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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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秉昊. 자는 순서(舜瑞), 순우(舜㻦), 호는 원명(圓明), 이명은 연도명(延圖明), 연병학(延秉學).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4년 11월 22일 충청도 청안현 북면 석화리 산정(현재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1리 산우물마을)에서 부친 연채우(延彩羽)와 모친 전주 이씨 이회철(李會喆)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 형편은 빈농을 겨우 벗어난 수준이었다. 그는 형 연병환(延秉煥)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연병환은 북간도 용정에서 중국 해관원으로 근무했으며, 1919년 3월 13일 용정촌에서 전개된 3.1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이 받는 봉급을 만세운동에 지원했다가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연병호는 이런 형으로부터 독립의식을 전수받았다.

연병호는 고향에서 중명학교(重明學校)를 졸업한 뒤 1913년 형의 부름을 받고 용정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중등과정의 창동학원(昌東學院)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나, 이듬해에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1916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에 입학하여 1년 정도 수학했으며, 기독교청년회관에 재학하는 동안 안재홍, 조용주(趙鏞周) 등과 교유했다. 이는 그가 기독교를 배경으로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인적 기반이 되었다.

연병호가 독립운동에 첫발을 내딛은 것은 3.1 운동 직후 국내에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면서부터였다. 이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를 지원하는 청년들의 단체로, 결성을 주도한 인사는 연병호를 비롯하여 조용주, 송세호, 안재홍, 이병철 등이었다. 이 단체의 특징은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하이에서 귀국한 인사들에 의해 조직 결성이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상하이에는 각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은 열기만큼 견고하지 못했고 서로간의 파벌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에 조소앙과 연병호, 조용주, 송세호 등은 청년을 중심으로 굳건한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국내에서 청년 비밀단체 성립을 추진했다. 연병호는 기독교청년회관 시절 익히 알고 지내왔던 인사들을 포섭했고, 형을 따라 만주로 갔을 때 알고 지냈던 이들과도 연락했다. 이러한 인맥을 바탕으로, 그는 순조롭게 단원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청년외교단은 단장을 두지 않고 총무 책임체제로 운영되었다. 안재홍과 이병철이 총무를 맡았는데, 안재홍은 강령 및 규칙 등 운영의 기초가 되는 문안 작성을 맡았고 이병철은 주로 자금과 조직을 맡았다. 그리고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을 맡았고, 조소앙과 이종욱이 외교특파원을 맡았다. 청년외교단은 서울에 중앙부를 설치하고 국내에는 대전, 회령, 충주 등지에 지부를 두고 상하이에 해외지부를 설치했다. 신원이 파악되는 단원은 총 25명인데, 이 중에서 연병호와 같은 충청권 인사들은 10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김태규, 정낙윤, 유흥식, 유흥환, 이강하, 정석희 등은 상하이로 파견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거나 대전과 괴산의 임시정부 조사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청년외교단은 충주와 괴산, 대전 등지에 지부를 두었다. 이는 조직 기반을 구축하는 데 충청도 출신인 연병호와 이병철의 역할이 컷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청년외교단의 구성원은 기독교도가 중심을 이뤘지만, 월정사 승려 송세호의 주선에 의해 불교 승려인 이종욱, 용창은 등 월정사 승려들도 참가했다. 특히 이종욱은 청년외교단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연통제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청년외교단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결성을 지도했으며, 교회와 여학교를 중심으로 전국적 조직을 갖춘 애국부인회를 통해 조직 기반을 폭을 확대해나갔다. 이후 청년외교단은 1919년 8월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건의서>를 임시정부에 제출했다.

1. 이상과 주의의 대기치 아래 각파의 협동을 표방하여, 감정적 충동의 피해가 없도록 할 것.


2. 임시정부의 내각 총장은 상해에 집붕하여 정무의 통일을 기할 것.

3. 열국 정부에 직접 외교원을 특파하여 국가의 독립을 정면으로 요구할 것.

4.내외의 책응을 긴밀 전일케 하기 위해 정부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국내 각 단체 및 종파의 대표자와 협의 후 서울에 교통본부를 설치하여 중추기관을 작성케 할 것.

5. 조용은에게 즉시 신임장을 교부하여 국제연맹회의에 파견하여 외교활동을 담당케 할 것.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연통제 역할도 수행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국내조직으로, 주요 임무는 국내의 정보 제공 및 통신과 인적, 물적 자원의 확보에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서 연통제 조직을 어느 정도 갖췄지만 중부 이남 일대에는 거의 실현시키지 못했고, 청년외교단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지부를 통해 실질적으로 연통제 역할을 대행했다. 또한 그들은 <외교시보>를 발행하여 국내 인사들에게 내외 정세의 동향을 알리는 한편 <국치기념경고문>을 인쇄하여 독립운동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만세시위를 촉구하는 이 경고문은 서울의 독립운동 비밀단체를 비롯하여 학교 및 일반에게도 배포되었다.

청년외교단은 외교 활동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독립전쟁에 대비한 적십자회를 설치하는 한편 1919년 9월 국내 비밀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배달청년당으로의 개편을 추진했다. 배달청년당의 강령은 '본당은 민족의 독립, 영토의 회복, 그리고 민주주의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11월 말 청년외교단 조직이 발각되면서, 배달청년당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동지들이 대거 체포되었지만, 당시 연병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을 연계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주로 가 있어서 체포되지 않았다. 이에 재판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919년 말, 연병호는 북간도 안동현에 근거지를 둔 대한정의단군정사에 합류했다. 이 단체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의병 출신의 이규, 강희, 이동주, 조동식 등이 대한제국군 군인들을 모아 조직한 대한정의단이시군정부가 임시정부의 권고에 따라 개칭된 무장조직이었다. 이 단체의 병력은 중국 보위단 이름으로 편성된 100여 명, 소사하 지방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 240명, 화전현 고상하에 주둔한 100여 명 등 400여 명에 달했다. 연병호는 이 단체에 가담하여 심판과장을 맡았는데, 이 직책은 총재를 보좌하는 참모로서 임시정부와의 연계가 주요 임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인 <불온문서 배포의 관한 건> 고경제2915호, 1925년 8월 24일자 정보기록에 따르면, 연병학(延秉學)이란 사람이 안도현 하수산에 근거지를 둔 대한독립산포대에서 산포대장을 맡았다고 한다. 이 '연병학'의 연령과 출신지가 연병호와 일치한 것을 볼 때 동일인임이 분명하다.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제 첩보기록에 따르면 그는 권총과 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볼때 그는 독립군 활동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22년 10월 2일자 <소수분 독립군 편성의 건> 정보기록에 따르면, 연병호(延秉浩)라는 이름의 인물이 길림성 동년현 소수분에서 독립군 편성에 참여했다고 한다. 다만 이 시기 연병호는 상하이에서 활동했고, 정보기록에는 그의 나이가 약 50세라고 기재된 것으로 볼 때 동명이인인 듯하다.

연병호가 만주에서 상하이로 언제 돌아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20년 초 용정에 있던 그의 형 연병환이 상하이로 옮겨 거류민단에서 활동한 점을 볼 때 연병호도 형을 따라 1920년 초에 상하이로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병호는 1920년 3월 30일자 <독립신문>에 <독립기념일의 말>이란 글을 게재했다. 이 글은 3.1 운동 1주년을 맞이해 그동안 독립운동에 대한 감상과 의지를 피력한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투철한 독립정신과 강인한 실천을 강조했다. 그가 상하이에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2년 3월 10일 임시의정원회에서였다. 그는 민충식과 함께 신도의원으로 의정원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임시의정원이 국민대표회의 개최와 관련해 심각한 갈등을 빛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해 사면 청원을 여러 차례 했지만 반려되었다. 이때문에 임시의정원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거의 활동하지 않고 청년운동을 활성시키는 데 주력했다. 1922년 4월 15일, 연병호는 조소앙 등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를 결성했다. 결성 직후 회원은 500여 명이 달했지만 상하이에 거주하는 회원은 대략 200여 명이었다. 이는 당시 상하이의 한인단체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이었다. 한인동맹회는 국적, 종교를 불문하고 17세 이상의 남녀로 조직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그리고 독립, 평등, 자유를 한민족의 정치, 경제, 종교상에 실현한다는 것을 강령으로 삼았다. 동맹회 회원은 조소앙 외 10명이었으며, 연병호는 주무로서 자신의 집인 상하이 프랑스조계 군영로 2호를 동맹회의 연락처로 사용했다.

또한 연병호는 1922년 6월과 7월에 유호청년회의 발기, 조직을 주도했다. 유호청년회는 당파에 관계없이 35세 이하 남자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가 국민대표회의를 둘러싸고 갈등을 빛는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애 갈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기탄없이 개진했다. 또한 결의를 통해 조사위원 9인을 선정했는데, 연병호는 윤자영, 이규정, 정춘희, 김보연, 김정목, 정광호, 나창헌, 장덕진 등과 함께 조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22년 6월 24일 제3회 시국해결 및 비판연설회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문과 결의가 결정되었다.

선언


우리난 오직 대한의 청년이오. 우리난 오직 대한의 독립운동자이라. 시국의 분요와 현상의 침체를 좌시키 어려움으로 이에 우리난 정당한 입장에서 차에 광정을 기하여써 1일이라도 속히 우리 전민족의 진향(進向)하는 목적에 도달코저 하노니 우리의 충직으로써 정론을 입하며 우리의 성의로서 확실한 통로를 개척하려 하노라.

결의


1. 우리난 공정한 입장에서 행동할 일

1. 우리난 여하한 각자 하에서던지 독립운동자끼리 서로에게 폭력을 사용하야 투쟁하는 행위의 일체를 방지할 일.

1922년 7월 1일 의정원회의장에서 80명의 청년들이 모여 독립운동계의 광정을 강력하게 촉구했을 때, 연병호는 조소앙, 조상섭 등과 함께 의정원 의원으로 참가해 시국 대책을 논의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연병호가 이끄는 세계한인동맹회를 비롯해 유호청년임시대회, 화동한국연합회시국책진회 등 62명의 인사들이 임시정부에 모여 7월 12일 시사책진회를 조직했다. 시사책진회는 안창호가 회장을 맡고 여운형, 김용철, 신익희 등이 간사를 맡아 운영되었다. 이때 주요 안건은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와 임시의정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형권의 자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등이었다. 이때 연병호는 34명의 서명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시사책진회에서도 해결 방도를 찾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7월 28일 조소앙, 이필규,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했다.

이후 그는 1922년 8월 국민대표회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선언서를 배포하는 데 동참했다. 선언서의 논지는 임시정부가 4년여 동안 국내외 동포의 중심을 이루어 관심을 받아온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한형권의 자금을 임시정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에 동참한 인사들은 김상옥, 조완구, 윤기섭, 조소앙, 김홍식 등 39인이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끝내 열리게 되자, 연병호는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다.

연병호는 베이징으로 간 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베이징대학을 다녔다. 그는 이시기에 중국 인사들과 교류를 넓혔고, 1925년에 베이징에서 한중연합체인 동서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 여기에는 주로 무장투쟁론에 의거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중국의 혁명적 인사들이 참가했다. 한편 임시정부가 이승만 탄핵안을 가결하고 2대 대통령으로 박은식을 선출하자, 연병호는 대통령 선출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고 1925년 5월 31일 이천민, 박숭병과 함께 3인의 이름으로 <교정서>를 발표했다.

1925년 말, 연병호는 만주로 넘어가 신민부에 참가했다. 그는 신민부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국제공산당 조직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을 받는 임무를 수행했다. 중국 군벌 펑위샹의 책사로 활동하던 공인(孔仁)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그는 국제공산당과 직접 교섭한 끝에 5만원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25년도 신민부의 1년 총수입이 16만 5천 8백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5만원이란 금액은 신민부 운영에 막대한 자금이 아닐 수 없다. 이후 1926년 2월, 연병호는 1차로 받아온 3천원을 신민부에 교부하여 동녕에 소재한 군사강습소의 운영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뒤 신민부와 관련된 연병호의 행적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국제공산당이 신민부에게 군자금을 계속 지원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그 역할을 계속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병호는 1929년 무렵 난징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1930년 8월 25일 중국 항저우에 있는 국민당 절강성 집행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독립운동의 전후 개황'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그의 연설은 난징의 <중앙일보> 1930년 8월 29, 30일자 기사에 실려 많은 중국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연설에서 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혁명이란 하루아침에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끊임없는 투쟁이 이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 광대한 민중이 혁명의 기본 역량이 되어야 한다. 일시적 좌절에 굴복하여 혁명을 중도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내 혁명지사들의 민중계몽운동은 혁명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절대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중략) 혁명운동은 대중에 파고들어야 하고, 민중을 훈련시키고 민중을 향한 선전활동을 적극 전개하며, 민중을 조직하여 혁명 무력의 근간으로 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제사회의 혁명동지들과 연계를 강화해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공동 분투해야 할 것이다.

1932년 초, 연병호는 한국혁명당 결성에 참가했다. 한국혁명당은 당시 난징 국민정부의 심계원(審計院)에서 근무하던 신익희의 주도로 난징에 머물던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계 인사들이 결성한 정당으로, 상하이의 한국독립당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활동했다.[1] 한국혁명당에는 연병호를 비롯하여 신익희, 윤기섭, 성주식, 안재환, 김홍일 등이 참가했으며, 진보적 민주정당을 표방한 독립운동단체의 단결과 독립의식 고취를 당면 목표로 삼았다. 특히 중국 국민정부와의 연합전선을 꾀해 중국 국민당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연병호는 뒤이어 독립운동정당의 통합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였다. 그는 한국광복동지회,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독립당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추진했다. 그러다가 1934년 2월 한국혁명당이 재만 한국독립당과 합당할 때 참여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했다. 재만 한국독립당은 상하이에서 결성한 한국독립당과 다른 조직으로, 1929년 한족총연합회의 홍진, 지청천 등이 생육사와 통합하여 확대 개편한 것이었다. 이들은 1931년 만주사변이 벌어진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만주에 더는 있기 어렵게 되자 베이징으로 본부를 옮기고 중국에 기반이 있는 한국혁명당과 통합하는 것을 선택했다.

신한독립당에는 당수에 홍진, 상무위원에 김상덕, 신익희, 윤기섭 등이 선임되었으며, 연병호는 선전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뒤이어 상무위원과 집해우이원을 겸하다가 제2차 중앙위원회에서 상무위원을 사퇴하고 집행위원을 수행하는 한편 정무위원회 주임을 맡는 등 당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연병호는 1933년 9월에 충청도 의원의 자격으로 10년만에 임시의정원에 복귀했으며, 1934년 1월 초 진강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26회 회의에서 차이석, 윤기섭, 김철, 염온동, 김붕준, 조소앙 등의 기존 의원과 최동오, 신공제, 문일민, 양명진, 박창세, 장성산, 김홍서, 송병조 등 신임 의원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의정원을 운영했다.

이후 연병호는 신한독립당을 토대로 독립운동 정당들을 하나로 통합해 민족대당을 만들려 노력했다. 그 결과 1935년 7월 신한독립당을 포함해 5개의 정당과 단체가 통일하여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그러나 이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의열단계 인사들이 민족혁명당의 권력을 독차지하자 이에 반감을 품은 신한독립당계 인사들이 탈퇴해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연병호는 1935년 10월을 끝으로 의정원에서의 활동을 중단했고, 1936년 3월 한국국민당에 가입했지만 불과 4개월만에 탈퇴했다. 게다가 1936년 6월 <독립공론>의 주간을 맡던 중 그가 쓴 글의 논조가 문제가 되어 김구 계열의 청년들의 습격을 받고 심한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벌어졌다. 연병호는 이 일련의 일을 겪으며 심신이 고단해졌고 일제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난징도 위험해지자 상하이로 거처를 옮겼다.

1937년 초 상해거류조선인회장이자 일제 밀정 이갑녕이 저격당했다. 이에 일제가 대대적으로 한인 체포에 나섰고, 연병호는 1937년 1월 7일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국내로 압송되어 '적색운동의 거두'라는 혐의가 씌워졌고 1심에서 징역 8년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여 1938년 2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이유있다는 판정을 받고 징역 6년으로 감형되었다.[2] 이에 불복해 상고하였으나 1938년 5월 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형기가 확정되었다.[3] 1944년 10월에 출옥했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임시정부환영회 영접부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한국독립당 선열사적조사위원장 겸 훈련부장, 대한민국정무위원 겸 농민부장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이후 충북 괴산군에서 여생을 보내던 그는 1963년 1월 25일에 병사했고, 그의 장례는 2월 3일 고향의 도안초등학교 교정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장례식에는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가 참석하여 조사(弔辭)를 낭독하였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를 애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서거 직후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197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

  1. 한국독립당 측은 한국혁명당에 무정부주의 계열, 민족주의 계열, 공산주의 계열이 섞였다며 '백적흑의 혼혈아'라고 비꼬았다.
  2.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3. 독립운동관련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