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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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承學. 자는 우경(愚卿), 호는 희산(希山), 이명은 김탁(金鐸).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1년 윤7월 12일 평안도 의주부 피현면 마산동(현 평안북도 피현군 광리)에서 아버지 김덕린과 어머니 강릉 최씨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배천 김씨의 시조 김선(金善)은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金鳴鍾)의 25세손으로, 조선 성종 때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재임 중 죄를 지어 1476년에 평안도 의주목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후손들이 김선의 선조가 살았던 황해도 배천군을 본관으로 정해 경주 김씨로부터 분적했다. 11대조 김양필은 이이의 문인이었으며, 10대조 김능호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해 호성원종공신이 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승학의 조부 김흥려 대에 이르러 가산을 탕진했고 아버지 김덕린 대엔 가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김승학이 출생한 때로부터 이듬해인 1882년 가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청나라 군사 수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오면서 무고한 인민을 살육한다는 소문을 듣고 겁이 난 인근 도시 피난민들이 김승학 가족이 살던 마산동까지 몰려오는 바람에 김승학의 부모가 애써 농작한 곡물이 피난민들의 점심거리로 소진되고 말았다.

결국 농사 지을 길이 막막해진 김덕린은 인근 남서쪽 광하동으로 이사가서 백의일, 백의손, 백인거, 박의관, 한응우 등 여러 집을 전전하며 소작인으로서 생계를 이어갔다. 흉년 때는 초근목피로 연명했는데, 김덕린은 매일 품팔이를 했고 어머니는 이웃집 방아를 찧어주고 삯으로 등겨를 받아서 아침은 겨밥, 저녁은 송피 범벅으로 겨우 끼니를 떼우며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가세가 너무 기울어서 자녀를 서당에 보낼 수 없었기에, 김승학은 낮에는 땔나무를 해오고 밤에는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김승학의 회고록 <망명객 행적록>에 따르면, 하루는 지게를 지고 앞들 밭에 나가서 떨어진 콩잎을 긁어모으던 그에게 친구들이 같이 글방에 가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김승학은 처음에는 "나도 서당에 가고 싶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친구들이 거듭 설득하는데다 자기도 서당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서 결국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조산재 서당에 가서 아버지가 예전에 소작해준 집 주인이었던 백선명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김덕린은 아들이 조산재 서당에 가는 걸 허락해줬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0살 때인 1890년에 조산재 서당에 입학한 그는 1897년 까지 한학을 수학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틈날 때 짚신을 삼고 돗자리를 짜서 시장에 내다 팔아 종이와 붓 값을 마련했다. 그리고 16살 때인 1896년에 김내정과 혼례를 치렀고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성률(1903년생), 딸은 성희(1906년 생), 차남은 성철(1908년생), 그리고 막내는 성준(1913년생)이다. 1896년 10월 광상동으로 이사갔다가 1897년 봄 광하동 선영 아래에 아버지와 첫째 매형 문용덕이 함께 초가삼간을 짓고서 다시 이사갔다.

1899년, 김승학은 월화면 진음동 증골에 있는 증곡재에 입학해 조병준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병준은 1895년 명성황후을미사변으로 죽자 '국수보복'의 대의를 품고 유인석의 호소에 응해 고향의 유학자 장원섭, 신우현 등과 함께 평북 창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른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배일감정이 강한 사람이었고, 김승학은 그로부터 민족의식을 배양받았다. 또한 증곡재에 모인 평북 청년 7~8백명이 시국을 토론할 때 열심히 참여하면서 시국에 대한 문제의식을 깊이 느꼈다.

1900년 음력 3월 15일, 조병준은 자신의 스승 박문일의 제사를 마친 뒤 눈물을 흘리며 시국을 통탄했다.

우리는 섬나라 오랑캐 왜노와 4백년 동안 원수인데, 지난 을미년에 우리 국모 명성황후를 참시하였으니, 우리 국민은 왜노와 불공대천지수이며, 더욱 우리 선비로서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 그러므로 삼남 학자들은 처처에서 거의하여 혈전하는데, 우리 지방 인사들은 묵묵부동하니 이런 수치가 어데 있는가?

조병준과 함께 창성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동지 장원섭도 학생들에게 거의를 암시하는 연설을 했다.

우리는 산중에서 성현들이 지은 책만 크고 높은 목소리로 읽거나 심성정, 이기론을 연구만 하는 것보다 빨리 군사를 양성하여 왜적과 혈전할 것을 준비하는 것이 급무인데, 국내에서는 군인을 양성할 곳이 없으니 불가불 서간도에 건너가서 지점을 물색하며 중국 군벌들과 악수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다.

김승학은 조병준과 장원섭의 연설에 크게 감동해 서간도를 답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00년 음력 9월에 신의주 진리면 탑동에 사는 고종형 고효겸을 찾아가서 답사 취지를 말했다. 고효겸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시간도로 가서 무엇을 할 지를 물었다. 이에 김승학이 답했다.

듣건대 서간도는 본래 우리나라 강역인데 우리가 포기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청국에서 관리하거니와, 백여년 전부터 우리나라 빈민들이 건너가서 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여러 만호가 농업을 경영하고 사는데 그 지방을 나선국이라고 한답디다. 그곳은 인심이 순후하고 곡물이 풍부하여서 누구라도 가기만 하면 의식은 공급하여 준다고 하며, 그곳에서 사는 중국인 왕교란이라는 장수가 원래 향마적 수괴로서 중국정부에 귀화하여 수만명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고 합니다.


또 그 곳 통령으로 있는 한병화란 사람은 혹 조선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그의 모가 조선인이라 하기도 하는데 재산이 누거만이라 하며, 왕, 한 2인이 나선국을 관리하고 있는데 한통령은 조선인이 찾아가기만 하면 후대할 뿐만 아니라 청구하는 대로 수응하여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의 우견에는 이 두 사람을 찾아가서 우리나라 형편도 말하고 잘 교섭하면 그곳에서 군대를 양성할 지점을 차득할 수도 있을 듯하고, 잘만하면 양군할 물자도 의뢰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합니다.

김승학의 이 말을 듣고 설득된 고효겸은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이후 김승학은 10월 초순에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부모님께 고별하고 집을 나서 의주에서 고효겸을 만난 뒤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북동쪽으로 압록강변 벽동군 벽단진까지 가서 강을 건넜다. 이때 그는 <나선국을 찾아서>라는 시를 지었다.

듣건대 나선국은


새로 별천지를 열었다 한다.

부질없이 설득해 볼 생각으로

지금 압록강을 건너노라.

왕교란, 한병화 두 사람은

알지 못하노라, 어떤 인물인지.

왜적이 우리나라를 덤벼드니

선비들이 붓을 던지고 무기를 잡을 때로다.

이후 1900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서간도 환인, 통화 지방 등을 탐방했다. 그러나 의화단의 난으로 교통이 두절되어 나선국이 있다는 곳까지 가지 못하고 끝내 왕교란, 한병화를 만나지 못한 채 집안현에서 고구려의 옛 도읍터와 광개토대왕릉비를 구경한 뒤 1901년 3월에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그는 귀국할 때 뜻을 이루지 못한 것에 탄식하며 한시를 읊었다.

경영하고자 가던 길이 뜻과 같지 못하니,


검을 쓰다듬으면서 동으로 돌아오매 한탄을 참을 수 없노라.

증곡재로 돌아온 김승학은 조병준에게 그동안 서간도에 갔다온 일을 설명했고, 조병준은 뜻은 가상하지만 너무 무모했다며 앞으로 공부에 힘쓰다가 좋은 기회를 만나서 실천하게 되면 선봉이 되라고 격려했다. 그 후 동료들은 김승학을 '나선국 선비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김승학은 1903년 가을부터 인근 광제재(廣濟齋)에서 학동을 가르치는 훈장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1904년 5월에 경의문대[1]에 응시해 합격했고, 1904년 8월 17일에 서울에서 한문 박사과 시험을 치렀다. 당시 시험을 처 온 사람은 360명인데 모두 50~60대 유학자들이었고, 김승학만 30세 미만의 청년이었다. 당시엔 학부대신 이재곤이 일본에 가 있어서 차관 고영희가 대리로 출석했고, 학무국장 윤치오와 장세기가 수석 시관을 맡았고, 그 외에 10여 명의 시관이 배석했다.

김승학의 회고록 <망명객 행적록>에 따르면, 주변 사람들이 시험관들에게 뇌물을 줘서 합격을 보장받으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승학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 그럴만한 돈도 없는데다 금전을 주고 박사를 살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거절했다. 그리고 10월 1일, 그는 낙방 통보를 받았다. 반면 시험 첫날 논어 첫 구절도 통독하지 못한 윤창룡이란 자는 합격했다. 이에 분노한 그는 학무국장 장세기(張世基)를 찾아가 항의했다.

금번 과거에 착오가 있으니 파과(과거시험을 취소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윤창룡과 저를 대면 회시(다시 시험봄)시켜주거나 하시오.
파과라니 무슨 말이며, 재시는 무슨 말이냐?
재시하라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쨰, 당선 유생 윤창룡은 첫날 면강 시에 논어의 제1장 제1절을 외우지 못하여 불자 패를 받았고, 둘째, 그는 작문 문제의 뜻부터 모르는 사람이니, 자기가 지었다는 작문을 배독시켜 보면 알 것이므로 저와 윤 양자를 한 자리에 앉히고 작문을 제시해주시오.

그러자 장세기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를 한성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해주겠다는 것이다.

김학사의 요구도 일리가 있을 듯하나 그러한 요구는 도저히 응낙할 수 없는 일이고, 다른 방법이 있는데 김학사가 들으면 다행이고, 듣지 않으면 김 학사에게 불행할 것이요. 이번 박사과는 노유들을 위하여 한 것인데 김학사는 가장 청년이라, 앞길을 개척하자면 박사학위나 가지고서는 도저히 될 수 없을 터이니, 그러지 말고 학교에 입학해서 앞날의 실속 있는 지위를 얻도록 힘쓰는 것이 좋겠소. 내가 소개하여 줄 터이니 한성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시오. 그래서 본과 1년 반이나 속성과 6개월이나 졸업만 하면 박사보다 썩 나은 학교 교원으로 취직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시오.

김승학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주변인들이 한사코 권했고 장세기가 사서 12질, 산술책 1권, 교육방침 1권을 주면서 "이번에 박사되지 못한 것을 조금도 낙망하지 말고 고등사범학교에서 1년 반만 수업하면 허위인 박사보다 성공할 터이니 내 소개를 가지고 학교에 입학하라."고 말하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승낙했다. 그는 이리하여 1904년 8월 25일 한성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1년여 동안 신학문을 수학하며 지냈지만 학비가 궁핍해져 1905년 9월에 자퇴하고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하지만 그는 그 동안 자신이 알고 지냈던 유교의 세계와는 색다른 서양의 학문을 익혔고, 이것이 나중에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05년 10월 27일 어머니가 사망하자, 김승학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뒤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그러다가 1907년 5월, 그는 일명 구시학교 사건에 휘말렸다. 당시 의주에 구시학교가 설립된 이래 일본인 교사가 학교에 와서 청년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교장 장응량이 많은 금전을 일본인 교사에게 낭비하다가 재정이 곤란해지자 향교 토지에서 추수된 곡식 수백 석을 향교 승낙도 없이 팔고 토지까지 매각하려 했다. 이에 분노한 향교 직원과 유생들은 의성향교를 새로 설립하고 조병준을 학장으로 추대하며 장응량의 전횡을 고발했다.

김승학은 상중인 몸으로 여기에 끼고 싶지 않았지만 유생들이 도와줄 것을 강권하자 어쩔 수 없이 김경하와 함께 대한매일신보에 구시학교 고발 신문광고를 내고 서울로 상경하려 했다. 그러던 중 장응량이 부정 지출 사실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 장부를 가지고 서울로 도주하려 했다가 유생 정성록에 의해 붙잡혀 열차에서 끌어내려지면서 왼쪽 팔이 부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장응량은 그 길로 서울로 도망가서 한성지방검사국에 정성록을 구타 상해죄로 고소했다. 검사국은 마침 상경해온 김승학의 서울 숙소에서 정성록을 발견하고 김승학이 그와 관련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구속해 한성지방법원 구치감에 3개월간 투옥시켰다. 다행히 의주부윤이 나서서 1907년 6월에 구시학교 장부를 학부에 보냈고, 학부에서 장응량의 부정 지출을 발견한 후 장응량을 견책하고 김승학과 정성록은 석방되었다.

1907년 8월, 일제가 정미 7조약을 강제 체결한 뒤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분개한 김승학은 종로 각 곳을 돌아다니며 배일 강연을 했다가 일본군인에게 체포되어 평리원 구치감에 3개월간 수감되었고, 당시 평리원 검사 유동작에게 태형 10대를 선고받고 출감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이후 그는 8월에 신민회에 가입했고, 비현면 면감을 맡았다. 또한 1907년 9월 의주 비현면 당후동에 설립된 극명학교 교감으로 부임했다.

1909년 1월 28일, 김승학은 13개 학교 연합 학생 천여 명을 인솔하고 신의주에서 순종 황제의 순행을 맞이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황태자의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황제를 배행하면서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게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서북 지역에서는 일장기 게양 거부 운동이 확산되면서 일장기를 파는 일기조합소가 습격당했다. 김승학은 여기에 호응해 각 지영반에 일장기 게양 반대를 명했다. 또한 그는 신의주역과 의주역 사이를 다니면서 일장기 든 사람들을 만나면 말로 타이르고 깃발을 찢었다. 그러다가 결국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신의주 경찰서에 끌려가 이틀 동안 무수한 고문을 받았고, 극명학교 교사 이승근과 체육교사 박형권도 같이 붙잡혀 사경에 이를 정도로 고문당했다.

김승학은 극명학교를 떠나 1908년 3월 비현면 노남리에 개교한 명의학교 교사로 전근되었다. 그러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 경찰은 매일 같이 학교에 와서 김승학에게 안중근과 무슨 관계냐고 추궁했고, 학부형들에게 "김승학과 같은 불온분자에게 교육을 받으면 순량한 자제들까지 불량자가 된다."고 을러댔다. 결국 김승학은 국내를 떠나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1910년 2월 13일자로 이름을 김탁(金鐸)으로 개명한 뒤 그해 10월 만주로 건너갔다. 이리하여 장장 35년에 걸친 그의 항일투쟁이 시작되었다.

김승학은 1910년 10월 만주로 건너간 뒤 봉천성 서탑에 있는 한인상회 동익풍과 합동하여 요령선 반선현 대청퇴자에서 수전을 개간했다. 그러나 1911년 자연 악화와 마적의 약탈로 인해 중단했고, 이듬해인 1912년에 봉천성 관립 강무당 속성과에서 6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은 후 의병단에 가담했다. 그는 의병단원으로서 년간 만주와 몽고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1919년 7월 만주에 있던 의병단, 향약계, 농무계, 포수단 등이 통합하여 결성된 대한독립단에 가입했다.

김승학은 1919년 8월 초 대한독립단 도총재 박장호를 찾아가 대한독립단 국내 지단 설치 계획을 설명하고 결재를 받았다. 그런 후 관전현에서 임시정부 연통재 평북독판부 독판을 맡고 있는 조병준을 찾아가 독판부 특파원을 겸임하고서 백의범, 백기준, 신우현과 함께 국내로 잠입했다. 그는 월화면 화합동 북곡에 사는 고경집을 찾아가 5~6일간 쉬면서 각종 선전문서를 정비하고, 다시 구성군 관서면소로 가서 증곡재 동창 홍식과 배준호에게 구성군 일원의 조직 책임을 위촉했다. 그 뒤 태천군을 거쳐 박천군으로 가서 박승무의 안내로 동군 덕안면장 박래양을 만나 임시정부 연통제 기관 및 대한독립단 지단을 조직했다. 또한 영변군으로 가서 연산면 대성동의 강규묵, 소림면 정상동의 명이항 등 6, 7인을 통해 연통제 기관 및 독립단 지단을 5곳에 조직했다.

그후 김승학은 친족인 북진경찰서 경부 김영걸을 정찰하고자 그의 저택에 방문했다. 김영걸은 그의 안부를 물은 후 김승학을 떠보았다.

저도 조선 사람이요, 또 형님의 제자가 아닙니까. 형님을 만난 지 10여 년입니다. 외국에 가서 계시다더니, 금일 이렇게 뵈올 줄은 실로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터입니다. 그 동안 북진 광부들의 태도가 이상하게 돌변하는 것을 의심하였던 차인데 이곳 오신지 여러 날 되셨지요?

김승학이 정색하고 말했다.

그것이 무슨 억측인지 모르거니와 나는 볼 일이 있어 경성까지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그대가 여기 있다기에 한 번 만나고 싶어서 내방한 것이네.

이에 김영걸은 자신이 이곳에 온 지 3년 되었는데 곧 의주 경찰서로 전근될 듯하다고 하면서 김승학에게 속히 떠나라고 권했다. 김승학은 그제야 김영걸이 자신의 행동을 아는 줄 짐작하고 곧 떠났다. 이후 그는 구성, 태천, 영변, 운산, 영유, 숙천, 강서, 용강 등 평안남북도 일대 52개 소에 연통제 기관과 독립단 지단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각지로 다니며 임시정부와 독립단을 선전했고 맹산 천도교 간부 등 천도교도 53인이 만세 시위 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사건을 조사했다.

1920년 1월 14일, 중국 당국은 일제의 압력을 못이겨 대한독립단과 한족회에 대해 해산령을 통보했다. 이 무렵 만주로 돌아온 김승학은 가뜩이나 "대한독립단의 지단"이니 "한족회의 지부"니 하면서 서로 호수를 획득하려는 갈등이 생기는 것을 보고 우려했던 터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두 단체를 합쳐서 새 단체를 설립하자고 주장했다. 이후 서간도 각 단체 통합 유세단으로서 대한독립단 대표에 선출된 그는 다른 대표들과 함께 각 단체 수뇌부를 개별적으로 방문해 통합을 권유하기로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20년 2월 관전현 향로구에 통일기관을 설치한 뒤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그간의 정황을 보고하게 하고 그 기관의 명칭을 받아오기로 했다. 또한 대표들은 다음 합의안을 도출했다.

1. 각 단체의 통일기관을 설치하고, 국내 왜적의 행정기관 파괴 사업을 실행하되 각 단체의 개별적 명의로 하지 말고 반드시 상하이 임시정부가 지정하는 명의로 할 것.


2. 연호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할 것.

3.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이상의 사실을 보고하고, 통일 법명을 요청할 것.

4. 통일기관읜 국내와 접근한 압록강 연안 적당한 지점에 둘 것.

5. 통일기관의 경비는 원칙적으로 각 단체가 평균 부담하되 국내로부터의 특별 수입금은 통일기고나 군사비에 보용할 것.

김승학은 이렇듯 남만주 통일기관 명칭 승인건 및 통일기관에서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할 때 이용할 무기를 구입할 사명을 이루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향했다.

김승학은 1920년 2월 상하이에 도착한 뒤 프랑스 조계 보창로 보강리 50호에서 유숙했다. 이곳은 임시정부 지정 숙소로 천도교 대표단 신숙, 최동오, 김홍선, 장경순이 하숙하고 있었다. 김승학은 그곳에서 몇달간 머물고 있다가 6월 15일 안창호를 찾아가 대한독립단의 진행 방침을 토의하다가 시간이 부족해 이튿날 대동여사에서 다시 안창호와 만나 대화했다. 안창호는 "대한독립단과 대한청년단연합회가 연합하여 광복군이 되게 하라."고 조언했고, 김승학은 7월 2일에 다시 안창호를 방문하여 논의를 계속했다.

이후 수차례의 토의 끝에, 남만주 광복군 조직은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로서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한독립단, 의용단 세 단체가 통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광복군 편제안에 대한 논의는 7우러 12일부터 시작해 7월 26일 대한광복군사령부 규정, 대한광복군 참리부 규정, 대한광복군영 규정을 확정해 8월 1일 시행을 공포했다. 또한 8월 10일 만주의 통합단체의 명칭이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광복군사령부'로 확정되었고, 김승학은 군정국장 겸 군기국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김승학은 상하이에서 7월 말까지 극비리에 마우저 총과 루거 권총 240정을 구입하고 철궤 4짝을 사서 내부를 고치고 그 속에 무기를 가득 채운 뒤 칠을 새로 하고 나무 상자로 포장했다. 그런 후 해송양행 주인 한진교의 소개로 중국인 장해봉을 만나 만날 장소를 약속한 뒤 안동현까지 이륭양행 선편으로 가고, 관전현 하구까지 목선으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그곳에서 하륙하여 육로로 장음자까지 가는 계획을 수립했다. 8월 초, 김승학은 이륭양행 기선을 타고 상하이를 출발해 73시간 만에 안동현에 당도했다.

그런데 이륭양행 주인 쇼가 배로 올라오더니 하륙하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유는 일본경찰이 이번 배를 특별하게 경계하여 삼도랑두에 정박하지 못하게 하고 경비정이 배 주위에 항상 주시하기 때문에 절대로 하륙하지 말고 상하이로 도로 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김승학은 사정을 설명했고, 쇼는 가지고 온 물품을 전부 이륭양행에 두었다가 2~3일 후에 가지고 가라고 통보했다. 그 후 이륭양행 소속 배가 떠나자, 김승학은 중국 삼판선 1척을 가지고 가서 물품들을 하륙시키려 했다.

그런데 배가 안동현 항구에 접근했을 때 일본 경찰이 느닷없이 들이닥쳤고, 김승학은 급히 뛰어내려 물살을 헤치고 육지로 올라왔다. 그는 근처의 옥수수밭으로 피신했다. 거기서 이틀 밤낮을 숨어지내며 일본 경찰을 피할 방안을 모색하던 그는 사흘째 되던 날 저녁 밭 제방을 넘어서 서북쪽 형제봉을 향해 내달렸다. 뒤늦게 일본 경찰들이 그를 잡으려 달려왔지만, 그는 가까스로 뿌리치고 삼도랑두로 피신했다. 그가 한 집에 들리니, 주인이 깜짝 놀라며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김승학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여기서 50리 쯤 되는 문가구에 사는 최우경인데, 안동현 가서 벼를 팔아가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이 산 동쪽 길바닥에 누웠더니 금전도 다 잃어버리고 모자와 신발도 없어졌으니, 이 모양을 하고야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겠소? 우선 신발만 한 켤레 사다주시면 감사하겠소.

한 사람이 반신반의하면서 말했다.

수상한 사람인데 또 중도에 도적을 만났다니 저 건너편 파출소에 가서 말을 해야 겠다.

김승학이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내가 잘못해서 중도에 자다가 실물한 것이니 법에 말할 것까지 없소.

이에 주인은 "우리는 우리 할 일이나 하지. 남의 일에 간섭할 것이 없으니 신발이나 한 켤레 사다 주어서 보내라"며 아들을 불러 짚신 한 켤레를 가져다줬다. 김승학은 감사히 받고 값으로 20전을 준 뒤 다시 길을 떠나 노동자 행색을 한채 안동현 칠도구 비현정미소로 갔다. 그때 일본경찰 4명이 들이닥쳐 김승학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김승학이 능청스럽게 답했다.

외촌에 사는 최우경으로 벼를 가지고 와서 봄 도정을 하는 중입니다.

일본 경찰은 실내에 같이 있던 7~8인에게 낱낱이 성명을 물은 뒤 안방으로 들어갔다. 김승학은 그 틈을 타 쏜살같이 도주하여 팔도구에 가서 한 중국 음식점에서 점심을 시켰다. 이때 예전에 안면이 있던 김효선이 들어와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 김선생이시오? 뵈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어디로부터 이디까지 가시는 길인지요?

김승학은 그가 일제의 밀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그의 본의를 짐작하고 일부러 마음 놓고 대하는 체 했다. 그러다가 김효선이 밖에 같이 온 동무가 있으니 그와 작별하고 다시 들어오겠다며 나간 틈을 타 곧바로 뒷문으로 빠져나와 구도구의 중국인 친지 집에 숨어서 중국인 옷으로 갈아입은 뒤 이튿날 새벽에 스승 조병준이 있는 관전현 장음자까지 피신했다. 그 후 다른 이들이 양륭양행에서 무기를 무사히 가져오면서, 김승학의 위험천만한 무기 운송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마침내 광복군 사령부에서 무기 수행식이 거행되는 날, 김승학은 장정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 광복군사령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 직속한 군단이며, 임시정부 군무부를 대표하여 우리의 원수 왜노(倭奴)와 혈전하는 기관이요, 제군에게 주는 무기는 국내 동포들의 피와 땀을 모아서 마련한 것이며, 내가 몇 번이나 위험한 경우를 무릅쓰고 다니면서 모집하였고, 4천리 되는 상해를 왕반(往返)하면서 수륙 양로로 가진 고난을 겪으면서 구입한 것이다. (중략)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며, 임시정부 군무부가 주는 것이니, 제군은 그렇게 알고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1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이후 광복군에 속한 무장 독립군은 국내로 진격해 일제의 기관을 70여 차례 습격해 주재소 56곳을 피습하고 면사무소 영림서 20곳을 불태웠으며, 일본 경찰 95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1920년 10월 ‘훈춘사건’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간도 출병이 단행되었다. 이에 독립군 부대는 노령으로 퇴각했고, 간도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일본군에게 무차별 살육되거나 약탈당했다.(간도 참변) 게다가 광복군 내부에서 갈등이 벌어져 1921년 1월 1일 광복군 사령부 제5영장 최찬이 같은 독립군 간부였던 김신택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승학은 그 소식을 듣고 피를 토하며 통곡했지만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고, 결국 광복군정부는 허물어졌고 독립 운동 단체들은 만주를 떠나 연해주나 몽골, 중국 관내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에 김승학은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세하기로 결정했다. 1921년 3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복간하기로 했다. 당시 독립신문의 발행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되어 있었다. 발행을 주도하던 이광수는 변절하여 귀국해 버렸고, 일제의 집요한 교섭으로 프랑스 조계 당국에 의해 신문사는 봉쇄되고 인쇄 도구는 압수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김승학은 상하이가 동양 제일의 국제도시이니 독립운동을 선전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므로 선전기관이 꼭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프랑스 조계 당국과 교섭하여 독립신문 복간을 허가 받고, 또 가지고 있던 독립운동 자금을 이용하여 신문사와 인쇄소를 복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21년 4월 중순 독립신문은 복간되기 시작하였고, 김승학은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그 발행을 총괄했다. 아울러 독립신문사의 부대 사업으로 교과서편찬위원회를 부설하고, 박은식·조완구·윤기섭·김두봉·정신·차이석·백기준 등과 함께 교과서 편찬 사업도 벌였다.

이무렵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이르쿠츠크에서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혁명단체 대표자들의 연석회의인 극동민족대회를 1921년 11월 11일에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김승학은 임원근과 함께 10월 20일자로 대표자 위임장을 발급받고 10월 말 상하이를 떠나 난징, 베이징을 거쳐 봉천에서 대한독립단 대표 박희곤과 이웅을 만난 후 장춘, 하얼빈, 치치하얼, 만주리를 경유하여 11월 초 러시아에 입국했고, 다시 치타를 거쳐 11월 13일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그는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 소식을 듣고 공산주의자들과 소련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 하지만 조선의 독립이 급했기에 애써 참고 회의에 참석해 고려공산당 대표 조동호, 화동한국학생연합회 대표 정광호 등 여러 참석자들과 함께 한국 각 대표단 보고서의 수정위원 책임을 맡았고, 대회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회의를 마친 뒤, 그는 페트로그라드 시내 상황을 시찰하고 1922년 3월에 상하이로 돌아갔다.

1922년 9월 3일, 김승학은 서이도본사에서 대종교에 입교해 영계와 참교 교질을 받았다. 이후 1923년 1월 15일 대종교단의 주요 경전인 <종경>을 인쇄하고, 9월 20일 대종교 2세 도사교 김교헌의 저술인 <신단민사>를 편수 겸 발행자로서 출간했다. <신단민사>는 "단군 신교의 문화 속에서 생활하던 민족의 역사"라는 뜻으로, 그 내용은 선사 시대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로 연결되는 정통을 세우고 청나라와 조선까지 4천여 년간을 우리 민족의 역사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시대 구분은 상고, 중고, 근고, 근세로 나뉘고, 다시 상고는 선사-배달-부여 시대로, 중고는 열국-남북조 시대, 근고는 고려, 요나라-고려, 금나라-고려 시대로, 근세는 조선-조선, 청나라 시대로 나뉜다. 또한 신인 단군을 중심에 두었고 개천기년을 연호로 사용했다.

김승학은 독립신문 1923년 7월 9월, 10월 호에 매회 신단민사 간행 광고를 냈고 11월에 이르러 북간도 여러 중학교에 새 역사 교과서로서 신단민사를 채택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일제가 신단민사를 불온서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압수하면서 책 배포에 많은 곤경을 겪었다.

1923년 3월, 김승학은 한중호조사 선전부장에 선출되어 중국, 한국간 친선을 도모했다. 그해 8월 국내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하자, 8월 29일부터 내지동포수재구제회 총간사를 맡고 의연금 모금 운동을 벌여 수합한 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기탁했다. 그리고 10월 1일에는 상해한인교민대회 집행위원 윤기섭, 여운형, 조덕진, 이유필, 조상섭 등과 함께 <관동진재 한인학살 경고서>를 발표해 일제의 관동대지진 한인 학살을 규탄했다.

우리들은 끊는 피와 사무치는 한을 더 참을 수 없는 이번 적왜의 포악한 마음과 행동을 들어 해내외 동포에게 고한다. 따라서 더욱 일치된 이성으로 적왜를 박멸하고, 조국을 광복하여 자유를 얻기를 갈망하노라. 적의 이번 지진은 기이한 재화라 일시에 폭발되는 그 형세가 참으로 천벌을 받은 것이다. 2백만의 수도이며 문화정치의 중심지인 동경이 별안간 잿더미가 되었으며, 대외무역의 문호인 요코하마와 도읍을 끼고 있는 요새인 횡수하 군항이 동시에 전멸하였다. 인명의 손실이 40~50만이며 재산상의 피해가 60~70억에 달하였다.


변란이 갑작스레 닥쳐오니 사람마다 살기를 도모하느라 다른 겨를이 없는 이때에, 저 간학무도한 적왜는 노랫말을 지어 선동하였다. 경찰은 민중에게 무기를 허락하여 우리 동포를 박살케 하며, 군대는 재앙을 입은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동포 수만, 수천, 수백 명을 산기슭에 몰아 엄밀하게 막아 지키며, 감옥에 있는 죄수처럼 행동거지를 마음대로 못하게 하였다. 한번 도살을 행할 적에는 그 중에 골라내어 우전천 물가에서 기관총으로 쏘아 죽였도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끊으며 수사의 보도를 금지하여 참절한 광경이 6~7천 명에서 내려가지 않으니 이 어찌 천도가 무심하랴?

오늘 이 참극을 차마 행함은 기회를 만나면 우리 민족을 완전히 없애고자 하는 그 마음의 표현임이 더욱 분명하도다. 우리들은 이 원수를 어느 날에 씻으려 하는가? 우리의 몸에 아직 박살의 쇠뭉치가 오가지 않아 잘 살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러한 참변을 당하고도 호소할 곳이 없다하면 이 인생이 그다지 귀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소위 문명이니 인도니 하고 말하는 이 세상이 과연 이러한가? 불공대천이 의분으로 뿐 아니라 자위상으로 자존상으로 적의 굴레와 억압을 일찍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의 생명은 늘 빼앗기고 말 것이니, 반드시 칼과 철퇴와 속사포로 직접 맛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을 아껴 나아가기를 두려워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부모와 형제와 처자와 자신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곡식과 포목과 저택과 가구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영예와 명리와 쾌락과 행복이 하나도 없다. 무엇을 위하여 구차한 생명을 구차히 유지하려 하는가? 구차히 유지하려고 해도 유지하지 못하는 생명을 더 무엇을 기다려 구차에 구차를 강구하는가? 우리는 살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죽는 것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국가를 광복하여 우리의 자유를 얻지 못하면 오직 오늘 내일 사이에 생명은 죽고 민족은 멸망할 뿐이라. 자유를 주지 않으면 죽음을 주소서 한 말은 우리가 도욱 깊이 맛보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이리해도 죽고 저리해도 죽을진대 더욱 유쾌하게, 사내답게, 빛나게, 최하 고기값이라도 하고 죽는 것이 어찌 떳떳하지 않은가?

어찌 하늘이 무심하리오. 죄악에 쌓인 자는 반드시 그 벌을 면치 못하나 지금 저들이 당한 바를 다만 과학상으로만 궁구하지는 말라.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연의 이치가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을 한번 돌아볼지어다. 오늘날 저들이 입은 재앙은 저들이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저들의 운명은 벌써 소멸과 멸망의 길에 들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 발흥한 자루를 빌림이니, 한번 가면 한번 돌아오고 꺾인 것이 펼쳐지는 천의 가르침이 매우 미묘하도다. 죽는 것을 받지 못하거나 때가 왔을 때 실행하지 않으면 그 살고 못 삶을 누구에게 한탄할 것인가?

동포여! 우리는 무엇으로든 일어나지 않을 수 없도다. 무엇으로든지 살기 위하여 죽기 내기 안할 수도 없도다. 슬프고 아프도다. 우리 동포여! 일치단결하여 살길을 개척할지어다. 우리들이 먼저 참학을 당한 동포의 사정을 아는 대로 기록하여 동포의 앞에 바치노니, 눈물과 한과 아픔과 쓰림을 용맹과 결단과 일치와 희생으로 쓸어버리고 고유한 광영과 행복을 지금부터 찾아 누려볼지어다.

이후 김승학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가 위축되던 시기인 1924년 4월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 그리고 같은 해 5월 학무부 차장에 임명되어 학무총장을 대리하면서 그 세력 회복과 확대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임시정부는 1926년 10월 김승학을 육군 주만 참의부 제4대 참의장으로 임명하여 남만 독립군 단체의 통합 사명을 부여하면서 취임하기를 독촉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서는 1925년 이래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 등 3부가 정립(鼎立)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역량을 분산시켰다. 때문에 3부 통합의 필요성이 대두하였고, 그것은 1926년부터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던 민족유일당운동에 의해 더욱 증폭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3부 통합의 임무를 맡은 이가 바로 김승학이었다. 이는 임정이 1920년 2월에 그가 대한독립단을 비롯한 남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을 통합하여 광복군사령부를 결성하였던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해 3월, 그는 참의부 소재지인 서간도 환인현에 도착하여 3부 통합운동을 주도했다. 같은 해 8월, 제4회 중앙의회를 개최하여,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전선 통일을 위하여 신민부·참의부와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도모할 것과 전민족의 독립운동전선 통일을 위하여 유일당 촉성을 준비할 것” 등을 결의함으로써 3부 통합에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각 부에서 3명씩 대표를 선출하여 3부 통합운동을 전개했다. 참의부 대표는 김승학, 장기초, 박희곤 3인, 정의부는 김동삼, 지청천, 이관일 3인, 신민부에서는 김좌진, 정신, 김동진 3인이 선출되었고, 이들은 길림에 모여 3부 통합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참의부 내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제 3중대 심용준 일파가 중앙호위대장 차천리(車千里)를 살해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나아가 심용준 일파는 1929년 4월 정의부 주류파 및 신민부 민정파와 연합하여 국민부를 결성한 뒤, 조선혁명당과 그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설치하여 당·정·군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김승학을 비롯한 참의부 주류파는 같은 해 11월 신민부 군정파 및 정의부 소수파와 연합하여 군민의회를 결성하였다. 나아가 ‘이당치국론’에 따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당군으로 한국독립군을 설치함으로써 이들 또한 당·정·군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1929년 11월 말 회의를 마치고 귀대하던 중 김동진은 중동선에서, 정신은 화피전자 부근에서 각기 피살되고 김동삼은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김좌진은 1930년 1월 중동선 산시에서 공산당원들에게 피살되었다. 이로 인해 3부 통합은 무산되었고 독립 운동 세력은 위축되었다.

1929년 2월 5일, 김승학은 회의를 마치고 군무위원 박창식, 김종성과 함께 귀가하는 길에 환인현 와니전자에서 잠복해 있던 봉천총영사관 통홤분관 경찰에게 붙잡혔다. 그의 체포는 참의부 출신 김소하, 김선풍, 김영제, 송운봉 등 일제에 투항한 자들이 1928년 10월에 선민부를 통화현에 설치한 뒤 독립운동가 정보를 밀고했기에 이뤄진 것이었다. 김승학은 통화 일본영사관에서 2주 동안 많은 고문과 심문을 받았는데, 주로 상하이에서 무기를 얼마나 구입하였는가, 또 독립운동사 자료를 수집한 것은 어디 두었는가 하는 것을 조사 받았다. 그리고 봉천의 일본 총영사관을 거쳐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김승학은 압록강을 건널 때 시 1수를 지었다.

나라를 버리고 집을 떠난 지 이십여 년만에


죄인 싣는 수레로 돌아오면 고향 하늘을 보노라.

수심 구름은 내 집이 있는 마두산 아래 아득하게 덮였을 것이오,

호걸스런 기운은 잠깐동안 내가 갇히는 압록강 감옥에 잠길 것이라.

무기를 많이 사들였으니 의병들의 형세를 격동시켰고,

곧은 붓을 들었으니 사대주의 잠꼬대를 경계하여 깨웠도다.

상림 동산 어느 날에 까마귀 머리 희어져서

절월을 가지고 돌아오는 한나라 조정에 나라 위세를 펼쳐볼까.

- 체포되어 압록강을 건너며.

그는 신의주 경찰에 도착한 후 사법계 주임 모근에게 다시 10여 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일본 형사들은 김승학을 꿇어앉힌 뒤 직경 3치 쯤 되는 통나무를 양다리 사이에 끼우고 두 사람이 올라가서 통나무를 디뎠다. 그러면 다리가 부러질 듯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되지만, 김승학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버텼다. 그 후 그는 1929년 3월 16일 신의주 미결수 감옥 독방에서 14개월 동안 미결수로 지내다가 1930년 5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평양 암정형무소에 복역했다. 그렇게 감옥에 복역하던 그는 이듬해에 스승 조병준과 아버지가 잇달아 별세했다는 소식을 제자 박이열 군으로부터 전해듣자 비분강개하여 2편의 시를 지었다.

저번에 늙은 선생을 위하여 울었더니, 오늘을 부친님 별세하심을 위하여 또 올게되니,


인륜의 죄와 악이 이내 몸에 거듭하도다.

감옥 철창 밖에서 조상하는 달은 인하여 빛이 없고,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 땀은 저절로 수건을 적시도다.

세상에 계시어 충성하신 마음은 예삿 노인보다 다르고,

선조를 받드는 정성과 성력은 하늘 참된 데서 나왔다.

눈 오는 밤 서리 아침에 산이 적막한 땅에

뉘가 능히 나를 대신하여 무덤 위엣 티끌을 쓸리요.

- 선고 별세의 흉음을 듣고.

내가 나고 내간 자란 것이 본래 빈한하고 미약하였으니


어머님은 베 짜시고 아버님은 밭 갈으시고 아내는 고사리를 캐었네.

평생에 집 살림살이 일삼지 않았으니 가난하기 물에 씻은 듯 하고

쇠하는 것이 머리털을 침노하니 귀밑털이 희기가 눈과 같더라.

내 손으로 심어놓은 괴하나무는 가시덤불을 이루었고

선세부터 전하여 오는 재실은 섶으로 만든 문짝이 헤어졌더라.

사람들아 내가 이루어 놓은 것 없다고 비웃지 마라.

천천히 공론을 기다려 잘잘못이 정하여 지리라.

어제 난 아이같은데 오십년을 지냈구나.

세상 물정을 늦게야 깨달았으니 지금에야 하늘이치를 알았더라.

여섯자 되는 몸은 비록 죄 없이 옥에 갇혀 있으나

한치만 한 마음은 항상 독립운동 하던 곳에 있도다.

일을 좋아하여 여기저기 참견하니 세 나라 옥을 모두 갇혀 보았고

공로 없이 외람되이 두 나라 은혜를 입었더라.

집을 잃어버리고 나라가 망한 것이 무슨 연고였던가.

모두가 다 우리가 사대하는 잠을 깨닫지 못한 탓이라.

- 옥중사아(獄中寫我)

김승학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며칠간 세상을 비관하고 죽으려고 단식했지만, 얼마 후 죽지 않고 일제가 망하는 걸 보기로 마음먹고 그만뒀다고 한다. 또한 어떤 날은 옥중에서 일제를 풍자한 한시를 짓다가 간수에게 발견되어 처벌을 받기도 했다.

국경선을 그어놓은 붉은 벽돌담이 멀리 하늘에 닿았는데,


그 가운데 작은 나라를 세운지 묻노니 몇 해나 되었는가.

긴 검을 찬 큰 대가리는 그 한가운데 왕이 되었고,

착한 체 하는 늙은 중은 부처 앞에서 조울고 있더라.

예부터 임금된 자 독한 위엄을 펴는 곳이고,

지금까지 약한 자는 몸을 망하게 하는 갓이더라.

만일 이런 악굴을 쳐 묻어버리지 않으면

대중의 원하는 바를 마침내 펴볼 수 없더라.

- 감옥서(監獄署)

1934년 3월 22일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김승학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8월에 다시 만주로 가서 그곳에 남아있던 가족들을 수습해 1934년 12월 하순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1937년 5월에 무순 천금채에 맡겨 두었던 독립운동사 자료와 다른 비밀 문서를 찾으러 다시 집을 떠나 압록강을 건넜다. 무순에서 자료를 찾은 뒤 난징으로 향하던 그는 도중에 여비가 떨어져 베이징에 사는 친척 집에 들려 수개월 간 체류했다.

같은 해 겨울, 김승학은 천진으로 가서 안경근을 만나 "난징으로 가지 말고 베이징에 있으면서 남, 북만주에 산재한 옛 동지들과 연락해 만주에 있는 청년들을 남중국 방면으로 많이 보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임시정부의 만주 연락책으로 활동하였고, 또 청년들을 선발하여 김구에게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일본군에게 추적당하자 남만주 사평성 예문촌(禮文村)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동지들과 연락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9월 상순, 김승학은 친척들과 청년 수십명을 데리고 고향 의주로 돌아왔다. 그는 숙원이었던 <독립운동사> 편찬 작업을 추진하고자 독립운동사 편찬회를 조직해 신의주 노송정에 사무소를 두고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다가 오광선, 전성호, 김해강 등이 찾아와 서울로 상경해 외세의 침략에 맞서 한국만의 독자적인 군사 단체를 조직하자고 권유하자, 그는 이를 수락하고 서울에 올라온 뒤 한국 혁명군이란 명칭 아래 동지를 모집했다.

얼마 후,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이 한국혁명군을 "광복군 국내 제1지대"로 고치고 그가 참모장의 임무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수락했고, 임정 요인들이 환국한 뒤 광복군 국내 제2지대 설립 책임을 맡고 개성으로 가 해외에서 입국하는 청년 100여 명과 국내 청년을 모아 만월대에 임시 군영을 두고 군사 훈련을 실시했지만 미군정의 지시로 강제 해산당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간행하던 독립신문을 속간했지만 이것마저도 정부 수립 직후 임정 기관지로 남한 단정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폐간되었다.

이후 1947년 9월 5일 김성수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8년 <친일파 군상>을 육필 원고로 작성하는 등 정치에 관심을 두었지만 1949년 김구가 암살당하자 큰 충격을 받고 정계를 완전히 떠나 독립운동사 편찬에 전념했다. 그는 자신이 독립운동사 편찬에 힘을 쏟은 까닭에 대해 회고록 <망명객 행적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 일찍 조국광복을 위한 운동대열에 참여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을 주판시(主辦時) 백암 박은식 동지가 편저한 한국통사라는 나라를 잃은 눈물의 기록과 한국독립운동지혈사라는 나라를 찾으려는 피의 기록을 간행할 때 그 사료수집에 미력이나마 협조하면서 다음에는 한국독립사라는 나라를 찾은 웃음의 역사를 편찬하자고 굳은 맹약을 하였다. 그로부터 다년간 그 참담한 투쟁을 통하여 사료가 작성되는 대로 당시 포두에 우거(寓居)하시든 조병준 선생께 보관시키고 불행히 왜경에게 피포(被捕) 후 손발이 요절되는 수십 차 악형이 주로 이 사료 수색 때문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전, 대구, 부산을 경유하여 통영군 욕지도로 피난했다. 이후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2동 114번지에 있는 화엄사에 기거하면서 석암이라는 초가삼간을 신축해 이웃 마을의 60세 이상 노인 3백여 명을 규합하여 대동노인회를 조직했다. 또한 1953년 1월 애국동지원호회 산하에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를 재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아 1954년 7월까지 원고를 마감하고 11월까지 교정한뒤 1956년 2월 5일 애국동지원호회 대표 문일민 명의로 <한국독립운동사>를 간행했다. 그러나 정작 김승학 자신은 이 책이 자신의 뜻과 상충된 점이 많고 동의없이 발간되었다며 회고록을 통해 유감의 뜻을 표했다.

그 후 그는 다시 <한국독립사> 작업에 착수해 1964년에 탈고했다. 이 책은 773쪽 분량으로, 본문 제1편은 '국내운동', 제2편은 '임시정부' 제3편은 '해외운동', 부록으로 의열사 및 독립운동자 약전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김승학은 1958년 1월부터 회고록 <망명객 행적록> 집필을 시작해 그해 6월에 마쳤다. 또한 신의주 미결수 감옥에서 잠시 구상했던 <배달족이상국건설방략>을 집필해 단군조선부터 고구려로 이어지는 북방사 계보와 영역을 논거하고 중국 만주부터 일본 대마도까지 이상국 건설의 판도를 그렸다. 그는 이 책 말미에 애국가를 자신의 민족 사관에 따라 개사하기도 했다.

1절. 백두산하 삼천단부 한데 모여, 한배님이 건국하신 우리나라 만세


2절. 높고 둥근 백두산은 우리 민족 기상이며, 맑고 깊은 천지물은 우리 겨레 정신일세.

3절. 우랄산부터 대마도까지 수륙 수만리, 우리의 선조들 즐기시던 보금자리라.

4절. 이 기상과 이 정신을 모두 합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후렴. 무궁화 화려한 금수강산, 배달민족 배달나라 길이 보전하세.

<한국독립사>가 출간되기 직전인 1964년 12월 17일, 김승학은 숨을 거두었다. 향년 84세. 그해 12월 24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묘소는 유언에 따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경내에 묻혔다가 2012년 5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에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승학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각주

  1. 성균관 내사성이 문제를 내어 각 도에 하달한 뒤 관찰사가 전국 유생에게 그에 대한 문대를 해 올리게 하고, 그 중 일정한 수를 뽑아 서울에 소집하여 재차 시험을 치고 최종 합격자에게 직함을 주는 제도. 1894년 갑오개혁이 시행될 때 도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