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Ballspielverein Borussia 09 e.V. Dortmund
Borussia Dortmund logo.svg
스포츠 팀 정보
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설립 1909년 12월 19일
연고지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도르트문트
경기장 지그날 이두나 파크 (Signal Iduna Park)
소유 Borussia Dortmund GmbH & Co. KGaA
감독 토마스 투헬
웹사이트 http://www.bvb.de/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독일 도르트문트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단이다. 도시 이름인 도르트문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 현지에서는 Ballspielverein Borussia의 축약어인 BVB(베파우베)를 많이 쓴다.[1]

상징색이 노랑과 검정이고, 유니폼에도 줄무늬를 자주 활용하는 데다 독일의 유명 동화이자 애니메이션인 꿀벌 마야 때문에 '꿀벌 군단'이라는 애칭이 있고 마스코트도 에마(Emma)라는 이름의 꿀벌이다. 근데 애니메이션은 일본에서 만든 게 함정 2008년 위르겐 클롭이 부임한 이후 강한 압박과 많은 활동량에 기반한 '게겐 프레싱'(Gegenpressing) 전술을 보면 마치 달려드는 꿀벌떼 같이 보이므로 매우 적절한 별명이다.[2] 덕분에 국내에서는 BVB보다는 그냥 꿀벌이라고 부르거나 도르트문트를 줄인 돌문이라고 많이 부른다. 물론 현지에서는 돌문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는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창단 이후 2차대전까지(1909-1945)[편집 | 원본 편집]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도르트문트에 위치한 '삼위일체 성당'의 교우회를 모태로 1909년에 탄생했다. 교우회의 젊은 광부들은 종교활동 외에도 함께 운동을 즐기곤 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축구가 인기였다. 그러나 새로운 교우회장은 야만적인 행위라며 축구를 금지한다고 선언했고, 이에 반발한 이들은 회의를 거쳐 교회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클럽을 창단하기로 했다. 돌발적인 사태였기 때문에 변변한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았고, 회의 전만 해도 클럽의 이름조차 정해두지 않았다. 간단한 논의 끝에 결정된 이름은 보루시아였는데, 몇 년 전에 파산해서 사라진 인근 맥주 양조장의 이름이었다.[3]

클럽의 초창기는 험난했다. 교회와 선을 긋고 시작했기 때문에 축구팀으로 승인받지 못해 육상부를 운영하기도 했고, 수년간 지역리그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정작 서독 1부리그에 처음으로 발을 딛은 건 1926년이 되어서였다. 그나마도 꼴찌로 다시 강등당했고, 재정위기를 겪고, 나치에 의해 클럽의 수뇌부가 교체당하기도 했다. 새로 출범한 가우리가에서 2번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나치 치하는 엄혹했다. 홈구장 바이세 비제에서 쫓겨나 슈타디온 로테 에어데로 옮겨가야 했고, 클럽 관계자들은 나치에 부역해야만 했다. 물론 끝까지 나치에게 저항한 이들도 있었으나 SA에 의해 살해당했다.

오버리가 시대(1946-1963)[편집 | 원본 편집]

2차대전이 끝나고 독일 축구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전쟁의 참화와 나치 청산으로 인해 많은 클럽들이 사실상 재창단의 길을 걸었고, 독일의 축구리그인 가우리가도 오버리가로 바뀌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오버리가 체제에서 빛을 본 클럽 중 하나였다. 베스트팔렌의 우승팀 자격으로 개편된 오버리가 서부지구에 참가해 최초의 서부지구 우승팀 자리를 차지했다.[4] 1948/49시즌에는 리그 2연패에 성공했고 부활한 전국대회에 팀 역사상 처음으로 참가해 준우승팀이 되었다. 최초의 3연패도 BVB가 달성했으며, 비록 서부지구 최초의 독일 우승팀은 놓쳤지만 1955/56시즌에 드디어 첫 우승을 차지했다.

처음으로 진출한 유러피언컵에서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긴 했지만 전국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승해 오버리가 체제에서 유일하게 2연패에 성공한 클럽이 됐다. 1957/58시즌에 독일팀 최초로 유러피언컵 8강에 진출했고, 이후에도 서부지구의 강호 자리를 유지했다. 특히 1962/63시즌에는 서부지구 준우승에 그쳤지만 전국대회서 서부지구 우승팀 쾰른을 꺾고 우승해 유일한 3회 우승팀이자 오버리가 시대의 마지막 우승팀이 되었다. 오버리가 체제에서 도르트문트는 서부지구에서 6번 우승하고 전국대회에서 3번 우승했는데 이는 서부지구 최고 기록이며 누적승점에서도 1위였다.[5]

분데스리가의 개막과 유럽대회 우승(1964-1970)[편집 | 원본 편집]

오버리가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당연히 분데스리가 설립멤버에 포함되었다. 다른 지방의 명문클럽들과는 달리 BVB는 성공적으로 분데스리가에 안착했고, 지속적으로 상위권에서 경쟁했다. 비록 분데스리가 우승은 차지하지 못하고 계속 문턱에서 주저앉았지만 1965년에 클럽 역사상 최초로 DFB-포칼에서 우승했으며, 1965/66시즌 UEFA 컵 위너스컵에서 독일 클럽으로는 첫번째 유럽대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6/67시즌을 끝으로 주축선수들의 이탈과 노쇠가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하위권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1969/70시즌 5위로 반등에 성공했지만 일시적인 회광반조에 지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같은 서부지구 출신인 쾰른 역시 분데스리가 초대 우승팀이 되는 등 60년대 독일 최고의 팀 중 하나였는데 이 무렵부터 전성기에서 내려와 리그를 주름잡는 패자의 교체가 일어났다.

강등과 침체기(1970-1991)[편집 | 원본 편집]

1970년에 주장 볼프강 파울이 은퇴했고, 마침내 팀의 몰락이 일어났다. 1971/72시즌, 17위에 그치며 처음으로 강등당했고 새 홈구장 베스트팔렌슈타디온[6]의 개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2부리그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1976/77시즌 1부리그에 복귀하여 빌리 리펜스, 만프레트 부르크스뮐러 등의 활약으로 중위권에 안착하긴 했으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게 0:12로 대패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7] 우도 라텍, 브란코 제베치, 카를-하인츠 펠트캄프 등의 감독들이 거쳐가며 상위권에 도전하기는 했지만 번번히 7위 전후의 성적에 머무르고 감독이 떠나는 과정을 반복했다.

1985/86시즌 강등위기에 몰렸으나 라인하르트 자프티히가 팀을 구했고, 프랑크 밀, 토마스 헬머, 노어베르트 디켈을 영입하는 공격적인 투자로 4위라는 성과를 냈다. 자프티히가 성적부진으로 물러난 뒤 신임감독 호어스트 쾨펠의 지휘 아래 안드레아스 묄러, 미하엘 루메니게 등을 영입하며 1989년에 포칼 우승을 차지하고 1989/90시즌 4위에 오르는 성과를 올렸다. 이에 고무된 도르트문트는 당시 독일 이적료 신기록인 410만 마르크의 금액으로 플레밍 폴센을 영입했으나 쾨펠 역시 자프티히처럼 성공 이후 부진을 경험하며 팀을 떠났다.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을 끝낸 것은 스위스에서 온 남자, 오트마 히츠펠트였다.

히츠펠트와 황금기(1991-2003)[편집 | 원본 편집]

오트마 히츠펠트는 도르트문트를 매년 우승 경쟁에 참여하는 강팀으로 탈바꿈시켰다. 첫시즌에 리그 2위, 2번째 시즌에 리그 4위와 UEFA컵 준우승이란 호성적을 거뒀고 4번째 시즌에 드디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상금과 TV중계권료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투자를 했는데 슈테판 로이터, 마티아스 자머, 카를-하인츠 리들레, 안드레아스 묄러, 위르겐 콜러 등 매년 독일 국가대표 선수들을 수집하며 강력한 전력을 구축했다. 여기에 스테판 사퓌자, 줄리우 세자르 등 외국인 선수들 역시 팀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히츠펠트는 1994/95시즌과 1995/96시즌 연거푸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1996/97시즌에는 UEFA컵에서 악연이 있던 유벤투스를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만나 우승을 차지했다.[8] 특히 결승전에서 라스 리켄이 넣은 쐐기골은 클럽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정상에 오른 히츠펠트는 감독에서 물러나 단장으로 부임하고, 그 뒤는 이탈리아의 명장 네비오 스칼라가 이었다. 스칼라는 인터콘티넨털컵에서 우승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 순항하긴 했지만 리그에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경질되었다. 히츠펠트는 클럽을 안정화시키는 대신 라이벌 바이언으로 떠나버렸고 클럽은 다시 반등과 부진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이 이룬 업적과 거대해진 규모로 인해 도르트문트가 독일을 대표하는 강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1995년에 착공한 홈구장 확장 덕분에 많은 입장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특히 1999년부터 추진한 주식 상장은 구단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부를 앞세워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들여 크리스티안 뵈른스, 에바니우손, 데데, 토마스 로시츠키, 얀 콜레르, 마르시우 아모로주, 에베르톤 등 여러 선수를 사왔고, 감독으로 변신한 마티아스 자머의 지휘 아래 2001/02시즌 우승트로피를 탈환하고 UEFA컵 결승에 올랐다. 2002/03시즌은 리그 3위와 챔피언스리그 2차 조별리그 탈락에 그쳤지만 구단의 전력이 강력한 것은 분명했고, 바이언으로부터 제바스티안 켈을 뺏어오는 등 이적시장에서의 존재감도 컸기에 도르트문트의 미래는 계속 밝아보였다.

재정위기와 파산, 그리고 몰락(2003-2008)[편집 | 원본 편집]

주식상장의 성공과 각종 대회에서의 호성적과는 달리 사실 도르트문트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았다. 스타플레이어들을 수집하면서 엄청난 금액을 투자했고, 다시 한 번 홈구장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을 증축하면서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주고 있었다. 여기에 키르히의 파산으로 인해 분데스리가의 TV중계권료가 쪼그라들었기 때문에 잔뜩 커진 몸을 유지하기 위해선 꾸준히 성과를 내 돈을 벌어와야만 했다. 그런데 2003/04시즌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클럽 브뤼헤에게 덜미를 잡히며 그야말로 광탈을 경험했고, UEFA컵에서도 일찌감치 떨어졌다. 그러면 리그에서라도 만회해야 했는데 오히려 7위에 그쳐 UEFA 인터토토컵에 나가야했고, 그것마저 떨어지면서 이후 유럽대회에서의 수익을 전혀 얻지 못하게 됐다. 끔찍했던 것은 이런 부진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고착화되어버렸고, 도르트문트는 중위권에 머무르는 보통 클럽이 되어버렸다. 이미 어마어마한 규모의 투자를 했기 때문에 재정상황은 좋지 못했고, 새로운 수입원마저 말라버렸으니 재정상황에 빨간불이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도르트문트는 약 1억 유로의 부채를 짊어져야 했고, 선수들에게 급료조차 지불하지 못해 라이벌 바이언으로부터 돈을 빌려받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선수들은 헐값에 팔려나갔고, 약해진 전력은 다시금 성적부진이라는 끔찍한 악순환을 불러왔다.

클롭의 시대(2008-2015)[편집 | 원본 편집]

2008/09시즌을 앞두고 마인츠의 감독이었던 클롭이 새 감독이 됐다. 어느 정도 기대를 모으긴 했지만 아예 팀을 탈바꿈시킬 거라고 예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넉넉치 않은 지원 속에서 팀의 순위를 끌어올렸으며, 저렴한 몸값으로 데려온 선수들과 기존의 선수들이 대폭발하여 3년차에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9] 9년 만의 정상 탈환이었고, 명가 부활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로만 바이덴펠러, 야쿱 브와슈치코프스키, 마르첼 슈멜처, 마츠 후멜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케빈 그로스크로이츠, 카가와 신지, 우카시 피슈첵, 스벤 벤더, 네벤 수보티치 등 빅클럽 기준으로는 헐값의 이적료로 영입된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구단의 유스 출신인 배신자 마리오 괴체누리 사힌이 이끄는 젊고 강력한 팀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져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경영자 한스-요아힘 바츠케와 구단의 레전드인 단장 미하엘 초어크, 그리고 클롭은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이들 3인방은 독일을 넘어 유럽에서 성공적인 축구클럽 경영 사례로 소개되었다.

2011/12시즌에는 괴체의 후반기 아웃에도 불구하고 분데스리가 최다 승점 기록을 갈아치우며 2연패에 성공했고, 분데스리가 역사상 4번째 리가-포칼 더블을 달성한 팀이 됐다.[10] 특히 시즌 도중 바이언과의 마르코 로이스 영입전에서 승리하고 포칼 결승전에서 바이언을 5:2로 격파하며 세간으로부터 바이언의 강력한 라이벌로 인정받았다. 이후 라이벌 바이언이 어마어마한 공룡이 되면서 우승 경쟁에는 실패하지만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과 2번의 준우승을 기록했고, 2014/15시즌에는 전반기를 리그 17위로 마쳤다가 UEFA 유로파 리그 티켓을 따내는 대반전에 성공하기도 했다.[11] 한창 팀이 부진하던 시즌 도중에 클롭이 팀에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사임을 선언했고, 새 감독으로 마인츠에서 클롭의 후임자였던 토마스 투헬이 선임되면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고 있다.

투헬의 부임 (2015- )[편집 | 원본 편집]

투헬 부임 이후 무려 3.3점에 달하는 경기당 평균 득점을 기록하며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선보이고 있다. 시즌이 막 시작된 현 시점에서 분데스리가 개막전과 2라운드 모두 4-0 대승을 거둔 데 이어, 유로파 플레이오프에서도 오드에 합계 11-5 대승을 거두는 등 그야말로 공격축구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상대한 팀이 오드나 잉골슈타트 등 약팀이지만, 지난 시즌의 악몽과도 같았던 부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 또 14/15 시즌 리가 3위를 차지한 강팀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도 4-0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현재의 상승세가 단순한 양학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현지 시간으로 8월 29일, 한국의 박주호영입했다는 오피셜이 떴다! 등번호는 과거 이영표가 쓰던 3번으로 전해진다. 박주호 자리에서 뛰는 슈멜처의 폼이 현재 매우 좋고, 백업으로 뛰는 둠 또한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로 박주호의 주전 경쟁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미드필더와 풀백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멀티성을 살리면 선방부터 볼배급, 득점까지 모두 맡을 수 있는 그로스크로이츠처럼 '주전급 서브'로 활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로스크로이츠 본인도 이적 루머가 강하게 나고 있는 중. 또 감독인 투헬 역시 박주호를 좋아하고 잘 활용하는 것으로 국내에서 잘 알려져 있는 편이라는 점도 희망적인 부분.

이적시장 마지막 날인 8월 31일에는 맨유에서 아드낭 야누자이를 임대해왔다. 공홈 기사에 따르면 임대기간은 1년이며, 완전이적옵션은 언급되지 않았다.

스쿼드[편집 | 원본 편집]

15-16 시즌[편집 | 원본 편집]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5-16 시즌 선수 명단
등번호 이름 로마자 이름[12] 포지션 국적[13] 생년월일 비고
1 로만 바이덴펠러 Roman Weidenfeller 골키퍼 독일 1980년 8월 6일
3 박주호 Park Joo-Ho 수비수 대한민국 1987년 1월 6일
4 네벤 수보티치 Neven Subotić 수비수 세르비아 1988년 12월 10일
6 스벤 벤더 Sven Bender 미드필더 독일 1989년 4월 27일
7 요나스 호프만 Jonas Hofmann 미드필더 독일 1992년 7월 14일
8 일카이 귄도간 İlkay Gündoğan 미드필더 독일 1990년 10월 24일
9 아드낭 야누자이 Adnan Januzaj 공격수 벨기에 1995년 2월 5일 [14]
10 헨릭 므키타리안 Henrikh Mkhitaryan 미드필더 아르메니아 1989년 1월 21일
11 마르코 로이스 Marco Reus 공격수 독일 1989년 5월 31일
15 마츠 후멜스 Mats Hummels 수비수 독일 1988년 12월 16일 Captain
16 야쿱 브와슈치콥스키 Jakub Błaszczykowski 미드필더 폴란드 1985년 12월 14일
17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 Pierre-Emerick Aubameyang 공격수 가봉 1989년 6월 18일
18 누리 사힌 Nuri Şahin 미드필더 튀르키예 1988년 9월 5일
20 아드리안 라모스 Adrián Ramos 공격수 콜롬비아 1986년 1월 22일
23 카가와 신지 Shinji Kagawa 미드필더 일본 1989년 3월 17일
24 마리안 자르 Marian Sarr 수비수 독일 1995년 1월 30일
25 소크라티스 파파스타토풀로스 Sokratis Papastathopoulos 수비수 그리스 1988년 6월 9일
26 루카스 피스첵 Łukasz Piszczek 수비수 폴란드 1985년 6월 3일
27 곤살로 카스트로 Gonzalo Castro 미드필더 독일 1987년 6월 11일
28 마티아스 긴터 Matthias Ginter 수비수 독일 1994년 1월 19일
29 마르셀 슈멜처 Marcel Schmelzer 수비수 독일 1988년 1월 22일
33 율리안 바이글 Julian Weigl 미드필더 독일 1995년 9월 8일
34 마빈 둑쉬 Marvin Ducksch 공격수 독일 1994년 3월 7일
37 에릭 두름 Erik Durm 수비수 독일 1992년 5월 12일
38 로만 뷔르키 Roman Bürki 골키퍼 스위스 1990년 11월 14일
39 헨드릭 본만 Hendrik Bonmann 골키퍼 독일 1994년 1월 22일
40 예레미 두지악 Jeremy Dudziak 수비수 독일 1995년 8월 28일

라이벌[편집 | 원본 편집]

국내에서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데어 클라시커로 유명하지만, 사실 도르트문트의 가장 큰 라이벌은 단연 FC 샬케 04이다. 우승경쟁과 이적시장에서의 가십으로 근래에 형성된 바이언과의 대립과는 달리 이쪽은 지리적으로 거의 옆 동네 수준으로 가깝고, 양 팀 다 모두 광부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진짜 더비 경기다. 레비어 더비라고 부르는데, 라이벌 매치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고 역사가 오래된지라 세계 10대 더비로 뽑힐 정도로 유명하고 치열한 매치업이다. 각 팀의 상징도 노랑(도르트문트)과 파랑(샬케)으로 보색 관계에 있어 라이벌리가 더욱 돋보이...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보루센 더비로 엮이기는 하는데 사실 큰 라이벌은 아니다. 두 팀의 이름에 보루시아가 들어간다고 해서 엮는 거지만 애초에 의미가 다르며 별다른 접점도 없다. 글라트바흐의 보루시아는 프로이센을 의미하지만 도르트문트의 보루시아는 지역 양조장 이름이다. 앞서 언급한 0:12의 굴욕이 있긴 하지만 딱히 이걸로 라이벌리를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언론에서도 크게 주목하지 않는 관계이건만 정작 도르트문트 구단에서는 이 매치업을 더비라고 부른다. 그래서 축구팬들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더비로 취급해주는 것.

한편 국내에서의 이미지와 달리 독일에서는 썩 평판이 좋지 않은데 1995년에 돈을 퍼부어서 우승한 이후 팬들이 뭐든지 살 수 있다고 노래를 부르며 거만하게 굴었기 때문. 게다가 그 우승조차 안드레아스 묄러의 다이빙 덕분이었다. 얼마 전 키커에서 2015/16시즌 도르트문트의 성적을 묻는 설문에서 5%가 강등권을 찍기도 했다. 다만 1. FC 쾰른과는 사이가 좋은데, 2010/11시즌 도르트문트와 바이어 레버쿠젠과 우승경쟁을 하고 있을 때 쾰른이 레버쿠젠을 잡아줬기 때문.[15]

이것저것[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BVB라는 축약어만으론 헷갈릴 수 있으니 창단년도를 붙여 BVB09라고도 부르는데 축구게시판에서는 다들 알아보니까 그냥 BVB라고 하는 편.
  2. 다만 2014-15 시즌을 끝으로 클롭이 사퇴하면서 앞으로 전술이 어떻게 될지는 지켜보아야 한다.
  3. 그러므로 보루시아란 이름을 프로이센 왕국에서 따왔다거나 BVB가 프로이센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4. 오버리가는 1945/46시즌부터 시작되었으나 서부지구는 북부지구와 함께 1947/48시즌에 생겼다.
  5. 12년 랭킹에서는 쾰른에게 밀려 서부지구 2위였다.
  6. 현재 사용하고 있는 홈구장 지그날 이두나 파크의 원래 이름
  7. 분데스리가 최다점수차 경기 기록이며, 이 패배로 인해 BVB012라는 별명이 붙었다.
  8. UEFA컵에서 준우승할 때의 상대가 유벤투스였고, 1995년에도 4강에서 유벤투스에게 졌다.
  9. 3년간 사용한 순지출이 700만 유로 정도였다.
  10. 승점 기록은 이듬해 바이언이 갱신했다.
  11. 덕분에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베저의 기적'이라고 칭송받던 빅토르 스크리프닉베르더 브레멘이 묻혀버렸다. 안습
  12. 유니폼 백네임의 경우 굵은 글씨.
  13. 국가대표 기준
  1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1년간 임대
  15. 쾰른과 레버쿠젠은 라인 더비를 이루는 앙숙이다.