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백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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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伯麟. 아호는 계원(桂園), 별호는 진방(鎭邦), 진영(珍榮).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5년 1월 2일 황해도 송화군 풍천면 오미동에서 부친 풍천 노씨 노병균(盧秉均)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의 3형제 중 세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사망해서, 노진국(盧鎭國), 노진민(盧鎭民) 두 형제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6살 때인 1880년 서당에 입학하여 14살 때인 1888년까지 사서삼경 등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성품이 호탕하였다. 1895년 봄 전국 각도에서 인재를 선발한다는 조서가 내려졌을 때, 노백린은 황해도 대표로 뽑혀 상경하여 관비생으로 뽑힌 뒤 일본으로 유학갔다. 4월 7일 일본에 도착한 뒤 6월 도쿄에 있는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보통과와 특별과 과정을 통해 일본어를 배우고 1896년 8월 졸업했다. 1897년 성성학교(成城學校))에 입학하여 1898년 11월 졸업한 뒤, 1898년 12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899년 11월 함께 유학을 떠났던 한인학생 20명과 함께 11기로 졸업한 뒤, 6개월간 일본군 연대에서 근무하며 실무경험을 쌓았다. 이 시기, 유학생들은 친목회와 제국청년회를 조직하여 서로 교류하고 학회지를 발간했다. 이중 체국청년회는 친목회 해산 후 노백린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것이었다. 노백린은 제국청년회에서 활동하면서 이갑, 유동열, 윤치성(尹致晟), 김의선(金義善) 등과 교류하였고, 귀국 후에도 계속 교류하면서 이후 전개되는 민족운동과 항일독립운동에 함께 하였다. 이렇듯 일본에서 착실히 공부하고 일본군에서 6개월간 훈련 실무를 마쳤으나, 바로 귀국하지 못했다. 관비로 일본으로 떠났던 유학생들이 박영효 내각이 실각한 뒤 역당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1900년 6월 견습사관의 임기가 끝나면서 노백린 등 21명의 청년장교들은 일본군계에서도 제외되어 무국자 신사가 되어 버렸다.

이에 당시 주일공사 이하영이 공사관의 빈방 하나를 내주고 머물게 한 뒤, 본국에 이들의 구제책을 건의했다. 정부는 이들 중 19명에게 1900년 7월 복관하고 계속 유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정부는 복관만 했을 뿐 합당한 봉급이나 유학비를 보내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청년 장교들은 하루하루를 어렵게 먹고 지내야 했다. 결국 노백린 등 6명은 1900년 10월 청년장교단을 대표하여 귀국한 뒤 정부에 일본에 남은 동지들의 사정을 탄원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1901년 상경하여 원수부 회계국 총장이었던 민영환의 주선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들과 함께 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무관학교는 1896년 1월 11일 무관학교 관제에 따라 설치된 초급무관양성을 위한 근대적 교육기관이었으나, 을미사변아관파천으로 폐지되었다가 고종이 환궁한 뒤 다시 설치되었다. 노백린은 어담(魚潭) 윤치성(尹致晟)·김형섭(金亨燮) 등과 함께 육군참위에 임관되고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이 되어 군대양성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노백린, 윤치성에게 일본군 관전단(觀戰團)에 참가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노백린은 윤치성과 함께 군부 대신 권중현(權重顯)을 따라가서 여순과 대련에서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교전을 지켜봤다. 이후 1904년 4월 4일 부위로 승진했고, 1904년 9월 9일 정위로 승진했으며, 1904년 9월 28일 참위를 거쳐 부령, 정령으로 승진했다. 또한 육군무관학교장을 비롯하여 헌병대장, 육군 연성학교장을 역임하였다. 이렇듯 무관으로서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한편으로 징계를 받기도 했다. 1907년 4월 19일 명령불복종으로 직무를 정지당한 것이다.[1] 2달 후인 6월 11일 이완용과 이병무(李秉武)의 청으로 징계에서 풀려나 군부교육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 징계 기간 동안 진성중학교 교관을 맡았던 걸 볼 때, 관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후 군부교육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909년 5월 22일 육군무관학교 교장 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무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1902년 초, 노백린은 민영환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 '개혁당(改革黨)'에 가입, 활동했다. 개혁당은 러시아와 일본간의 세력다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그 혼란한 틈을 타 친러보수 내각을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 개혁하고자 했다. 이때 노백린은 이동휘와 함께 즉각적인 거병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무력의 열세인 점 때문에 묵살되었다. 그후 고종의 양위를 둘러싸고 정세가 고조되던 1907년 7월 중순, 이갑, 유동열, 박재덕, 이동휘와 궁내부대신 박영효와 함께 고종의 양위를 저지하기 위한 무력 항쟁, 친일파 대신 암살 등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의 중심인물이었던 이갑, 박재덕, 박영효 등이 1907년 7월 22일 체포되면서, 무력 항쟁이 일어났을 때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노백린이 이끄는 기병대와 이동휘, 유동열의 보병을 합해 불과 2천여 명에 불과했다. 이에 안창호가 무력의 열세인 점을 들어 무력 항쟁을 반대했고,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해산되면서 육군 연성학교가 폐교된 뒤, 노백린은 교육계에 투신했다. 그는 소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해주, 재령, 사리원, 신천 등지를 다니며 연설하고, 자신의 고향 풍천에 광무학당을 비롯하여 중학교, 여학교 등을 세웠다. 이로 인해 일본의 주목을 받게 되자 광무학당을 이한섭(李恨燮)에게 맡기고 상경한 뒤, 윤치성과 함께 대한피혁회사와 양화점을 설립했다. 그는 피혁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직접 일본 도쿄, 오사카를 돌며 제화기술자를 데려오기도 했다. 동물의 피부를 벗겨낸 가죽을 가공하여 의류, 신발 등에 사용하는 피혁(皮革)은 당시엔 천직으로 여겨졌지만, 그는 전통적인 직업관에 구애받지 않고 피혁업에 힘을 쏟았다. 이외에도 교동의 '가나다 식료품점', 황해도 송화, 연안의 금광, 충주 예산의 사금광, 광주의 사기소와 서울 청진동의 철공소 등을 운영했다. 이러한 사업 운영은 한민족의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자금난에 시달린 끝에 모두 폐업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된 뒤, 노백린은 시세를 한탄하며 칩거했다. 그러다 1916년 7월 만주 시찰을 핑계로 조명구(趙明九) 등과 함께 국내를 떠나 상하이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해 1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그는 박용만이 창설한 '대조선국민군단'에 협조하여 김성옥, 허용, 이복희, 이상희와 함께 별동대의 주임으로서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원래 미국 내에서는 외국인의 군사활동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하와이 미군 사령관이 이를 묵인하여 주었던 것이다. 군제(軍制)는 미국식으로 하고 총은 목총으로 대용했으며 병영을 건축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에는 호놀룰루에서 박용만과 함께 대조선독립단을 창단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대조선독립단은 국민군단의 정신을 이은 것으로, 1918년 국제정세의 홍보를 목적으로 창간되었던 태평양시사를 인수하여 기관지로 삼았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군무총장에 선임되자,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만나기 위해 10월 1일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 건너간 그는 캘리포니아 주에 정착한 뒤 일본과의 독립전쟁에 투입될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해 비행기 학교를 설립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공군을 창설하기로 마음 먹은 건, 당시 일본군이 공군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기에, 임시정부 산하 공군을 양성한다면 장래 전개될 독립전쟁의 공중선에서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쌀의 대왕' 김종림으로부터 2만 달러를 기부받고 40에이커의 운동장을 사들려 교사를 지었다. 김종림은 이외에도 매달 3,000 달러를 기부하여 교사의 월급 등의 운영금으로 사용하게 했다. 학생들은 월사금 10불을 내고 캘리포니아 교육국에서 임대한 퀸스디스트릭트 학교건물에서 전술, 비행술, 비행기 수리와 관리, 무전통신학, 영어 등을 배웠다.1920년 6월 22일 김종림이 구입한 비행기가 도착하여 비행술 실습이 시작되었으며, 이틀 뒤인 24일에도 레드우드시로부터 비행기가 도착하였다. 비행학교는 9월에는 무선장치를 갖춘 5대의 비행기를 갖추었다.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 1920년 6월 24일자 기사에 따르면, 교관은 레드우드 비행학교의 교관이었던 브라이언트였으며, 한국인 교관은 이용선, 오임하, 이초였고, 학생은 30명이었다고 한다. 1920년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이 있었는데, 제1회 졸업생 4명은 우병옥, 오임하, 이용선, 이초로, 모두 비행히 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이후 학교의 졸업생 박희승(朴熙昇)과 김자중(金自重), 박희성(朴熙成)과 이용근(李用根)은 국제비행사가 되었는데, 특히 김자중은 만주 군벌 장쭤린의 항공대에서 활약했다. 박희성과 이용근은 1921년 7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육군 비행병 소위에 임관되었다. 비행학교는 미주한인들과 임시정부, 그리고 미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노백린이 시카고를 출발할 때 청년들이 따라왔으며, 1920년 2월 중순에도 시카고에서 학생들이 출발하여 샤크라멘타에 도착했다. 1920년 3월 1일에는 레드우드의 비행학교에 재학중이던 이용선과 이초가 샤크라멘토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서 비행기를 조종하고 참석하여 한인사회를 고무시켰다. 1920년 6월 30일부터 7월 8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북미한국국민총회에서는 비행기학교 보조금 지출을 위해 당해년부터 회원 각자의 1년분 수입의 5분을 소득세로 납부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은 1920년 4월과 5월에 비행기 학교에 대한 기사를 많이 다뤘다. 윌로우스의 영자신문인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에서도 이 비행기 학교에 대하여 보도했다. 또한 노백린의 비행학교는 영화로 촬영되어 미국 전역에서 유명해져 미국인이 상당한 액수를 기부하기도 했다. 이렇듯 비행학교가 자리를 잡자, 노백린은 상하이로 돌아갔고 김종림이 총재를 맡아 학교 운영을 온전히 책임졌다. 그러나 1920년 11월 초 추수기에 윌로우스 일대에 불어닥친 대홍수로 인해 한인 사회가 큰 손실을 입으면서, 비행학교의 재정상태가 매우 악화되었다. 김종림은 학생들을 다른 무관학교에 보내서 비행훈련을 받게 하는 등 대응책을 강구하였으나, 1921년 4월 10일 레드우드비행학교 졸업 시험에서 박희성이 비행하던 중 추락하는 바람에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여파로 인해 노백린의 비행사 양성소는 1921년 4월 중순경 문을 닫고 말았다.

1921년 2월 2일 상하이에 도착한 노백린은 2월 18일 환영회에서 "시기가 되면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연해주의 독립운동세력과 연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군무총장의 자격으로 연해주에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시 연해주에서는 러시아 내전을 틈타 시베리아로 진주한 일본군에 맞서 독립군이 공산군과 손잡고 무력 항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은 혁명의 전파를 위해 한국의 독립을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독립군을 수용하여 강력한 병력으로 양성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러한 소련의 약속에 고무되어 김홍일(金弘壹)을 만주로 거쳐 러시아로 가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독립군을 설득해 연해주에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국토를 회복하고 한양으로 새 정부를 옮기자"는 내용의 군가를 짓기도 했으며, 1921년 11월 11일에 열린 개천절 축하식에서도 국토를 회복하여 개천절 행사를 한성에서 거행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는 독립전쟁을 위해 세 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첫번째는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독립군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특히 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는데, 사관학교에서는 6개월간 수업을 마친 사관후보들을 각 독립군 부대에 배치하여 간부로 활동하게 했다. 이러한 사관학교의 운영과 사관후보의 양성은 국내 침공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두번째는 각지의 독립군을 임시정부의 군무부를 통해 연합하는 것이었다. 1921년 6월 중국 베이징에서는 진합단(晋合團)이 조직되었고, 노백린이 군무장을 맡았다. 진합단의 단장은 박용만이었고, 부단장은 강경문, 비서는 서왈보, 내무장은 신채호, 재무장은 김창숙, 사령관은 김좌진이 맡았다. 이들은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을 재편성하여 세력을 총집결시키고자 하였다. 세번째는 사회주의 인사들과 연합하고자 한 것이었다. 1921년 10월 2일 천진에서 북경지한협회 지부원 나중소 등 3명과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군무부장 노백린, 법무총장 신규식 이하 여러 명이 회합을 갖고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은 무력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와 중국의 쑨원 정부와 교섭하여 협조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사회주의는 독립운동의 한 노선으로 수용되었으므로, 이들과 연합하여 독립전쟁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 갈등과 분열은 갈수록 격화되었고, 급기야 1922년 3월 노백린을 제외한 국무원 전원이 총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백린은 4월 7일 정부측을 대표하여 임시의정원에 출석해 자신은 대통령의 면직 및 국무원 사퇴와 상관없이 정부를 지키고 의정원을 통해 시국을 수습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에 당시 미국에 있던 임시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의정원 사이에 전보가 오갔고, 얼마 후 노백린이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임시정부를 책임지게 되었다. 노백린은 6월에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상해청년대회에서 정국에 대하여 정견을 발표했고, 7월에는 안창호의 집에서 안창호, 여운형, 도인권, 김구 등과 회합하여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이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그해 10월 김구를 내무총장에 기용하는 개각을 단행하여 일단 임시정부를 정상화했다.

국무총리 노백린은 1923년 1월 5일 국무원포고 1호를 발표하여 임정을 정비하였고, 1월 15일 개원한 임시의정원에서 '대국쇄신안'을 통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반에 대하여 개혁할 것을 도모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존립을 논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5월 10일 결렬되면서 독립운동 전선의 분열과 약화를 초래하였다. 노백린은 국민대표회의에 진언을 잇달아 올리고 시국문제 해결과 장래 독립운동에 관한 방책을 발표하였으나 끝내 수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행정전반에 관한 사항을 처리하여 1923년 11월 5일부터 학무부 주관으로 열린 국정교과서 제정에 관한 협의회를 통하여 국정교과서를 편찬하게 하였고, 1924년 4월 13일 필리핀 국회의장 케손의 환영회에 참석하여 국무총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924년 4월 7일 계속되는 재정난과 독립운동 노선의 분규를 수습하지 못햇다는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직 사임을 표명했고, 임시의정원은 4월 9일 사임을 수리하였다. 그해 5월 30일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군사 관계를 담당하였으나, 심장병 때문에 이렇다할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는 말년에 대한제국 육군 정령 제복을 즐겨 입었고, “정복에 말 타고 남대문에 입성해보면 참으로 좋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고 한다. 또 자전거 타기를 무척 좋아해 매일 상하이 시내를 자전거로 두루 다녔다고 한다.

1926년 1월 22일 오전 11시 45분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양옥 단칸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52세. 그의 유해는 정안사로(靜安寺路)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8월 15일 한국에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노백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홍윤정, <노백린의 항일독립운동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98.[1]
  • 국가보훈처, <1993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각주

  1. '관보' 광부 11년 4월 20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