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 베르더 브레멘

SV 베르더 브레멘
SV Werder Bremen
SV-Werder-Bremen-Logo.svg
스포츠 팀 정보
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설립 1899년 2월 4일
연고지 브레멘
경기장 베저슈타디온 (Weserstadion)
소유 Sportverein Werder Bremen von 1899 e. V.
감독 빅토르 스크리프닉
웹사이트 http://www.werder.de/

SV 베르더 브레멘(Sportverein Werder Bremen von 1899 e. V.)은 독일 브레멘에 연고를 둔 축구단이다. 원칙상으로는 독일의 다른 구단처럼 베르더 브레멘이라는 긴 이름으로 불러야 하지만 귀찮아서 짧은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언론에서 자주 쓰는 별명으로 베르더, 브레머(Bremer)가 있으며 브레멘으로도 많이 표기하니 그냥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부르면 된다. 귀찮으니까 브레멘으로 통일하자 이니셜은 SportVerein Werder의 준말인 SVW(에스파우베)를 사용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피쉬쾨페(Fischköpfe)라고도 불리는데 이건 생선머리라는 의미로 남부에서 북부의 해안도시 사람들을 조롱하는 멸칭이 축구팀에게도 붙은 것이다. 그니까 까고 싶을 때 쓰면 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창단 이후 2차대전까지(1899-1945)[편집 | 원본 편집]

1899년에 16세 학생서클에 의해 FV 베르더 1899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는데 베르더라는 이름은 클럽이 훈련과 경기를 치르던 슈타트베르더라는 지역에서 따왔다.[1] SV가 아니라 FV인 건 오직 축구만 취급하는 클럽이었기 때문인데 남성만 가입이 허용됐고, 그 자격도 까다로웠다. 그러다가 1차대전이 끝난 뒤 여성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다양한 스포츠를 취급하며 지금과 같은 SV 베르더 브레멘으로 바뀌었다.[2]

나치가 집권하면서 가우리가 체제가 등장했고, 베르더 브레멘은 몇 차례 우승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독일 축구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반대로 오욕의 시대이기도 한데 당연하게도 나치와의 관계 때문이다. 베르더 브레멘은 나치의 정치적 선전과 군사교육에 동원되었고, 홈구장인 브레머 캄프반[3]은 나치의 행사장으로 쓰였다. 1934년에 유대인들이 쫓겨났고 클럽은 나치의 대표적인 꼭두각시로 자리잡았다.[4] 보다 끔찍한 것은 이러한 타락이 구단의 자발적인 참여의 결과였다는 점이다. 특히 1934년부터 1936년까지 회장이었던 빌리 슈퇴버는 열렬한 나치의 신봉자여서 구단 관계자들을 전부 나치에 입당시켰고 구단을 나치의 선전도구로 전락시켰다. 이 시기의 많은 클럽들이 유사한 일을 겪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의 씻을 수 없는 수치다.[5]

오버리가 시대(1946-1963)[편집 | 원본 편집]

다른 팀들처럼 나치에 부역했기 때문에 2차대전이 끝나고 클럽이 잠시 해체되었다가 1946년에 이름을 되찾고 부활했다.[6] 이후 오버리가 북부지구에 속하게 됐고 점차 성장하여 독일 내에서 손꼽힐 정도의 강팀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끝내 우승은 하지 못하고 제대로 콩라인을 탔는데 북독더비 라이벌인 함부르크가 16시즌 중 15시즌을 우승해버렸기 때문. 햄버거를 죽입시다 햄버거는 나의 원수 덕분에 오버리가 마지막 5시즌 동안 내리 준우승을 했다. 그래도 1960/61시즌에 DFB-포칼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UEFA 컵위너스컵에서는 8강에 진출했다.[7] 이 시기에 얻은 별명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강팀에게 강하고 약팀에게 약하다는 의미에서 붙은 '북부의 스핑크스'고, 다른 하나는 선수들이 미국 담배회사의 공장에서 일해서 생긴 '텍사스-엘프(텍사스 일레븐)'이다.[8]

분데스리가의 개막과 첫 우승(1964-1971)[편집 | 원본 편집]

우승은 못했다지만 북부지구의 강팀이었기에 여유있게 분데스리가 창립회원이 될 수 있었고, 2번째 시즌에 우승팀이 되는 대형사고를 친다. 북부의 강호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북부에서의 얘기고 이 시기에는 서부와 남부의 클럽들이 강세를 보였기 때문에 북독의 맹주 함부르크도 아니고 브레멘이 우승을 차지한 건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독일 챔피언이 된 건 클럽 역사상 최초였고, 마침 이때가 브레멘시 1000주년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가대표 주전 하나 없던 브레멘이 우승할 수 있었던 비결은 탄탄한 수비력이었고, 특히 클럽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호어스터-디터 회트게스가 바로 이때부터 브레멘에서 뛰었다.

다음시즌 리그 4위를 기록했고 유러피언컵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다.[9] 그러나 그 뒤로 팀은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리그 16위로 추락했다가 준우승팀이 되었다가 다시 9위로 떨어졌고 더이상 중위권에서 올라오지 못하면서 우승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팀을 이끌어온 주축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무너진 백만장자(1971-1981)[편집 | 원본 편집]

연달아 중위권에 머무르자 수뇌진은 돈을 퍼부어 스타플레이어를 수집하는 방법으로 상위권 재도약을 노렸다. 마침 시기적절하게 이적료 제한이 폐지된 덕분에 마음놓고 돈을 썼고, 백만장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하지만 클럽의 재정이 넉넉한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 썼기 때문에 금방 한계에 봉착했고, 결국 얼마 가지 못해 전략을 포기해야 했다. 더 문제는 이렇게 끌어들인 선수들도 계획적으로 영입한 게 아니라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으로 데려온 거라서 제대로 써먹지 못했고, 감독이 줄줄이 잘려나가는 가운데 성적이 좋아지기는커녕 제자리걸음만 했다. 지지부진한 성적에 재정문제까지 더해지면서 팀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1979/80시즌에 강등당하고 만다. 이름높은 감독이던 쿠노 클뢰처의 지휘 아래 2부리그에서 순항하며 1년 만에 손쉽게 복귀하는 듯 했으나 클뢰처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결국 감독이 바뀌게 된다.

레하겔의 시대(1981-1995)[편집 | 원본 편집]

새 감독은 이미 몇 년 전에 잠시 지휘봉을 잡았다가 물러난 오토 레하겔이었다. 1978년에 분데스리가 기록인 0:12의 패배를 당하며 Torhagel(골폭풍)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고 이후에도 인상적인 지휘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10][11] 그러나 이런 과거를 뒤로 하고 레하겔은 찬란한 황금기를 열었다. 클뢰처의 뒤를 이어 2부리그에서 우승했고, 부정적이던 세간의 평을 비웃기라도 하듯 1부리그에 복귀하자마자 팀을 5위에 올려놨다. 준우승을 차지했던 1967/68시즌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독일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시즌 브레멘은 15년 만에 2위를 기록했고 특히 골득실 때문에 밀려난 아까운 준우승이었다. 이후 브레멘은 매시즌마다 우승을 다투는 독일의 강호로 자리잡았으며 이때부터 바이에른 뮌헨의 강력한 라이벌로 자리잡았다. 1984/85시즌과 1985/86시즌 연속으로 바이언에게 밀려 준우승에 그쳤으며, 특히 시즌 내내 1위를 하다가 마지막 경기에서 뒤집힌 1985/86시즌은 뼈아픈 경험이었다.[12][13]

그렇다고 언제까지 준우승만 하란 법은 없었다. 샬케레버쿠젠은 잊자 1987/88시즌에 그토록 고대하던 마이스터를 차지했으며, 23년 만에 거둔 2번째 우승이었다.[14] 비록 이 우승 이후 리그 성적이 들쑥날쑥해지지만 그래도 꾸준히 우승경쟁에 참여했고 1988/89시즌부터 3연속 포칼 결승진출이라는 기록도 세웠다.[15] 유럽 클럽대항전에서도 어느 정도 성적을 거두기 시작해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나폴리를 도합 8:3으로 이기기도 했으며, 1991/92시즌에는 컵위너스컵에서 클럽의 유일한 유럽대회 트로피를 차지했다.[16] 최종적으로 레하겔의 지휘 아래 브레멘은 2번의 리그 우승과 4번의 준우승, 2번의 포칼 우승과 2번의 준우승, 그리고 1번의 유럽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결국 준우승이 더 많잖아? 클럽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루디 푈러, 브루노 페차이, 카를-하인츠 리들레, 클라우스 알로프스, 안드레아스 헤어초크, 루네 브라체트, 마리오 바슬러 같이 유럽에 널리 알려진 스타플레이어를 비롯하여 디터 아일츠, 노어베르트 마이어, 미르코 보타바, 프랑크 노이바르트, 토마스 볼터, 마르코 보데, 윈턴 루퍼, 올리버 렉, 요니 오텐, 그리고 토마스 샤프까지 수많은 클럽의 레전드들이 브레멘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포스트 레하겔(1995-1999)[편집 | 원본 편집]

달이 차면 기울듯 전성기가 있으면 쇠락기가 있는 법. 1994/95시즌의 준우승을 끝으로 레하겔이 팀을 떠나면서 아름다웠던 시기도 끝이 났다. 하필 레하겔의 행선지가 바이언이라 충격을 줬는데 공교롭게도 브레멘과 레하겔 모두에게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17] 레하겔이 떠난 뒤 브레멘은 4시즌 동안 5명의 감독을 선임했으며, 특히 1시즌을 다 소화한 감독은 1명뿐이었다. 오랫동안 우승후보였던 팀은 중위권으로 추락했고, 급기야 강등 목전에 이르렀다. 위기 속에서 펠릭스 마가트는 경질당하고 브레멘은 새로운 감독을 선임한다.[18]

샤프-알로프스 체제(1999-2012)[편집 | 원본 편집]

1999년 5월 10일, 마가트의 후임으로 선임된 것은 은퇴 이후 아마추어팀(2군) 감독으로 일하고 있던 토마스 샤프였다. 시즌 막판에 감독을 경질하고 산하 스탭을 임시 감독으로 쓰는 건 꽤 흔한 일이지만 샤프는 모두의 기대를 상회하는 성과를 거뒀다. 팀을 강등에서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승부차기로 숙적 바이언을 꺾고 포칼 우승을 차지한 것.[19] 당연히 계속해서 지휘봉을 잡았으며 이후 1999/2000시즌 중간에 역시 브레멘에서 선수로 뛰었던 클라우스 알로프스가 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이후 알로프스가 팀을 떠나는 2012년까지 샤프-알로프스 체제로 팀을 이끌었다.

이 둘은 브레멘을 완전히 되살려냈는데, 팀의 순위는 점점 상승하였으며 특히 2003/04시즌 분데스리가 역사상 3번째로 리가-포칼 더블을 달성한 클럽이 됐다.[20][21] 비록 이후 리그에서 우승하지는 못했지만 수 년간 우승경쟁에 참여했으며, 유럽 클럽대항전에서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강호로 여겨졌다.[22] 샤프가 지휘봉을 잡는 동안 브레멘은 1번의 리그 우승과 2번의 준우승, 3번의 포칼 우승과 2번의 준우승, 1번의 리가포칼 우승과 2번의 준우승, 그리고 UEFA컵 1회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번에도 준우승이 더 많잖아? 지금은 아니지만 원 클럽 맨인 샤프가 팀을 되살려낸 것으로도 유명했고, 비록 1경기 차이로 레하겔의 최다 리그 지휘 기록은 갈아치우지 못했지만, 전체 경기 수에서는 레하겔을 넘어 브레멘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른 감독이 됐다.

레하겔의 브레멘은 뛰어난 공격수들을 보유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수비에 무게를 둔 축구를 했는데, 반면에 샤프의 브레멘은 공격에 집중했고 공격수와 미드필더들의 활약으로 유명했다. 분데스리가 최고의 용병으로 꼽히는 아이우톤과 클라우디오 피사로부터 미로슬라프 클로제, 이반 클라스니치 같은 공격수가 있었고, 리스테시 크리스티안, 요앙 미쿠, 지에구, 메수트 외질 등 뛰어난 플레이메이커들이 활약했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독일 국가대표 선수가 많아서 페어 메르테자커, 토어스텐 프링스, 프랑크 바우만, 클레멘스 프리츠, 팀 보로프스키, 팀 비제, 파비안 에른스트 등 수비 포지션의 선수들도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넘나들며 활약했다. 여기에 빅토르 스크리프닉, 믈라덴 크르슈타이치, 나우두도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브레멘의 몰락과 포스트 샤프(2012-)[편집 | 원본 편집]

비록 브레멘이 분데스리가의 강호이기는 했지만 재정적으로 풍족한 팀은 아니었고, 연고지도 빅마켓과는 거리가 멀었다.[23] 즉 브레멘이 내고 있던 성과는 탄탄한 재정과 많은 투자를 통해 이뤄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스포츠적 성공을 통한 수익 창출과 재생산으로 이뤄졌던 것이다. 이는 구단의 성적이 나빠져 자금줄이 막히거나 이적시장에서 실패한다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4] 그리고 실제로 브레멘은 무너졌다.

2008년에 브레멘은 홈구장인 베저슈타디온을 개축하기로 했다. 태양광 조명, 관중석 규모 5만으로 확장 등을 목표로 했고, 비용은 최대 5,000만 유로 가량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내 철강 가격의 폭등으로 비용이 거의 20%나 상승해버려, 결국 좌석 수를 42,500석으로 수정해야 했다. 결국 공사비는 공사비대로 내고, 기대 수익은 별로 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예쁜 구장을 얻었잖아? 구장 때문에 지출이 커졌는데 이 무렵부터 브레멘의 이적시장이 잘 풀리지 않았다. 팀에 가장 필요했던 수비형미드필더는 하나 같이 이적료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영입에 실패하고, 이런 건 아슬아슬할 필요가 없는데 영입을 포기한 마리오 만주키치에딘 제코는 대박이 났으며, 웨슬리, 마르코 아르나우토비치, 엘예로 엘리아 같이 구단이 기대를 했던 영입은 줄줄이 망했다. 엘리아가 망할 거라는 걸 팬들은 알고 있었다. 이전에도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처럼 실패한 이적은 있었으나 이전에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나왔다면 이제는 리빌딩과 맞물려 대형 영입의 실패 하나하나가 타격이 컸다. 그런가 하면 막스 크루제처럼 내보낸 선수가 대박이 나기도 했다.

구장 공사로 인한 재정악화, 이적시장의 실패, 보드진의 비리로 인한 교체, 리그에서의 불운과 이로 인한 성적 및 수익 하락 등 온갖 악재가 연달아 줄줄이 터지니 팀이 약해지는 건 당연했다. 돈이 없으니 투자를 못하고, 투자를 못하니 성적이 떨어지고, 성적이 떨어지니 돈이 안 나온다. 이 악순환이 반복되어 나중에는 에이스들을 팔아도 당장 돈이 없어서 투자하지도 못하고 전력만 약화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2009/10시즌의 3위를 끝으로 브레멘은 10위권 전후의 성적만 기록하고 있으며, 또다시 강등 위기에 놓이기까지 했다. 2012년 알로프스가 볼프스부르크로 떠났고, 리그에서의 부진 속에 2013년에 샤프마저 경질되면서 아름다웠던 시기는 끝이 났다.[25]

이제 팀이 반등하기 위해선 뛰어난 감독의 지휘 아래 극적인 성적 상승을 이뤄내 자금줄을 만들어내거나 유망주들의 동시다발적인 폭발이 이뤄져야 하는 상황.[26] 샤프의 뒤를 이은 로빈 두트는 기대와는 달리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경질당했고, 대신 2014/15시즌 중반에 부임해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빅토르 스크리프닉이 브레멘의 희망이다. 여러 면에서 샤프와 닮았는데 레하겔 밑에서 뛰던 샤프처럼 스크리프닉은 샤프 밑에서 선수로 뛰었으며, 샤프가 그랬던 것처럼 2군팀 감독을 하다 시즌 중간에 부임했으며, 지루했던 두트의 축구와는 달리 공격적이면서 적극적인 축구로 샤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물론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라서 공격 일변도로 여겨지던 샤프보다는 조금 더 신중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대 성적[편집 | 원본 편집]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총 4차례의 분데스리가 우승 중 마지막은 2003-04 시즌, 준우승은 05-06, 07-08시즌이다. DFB 포칼 우승은 총 6차례를 기록했는데, 2008-09 시즌이 가장 최근이다. 참고로 이 08-09 시즌에는 UEFA 유로파 리그/UEFA 컵도 우승하면서 더블(?)도 달성했다.

하지만 이후 외질 등 주축 선수들이 빠져나가고 재정난을 겪는 등 문제로 성적이 급강하했다. 09-10 시즌 분데스리가 3위를 기록한 팀이 10-11시즌을 13위로 마무리하더니(...) 11-12시즌 9위, 12-13시즌과 13-14시즌 12위, 14-15시즌 10위를 기록하며 기세가 영 좋지 않다.

기록[편집 | 원본 편집]

  • 국내
분데스리가
우승 (4): 1964–65, 1987–88, 1992–93, 2003–04
준우승 (7): 1967–68, 1982–83, 1984–85, 1985–86, 1994–95, 2005–06, 2007–08
2. 분데스리가
우승 (1): 1980–81
DFB-포칼
우승 (6): 1960–61, 1990–91, 1993–94, 1998–99, 2003–04, 2008–09
준우승 (4): 1988–89, 1989–90, 1999–2000, 2009–10
DFB-리가포칼
우승 (1): 2006
준우승 (2): 1999, 2004
DFL-슈퍼컵
우승 (4): 1988, 1993, 1994, 2009 (unofficial)[15]
준우승 (1): 1991
  • 대륙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1): 1991–92
UEFA 유로파 리그/UEFA컵
준우승 (1): 2008–09
UEFA 슈퍼컵
준우승 (1): 1992
UEFA 인터토토 컵
우승 (1): 1998
  • 기타
기린 컵(Kirin Cup)
우승 (2): 1982, 1986
  • 유스
독일 U-19 챔피언십
우승 (1): 1999
U-19 분데스리가 북부/북동부
우승 (2): 2007, 2009

선수단[편집 | 원본 편집]

2015/16시즌[편집 | 원본 편집]

SV 베르더 브레멘 15-16 시즌 선수 명단
등번호 이름 로마자 이름[27] 포지션 국적[28] 생년월일 비고
1 라파엘 볼프 Raphael Wolf 골키퍼 독일 1988년 6월 6일
2 산티아고 가르시아 Santiago García 수비수 아르헨티나 1988년 7월 8일
3 루카 칼디롤라 Luca Caldirola 수비수 이탈리아 1991년 5월 1일
4 알레한드로 갈베스 Álex Gálvez 수비수 스페인 1989년 6월 6일
5 아사니 루키먀 Assani Lukimya 수비수 콩고민주공화국 1986년 1월 25일
7 야닉 베스터가르드 Jannik Vestergaard 수비수 덴마크 1992년 8월 3일
8 클레멘스 프리츠 (주장) Clemens Fritz 수비수 독일 1980년 12월 7일
9 아론 요한슨 Aron Johannsson 공격수 미국 1990년 11월 10일
10 레벤트 아이치첵 Levent Ayçiçek 미드필더 독일 1994년 2월 12일
11 레빈 외즈투날리 Levin Öztunalı 미드필더 독일 1996년 3월 15일 [29]
14 이제트 하이로비치 Izet Hajrović 공격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1991년 8월 4일
16 즐라트코 유누조비치 Zlatko Junuzović 미드필더 오스트리아 1987년 9월 26일
17 외즈칸 일디림 Özkan Yıldırım 미드필더 독일 1993년 4월 10일
18 펠릭스 크로스 Felix Kroos 미드필더 독일 1991년 3월 12일
19 루카 밀란 잔더 Luca-Milan Zander 수비수 독일 1995년 8월 9일
20 울리세스 가르시아 Ulisses Garcia 수비수 스위스 1996년 1월 11일
21 안토니 우자 Anthony Ujah 공격수 나이지리아 1990년 10월 14일
22 핀 바르텔스 Fin Bartels 미드필더 독일 1987년 2월 7일
23 테오도르 게브레 셀라시 Theodor Gebre Selassie 수비수 체코 1986년 12월 24일
26 율리안 폰 하케 Julian Von Haacke 미드필더 독일 1994년 2월 14일
28 멜빈 로렌첸 Melvyn Lorenzen 공격수 독일 1994년 11월 26일
30 미하엘 체터러 Michael Zetterer 골키퍼 독일 1995년 7월 12일
35 막시밀리안 에게슈타인 Maximilian Eggestein 미드필더 독일 1996년 12월 8일
37 야넥 슈테른베르그 Janek Sternberg 수비수 독일 1992년 10월 19일
38 마르논-토마스 부쉬 Marnon-Thomas Busch 수비수 독일 1994년 12월 8일
40 라이프 후시치 Raif Husić 골키퍼 독일 1996년 2월 5일
42 펠릭스 비트발트 Felix Wiedwald 골키퍼 독일 1990년 3월 15일
44 필리프 바르크프레데 Philipp Bargfrede 미드필더 독일 1989년 3월 3일
- 루도비치 오브라니악 Ludovic Obraniak 미드필더 폴란드 1984년 11월 10일

명예주장[편집 | 원본 편집]

  • 리하르트 애커쇼트 : 오버리가 시대의 주장. 리그 우승이 없음에도 구단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명예주장이다.
  • 피코 쉬츠 : 첫 우승을 차지할 때의 주장. 함부르크에 우베 젤러가 있다면 브레멘에는 쉬츠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브레멘 팬들에게 그렇다는 얘기다
  • 호어스트-디터 회트게스 : 분데스리가 출장 2위이며 독일 국가대표팀 최다 출전 기록도 갖고 있다. 유로 19721974 월드컵 우승멤버로 특히 유로에선 주전으로 우승했다.
  • 디터 부르덴스키 : 구단의 최다 출장 기록 보유자로 2부리그로 강등당했을 때도 팀을 지켰고, 말년에는 백업 키퍼로 분데스리가 우승을 경험했다. 은퇴한 뒤에는 구단의 골키퍼 코치로 일하기도 했다.
  • 디터 아일츠 : 분데스리가 출장 3위이며 브레멘에서만 뛴 원 클럽 맨이다. 유로 1996 우승 멤버. 구단 U-19팀 감독과 독일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거쳤으며 현재는 13세 미만 소년 지도를 맡고 있다.
  • 마르코 보데 : 분데스리가 출장 4위이자 분데스리가 득점 1위 기록 보유자. 원 클럽 맨이며 2002 월드컵 준우승 멤버다. 현재 구단 이사회에서 일하고 있다.
  • 프랑크 바우만 : 마지막 리그 우승인 2004년의 주장으로 역시 은퇴 이후 보드진에서 일하고 있다.

라이벌[편집 | 원본 편집]

사이가 나쁜 구단으로 세 팀을 꼽는데 가장 먼저 꼽히는 팀은 북독 더비를 이루는 함부르거 SV다. 연고지인 브레멘함부르크한자동맹의 주요도시였기 때문에 언론에서 이를 강조하기도. 1982/83시즌에는 함부르크가 골득실 차이로 브레멘을 제치고 우승한 적이 있고, 2008/09시즌에는 분데스리가, 포칼, UEFA컵 3개 대회에서 3주 동안 4번 붙은 적도 있었다.[30] 지금은 두 팀 다 예전의 영광을 잃은 상태라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지만 한때는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매치업이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상술했다시피 80년대부터 치열한 우승경쟁을 펼쳤고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이적 때 사전접촉 문제로 한 번 싸우기도 했다. 지금은 체급 차이가 너무 나버려서 일방적으로 패하고 있지만 한때는 몇년 간 맞대결에서 무패를 기록한 적도 있었고, 바이언의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5골을 넣고 승리한 유일한 팀이 브레멘이다. 근데 그게 마지막 승리 샬케 04는 브레멘의 스타플레이어들을 자꾸 데려가서 사이가 나빠진 케이스다. 중요하진 않지만 로트-바이스 에센과는 포칼 결승에서 치고박은 뒤 서포터끼리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각주

  1. 베르더는 하중도(河中島)나 침수지역을 의미하며 슈타트베르더는 베저강에 위치한 하중도처럼 생긴 반도다. 현재 사용하는 홈구장인 베저슈타디온도 베저강 연안인 페터스베르더에 있다.
  2. 유럽에는 이렇게 축구를 중심으로 여러 스포츠팀을 운영하는 클럽들이 많다. 단지 가장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게 축구인 만큼 우리가 축구팀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3. 現 베저슈타디온
  4. 2008년에 이 시기에 쫓겨났던 유대인 축구선수들에 대한 전시가 있었다.
  5. 그러나 구단에서는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어물쩡 넘어가고 있다.
  6. 재창단 과정에서 Grün-Weiß(초록-하양)이라는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구단의 상징색으로 응원가에도 쓰이는 별명이다.
  7. 우승팀 AT 마드리드에게 졌다.
  8. 당시의 독일클럽들은 세미프로에 가까웠다. 급료상한이 상당히 낮았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부업을 뛰었고, 아예 별명까지 얻은 선수들도 있다.
  9. 한편 이때 브레멘을 떨어트린 팀은 준우승팀 파르티잔이었다.
  10. 독일어로 Tor는 골, Hagel은 우박, 빗발을 의미한다. 즉 레하겔의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
  11.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이끌고 DFB-포칼에서 우승을 차지하긴 했으나 몇 달 뒤 리그에서의 부진으로 경질당했다.
  12. 2경기를 남겨두고 두 팀이 맞붙었는데 브레멘이 승리한다면 우승이었다. 후반 89분에 브레멘이 페널티킥을 얻었고, 성공률이 90%가 넘는 미하엘 쿠트초프가 키커라 다들 브레멘의 우승을 점쳤다. 그러나 골대를 맞춰 무승부로 끝났는데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브레멘이 패하여 승점 동률이 되었고, 골득실 차이로 바이언이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13. 34라운드 중 32라운드 동안 브레멘이 1위였고, 바이언은 마지막 경기에서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최종라운드가 첫 1위였던 우승팀은 지금까지도 이때의 바이언이 유일하다.
  14. 공교롭게도 레하겔과 악연이 있던 우도 라텍이 바이언의 감독에서 물러난 시즌이다.
  15. 1978-80년의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 이은 2번째 기록이다.
  16. 한편 1993/94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인 AC 밀란은 2실점으로 역대 최소실점 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했는데 이 2골 모두 브레멘이 넣었다.
  17. 레하겔은 독선적인 태도로 바이언의 스타플레이어들과 마찰을 빚었고, 보드진과 언론마저 레하겔을 공격하면서 시즌 후반에 불명예스럽게 경질당했다.
  18. 비록 경질당하긴 했지만 마가트는 강등을 모르는 특급 소방수로 자리잡았으며 이후 여러 우승을 차지하고 명장 반열에 오른다. 경질당할 때도 어찌됐든 강등권 바로 위에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잔류신화도 잉글랜드의 풀럼을 이끌고 강등당하면서 끝이 났다.
  19. 선수/감독으로 각각 포칼 우승을 차지해본 건 샤프가 3번째다.
  20. 바이언, 쾰른, 브레멘, 도르트문트 순으로 지금까지 총 4팀만 달성했다.
  21. 이때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아이우톤은 非독일인으로는 최초로 독일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22. 이탈리아 클럽들을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인 걸로도 유명한데, 80년대에 이탈리아 클럽들에 의해 좌절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변화다.
  23. 클로제를 영입할 때의 이적료가 500만 유로인데 돈이 없어서 은행 융자를 껴야했을 정도.
  24. 비단 브레멘만의 문제는 아니라 많은 프로클럽들이 겪는 일이며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언의 대항마가 매년 바뀌는 이유이기도 하다.
  25. 한편 샤프가 경질된 시점에서 리그 마지막 경기가 남아있었는데, 이미 잔류가 확정되어서 큰 의미는 없는 경기였다. 그래서 샤프의 경질설이 나오고 있었지만 다들 나가더라도 시즌 종료 후의 일이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경질 뉴스가 나왔고, 팬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에 욕을 퍼부었다. 비록 새 시즌이 시작하고 뒤늦게 브레멘에서 샤프를 위한 행사를 벌이긴 했지만 정말 바보같은 결정이었다. 결국 이 경질로 인해 샤프는 레하겔의 리그 기록에 1경기 모자란 상태로 팀을 떠났다.
  26. 분데스리가는 50+1 룰 때문에 외부 재력가의 투자를 통한 반등을 기대하기 어렵다.
  27. 유니폼 백네임의 경우 굵은 글씨.
  28. 국가대표 기준
  29.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임대)
  30. 당시 함부르크는 3관왕에 도전중이었으나 연달아 브레멘에게 꺾이며 무관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