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주당

통일민주당1987년부터 1990년까지 존속했던 대한민국정당이다. 약칭은 통민당이 아닌 민주당이다.

창당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985년 제12대 총선 이후 한국 야권은 신한민주당을 중심으로 결집한 상태였다. 신한민주당은 총재 이민우가 원내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원외에서 김영삼, 김대중 두 거물 정치인이 협력하고 있는 구조를 갖고 있었는데 제5공화국 헌법상의 대통령 임기 만료가 다가옴에 따라 민주화 요구에 대한 방법론적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1986년 12월 24일 이민우는 민주화 조건 7개항을 수용한다면 신한민주당은 내각제 개헌에 찬성하겠다는 이민우 구상을 발표한다. 이는 원외 양김씨와 상의하지 않은 독단적인 것이었고 양김은 크게 격분하여 87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양측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이철승 등이 이민우에 동조하여 내각제 개헌에 찬성하자 양김은 자신들을 따르는 의원들을 이끌고 집단 탈당을 결행한다.

이들은 1987년 4월 정식으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는데 창당 과정에서 정치깡패에 의해 습격받기도 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6월 항쟁의 주인공 : 직선제 개헌의 성취[편집 | 원본 편집]

이민우 구상에 반대하여 생긴 정당이니만큼 이들의 목표는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 쟁취였다. 창당 직후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격렬히 저항했고,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진상규명을 요구하였으며 재야시민사회와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민주항쟁을 위한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전국적으로 통일민주당은 고른 지지를 받으며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양김씨에 대한 개인적 지지도까지 더해지면서 6월 항쟁 기간 내내 전국적인 가두시위를 이끌었다. 신한민주당이 이민우 구상 이후 민주화 및 반정부투쟁의 동력을 상실한 것에 비하면 통일민주당은 그 존재감을 여감없이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 끝에 마침내 전두환으로부터 항복 선언(6.29 선언)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분당과 87~88년 정국[편집 | 원본 편집]

통일민주당은 동교동계 및 상도동계가 양대 세력으로 지분을 갖고 있었으며, 양 세력의 수장인 김대중, 김영삼은 대통령 출마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특히 87년 초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김대중이 이를 번복하면서 양측은 끝내 타협하지 못했고, 김대중과 동교동계가 집단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며 당이 반쪽났다.

상도동계, 그리고 소수 중립파만 남은 통일민주당은 1987년 대선에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을 상임고문으로 영입하는 승부수를 띄웠으나 결과는 김대중보다 1% 더 득표한 27%로 2위에 머물렀다.

통일민주당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김영삼은 이인제, 노무현같은 신진인사를 기용하며 부산에서 1석을 빼고 모조리 쓸어버리고 경남에서도 9석을 내며 선전했으나 서울에서 평화민주당의 강세에 10석에 그치고, 경기에서도 4석에 머물며 전국구 포함 총 59석으로 평화민주당에 밀려 원내 3당에 그치고 말았다. 전국적인 지지율이나 후보 득표 총합에서는 평화민주당에 앞섰으나 평화민주당이 서울과 호남에서 대승을 거두며 지역구 의석을 다수 확보한 것, 당시에는 정당득표가 아닌 획득한 지역구 의석수 기준으로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며 손해를 본 점이 작용했다.

이후 야당 내 주도권을 평화민주당에 내어주었고 통일민주당은 서서히 존재감이 얕아져만 갔다.

3당 합당[편집 | 원본 편집]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 노태우가 여소야대 정국의 타파를 위해 김영삼에게 합당을 제의했다. 김영삼은 고민 끝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맞서 싸우던 독재정권과의 야합을 선택한다.[1] 이로서 1990년 1월 삼당합당이 이루어지고 통일민주당은 소멸하였으며 나머지 2개 당과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으로 거듭난다.

노무현, 이기택, 김정길 등 소수파가 합당에 반대하여 탈당, 꼬마민주당을 만들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각주

  1. 김영삼은 실제로 대통령 당선 후 군부의 하나회나 당내의 민정계를 대대적으로 숙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