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창 (1892년)

申鉉彰.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2년 1월 7일 충청남도 논산군 부적면 인천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8년 세브란스 의전(醫專)을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애국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동년 3월 단장인 신현구의 명에 의하여 군자금을 지참하고 상해 임시정부에 밀파되어 전달한 후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한 후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가 조직되자 그는 양하창(梁瑕彰)과 함께 간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9월에 “태평양회의 선언서”를 발표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1월 25일에는 상해에서 대한적십자회 정기총회가 개최됨에 그는 동회의 상의원(常議員)에 뽑혀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28일에 결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가입하여 이사를 역임하였는데, 그해 말에 만주 독립군이 노·중 국경지대에서 추위와 식량난에 굶주린다는 소식이 상해로 전해지자 노병회에서는 성금을 모금하여 급원금(急援金) 50원을 독립군부대장 김규식에게 송금하는 등 활동하였다.또한 김구·이유필(李裕弼)·여운형·손정도·나창헌 등이 중심이 된 노병회는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고, 군인 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조달을 목적으로 조직되어 무장항일투쟁의 결의를 굳게 하였다.

1929년에 귀국한 그는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사상을 초월하여 민족독립 의지로 뭉쳐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였으며, 동년 7월 21일에는 신간회 서울지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그러나 국내에서의 활동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전북 전주, 평북 철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병원을 개업하여 의료업에 종사하였다. 1942년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요시찰 대상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를 받다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되었다. 1951년 8월 13일 논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신현창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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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