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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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琦燮. 호는 완운(蜿雲), 이명은 윤중규(尹仲珪).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7년 4월 4일 조선 후기 명문가인 해평 윤씨 집안에서 유학자 윤기영(尹耆榮) 합천 이씨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경기도 장단도호부(현재 파주시 장단면)이다. 그는 어린 시절 강원도 철원의 문인 박초양(朴初陽)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서울 보성학교에 제1회로 입학하여 190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을 일깨웠으며, 신민회에도 가입했고 신민회 산하의 '청년학우회'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다가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탄압받고 오산학교가 재정난에 시달리자, 그는 국내에서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1911년 8월 서간도로 망명한 그는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립하고, 산하에 무관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창립해 10년 동안 신흥무관학교의 학감 및 교장으로 역임하면서 여러 인재들을 양성했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이 갈수록 거세져 신흥무관학교를 더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2월 9일부터 4일간 유하현 삼원포에서 개최단 '재만임시국민대회'에서 "최근 적당한 시일 안에 독립전쟁을 단행하되, 이에 소요되는 비용은 본회와 임시정부가 공동 부담한다."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윤기섭은 이 결의안을 임시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서간도 대표로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그가 상하이로 파견된 목적은 비단 결의안 채택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서간도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원조와 협조를 요청하는 데 있었다.

윤기섭, 이진산 등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7회 임시의정원이 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의원 당선증서를 의정원에 제출했고 3월 4일 정식으로 의원 자격을 취득하고 공식적으로 의정 활동을 시작했가. 윤기섭은 등원 후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에 관한 대책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그는 3월 16일 회의에서 이진산, 이유필 등과 함께 '개전(開戰)'에 대한 정부 방침을 질의했다. 이에 임시정부 재무차장 윤현진은 '전쟁과 외교 양 방면'을 병행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의 재원 마련을 위한 인구세와 고애채 발행 방침을 밝혔다. 윤기섭은 독립전쟁 개시 시기가 언제인지도 물었지만, 군무차장 김희선은 확답을 피했다.

임시정부의 답변이 이렇듯 미적지근하자, 윤기섭은 이진산, 왕삼덕, 이유필, 김홍서 등과 함께 제7회 의정원 폐회일인 3월 30일 '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정식 의안으로서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의정원은 정부에 건의하고 1주일 내로 정부의 채용 여부에 대한 확답을 요청했다. 건의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금년 5월 상순 안으로 적당한 지점에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군사계획을 절실히 확립하여 군무진행의 방침을 주도히 규정할 것.


2. 군무부 가운데 육군, 군사, 군수, 군법의 4국과 기타 모든 군사기관을 만주[1]로 옮길 것.

3. 금년 안에 적어도 만주에서 보병 10개 내지 20개 연대를 편성, 훈련할 것.

4. 금년 안에 적어도 사관과 준사관 1천 명을 양성할 것.

5. 금년 안에 전투를 개시하되 적어도 보병 10개 대를 출동하도록 할 것.

정부에서 건의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요청하자, 윤기섭은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한 뒤에야 세계가 움직이겠고,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당한 후에야 국민의 단합이 완성되리라"고 호소했다. 이 건의안은 3명의 기권자를 제외하고 만장일치로 의정원을 통과했다. 이후 윤기섭을 비롯한 17명의 의원들은 1920년 3월 19일 '대통령 내도 촉구 결의안'을 제안했다. 당시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고 있어서 임시정부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윤기섭 등은 제안문에서 "임시대통령이 원지에서 국무를 직접 챙기지 않아 많은 지장이 있었다. 정무를 수습, 정돈하여 독립 혈전을 개시하려면 임시대통령이 임시정부에 친림(親臨)함이 필요하다."며 이승만의 조속한 상해행을 촉구했다.

윤기섭은 제7회 의정원 회의가 공식적으로 폐회된 후에도 임시정부에 한족회 및 서로군정서에 대한 재정 지원 등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평안남북도의 공채 발매권을 서간도에 위임하라"는 윤기섭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평안도는 임시정부의 중요한 자금 공급처이자 안창호를 비롯한 서북출신 인사들의 정치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윤기섭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위해 노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 후 윤기섭은 안정근, 왕삼덕, 조상섭, 이진산 등과 함께 서북간도 독립군 단체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는 임무와 신흥무관학교에 이어 독립전쟁을 수행할 장교들을 양성할 수 있는 군관학교 설립 및 운영을 해당 지역 지도자들과 협의하기 위해 간도특파원 자격으로 다시 만주에 파견되었다. 그는 서간도에서 1년간 시찰을 마친 뒤 1921년 2월 중순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귀환했다. 그는 일본군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간도 참변을 자행한 사실을 임시정부에 보고했고, 1921년 2월 28일에 개원한 의정원 제8회 회의에 서간도 대표 의원으로 참석했다.

윤기섭은 이번 회의에서 신도의원 자격 심사의원으로서 새로 선출된 의원의 등원 여부를 심의했다. 당시 의정원은 의원 정족수 미달로 운영에 차질을 빛고 있었다. 일제에 체포되거나 국내로 돌아가면서 사면 청원을 제출한 의원들이 늘어나면서 의원 확보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1921년 4월 29일 의정원은 '법정 인원의 결정'을 위해 토론을 벌였다. 먼저 홍진 의원이 전년도에 의정원에서 현재의 선출의원 수를 총의원수로 간주하기로 의결했음을 상기시키면서, 금년에도 이에 준해 선출된 의원이 반 수 이상 출석하면 개회할 것을 주장했다. 즉, 이번 회의에 선출된 의원이 28인이라면 반수인 14명 만으로도 개회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붕 의원은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적어도 20인 이상으로 개회해야 시비가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고, 신익희 의원도 같은 주장을 펼쳤다. 여기에 조완구신현창 의원이 찬성했고, 다른 의원들은 홍진 의원의 의견을 찬성했다. 이로 인해 논쟁이 가열되자, 윤기섭은 "의원 수가 금후로 더욱 증가는 할지언정 감소하지는 아니할 것"이라고 의원들을 설득해 홍진의 제안이 가결되게 했다.

그러나 윤기섭의 예상과는 달리 의원수 증가는 회를 거듭해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1922년 2월 8일에 개회된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중 의원 선출 주관 부서인 내무차관 조완구는 "법정 인원 57명 가운데 보선이 안된 의원이 32명"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노령,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서북간도는 일제의 탄압과 내부의 분란 등의 문제로 인해 의원을 선출하지 못했고, 오직 기호지역 출신과 서북지역 출신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에 임시정부의 무능을 성토한 이들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면서, 임시정부는 시련에 직면했다. 제10 임시의정원 회의는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요구하는 측과 이를 저지하려는 측으로 나뉘어 공방이 이어졌다. 윤기섭은 임시정부를 유지하자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갈수록 논란이 가열되자 3월 11일 신익희, 양기하, 손정도, 연병호 의원과 함께 다음과 같은 건의안을 의정원에 제출했다.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 강령, 방략, 정책을 원만히 협의하여 적법 또는 합리적으로 신속히 실행키 위하여 내외 각지 단체의 대표와 내외 각지의 신망급 지식이 특정한 인사를 망라한 대회의를 가급적 속히 소집할 일을 임시정부의 건의하자.

이것은 임시정부가 주도하여 독립운동가 대표 회의를 소집하자는 것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 지지파는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회의 개최 계획을 반대했고, 정부유지파도 회의 개최가 시기상조라고 주장해 건의안은 부결되었다. 이후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지지하는 이들이 상하이 교민 102명의 연서로 인민청원서를 의정원에 제출하자, 국민대표회의를 지지하는 의원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의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윤기섭은 인민청원안은 임시정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여겨 반대했지만 대세가 기울자 4월 13일 정부유지파 의원들과 함께 의정원에서 퇴장했고, 임민청원안은 이튿날 바로 통과되었다. 10여 일 뒤 윤기섭을 비롯한 정부유지파 의원 6인은 의정원 명의로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영구적 제도로 개정하기 위해 4개월 이내에 임시의정원 소집과 아울러 광복운동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하자.

윤기섭은 이에 대해 "본안의 정신은 조직체를 좀더 완전하고 단단하게 하자 함에 있으니 국민대표회의에서 무엇을 하기만 기다리지 말고 본원에서 헌법, 관제, 원법 전체에 착수하여 가히 개정할 자를 개정하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국민대표회의 지지파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제10회 의정원 개회 40일째인 1922년 5월 8일 '법정연구회'를 설치하여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법규와 제도를 개선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금후 5개월 이내에 임시의정원 임시회의를 소집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수정 통과되었다. 즉, 국민대표회의에 대응하여 소집하려던 광복운동자회의는 제안에서 삭제되었다.

이후 임시의정원 내에서 노선 관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국민대표회의 지지 의원들은 이승만 임시대통령과 국무원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윤기섭은 양측의 입장을 절충시키고 임시정부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로 끝났고, 국민대표회의 지지 의원들이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임시의정원의 위세는 매우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윤기섭은 국민대표회의가 열리는 시기인 1923년 제11회 의정원 회의에서 제7대 의장에 선출되었다.

의장에 선출된 윤기섭은 그 직후부터 이승만 대통령 탄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심했다. 1923년 4월 2일, 임시의정원은 조덕진을 비롯한 9명의 의원들이 제출한 '대국쇄신안'을 통과시켰다. 대국쇄신안은 과거 모든 사업이 진전되지 못한 원인을 규명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여론을 채택하여 적절한 독립운동방략을 연구하고 독립운동 국면을 일신시키자는 내용이었다. 조덕진 등은 연이어 3개항으로 된 대국쇄신 실행안을 제출했다.

첫째, 법제를 시의와 민의에 맞게 개정할 것.


둘째, 임시의정원의 감독 아래 정부가 '민중기관'의 뜻을 살펴 적절한 계획을 세워 독립운동을 통일적, 적극적으로 진행될 게 할 것.

셋째,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할 것.

이후 조덕진을 비롯한 12명의 의원이 서명하여 탄핵안을 제출했고, 4월 28일 의정원 회의에 상정하여 안건을 심사할 특별위원으로 최창식을 비롯한 5명의 의원을 선정했다. 이들이 심사를 거쳐 작성한 탄핵안 발의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1. 공무도 없이 정부 소재지를 떠나 정무를 지체시키고 시국을 수습하지도 못함.


2. 국정원의 동이나 국무원의 연서도 없이 교령을 남발함.

3. 행정 부서를 정돈하지 못하고 법률을 준수하지도 못하면서, 또한 준수하도록 만들지도 못함.

4. 구미위원부와 그 직원, 주미공사를 독단적으로 설치함.

5. 외국공채 사용과 구미위원부의 재정을 마음대로 사용함.

임시대통령 탄핵 논의는 더 나아가 권력 구조를 개편하기 위한 임시헌번 개정으로 이어졌다. 4월 27일 임시의정원 부의장 도인권 등 26명은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그에 속했던 직권은 국무원과 임시의정원에 나누어 이관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임시헌법의 개정 등을 어떠한 '특종회의'에서 행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의 헌법개정안을 제출했다. 이 특종회의는 국민대표회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처리가 늦어지자, 문시환 의원은 "국민대표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긴급 제안을 제출했다. 이 안은 임시의정원의 권위를 무시하는 내용임에 분명했지만 5월 4일에 통과되었다.

이에 정부유지파 의원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조완구는 국민대표회의와 의정원이 병립하는 일은 의회사상 기이하며 큰 치욕이라면서, 반대파 의원들을 비난하는 내용의 성토문을 배포했다. 국무총리 노백린도 <국무원 포고>를 발표해 현 임시정부의 유지와 국민대표회의 측의 반성을 촉구했다. 이때 윤기섭은 의장의 직권으로 문제가 되었던 임시헌법 개정안 결의를 정부에 보내지 않고 무효를 선포한 뒤 5월 19일 제1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종결시켰다.

1924년 2월 29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제12회 의정원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선출된 36명의 의원 중 이 회의에 참석한 이는 의장 윤기섭을 비롯해 여운형, 조완구, 조상섭, 최석순, 김붕준, 김승학 등 7명에 불과했다. 국무원에서는 국무총리 노백린, 내무총장 김구, 외무총장 조소앙, 재무총장 이시영이 출석했다. 이렇듯 참석 의원이 얼마 되지 않아서 회의를 열지 못하던 임시의정원은 보선 의원의 자격심사와 사면을 청원한 의원들의 문제 때문에 정식의안 처리를 3월 21일에야 수행했다.

이런 상황에 질려버린 윤기섭은 의정원 회의에서 발생한 '문시환 동의안'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3월 21일 의장직 사면원을 제출했다. 하지만 그의 사면원은 바로 처리되지 않았다. 3월 26일 열린 회의에서도 의장 사면의 건으로 의원들간의 토론이 거듭되다가 3월 27일에야 의장 사면원이 통과되었고, 다음날 부의장이었던 조상섭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윤기섭은 의장직에서 물러난 후 6월 10일에 의원 사면원도 제출했지만 이는 처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6월 25일부터 다시 의정원 회의에 참석했다.

윤기섭은 조상섭, 김상덕 등 18명의 의원들과 함께 7월 12일 회의에서 "독립운동의 민족적 기초 조직을 공고히 하고 독립운동의 방침을 쇄신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립당대표회의소집안'을 제출했다. 임시정부가 주도하여 독립운동 정당을 창당하자는 이 안건은 의정원의 논의를 거쳐 7월 17일에 통과되었다. 임시정부는 1924년 9월 국무원령 제1호로 <독립당대표회의소집간장>을 발표하고 이를 위한 소집위원회도 구성했다. 그러나 이 독립당대표회의 소집은 정당이 설립될 경우 국민대표회의 때처럼 임시정부의 존립에 위협을 끼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무산되었다.

그러던 1920년대 중반 안창호 등이 좌우익 세력을 통합해 민족을 대표할 유일당을 창당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1926년 12월 10일 국무령에 선임된 김구는 내각을 구성하고 유일당 운동에 호응하기 위한 개헌을 서둘렀다. 윤기섭을 비롯한 14명의 의원은 1926년 11월 20일에 개원한 의정원에 '헌법개정 제의안'을 발의했다.

이 안건은 12월 23일 가결되었고, 이에 따라 헌법개정 기초위원으로 윤기섭, 이규홍, 정원, 김철, 김붕준을 선출했다. 그러나 윤기섭이 제출한 임시약헌 초안은 내용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이유로 다수 의원들의 반대를 사 통과되지 못했다. 그 대신 김갑, 이규홍, 황의춘 등이 약헌 초안을 제출했고, 임시의정원은 이를 의결하고 3월 5일 공포해 4월 11일부터 시행했다.

이후 윤기섭은 한국 유일독립당 상해 촉성회에서 임시정부 계열을 대표하여 24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정당 설립 운동에 동참했다. 그는 1927년 11월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 연합회를 개최해 각 지역의 촉성회를 통일하여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고자 게획했다. 그러나 촉성회연합회의 활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결국 별도의 단체를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당 운동이 결렬된 후, 윤기섭은 민족주의 인사들과 함께 독자적인 정당 결성에 나섰다. 좌파 세력이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부정하자, 우파 진영 인사들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기 위한 정당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25일 이동녕, 안창호, 조소앙, 김구, 윤기섭 등 28명의 발기인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처음에 비밀결사로 조직되었지만, 1년이 지난 1931년부터 당의 존재를 표면화하면서 민족진영의 대표적인 단체로 활동했다. 그들은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신민주국 건설과 균등사회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런데 윤기섭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독립당을 탈당했는데, 그 이유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1932년 1월 초 난징에서 신익희와 함께 중국 정부 및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는 한인들을 중심으로 한국혁명당을 결성했다. 이 당에는 성주식, 나월환, 최용덕, 김홍일, 연병호, 김사집, 정태희 등이 참석했다. 윤기섭은 한국혁명당 이사장을 맡아 당을 대표했다. 이에 대해 한국독립당은 한국혁명당에 나월환 같은 아나키스트 계열 인사와 정태희 같은 좌익계 인사가 포함된 점을 들어 한국혁명당을 "백적묵의 혼혈아'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그가 임시정부와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혁명당을 창설한 후에도 의정원 회의에 계속 참석했고, 1932년 항저우에서 열린 제24회 의정원 회의에도 참석해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 국무위원 선출은 전임자의 임기가 만기가 되지 않았는데도 선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임시약헌에 위배되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윤기섭은 임시의회 소집을 요청했고, 1933년 3월 6일에 열린 제25회 회의에서 국무위원을 새로 선출했다. 이 회의에서는 기존 9명의 국무위원을 11명으로 늘렸는데, 그는 이때도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정상화를 위해 진력했다.

1933년 말, 윤기섭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한 재만 한국독립당과의 연계를 추진했다. 그는 한국혁명당을 대표하여 신익희와 함께 재만 학국독립당 대표 신숙을 만나 합당에 관한 절차를 논의했다. 이후 재만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이 그를 만나러 난징으로 왔고, 두 사람은 서로 논의한 끝에 두 당이 합당하는 게 두 당 모두에게 이득이 될 거라는 데 동의했다. 당시 한국혁명당은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조직의 확대를 꾀하고자 한국독립당과 합당하길 희망했고, 만주에서 쫓겨난 한국독립당도 중국 관내에서 새로운 활동기반을 마련하려면 한국혁명당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렇게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양당간의 합당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1934년 3월 1일부터 8일까지 난징에서 윤기섭, 신익희, 성주식 등 한국혀명당 대표와 홍진, 신숙 등 한국독립당 대표들이 만나 신한독립당의 간부진을 선출하고 당의와 강령을 제정했다. 신한독립당의 중앙위원장에는 홍진, 총무위원장에는 윤기섭이 선임되었다.

한편, 윤기섭은 1932년 10월에 결성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신익희와 함께 한국혁명당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이때 그는 상하이의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동지회 등 5개 단체의 대표들과 만났다. 이 동맹은 각 단체가 연합하여 단일대당 결성을 이루기 위한 임시기구로 일종의 협의체 형식을 띠었으며, 윤기섭은 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34년 3월 1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대회에서 "가맹단체는 물론 기타 혁명단체를 전부 해소하고 단원을 통일동맹에 합류시킬 것"을 통일 방침으로 정하고 임시정부 역시 폐지한다는 방안이 결정되자, 임시정부 유지를 당헌으로 규정했던 한국독립당이 거세게 반발했다. 여기에 의열단의 아나키즘 이념을 문제삼는 민족주의 인사들의 반대도 거셌다.

이에 윤기섭은 홍진과 함께 통합을 위해 설득에 적극 나섰다. 먼저 의열당과 통합을 반대하는 신한독립당 내 인사들의 협조를 구하고,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냈다. 그 후 김구를 찾아가 동참을 호소했지만, 김구는 임시정부는 절대 해체할 수 없으며 과거 통일운동 실패의 전례에서 알 수 있듯 이념을 달리하는 세력과 함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윤기섭은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1934년 9월 20일 국무위원 사직서를 제출한 뒤 임시정부를 완전히 떠났다.

1935년 7월, 중국 관내 지역에서 활동하던 5개 정당 단체가 중심이 되어 민족혁명당이 탄생했다. 이때 윤기섭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어 난징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을 단행한 일제가 1937년 11월 난징을 침공하자, 윤기섭은 11월 14일 민족혁명당 구성원들과 가족들을 인솔하여 난징을 탈출하고 1938년 3월 13일 국민정부 수도인 충칭에 도착하여 민족혁명당 충칭시 구당부를 설치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이후 민족혁명당은 1941년 5월에 열린 제5기 제4차 당중앙회의에서 그동안의 입장을 바꿔 임시정부 참여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우선 한국독립당 측에게 양당이 병합하여 임시정부를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은 중국공산당으로 넘어간 조선의용대 소속 당원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에 민족혁명당은 1941년 10월에 열리는 회의에 결원된 각도 의원의 보선에 출마해 의정원에 참여하려 했다.

의정원 의장 김붕준은 민족혁명당의 임시의정원 참여를 희망하여 민족혁명당의 김원봉, 한국독립당통일동지회의 손두환과 제휴하여 의장 직권으로 각도 선거민에게 의원 보선을 통지하고 결원된 의원들을 선거하도록 통지했다. 이 때 22명의 의원이 보선되었는데, 윤기섭은 경기도 의우너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 출신 의원들의 의회 진출은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임시정부는 1941년 10월 15일 제33회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려던 보선 의원들의 의정원 진출을 저지하고 내무부장 조완구 명의로 '내무부 공고 제1호'를 발표하여 선거 무효를 공표했다. 이후 한국독립당은 의정원 회의에서 의장 김붕준을 탄핵, 제명했다. 이리하여 윤기섭은 7년만에 다시 의정원에 진출할 기회를 상실했다.

1년 후인 1942년, 제34회 의정원은 비로소 좌익 진역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윤기섭은 의원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의정원 대신 임시정부 내에서 일하기로 결정하고 1943년 3월 군무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그가 군무부 차장을 맡을 직후 맞이한 난관은 '한국광복군 행동 9개준승' 존폐 논란이었다. 중국 국민정부와 임시정부가 합의한 이 합의서는 광복군이 중국 국민혁명군에게 예속되어 독자적인 행동을 제약받는 결과를 야기했다.

이에 민족혁명당계 의원들은 즉각 취소를 주장했지만, 한국독립당계 의원들은 중국정부와의 관계를 들어 점진적으로 개선하자고 주장했다. 이때 윤기섭은 "광복군은 중국의 노예군대"라는 극단적인 언사로 중국측의 주권 유린을 강하게 규탄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와 끝까지 함께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이를 각하하고 중국 정부와 지속적으로 협의하여 차차 개선해나가기로 결정했다. 그 후 윤기섭은 1944년 6월 1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생활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의 생활을 관장했다.

8.15 광복 후, 윤기섭은 1946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 당원 신분에서 민전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중도우파 스탠스의 정치노선을 지닌 그는 좌우합작위원회에 참가. 그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위원에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로 관선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서대문구 불광동 자택에서 머물고 있다가 1950년 8월초 무렵에 납북되었다. 장녀 윤경자의 증언에 따르면, 사복을 입은 사람이 지프차를 몰고 와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다며 윤기섭을 만나기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윤기섭은 가족에게 금방 돌아오겠다면서 그 사람과 나간 후 그대로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납북된 윤기섭은 1951년 9월 중순에 북한의 소련과 중공 대사관을 방문해 각국 정부에 보내는 호소문을 전달했다. 호소문의 내용은 전쟁의 참상이 심하니 조속한 휴전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1956년 7월 안재홍 등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북한 정부로부터 온갖 제약에 시달린 그는 1959년 2월 27일 평양에서 사망하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선 반공 혐의로 숙청되었다는 설과 건강 악화로 병사했다는 설이 대립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윤기섭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각주

  1. 중국 동삼성과 연해주, 흑룡강까지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