 향락을 바로잡아 '일하는 사회',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이 ‘범죄와의 전쟁’ 선언으로 자정 이후 심야영업이 단속되었고, 유흥업소 단속, 교통질서 위반 집중단속, 청소년보호구역 확대, 가정파괴범·유괴범·흉악범을 비롯한 각종 범죄조직 소탕 등 종합대책이 수립되었다. 또 보복범죄를 특정범죄 가중 처벌 대상에 추가하고 각종 형사 관계법을 개정해 마약, 폭력조직, 인신매매, 가정파괴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이에 따라 1992년까지 약 16,000명의 경찰이 충원되었고, 경찰청 보안부는 방범국으로 개편되어 각 지방청 및 경찰서의 방범부서에서 범죄예방과 진압을 담당하도록 했다. 경찰은 방범순찰차와 이동방범파출소를 운영하고, 행락철에는 특별방범활동을 실시했으며, 불법무기류 자진신고 및 단속을 강화했다. 또 방범홍보활동을 전개하여 자율방범대를 조직하고, 예비군의 방범활동 동참이나 금융기관의 자율방범기능 등을 통해 치안 유지를 위한 민간협력을 촉구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지 2년 만에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등 5대 강력범죄가 선포 전에 비하여 5.9%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검찰과 경찰의 공권력을 총동원해 조직폭력배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을 벌여 1년간 1,923명을 검거했고, 단기적으로 폭력범죄조직의 와해를 이끌어내며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런 범죄와의 전쟁 선포는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이미 이전부터 검찰과 경찰은 꾸준하게 조직폭력배를 소탕하면서 치안을 안정화시키던 상황이었고, 사실상 1990년 10월 4일 폭로된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사건 및 중요 인물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계획이 포함된 청명계획의 내막이 알려지면서 정권 퇴진 운동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는 등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느낀 노태우가 정국을 전환시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경제

외교

남북 관계

노태우 정부의 한반도 통일정책은 한민족공동체통일안의 제안으로 이해될 수 있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통일에 대한 자주·평화·민주의 원칙을 밝힌 7·7특별선언, 동년 10월 18일 유엔총회에서 행한 연설, 그리고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의 8·15경축사에서의 북한의 능동적인 자세변화를 촉구하는 새로운 통일구상을 통해 천명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통일구상을 포괄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했다.

1990년 들어 북한의 핵개발이 국제적으로 초미의 관심을 끌었고, 1991년 9월 25일, 노태우는 UN총회 연설을 통해 북한에 대해 핵무기개발을 포기할 것을 촉구하고 한반도의 핵문제에 대해 협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후 미온적인 북한의 태도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1991년 11월 8일, 한반도 비핵화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어 한반도에서의 핵부재[5]를 선언하며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명분을 사전에 제거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북한에 대해 핵확산금지조약의 회원국으로서의 의무이행인 안전담보협정의 서명과 핵사찰 수락을 촉구했다.

이후 남북한은 1991년 12월, 한반도 핵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세 차례의 남북 고위급회담을 개최하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통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조국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마련하자는 공통된 취지에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전문과 6개항으로 된 〈비핵화 공동선언〉은 1991년 12월 31일 채택된 뒤 1992년 2월19일 제6차 고위급회담[6]에서 남북기본합의서와 함께 발효됐다.

노태우 정부의 이런 적극적인 대북정책은 당시 북한의 대남도발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것과 1992년 10월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개최된 남북 고위급회담을 통한 책임있는 대화를 통한 화해노력이 높게 평가받는다.

한미 관계

1990년대 초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북미간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한·미 양국간의 팀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은 중요한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국방부1991년 12월 16일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담보협정에 서명하고 핵사찰에 응한 뒤 남북한 동시 핵사찰을 받아들이면 팀스피리트 훈련을 유보내지 전면 재조정할 수 있다는 계획을 제시하였다. 이후 북한 핵 문제와 남북한 관계개선의 흐름에 따라 1984년 이후 매년 20만명 이상이 참가하여 치러지던 팀스피리트 훈련에 대해 1992년 처음으로 잠정적 중단 선언조치가 이루어졌다.

1991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제23차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SCM)는 한반도와 국제질서의 변화, 즉 한소수교와 구소련의 해체,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넌·워너(Nunn·Warner) 2차보고서 의회제출, 북한위 핵개발 임박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3차 SCM은 북한 핵포기시까지 제2단계 주한미군 감축 유보, 전시지원협정(WHNS)의 체결, 한미간 군수·방산·기술협력문제의 협의를 진행시켰다.

한편,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이래로 한국의 미국간의 외교관계는 국제질서의 급격한 변화,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에 따른 국제적 지위향상 및 미국 국내의 사정변화를 반영하면서 안보 및 경제, 통상 협력 분야에서의 관계조정을 통한 성숙한 동반자 관계의 수립,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와 협력을 도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한일 관계

노태우 정부하의 일본과의 관계는 문화역사적인 측면이나 안보국방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는 항상 역사적인 측면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왔지만, 노태우 정부의 시기는 냉전의 종식과 맞물리면서 변화의 흐름도 감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가령 당시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역사문제가 계속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반면, 북일관계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면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북방외교

노태우 정부의 가장 큰 외교적 성과는 소련, 중국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포함하는 북방외교이다. 노태우 정부는 대한민국의 국력신장과 국제적 지위 향상에 따라 북한에 대한 우위가 명백해지고 냉전 종식등 국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동안의 경쟁·대결 외교를 지양하고 북한을 개방시키려는 선도적인 대북관계를 모색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1988년 7월 7일 노태우는 남북관계 및 동구권 외교를 비롯한 북방정책에 있어서 새로운 통일정책의 기본방향을 밝혔다. 7·7선언은 북한과의 적대·대결관계를 청산하고 민족공동체의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공동번영을 모색하고, 북한과 우방간의 관계개선을 적극도우며, 우리나라도 중국·소련 등 공산국가와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해나가겠다는 정책선언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7·7선언은 민족의 관계에서 북한정책을 전향적으로 전환하고 북방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겨냥한 북방정책이라는 두 개의 정책방향이 상호 연계되어 있다. 이 선언은 북방정책을 대북한 정책과 대북방 외교정책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설정하고 그 대상범위도 북한과 북한의 주요 동맹국인 중국, 소련뿐만 아니라 동구권 및 아시아권 사회주의국가를 포함하는 것으로 정립하였다. 7·7선언은 냉전시기 두 번의 반쪽 올림픽이었던 모스크바 올림픽LA 올림픽과는 달리 서울 올림픽을 동서의 거의 모든 국가들을 참여시킨 전 인류의 스포츠 제전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전개된 동서냉전의 종식 등 세계적인 화해시대의 흐름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소련
1989년 4월, 소련과 무역대표부를 교환하면서 양국의 수교협상은 급진전되었고, 1990년 2월과 3월에는 한국의 영사처와 소련의 영사처가 모스크바와 서울에 각각 개설됨으로써 사실상의 수교에 이르는 조건들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당시 소련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쵸프1991년 4월 19일부터 4월 20일까지 제주도를 방문하여 노태우와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이 방문은 소련 정상으로서는 최초의 한국 방문이었다. 이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맞물리면서 양국의 수교를 향한 관계의 진일보로 이해된다. 또한 이 회담에서는 남북관계와 국제관계에서 우리의 가장 큰 과제인 UN가입 문제가 무난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정상회담에서 한·소 우호·협력에 관한 조약 체결을 제의하였다. 노태우는 이를 수락하고 외무장관 회담에서 구체적으로 협의토록 했다.
중국
1992년 8월 한·중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어, 근 반세기 동안 지속된 한국과 중국 간에 단절되었던 교류가 재개되었다. 한·중 양국간 국교 수립은 당시 구소련 및 동유럽권 붕괴 이후의 세계적인 탈냉전의 조류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도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과거 반세기 동안에 걸친 부자연스런 단절의 역사를 청산하고 수천 년에 걸친 역사적 교류를 회복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양국간의 새로운 선린·우호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중국과의 국교 수립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원칙을 정부가 전면 수락함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중화민국과의 외교관계가 중국과의 수교와 동시에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정부수립과 한국전쟁 등 어려운 시기에 아시아에서 가장 긴밀한 우방이었던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한때 한국의 적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게 된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라는 냉혹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동구권
노태우 정부의 동구권 외교에는 한국과 헝가리의 수교가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 냉전종식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간 노태우 정부는 7.7선언에서의 북한정책 기조 천명과 노태우 대통령의 유엔연설을 통해 사회주의권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쳐나갔고, 이러한 유리한 환경에 힘입어 한국은 1989년 2월 1일에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국교를 수립하게 된다. 이 수교를 계기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로 이어진 한국의 동구 사회주의 국가와의 수교를 견인시켰다.

평가

긍정적

부정적

사건/사고

이 시기를 다룬 대중매체

2012년 개봉한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은 노태우 정부 집권기 실제 사건인 범죄와의 전쟁이 시대적 배경이다.
2011년 개봉한 이 영화의 모티브는 노태우 정부 집권기 실제 사건인 국군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청명계획이다.
2005년 4월 23일부터 2005년 9월 11일까지 문화방송에서 방영하였던 드라마이다. 극중 배경은 대부분 전두환 집권기에 맞춰져 있으나 극후반부인 40회에는 6.29 선언이 등장하며 노태우가 부각되었고, 최종회인 41회에서는 노태우의 당선과 5공 청산을 놓고 두 인물의 대립이 묘사되었다.

각주

  1. 물론 재임기간 당시 물난리가 잦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수재민이 발생한 것을 빗대어 나온 별명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줏대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을 두고 만만한 물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2. 당초 선거 불출마 의사를 피력하던 김대중이 갑작스럽게 불출마를 번복하고 출마를 결행하며 김영삼과 마찰을 빚었고, 두 사람은 결국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어 견원지간의 사이로 변하고 말았다.
  3. 이런 전두환의 안하무인격 처사에 분노한 노무현은 청문회장에서 자신의 명패를 바닥에 던지며 크게 흥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 노태우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상도동계, 김대중은 동교동계, 노무현은 친노, 이명박은 친이라는 계파가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고, 퇴임 이후에도 현실정치에 이들 계파의 입김이 꾸준히 작용했음을 생각하면, 아무런 계파를 만들지 않고 조용히 물러난 노태우의 이런 정치적 행보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5. 주한미군의 핵무기를 한반도에서 철수시킨다는 내용
  6. 평양에서 개최

틀:대한민국 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